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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청년학생의 통일운동 역사
88년 -김일성종합대학 청년학생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통일운동의 새로운 역사를
연 기폭제 되다
우리 청년학생들을 비롯한 애국민중들이 통일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일 수 있게 된 중요
한 계기중의 하나는 바로 서울대 김중기 학우의 '김일성종합대학 청년학생들에게 보내
는 공개서한' 발표였다 할 수 있다. 3월 29일 서울대 총학생회장에 출마한 김중기 후
보는 유세에서 공개서한을 통해 "올림픽을 남북대화합의 대제전으로 만들고 이를 통해
통일의 길로 나아갈 것이 요구된다."고 주장하면서 '남북 청년학생회담' 개최를 제안
하였다.
이로서 김중기 학우의 선거공약은 이후 전대협차원의 사업으로 되면서 88년 6월 10일
남북청년학생회담투쟁과 88올림픽 남북공동개최 투쟁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청년학생들의 선봉적 통일투쟁에 대해 각계각층은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하면서
공동올림픽 성사투쟁을 전개하였으며, 범국민적 통일운동을 위해 7월 20일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민주단체협의회'를 구성하였다.
이남의 각계인사 1014명은 8월 1일 남북해외가 참가하는 민족올림픽을 제안하고 그 성
과를 이어 본격적인 범민족대회를 추진하자라는 취지속에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
한 세계대회 및 범민족대회 추진본부 발기 취지문'을 발표한다. 이러한 논의의 결과로
8월 22일부터 28일까지 남쪽 민족민주운동단체 23개와 미국, 일본, 필리핀, 독일 등
의 평화운동가들은 '한반도 통일을 위한 세계대회'를 성균관대 금잔디 밭에서 치르게
된다.
이렇듯 88년 청년학생들의 선봉적인 통일투쟁은 근 20년간 주춤했던 민간급 통일운동
의 새로운 역사를 열었으며, 4천만 민중이 그리고 7천만 민족이 통일운동의 주체로 힘
있게 나 설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89년 - 3자 연대로의 시작 "전대협은 평양에 도착했습니다."
민간통일운동은 당국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88년 투쟁의 성과를 이어 더욱 가열차게 전
개되었다. 그 중 3월의 문익환 목사의 평양행과 전대협 대표인 임수경의 방북은 한반
도를 통일의 열기로 들끓게 했으며, 나아가 통일운동이 한쪽만의 운동으로서가 아닌
남북해외가 공동보조를 맞추어 3자연대 속에서 이루어 질 수 있게 한 중요한 계기로
되었다.
이 시기에 전개된 청년학생들의 방북투쟁과 자주교류 등의 통일운동은 국민들에게 통
일이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현실에서 하루 빨리 실현해야 할 당면 과제임을 부각시켰
으며 나아가 90년대에 들어 개최된 범민족대회와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
) 결성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90년 - 통일운동 대중화의 새로운 전기!
88년 3월 서울대학교의 '김일성종합대학교 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된 청년학
생들의 통일열기는 그 뒤 남북청년학생회담 성사 투쟁, 임수경 방북투쟁 등을 통해 더
욱 달구어졌으며, 이는 곧 한반도 전체를 통일의 열기로 몰아넣었다.
이렇게 전민족의 의지 속에서 1차 범민족대회는 연세대에서 12개 지역 66개부문 연인
원 20만명이 참가한 가운데 성대히 치뤄지게 된다. 또한 1차 범민족대회에서 우리 민
족은 조국통일의 실현의 과제인 남북해외 7천만 겨레의 민족통일대연합전선 범민족통
일운동체를 결성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처럼 청년학생들의 선봉적인 통일투쟁을 기폭제로 마침내 성사된 1차 범민족대회는
조국통일운동의 새로운 단계를 개척한 민족적 쾌거였으며, 민족대단결의 구심체인 범
민련을 탄생시킨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한편 88년과 89년의 청년학생들의 통일운동이 전대협차원의 집중투쟁이고 상층투쟁이
었다면 90년의 통일운동은 '전면교류', '자유왕래'의 구호를 내걸고 1천개과 방북투쟁
을 전개함으로써 통일운동의 대중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91년 - 1차 청년학생 통일 대축전 성사!
우리의 청년학생들은 민족 앞에 놓인 통일운동의 과제를 선두에서 힘차게 전개해 나갔
다. 당시 청년학생들은 90년 1차 범민족대회를 계기로 91년 2차 범민족대회에서부터
범민족대회안에 청년학생통일축전을 진행할 것을 계획하고, 91년 초 이를 북과 해외
청년학생들에게 제안하였다. 그리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전대협은 박성희, 성용승
대표를 평양에 파견하였다. 이러한 청년학생들의 통일의지와 노력은 마침내 91년 청년
학생통일대축을 성사시켰으며 이는 나아가 91년 12월 범청학련 건설을 위한 남북해외
공동연락본부를 내오고 92년 범청학련 건설과 향후 대중적 자주교류의 실질적 토대 구
축에로 이어졌다.
92년 -3자연대 청년학생 조직 범청학련 결성!
반통일 세력들의 탄압이 더욱 더 기승을 부리는 시점에서 민족의 통일열망을 제대로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각 부분별로 3자연대를 실현시키는 과제가 제기되었는데, 청년학
생들은 이 민족적 요구 앞에 가장 먼저 떨쳐나섬으로써 범민련의 부문 연합인 '조국통
일 범민족 청년학생연합'을 결성하였다.
또한 남북의 청년학생들은 92년 2월 22일에 91년 말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의 발표에 발맞추어 이남지역과 평양에서 '합의서 채택 지지와 이행촉구 및
팀스피리트 훈련 완전철회'를 위한 남북청년학생 공동결의대회를 진행하였다.
당시 3차 범민족대회는 정권의 엄청난 탄압으로 대회장이었던 중앙대가 경찰에 의해
침탈당해 전대협 6기 태재준 의장을 비롯한 간부들과 학우들이 연행되었고 학교는 10
여 억원의 피해를 입었을 정도로 파괴당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청년학생들은
서울대에서 범민족대회와 범청학련 통일대축전을 성사시키고 범청학련을 결성함으로써
우리 민족 앞에 주어진 조국통일의 과제를 투쟁으로써 훌륭히 수행해 나갔다.
1993년 -범청학련 공동사무국 건설
범청학련은 여러 가지 3자연대 활동을 통해 남북해외의 연대를 더욱더 강화하고 그 내
용적 질적 연대를 심화시켜 나갔다. 먼저 범청학련은 베를린에 범청학련 공동사무국을
마련하기로 합의하였으며, 이에 따라 전대협에서는 박승희, 성용승, 최정남 대표를
파견하여 범청학련 사업을 강화해 나갔다. 또한 범청학련은 자주교류 사업을 활발히
벌임으로써 민족대단결과 3자 연대를 더욱 공고히 해나갔다. 이러한 힘은 당시 북미간
핵공방이 이루어지고 조국반도에 전쟁의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 속에서 6월 12일 '조
국반도의 평화실현과 자매결연을 위한 판문점 회담 성사투쟁'으로 모아진다. 물론 판
문점으로 향하던 남측대표단 전원이 연행되어 회담이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전쟁의 위
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이 땅의 진정한 책임일군인 청년학생들이 나서 외세에 맞서
민족대단결로 조국반도에 평화실현을 위한 투쟁을 벌였다는 것은 무척 큰 의의가 있다
. 또한 범청학련은 범청학련 공동의장단 회의를 전화연락으로 성사시킴으로써 범청학
련에 대한 전망과 과제를 위한 논의를 활발히 진행하였으며 그 속에서 범청학련의 발
전전망을 내올 수 있었다.
1994년 - 남북정상회담의 합의와 좌절. 이를 딛고 전쟁책동, 공안탄압을 분쇄해내다
94년은 남북정상회담의 합으로 그 어느때보다도 통일의 전망이 밝게 그려지던 해였다
. 그러나 95년을 통일원년으로 만들고자 했던 전민족적 염원과 의지는 정상회담을 몇
일 앞둔 시점에서 북의 김일성 주석이 서거함으로써 커다란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김영삼 정권은 자신이 언제 정상회담을 계획했었냐는 듯 조문파동과 주사파 시비를 벌
이면서 청년학생들을 비롯한 통일애국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그러나 우리 청
년학생을 비롯한 통일전사들은 통일 선봉대의 불굴의 투쟁을 선두로 해서 각 지역의
통일축전 그리고 5천여명의 건국대 진입 시도투쟁 등으로 김영삼 정권의 탄압을 정면
으로 맞받아 쳤다. 또한 3만이 넘는 통일대오가 일사분란한 모습으로 대회장을 변경하
여 서울대로 진입하면서 결국 범민족대회 사수, 성사라는 자랑찬 승리를 쟁취하였다.
1995년 -"우리 젊은이들이 통일의 기둥이 되겠습니다. "
범청학련은 범청학련 1차 중앙위원회 총회를 성사시키면서 '범청학련 통일방안'을 남
북해외 200만 청년학생들이 합의를 볼 수 있게 하였다. (여기에 남측대표로 정민주 이
혜정 대표가 참여하였다.)
또한 범청학련은 '6.3 남북해외 청년학생 통일선언'을 벌였는데, 이 선언운동은 기간
전개되었던 남북 해외의 연대운동 중 가장 대중적이며 내용 있게 진행되었다. 남측
2-3만명, 북측 50만명, 해외 3-4만명이 참가한 이 선언운동은 이남의 한 일간지에 "젊
은이가 통일의 기둥이 되겠습니다." 라는 제호의 남북 해외 공동선언문을 게제하는 것
으로 마무리 되었다. 이는 범청학련 사상 처음 있었던 일로 범청학련의 대중적 지반을
다지고 남북해외 청년학생들의 통일염원을 하나로 모아내는 데 독특한 공헌을 했다.
더불어 이 속에서 진행되었던 '아시아 청년포럼'은 범청학련의 활동에 대한 국제적 지
지여론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1996년 - 우리들의 당당한 승리!
7차 범민족대회 6차 범청학련 통일대축전은 96년 민족 앞에 제기되는 조국통일 투쟁의
과제를 실천하고 미국과 김영삼 정권의 실체를 낱낱히 밝힌 애국적 통일항전이었다.
대회의 원천봉쇄 입장을 밝힌 김영삼 정권은 이미 8월 초순부터 대회장을 막아나섰다
. 그러자 한총련 통일전사들은 이에 맞서 대회장 사수를 적극 결의해 나섰으며, 전국
각지에서 통일의 불바람을 일으키던 통일선봉대를 선두로 속속 연세대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김영삼정권은 범민족대회 폐막식을 알리고 청년학생들이 해산을 하려는 과정에
서 갑자기 학생들을 건물 안으로 몰아넣고 대규모 섬멸전을 감행하였다. 고립된 학생
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은 물론 의약품과 여성용품마저도 반입을 차단한 채 총기까
지 사용하겠다고 협박하면서 고사작전을 펼쳤던 것이다. 결국 김영삼정권은 이 8월대
회에서 6천 여명의 학생들을 연행하고 500여명을 구속하는 등 반통일적인 모습을 적나
라하게 드러내게 되었다.
한편 96년 범청학련은 95년 중앙위원회 성사의 성과에 기반해서 조국의 평화와 민족대
단결을 실현하기 위해 범청학련 총회와 연석회의를 개최하였다. 특히나 범청학련 1차
총회는 범청학련을 남북해외 청년학생 조국통일 투쟁의 구심체로서 전형을 확고히 세
운 획기적 투쟁이었다. 또한 청년학생들은 6차 범청학련 통일대축전에 류세홍, 도종화
대표를 파견함에 따라 남과 북 해외의 역사적인 3자 상봉을 성사시켰다.
1997년 - 반통일세력들의 광폭한 폭압속에서도 의연히 휘날린 범청학련의 깃발
청년학생들과 통일애국민중은 97년을 '민족자주 평화수호' 기치아래 남북해외 연대를
위한 해로 규정지었다. 그리고 연대항쟁이후 또 97년 5기 한총련 출범식 이후 비상식
적으로 진행된 김영삼정권의 광폭한 탄압을 뚫고 마침내 8차 범민족 대회 7차 범청학
련 통일대축전을 혁명의 도시 광주에서 성사해냈다.
또한 한총련은 쿠바 아바나 14차 세계 청년학생들의 축전에도 참가해 반제의 기치를
세계의 청년학생들과 함께 더욱 높이 듦으로써 반미자주 조국통일의 성업을 다해 나갔
다.
1998년 -폭우야 쏟아져라, 우리는 8월처럼 산다
청년학생들과 통일애국민중은 8월 12일 험난한 관악산 산줄기를 타고 서울대에 입성함
으로써 민족의 대단합과 조국통일의 의지를 남김없이 과시하였다. 특히나 쏟아지는 폭
우에도 굴하지 않고 각계각층이 참가하는 속에서 진행된 9차 범민족대회와 통일대축전
전야제는 우리 민족의 통일열기가 그 얼마나 뜨거운가 내외에 과시하기에 충분했다.
또한 통일선봉대의 임진각 진출투쟁, 연신내에서의 판문점 진격투쟁, 한총련 김대원,
황선대표의 방북투쟁, 문규현 신부의 축전 참가는 제 9차 범민족대회와 통일대축전을
명실공히 남과 북 해외 3자 연대의 장으로 빛내이고 통일애국민중에게 민족의 화해와
단합, 통일에 대한 확신을 안겨 주었다.
범청학련 운동의 대중화와 합법화를 위해 전개했던 범청학련 북녘 문화 유적 답사와
통일축구대회는 광범위한 대중속에서 크게 호응을 일으키면서 자주교류의 활성화를 94
년 이후 다시 한번 일으키는 투쟁이었다. 또 이는 대중들속에서 민족대단결 의식을 크
게 고양시키는 성과를 낳았다.
95년도 아시아 청년 포럼 이후 한총련이 세계민청에 가입함으로써 범청학련 투쟁의 정
당성을 전세계에 알림과 동시에 전 세계 청년과 연대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1999년 -전쟁책동 분쇄!
범청학련은 미국에 의한 일촉즉발의 전쟁위기 속에서 '미국과 일본, 남측당국의 전쟁
도발책동 분쇄를 위한 1.28 범청학련투쟁 선포식'을 시작으로 '미국의 전쟁책동 분쇄
와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4.28 범청학련결의대회' 등의 반미공동투쟁을 벌여
냄으로써 미국의 새전쟁도발 책동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였다. 이러한 투쟁을 통해 범
청학련은 7천만 겨레의 반미의식을 한층 높여낼 수 일었다.
또한 범청학련은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을 위한 10차 범민족대회가 역대사상 가장 거족
적이고 성대하게 치뤄질 수 있게 하는 데서도 선봉자적 역할을 훌륭히 담당했다. 범청
학련 남측본부는 판문점에서 열린 99년 범민족통일대축전과 범청학련 통일대축전에 황
혜로 대표를 파견함으로써 10차 범민족 대회의 실질적 3자 연대 실현을 선봉에서 수행
하였다.
2. 6.15시대
2000년 - 6.15 남북공동선언 실천 운동의 앞장에서 서다.
2000년은 조국통일운동사에서 새로운 국면이 열리는 해였다. 4월에 남북간 정상회담을
합의하고 6월에 정상회담을 성대히 열어 6.15 공동선언이라는 조국통일의 이정표를
탄생했다. 6.15 공동선언은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선언이며 조국통일의 이정표로
조국통일운동으로 광범위한 각계를 뭉치게 하였다. 과거 대결과 분단의 역사를 끝장
내고 화해와 통일로 나가는 역사적 길목에서 과거는 어떻든 6.15 공동선언을 지지하면
함께 할 것을 요구하였다.
범청학련은 상반기 동안 전민특위 사업을 비롯한 반미 3자연대집회를 비롯한 반미투
쟁과 내외반통일세력에 대한 꾸준한 투쟁을 벌였다. 6.15 공동선언이 채택된 조건에서
범청학련 통일대축전에 120여개 정부, 정당, 사회단체 인사들을 초청하는 사업을 벌
였으며 민화협과 공동실천을 위한 성의있는 노력을 보였다. 또한 범민련 남측본부의
단결을 실현하기 위해 성의있는 노력을 다했다. 8월 14일에는 민화협 산하 청년단체인
한국청년연합회와 전대협동우회, 한청, 범청학련, 한총련 등이 참가한 가운데 청년학
생통일대토론회를 개최하여 청년학생들이 6.15 공동선언 실천을 함께 하는 모범을 일
구었다.
2001년 -반미운동, 청년학생추진위 결성으로 6.15공동선언 실천운동의 새 지평을 열다
!
2001년은 2차 남북정상회담이 예견되어 있었으나 미국의 대북강경정책, 내정간섭 등
으로 남북 정부당국자간의 대화가 정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 농민들의 통일
대회가 금강산에서 남북 노동자, 농민 천명이상의 참가로 열리게 되는등 남북 사회단
체들간의 통일대회가 6.15 공동선언 이행의 명맥을 이어냈다.
범청학련은 올해초 공동의장단회의를 통해 민주적, 합법적 방식의 통일운동을 벌이겠
다고 결정하고 정부와의 연대, 협력을 선포하였다.
범청학련은 상반기 반미구국 30일단식등 반미투쟁에 총력을 집중하며 6.15 공동선언
이행의 활로를 열어나갔으며 광범위한 청년,학생들을 반미운동과 범청학련의 두리에
묶어세웠다.
또한 40여개의 청년단체로 구성된 '6.15 남북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2001 민족공동행
사 청년학생추진위'를 결성, 강화를 위해 노력함으로써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단
결과 조직결성의 모범을 창출했다.
청년학생추진위는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6.15 공동선언을 지지하는 민화협 산하
청년학생단체, 종단 산하 청년학생단체, 통일연대 산하 청년학생단체, 범청학련, 한
총련을 비롯한 여타 청년학생조직이 단결하여 구성됨으로 단결과 실천의 모범을 만들
었으며 청년학생 운동 대오의 6.15 공동선언 실천운동의 새 지평을 열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