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 경제 살려 차관 갚겠다며 눈물로 지원 호소”
1964년 12월 8일 서독의 수도 본에 있는 에르하르트 총리 공관. 3년 전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과 ‘전후 독일 부흥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르하르트 총리 간 정상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 중이던 군사정부는 미국의 차관 거절로 자금이 부족했다.
우여곡절 끝에 광부와 간호사 7000여 명을 긴급 모집해 서독에 파견하고 그들의 월급을 담보로 1억4000만 마르크(3000만 달러)의 차관을 얻었다 (박 대통령) “각하, 우리를 믿어주세요. 군인은 거짓말을 안 합니다. 우리도 독일처럼 분단국가입니다. ‘ 라인강의 기적’처럼 경제를 살려서 갚겠습니다.”
(에르하르트 총리) “각하, 제가 이승만 대통령 시절 한국에 두 번 갔었습니다. 산이 많던데 그러면 경제발전이 어렵습니다. 대동맥을 뚫으세요. 독일에도 산이 많았는데 1932년 본-쾰른 간 아우토반을 건설했고 1933년 집권한 히틀러가 아우토반을 전국으로 확장, 건설한 것이 경제부흥의 원동력이 됐습니다. 각하께서 내일 그 역사적인 길을 가십니다.
히틀러는 정치는 실패했지만 경제발전의 초석을 닦았습니다.
폴크스바겐 공장 만들고 철강공장 만든 것도 히틀러였습니다. 각하도 고속도로를 만든 다음에 자동차 물동량을 늘리고 제철공장 만드세요.
그리고 일본과 국교를 맺으세요. 지도자는 과거보다 미래를 봐야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왼쪽)과 에르하르트 서독총리(오른쪽)가 64년 12월 8일 총리공관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이 자리에는 통역관인 백영훈 원장이 배석한 증인의 말 이다. (박 대통령) “일본이 사과를 하지 않는데 어떻게 손을 잡겠습니까?” (에르하르트 총리) “아직 사과를 안 했나요?” (박 대통령) “그렇습니다. 우리도 아량이 있습니다.” (에르하르트 총리) “제가 사과시키겠습니다.”
당시 두 정상 간 대화는 박 대통령 통역관으로 수행했던 백영훈(80·사진) 한국산업개발연구원 원장이 통역했다. 지난 24일 서울 서초동 집무실에서 만난 백 원장은 “그때 박 대통령이 에르하르트 총리에게 돈 꿔달라는 얘기를 몇 번이나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며 “에르하르트 총리가 박 대통령에게 ‘니히트 바이넨(그만 우세요)’이라고 했을 정도”라고 전했다. 에르하르트 총리의 말대로 그 정상회담 직후인 65년 1월 16일 일본 오히라 외무상이 서울에 와서 정식으로 사과했고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졌다.
박 대통령 일행은 그 다음날 본에서 쾰른까지 20㎞ 구간을 아우토반을 이용해 이동했다. 이 구간은 1928년 착공해 32년 완공한 세계 최초의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였다. 박 대통령이 탑승한 벤츠 승용차는 시속 160㎞로 달렸다. 큰 충격을 받을 만했다. 박 대통령은 가는 도중 두 번이나 중간에 차에서 내렸다.
장기영 부총리, 이동원 외무부 장관, 이후락 비서실장도 따라 내렸다. 아우토반을 자세히 살펴본 박 대통령은 “어떻습니까. 좋죠? 히틀러가 했답니다. 우리도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힘든 일입니다. 그 시절이나 가능했지….”
박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동승한 서독 대통령 의전실장에게 처음 건설계획 수립부터 건설 방식, 관리 방법까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통역관이 전해주는 답변을 손수 메모하기도 했다. 백 원장에게 “우리가 여기서 보고 들은 것을 한국에 가서 실현할 것”이라며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박 대통령이 서독 방문 8일간 일과가 끝나면 낮에 들은 얘기를 다 적어내라고 지시하는 바람에 백 원장은 매일 새벽 3시에 잠자리에 드는 강행군을 했다. 대통령 주치의가 놔주는 주사로 근근이 버텼다는 것이다.
서독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박 대통령은 고속도로 건설에 몰두했다.
각 나라의 고속도로 건설 공사에 관한 기록을 공부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비밀 유지도 철저히 했다. 고속도로 건설 구상이 미리 알려져 반대 여론이 들끓게 되면 착공도 하기 전에 좌초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박 대통령은 아우토반을 달려 본 지 2년4개월이 지난 67년 4월 제6대 대통령 선거 때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선거공약으로 제시했다. 백 원장은 국내 최초의 민간연구소인 한국산업개발연구원을 설립해 경부고속도로의 타당성 분석과 운영 활성화 방안에 대한 보고서를 내는 등 자문 역할을 했다.
백 원장이 박 대통령 통역관으로 서독을 방문한 것은 그가 대한민국 독일 유학생 1호이자 경제학 박사 1호였기 때문이다. 1955년에 독일 쾰른대 경제학과에 진학해 3년 만에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이듬해 귀국, 29세에 중앙대 교수가 됐다.
경제학 책을 여러 권 집필해 유명해졌다. 하지만 5·16 군사정부에 의해 병역기피자로 몰려 훈련소에 강제 징집됐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병으로 있던 그를 박 대통령에게 요청해 발탁한 사람은 신응균 주서독 대사였다.
육군 훈련병에서 하루아침에 서독에 경제사절단으로 가는 정래혁 당시 상공부 장관의 특별보좌관이 된 것이다.
백 원장은 한독 경제협력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독일 정부로부터 대십자훈장을 받았다.
그는 “지난해 G20 회의에 우리나라 대통령이 참석한 걸 보고 눈물을 많이 흘렸다”며 “
그건 나만이 알 수 있는 대한민국의 고단한 역사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1964년 12월 서독 루르 공업지대의 함보른시 강당에 300여명의 한국인 광부와 간호사들이 모였다. 우리 1인당 GDP가 80달러였던 시절, 차관(借款)을 얻으려고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내외를 맞는 행사였다. 매일 새벽 4시 막장으로 출근하며 "글릭 아우프(Glueck auf·살아서 돌아오라)!"를 인사로 주고받던 광부들은 고향서 온 부모를 맞는 것 같은 설렘과 감회에 빠졌다.
애국가를 부를 때부터 행사장엔 흐느낌이 시작됐다. 박 대통령이 인사말을 했다. "여러분, 우리의 가난을 한탄하지 마십시오. 이게 무슨 꼴입니까. 나라가 못사니까 젊은이들이 이 고생을 하는 걸 생각하니 내 가슴에서 피눈물이 납니다. 우리만은 후손들에게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 대통령도 울고 모두가 울었다. 한 해 파독(派獨) 광부와 간호사들이 벌어서 송금한 외화는 우리나라 상품 수출액의 10%에 이를 만큼 큰돈이었다. 낯설고 고단한 땅에서 열심히 살던
그들은 대통령의 한마디 한마디에서 더없는 위로와 힘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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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정말 감사 합니다
경제발전에 전력을 다하신 고박대통령의 심정을 한번더 떠오르게 한내요
광부도 간호사도 함께 흘리게 된 진정한 지도자의 값진 눈물! 일 하면서도 신명이 났었는데 .....
그 시절에도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던 인사들을 아시나요?
글을 읽으니 가슴이 찡하네요. 나라를 위해 그렇게 고생 하셨고 그 덕분에 우리는 지금 잘 살고 -- ,
그런데 나쁜 놈들 때문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