|
21-08-22 주는 그리스도시요
마태복음 16장 13절-20절
어느 가정에 갑자기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그 가정의 가장이 돌연사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젊은 아내와 어린 딸이 세상에 남겨지게 된 것입니다. 남겨진 아내가 생각할 때 앞날이 막막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린 딸을 생각하면 그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봉제공장에 어린 딸을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공장에서 칭얼대는 어린아이를 반길 리가 없었습니다. 공장장이 어린아이를 계속 데리고 오려면 일을 그만 두라고 하였습니다. 할 수없이 여인은 어린 딸을 집에 남겨 두고, 밥상을 차려 놓고, 요강을 넣어 두고, 문고리에 숟가락을 꼽아 놓고 출근하였습니다. 그러니 출근해서 일은 하지만 마음은 혼자 집에 있는 어린 딸에게 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을 하면서 유난히 혼자 집에 있는 어린 딸에게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리하여 퇴근하자마자 발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자기 집 근처에 화재가 났는지 소방차가 와서 난리법석이었습니다. 놀라서 달려 가봤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자기 집에 불이 난 것입니다. 그런데 딸아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불길은 높이 오릅니다. 그렇지만 엄마가 뛰어 들어갔습니다. 다행이 어린 딸은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바들바들 떨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이불로 딸을 감싸 안고 밖으로 나옵니다. 그때 천정이 무너져 내리면서 불붙은 기둥이 엄마의 얼굴을 때리고, 엄마의 얼굴에 불이 붙었습니다. 소방관이 달려들어 엄마를 구출하고 아이도 구출하였습니다. 그러나 엄마의 얼굴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성형수술도 못했습니다. 어느 덧 세월은 흘러 어린 딸이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시험이 끝나는 날이었습니다. 공부하느라 고생한 딸을 위해 엄마는 시장에 가서 동태를 사오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엄마의 앞에 딸이 친구들이랑 같이 걸어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반가운 마음에 엄마는 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영희야!” 친구들과 영희가 함께 돌아보았습니다. 친구들은 흉하게 일그러진 엄마를 보았습니다. 놀란 친구들이 영이에게 묻습니다. “영희야! 저 흉하게 생긴 아줌마가 너희 엄마니?” 영희는 당황하여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니야! 저 아줌마 참 이상한 사람이네” 그 소리를 듣고 영희 엄마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시간을 얼마 남겨 놓지 않았던 때입니다.
이번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 호수에서 아주 먼 북쪽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이 지역 북쪽으로는 높은 헬몬 산이 있습니다. 헐몬 산은 거의 사시사철 눈이 쌓이는 산입니다. 특별히 겨울에 쌓인 눈이 녹아 땅 밑으로 흐르다가 바로 이 지역으로부터 맑고 깨끗한 물을 쏟아냅니다. 그러니까 이곳은 갈릴리 호수에 물을 공급해 주는 세 근원 중에 하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 지역은 겨울엔 대단히 춥습니다. 더구나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라면, 그 지역은 더 추울 때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추운 날씨일 줄 아시면서 일부러 그 지역으로 데리고 가신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어찌하여 제자들을 이 지역으로 데리고 가셨을까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지역은 유대나라 지역 중에 특별한 지역입니다.
특이하게도 유대 땅을 지배하는 왕들마다 꼭 이곳을 자기 신들에게 바치거나 자기 이름을 남기는 그런 곳입니다. 헬라가 이 나라를 지배할 때는 거기에 있는 자기들의 Pan 신전을 세워 놓고, 이곳 이름을 자기들의 신의 이름을 따서 Paneas 라 불렀던 곳입니다. 그 후 주전 20년부터 헤롯대왕은 이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헤롯대왕은 어떤 인물입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아기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다는 동방박사의 이야기를 듣고 화들짝 놀라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왕입니다. 이 헤롯대왕이 이곳에 하얀 대리석으로 사원을 지어 로마 황제 에게 바치고, 그리고 Pan 신전 옆에 로마 황제 신상을 세워 숭배하게 했습니다. 한마디로 헤롯대왕이 로마황제에게 아부를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헤롯대왕이 죽고, 헤롯대왕의 아들, 헤롯 빌립이 왕이 되자, 그는 한술 더 떠서 이곳을 아름답게 가꾸어 수도로 정하고, 이름을 로마 황제 이름과 자기 끝 자를 붙여서 Caesarea Philip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곳을 ‘가이샤라 빌립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보면 이곳 ‘가이샤라 빌립보’는 Caesarea Augustus를 숭배하는 곳이고, 헤롯을 섬기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에 오는 사람이면 로마 황제에게 절을 해야 하고, 헤롯을 경배해야 했던 곳, 당시 세계 권력의 상징이 자리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 웅장함과 화려함은 더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곳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앞에서 더없이 초라한 모습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갑자기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러한 주님의 질문에 제자들은 대답했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 대답을 듣고 주님은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저 풍문을 듣고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질문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렇게 질문하신 것을 바로 이런 뜻의 질문일 것입니다.
“너희들은 풍문으로만 들어서 나를 아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너희들은 3년 동안 나와 함께 먹고, 자고, 내가 행하는 일을 보았으니 그것을 통해서 알게 된 나를 너희들은 누구라 하느냐?”
그렇다면 주님이 생각하는 것, 말씀하시는 것, 주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포함해서, 주님의 삶을 3년 동안 곁에서 고스라니 바라보았던 제자들은 주님을 어떻게 증거 하였습니까?
이 장면을 생각하면 다니엘서에 나오는 황제 숭배가 생각이 납니다. 황제 신상 앞에서 황제에게 절을 할 것이냐? 아니면 나를 황제로 섬길 것이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대답하기 아주 어려운 질문입니다. 다른 면으로 생각해 보면, 이처럼 질문하신 예수님도 참 대단한 분이십니다. 감히 누구 앞에서 자기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단 말씀입니까? 그때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의 이러한 고백은 실제로 어떤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 말 속에서는 지금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로마 황제와 헤롯의 위엄이 도사리라고 있는 곳에서 Caesarea Augustus는 아무 것도 아니고, 헤롯빌립도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 당신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당신이 이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시고, 당신이 우리의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굉장한 사건입니까? 이렇게 대담한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아주 흡족하셨습니다. 3년 동안 고생한 보람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를 칭찬 하셨습니다. 17절과 18절 말씀입니다
.“바 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교회는 베드로 위에 세운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권력과 황금보다도 주님을 왕으로, 구원자로,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위대한 신앙고백 위에, 그 믿음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운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말씀 속에는 굉장한 암시, 영적의미가 들어 있었습니다.
먼저는 앞으로 주님께서 세울 교회가 세상 모든 권세를 누르고 영원할 것이란 암시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들이 세계 끝까지 뻗어나갈 것이고, 어떤 악의 세력도 주님의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는 뜻도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지금 가이샤라 빌립보에 서서 그 교회들의 미래를 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예수님 자신을 온 세계의 왕으로, 온 인류의 구원자로, 그리고 온 우주에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고백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이러한 가르침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 중 맨 처음에 순교한 사람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였습니다.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아그립바가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된 후 로마의 환심을 사기 위해 때려 죽였습니다.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습니다. 안드레는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아데사에서 X 자의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습니다. 빌립은 A. D 54년경에 십자가에서 순교했습니다. 마태는 파티아와 에디오피아에서 사역하였고 박해를 받았으며 A. D 60년에 나다바에서 미늘창으로 순교 당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94세때 유대인들에 의해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다대오도 A.D 72년에 에데사에서 십자가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바돌로매도 십자가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도마는 파티아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습니다. 셀롯인 시몬은 A.D 74년 영국에서 십자가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로마에서 기름 가마 속에 던져지는 형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지켜 주셨고 이를 본 도미티안 황제로부터 밧모섬에 귀양을 갔습니다.
이분들이 이처럼 하나같이 순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분들 모두는 로마의 황제나 우상 앞에서 “예수님은 나의 왕이요, 나의 구원자요, 살아계신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온 세계의 왕이요, 온 인류의 구원자요,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바르게 고백한 사람들은 이처럼 맞아 죽고, 찔려 죽고,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고 마는 것입니까?
이렇게 예수님께 칭찬들을 만한 신앙고백을 한 사람들의 마지막이 이렇게 비참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출애굽기 19장 5절에서 6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또한 신명기 28장 1절 말씀에서도 확실하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주님을 왕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왕의 사람들답게 만들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주님을 왕으로 고백하고 섬기는 사람들에겐 왕께서 반드시 무언가를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남다른 지혜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을 주시고, 어떤 사람은 높여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 행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주님을 왕으로 고백하고 섬기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뭔가를 반드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주는 것은 시대가 바뀌면 그것도 사라지는 것이지만, 그러나 만왕의 왕, 만유의 주이신 주님께서 주시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무식한 갈릴리 어부들, 매국노라고 손가락질 받던 세리, 가슴 속에 한 자루 비수를 품고 다니던 칼잡이, 이처럼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못 배운 촌놈들이 어떻게 세계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는 존재들이 되었습니까? 그 원인은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 황제보다도, 그리고 헤롯보다도 주님을 왕으로 섬기겠다고 고백하고 그 고백대로 살았으므로 주님이 그들을 높여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을 세계와 우주 만물의 주인으로 섬기니까, 주님께서 그들을 높여 주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어찌하여야 이분들처럼 담대하게 바른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유다 왕 아하스 때에 수리아 군대가 북 왕국 땅에 쳐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예루살렘은 온통 공포 분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러므로 아하스는 앗수르를 의지해야 할까? 애굽을 의지해야 할까? 그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아하스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부랴부랴 기혼 샘에 내려가서 급수 시설을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와 그 아들 스알아숩을 기혼 샘에 나가 있는 아하스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네가 누구를 의지해도 헛수고 일 것이다.” 그러면서 유명한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7장 9절 하 반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여기서 믿는다는 말은 굳게 선다는 말씀이고, 믿지 못하는 것은 넘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믿지 못하는 자는 넘어질 것이고, 믿는 자는 굳게 설 것이라는 뜻입니다. 결론으로 굳게 믿어야 굳게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힘이 없는 백성입니다. 언제나 강대국 틈바구니에 끼어서 늘 고통만 당하고 살았던 민족입니다. 지금도 여전합니다. 이번에는 세계적인 경제 불황입니다. 이런 때 우리 민족이 살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만왕의 왕으로, 예수님을 유일한 구원자로 섬기는 민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우리 민족을 지키시고 높여주실 것입니다. 우리들이 중국 땅에서 위대한 백성으로 사는 길도 이것뿐입니다. 하나님 편에 굳게 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찬양의 교회 형제자매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으로 고백하고 그분만을 섬기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실제로 교회의 주인은 오직 주님을 이 세상의 주인으로 고백하고 헌신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말없이, 교회 구석구석에서 주님을 주인으로 섬기며 헌신하는 분들이 많아야 좋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우리교회에는 주님을 왕으로 고백하며 사는 분들은 많은 것 같은데, 충성심이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진정 주님을 왕으로 고백한다면, 그분을 위하여 죽을 각오로 충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최고의 가치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진실한 고백이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재물도, 명예도, 지위도, 권력도, 어느 것도 우리 인생의 최고의 가치는 아닙니다. 그런 것을 섬기면서 주님을 왕으로 섬길 수는 없습니다.
자신을 죽음에서 구하기 위해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진 엄마, 그 흉한 몰골이 부끄러워 친구들에게 엄마가 아니라고 한 것은 딸이 엄마의 희생을 배반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요즈음 우리들 생각과 삶 속에는 은연중에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신 하나님보다도, 우리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님보다도 더 높고 귀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돈’과 ‘명예’와 ‘정욕’과 우리가 ‘성공이라고 착각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들 앞에서 주님은 오늘도, 지금도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우리들은 이 질문 앞에서 진실하게 대답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대답에 주님은 물론이거니와 세상도 귀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안타깝게도 돈 앞에서 주님을 부인합니다. 어떤 분은 명예 앞에서 주님을 부인합니다. 어떤 분은 욕망 앞에서 주님을 부인합니다. 어떤 분들은 성공이라고 착각하는 것 앞에서 주님을 부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다시 질문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주님 앞에서 정직하게 여러분의 지금 마음을 말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몇 년, 몇 십 년 동안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만나 보았고, 체험해 보았던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요즈음 감기만도 못한 ‘코로나 19’ 때문에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가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 여파로 각 교회는 예배에 엄청난 영향을 받습니다. 앞으로 교회 존속에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주님을 사랑하는 자녀로써 가장 기본적인 사랑과 충성의 표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마태복음 10장 32절에서 33절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