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서 배운 사랑
이 윤자
외출을 준비하고 밖으로 나오자 아파트 공원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마음을 찡하게 하였다..
힘없는 모습으로 나를 애절하게 처다 보고 있다. 배가 몹시 고픈가 보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그냥 마주 보고만 있었다. 약속시간도 맞추어야 하지만 배고파하는 고양이를 두고 가기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당황스럽다. 한 십분 정도 머뭇거리다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준비된 것도 없고 길고양이의 양식을 알지도 못하니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난처하기만 하다. 귀가하면서 그 장소에 다시 가보았지만 고양이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인정이 많은 나도 아닌데 안쓰럽고 불쌍하였다.
나는 짐승하고 별로 교감을 하지 않고 살았다. 차츰 고개를 숙이는 편인가? 어려서는 밥 먹는 개를 자꾸 귀찮게 하여 개에게 물리기도 하였다. 웬만큼 나이가 들었을 때도 개를 좋아하지 않아 에피소드도 많이 있다. 피곤하여 낮잠을 자고 일어나는데 강아지가 놀라 안방 바닥에서 미끄러지며 도망가는 모습도 있었고, 남편, 삼 남매 모두 좋아하여 나 몰래 강아지를 뒷담 속에 집을 잘 지어 놓고 자기들끼리 사랑하는 등 강아지를 수없이 가져왔다. 집에 강아지가 있는 것이 너무 싫어 그중 한 마리를 내가 잘 아는 지인에게 준 적이 있는데, 직장에 출근하는 길 가집이었다. 그 강아지가 나를 보더니 발뒤꿈치를 물려는 맏 달려들며 한참을 쫓아오고 사납게 짖어대고 있었다. 남편과 함께 있는데 꼬리를 치며 마구 뛰어오르며 반가워 죽는 모습이 극과 극이었다. 내가 훨씬 더 착한 사람인데... 어느 날 바로 옆집에서 차나 마시자고 놀려오라고 하여 간 적이 있는데 집에 들어가자마자 조그만 강아지가 물것처럼 짖어대고 있었다. 어색하여 나는 애교를 좀 부려보아도 그냥 짖어댄다. “똘이 왜 그래 아줌마가 너 좋아해.”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모든 개가 나를 보고는 짖는 이유는 무서워서인가? 그렇게 생각함은 내 착각이다. 사랑은 주는 사람이 더 큰 사랑을 받는 이치를 아주 늦게 깨달았다.
내가 싫어하니까 시댁으로 보낸 강아지도 나를 보더니 도독을 대하 듯 사납게 짖어댄다. 짐승들도 자기들을 싫어하는 사람을 인지하고 직감할 수 있는 능력이 뛰어난 것 같다.
개를 기르고 싶어 계속 강아지를 얻어오는 가족과 싫어하는 나 때문에 얻어오고 다른 사람에게 주는 일이 반복되었다. 다른 강아지 한 마리를 또 데려왔다. 가족들이 없고 강아지와 나 둘이만 있던 날이다. 강아지가 내게 숨바꼭질을 청한다.
그 모습이 귀여워 서로 찾고 감추고 하였다. 얼마 후 강아지는 반대방향으로 나를 유인하며 재롱을 떨기도 한다. 그때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마구 안아 주었다. 차차 우리는 사랑을 나누며 반려동물의 정을 알까 말까 할 무렵 강아지를 잃어버려 섭섭한 마음이 깊고, 다시 보고 싶어 마음이 울적해졌다.
원래 사랑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집안에 흙은 없고 시멘트 바닥이라 짐승의 분변을 처리하기가 여의치 않은 탓도 있었다. 어린 자식들과 남편은 예뻐만 하면 되고 나머지는 모두 내 목이 되니까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다. 이제 엄마의 간섭을 받지 않고 아들딸이 원 없이 키우며 가족으로 사랑하고 가족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모습이 행복해 보여 나도 즐거웠다.
자식들 집을 방문해 보면 고양이, 개, 금붕어 가족들에게 온갖 정성을 다 한다. 목욕시키고, 진지 상 차려드리고, 병원에 모시고 가고, 잠자리도 함께 한다.
금붕어도 참 웃긴다. 밥 주는 사람을 알아보고 동선을 따라가며 입을 뻐끔거린다. 그 모양이 신기하기도 하였다.
며느리가 부재중일 때 손자들과 생활하며 고양이들과 친해졌다. 외면만 하던 고양이들이 내 곁에 와서 쳐다보고 있으면 손자 손녀들은 그 말뜻을 알아듣고 나에게 통역을 해주기도 한다.
강아지들은 싫어하는 나를 알고 있어 오랜 세월 나를 보면 물고, 짖어댔지만 조금씩 닦아가는 나를 알아주니 보람이 있고 생각보다 재미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가족일 수밖에 없다는 깨우침이 늦게나마 더 큰 사랑을 배웠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개, 고양이라고 부르지 않고 이름을 지어 부르며 가족으로 서로 사랑을 나눈다.
오늘 큰 아들에게서 택배가 도착하였다. 고양이 양식 “츄르”였다. 지난번 고양이에게 미안했노라고 말하였더니 다음에 만나면 주라고 보내 준 것이다. 딸도 간식으로 “로얄 캐닌 피트”을 보내왔다. “우리 엄마 사랑스럽다.”라고 하며 길고양이도 아무것이나 먹지 않는다고 알려 주웠다. 나는 이것을 가지고 매일 아파트 공원을 서성이고 있다. 사랑을 배운 선생님께 보답하고 싶어서이다. 어느 날 기다리던 그 임처럼 왔다. 반가워 손가방에서 ‘츄르와 로얄 캐닌 피트’를 꺼내어 줬다. “또 와, 이제 너와 나는 친구야, 너에게서 배운 사랑으로 더 많은 사랑을 할 수 있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고양이가 오래도록 쳐다본다. “이제 당신을 사랑은 아셨어요.” 하는 따뜻한 눈길이었다. 더 이상 길고양이가 아닌 사랑을 가르쳐준 나의 친구이자 스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