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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미소
들판이나 물이나 하늘이 한마음으로
나에게 미소지으며 은총을 퍼붓는 듯했도다.
스펜서Edmund Spenser,《선녀 여왕The Fairie Queen》,1권 캔토 9
와이번에서 부컴으로 자리를 옮김과 동시에, 내 주된 친구도 형에서 아서로 바뀌었다. 형은 프랑스에서 복무 중이었다. 형은 내가 부컴에 있던 1914년부터 1916년 사이에 아주 가끔 휴가를 받아 근사한 젊은 장교의 모습으로 불쑥 나타나곤 했는데, 거의 무제한의 금전을 가지고 있는 듯 가뿐히 나를 아일랜드로 데려가곤 했다. 기차 일등석과 침대차는 그때까지 사치를 모르던 나의 여행을 더욱 빛나게 해 주었다. 독자들은 내가 아홉 살 이후 1년에 여섯 번씩 아일랜드 해를 건너다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형이 휴가를 오면 여행은 더 빈번해졌다. 그 덕분에 멀리 여행한 경험이 별로 없는 사람치고는 특이하게 배와 관련된 기억을 많이 지니게 되었다. 배가 앞으로 나아갈 때 굽이치던 파도의 푸른 인광燐光, 배가 물결을 헤치며 돌진하고 있는데도 별을 향해 미동도 없이 꽂꽂하게 서 있던 돛대, 새벽이나 일몰을 알리며 차가운 회녹색 수평선에 길게 가로누워 있던 연어살 빛의 단충, 항구로 다가갈 때 육지가 보여 주던 그 경이로운 움직임, 마치 나를 맞이하러 나온 듯 불쑥 튀어나와 있던 갑, 이리저리 얽히고설키다가 마침내 내륙 안쪽 깊숙한 곳으로 사라지던 산들의 모습이 눈만 감아도, 아니 때로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물론 이런 여행은 내게 아주 큰 기쁨이었다. 형이 프랑스로 가기 전 둘 사이에 고조되고 있던 긴장(와이번으로 인한 긴장)은 사라졌다. 이 짧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어렸을 적 고전 시대를 되살리자는 묵계가 상호간에 있었던 것이다. 형은 그 당시에 비교적 안전하게 여겨지던 육군 보급부대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가족들처럼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밖으로 표현한 것보다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야 내가 최소한 한 번 이상 겪은 이상한 경험이 설명될 것이다.
그것은 믿음도 아니고 꿈은 더더욱 아닌, 하나의 인상 내지는 심상心想, 강박관념 같은 것이었다. 부컴의 아주 추운 겨울 밤, 형이 소리를 지르며ㅡ아니 소리를 지른다기보다는 베르길리우스가 묘사한 지옥에서처럼 소리를 지르려고 애를 쓰는데도 박쥐 울음 소리밖에 나오지 않는inceptus clamor frustratur hiantem모습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ㅡ정원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위로는 내가 가장 혐오하는 분위기, 나약하고 비참하고 희망 없는 비애와 소름끼치는 공포가 뒤섞인 분위기ㅡ‘이방인의 저승Pagan Hades' 이 내뿜는 음울한 독기ㅡ가 떠돌고 있었다.
아서와 나의 우정은 특정한 한 부분의 취향이 같다는 데에서 시작되기는 했지만, 우리에게는 서로 도움이 될 만큼 충분히 다른점도 많았다. 아서의 집은 우리 집과 정반대였다. 아서의 부모님은 플리머스 형제단의 일원이었고, 아서는 대가족 중 막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은 우리 집이 시끄러운 것만큼 조용했다. 그 당시에 아서는 형의 일을 도와주고 있었는데, 건강이 좋지 않아서 몇 번 앓고 난 후에는 일을 그만두었다.
아서는 다재다능한 친구였다. 그는 피아니스트였고, 작곡가가 되기를 희망했으며, 화가이기도 했다. 우리의 초기 계획 중에는 아서가 《사슬에 묶인 로키》를 오페라로 만든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아주 짧고 행복한 기간이 끝나면서 그 계획도 고통 없이 사라져 버렸다. 문학의 영역에서는 내가 아서에게 끼친 영향보다 아서가 나에게 끼친 영향이 더 크고 지속적이었다. 그의 큰 약점은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가 일부 개선시켜 주기도 했지만, 그래도 내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반면에 아서는 나처럼 신화와 마법을 사랑하는 한편 내가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던 취미를 한 가지 갖고 있었고, 그 부분에서 내게 평생 가는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그가 ‘훌륭하고 튼실한 옛 책들’이라고 불렀던 영국 고전 소설에 대한 취미였다.
아서를 만나기 전에는 왜 그런 책들을 읽지 않았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아주 어렸을 대 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뉴컴 가The Newcomes》를 읽고 난 후 옥스퍼드에 들어갈 때까지, 새커리William Makepeace Thackeray는 다시 읽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새커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설교를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설교가 형편없기 때문이다. 디킨스에 대해서는 공포심을 품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내가 글 읽기를 배우기 전에 삽화들을 열심히 들여다본 데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 삽화들이 사악하다고 생각한다. 월트 디즈니 만화가 그렇듯이(그렇다고 해서 디즈니가 디킨스의 삽화가보다 훨씬 더 낫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비밀을 드러내는 것은 추악한 인물들의 추악함이 아니라 독자의 동정을 얻기 위해 바보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 인형들이다. 스콧Walter Scott의 작품은 중세를 주제로 한 가장 빈약한 소설 몇 권만 읽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아서의 영향을 받아 최고의 ‘웨이벌리 소설’을 전부 읽었고, 브론테 자매의 전 작품과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의 전 작품을 읽었다. 이들은 환상적인 이야기 위주였던 나의 독서 습관을 훌륭하게 보완해 주었으며, 나는 각 작품을 비교해 읽는 재미를 더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아서는 전에 내가 이런 책들을 꺼렸던 이유들을 오히려 매력으로 바꾸어 주었다. 내가 ‘진부함’이나 ‘평범함’으로 치부했던 것들을 아서는 ‘소박함Homeliness'ㅡ이것은 아서의 상상 세계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단어였다ㅡ이라고 불렀다. ‘소박함’은 ‘가정사’에서 유래된 말이지만, 아서가 단지 그 뜻만 지칭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 작품들이 우리의 소박한 경험, 즉, 날씨와 음식, 가정, 이웃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제인 에어》의 첫 문장이 읽을 때마다 즐거움을 준다고 말했다. 안데르센Hans Andersen의 동화에 나오는 첫 문장, “정말이지 비가 말도 못하게 쏟아졌다”라는 문장도 좋아했다. 브론테 자매의 작품에 나오는 ‘개여울’이라는 단어 하나도 깊이 음미했다. 교실과 부엌을 묘사한 장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소박한’것에 대한 사랑은 문학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집 밖에서도 소박함을 찾았고, 내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쳤다.
그때까지 자연에 대한 내 감정은 낭만적인 데 협소하게 치우쳐 있었다.
나는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거나 야성적이거나 으스스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거의 전적으로 집중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거리감을 주는 것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렇다 보니 산과 구름이 특별한 즐거움이 되었다. 하늘은 모든 풍경의 가장 주된 요소였고, 지금도 그렇다. 나는 《현대 화가론Modern Painters》에서 구름을 분류하여 이름 붙여 놓은 내용들을 보기 훨씬 전부터, 권운과 적운과 비구름의 각기 다른 질감과 높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땅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내가 자란 시골은 온통 낭만적인 성향을 북돋아 주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고, 놀이방 창문에서 내다 보이던, 손에 잡히지 않을 것처럼 아득했던 초록빛 언덕을 처음 본 이후 계속해서 나를 낭만적으로 몰아갔다. 그 지역을 아는 독자들은 내가 주로 다닌 곳이 홀리우드 힐즈ㅡ스토먼트에서 컴버, 컴버에서 뉴타우너즈, 뉴타우너즈에서 스크레보, 스크레보에서 크레이건틀릿,크레이건틀릿에서 홀리우드, 그리고 다시 녹네거니에서 스토먼트로 이어지는 울퉁불퉁한 다각형의 지역ㅡ였다는 말만 들어도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다. 그 지역을 모르는 독자들에게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선 그 지역은 잉글랜드 남부의 기준에서 볼 때 황량한 곳이다.
그리 많지 않은 숲에는 키 작은 마가목, 자작목, 전나무가 자라고 있다. 들판은 작은데, 매운 바닷바람에 시달린 산울타리 주변에 패인 도랑들이 그 들판을 가르고 있다. 이 지역에는 가시금작화가 상당히 많고, 땅 위로 몸을 드러낸 바위들이 많다. 이제는 쓰지 않는 채석장, 차가워 보이는 물이 차 있는 작은 채석장들도 놀랄 만큼 많이 있다. 바람이 거의 항상 풀밭 사이를 스쳐 다닌다. 농부가 밭을 갈고 있는 곳에는 갈매기가 따라다니면서 이랑에 뿌린 씨를 쪼아 먹는다. 들에는 따라 길이 없고 사람들은 통행권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모두가 알고 지내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설령 모르는 사람이 지나간다 해도, 그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알아보고 열린 문은 닫아 주며 작물들을 함부로 밟고 지나가지 않을 것을 믿는다. 버섯은 공기만큼이나 흔해서 주인이 따로 없다. 토양은 잉글랜드 일부에서 불 수 있는 비옥한 초콜릿 색이나 황토색보다 엷은 색ㅡ다이슨H, V. D. Dyson이 말한 바 “오래된 박토 薄土”ㅡ이다. 그러나 풀은 보드랍고 풍부하고 감미로운 향기를 풍기고 있으며, 언제나 하얗게 칠해져 있는 벽에 파란 슬레이트 지붕이 얹혀 있는 단층의 농가들은 풍경 전체를 화사하게 만든다.
홀리우드 힐즈는 그리 높지 않지만, 거기서 바라보이는 전경은 광활하고 다양하다. 북동쪽 맨 끝에 서서 보면 홀리우드 쪽으로 가파르게 내려가는 능선이 보인다. 발밑으로는 호수가 펼쳐진다. 앤트림 해안은 북쪽으로 가파르게 돌아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에 비해 더 푸르고 완만한 다운 지역은 서서히 곡선을 그리며 남쪽으로 사라진다. 그 둘 사이로 호수가 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날씨 좋은 날 주의 깊게 보면 스코틀랜드가 수평선 위로 유령처럼 어렴풋이 떠오른다. 이제 남쪽과 서쪽으로 더 가 보도록 하자. 아버지 집에서 바라보이는 외딴 집 앞에 서 보라. 그 집은 교외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집으로서, 우리 지역이 진짜 목동들이 사는 지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목동의 오두막’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그 앞에서도 호수가 내려다보이지만, 호수 입구와 바다가 지금 걸어온 지역에 막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방이 막힌 호수의 형국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내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던 거대한 대비 가운데 하나ㅡ니플하임과 아스가르드, 브리튼과 로그레스, 한드라미트와 하란드라,낮은 세계와 높은 세계ㅡ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바라보이는 지평선은 회색빛 도는 푸른색의 덩어리처럼 보이는 앤트림 산맥이다. 물론 화창한 날이면 녹색 능선이 3분의 2정도 정상을 향해 올라가다가 갑자기 깍아지른 절벽을 만나는 모습을 케이블 힐 위에서 추적할 수도 있다. 이것은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러나 지금 서 있는 이곳에는 그와는 사뭇 다르면서도 훨씬 더 사랑스러운 아름다움ㅡ햇빛과 풀밭과 이슬, 꼬끼오 우는 닭들과 꽥꽥 우는 오리들ㅡ이 있다. 그 사이, 발 아래 평평하게 펼쳐진 계곡 바닥 위에 공장 굴뚝들의 숲과 과선교와 묵직한 안개를 뚫고 솟아오르는 거대한 크레인 위에 벨파스트가 가로누워 있다. 거기에서는 끼익끼익 애처롭게 비명을 지르는 전차 소리, 고르지 못한 길을 따가닥 따가닥 지나가는 마차 소리, 이 모든 소리를 제압하는 거대한 조선소의 쿵쿵거리고 웅웅거리는 소리 같은 소음들이 연신 올라온다. 우리는 평생 이런 소리를 들으며 살았기 때문에, 그 소리 탓에 언덕 위의 고요함이 깨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소리들은 대비를 더 강조하고 풍성하게 해 주며, 이중성을 더 예리하게 만들어 준다.
발 아래 ‘매연과 혼돈’의 세상에는 나보다 운이 없는 아서가 내일부터 복귀해야 하는 진절머리 나는 사무실이 있다. 우리가 이처럼 평일 아침에 함께 언덕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아서의 흔치 않은 휴가 덕분이다. 저 아래에는 맨발로 다니는 노파와 ‘주류 판매소 spirit grocers'(친근한 영어‘술집pub'을 아일랜드에서 끔찍하게 바꾸어 놓은 말)주위를 어정거리는 주정꾼, 고삐에 팽팽하게 매여 혹사당하는 말과 굳은 얼굴의 부잣집 마나님ㅡ이 모든 것은 알베리히가 사랑을 저주하고 황금을 반지로 바꾸면서 만들어 낸 세상이다ㅡ이 있다.
이제 작은 길로 걸어가면ㅡ밭 두 개와 길 하나만 지나면 저쪽 멀리 있는 둑 위에 올라설 수 있다ㅡ약간 동쪽으로 치우친 남쪽 방향으로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그 세상을 보고서도 나를 낭만적이라고 비난할 사람이 있을까, 그곳에는 결코 저항할 수 없는 대상 그 자체가 있고, 세상 끝에 이르는 길과 그리움의 땅이 있으며, 상심과 축복이 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다운 평야라고 불러도 좋을 곳을 가로질러, 그 너머 모언 산맥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다운 평야의 모습을 처음 설명해 준 사람은 Kㅡ쿼터스 이모부의 둘째딸인 발퀴레ㅡ였다. 이 지역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은 사람은 다음과 같이 하면 된다. 중간 크기 감자 여러 개를 평평한 양철 함지에 깐다(한 층만 깔면 된다).그 위에 흙을 뿌려서 감자가 안 보일 정도로 덮되, 감자의 형태가 완전히 묻히도록 덮지는 말라. 그러면 감자들 사이의 갈라진 틈으로 흙이 흘러내린다. 이제 그 광경을 확대하여 그 갈라진 틈마다 시냇물이 흐르고 나무들이 여기저기 우거져 있다고 생각해 보라. 그리고 감자를 덮고 있는 황토색 표면에, 갖가지 농작물과 풀과 경작지로 알록달록한 바둑판 무늬의 밭, 하나같이 작은(하나가 2에이커밖에 안 되는)밭들을 그리라. 그러면 아주 큰 거인의 눈에는 평평하게 보이겠지만 그래도 걷기에는 아주 불편한 다운 ‘평야’의 그림이 완성될 것이다. 이제 농가마다 하얗게 칠해져 있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라. 이 작고 흰점들 때문에 평원 전체가 미소짓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여름 바다 위로 시원한 바람이 불 때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 같다. 길도 하얗다. 포장도로는 아직 없다. 작은 구릉들이 울퉁불퉁 저마다 고개를 내밀고 있는 탓에, 이 길들은 제멋대로 뻗어 나가 사라졌다. 나타났다 한다. 이 풍경 위에 잉글랜드의 따가운 햇살을 뿌려 대면 안 된다. 햇살은 그보다 옅고 부드럽게, 하얀 적운의 가장자리를 흐릿하게 할 정도로만 조정하고, 그 위에 물기 어린 미광微光을 덮어 비현실적으로 빛나게 하라. 그리고 이 모든 것 외에, 너무 멀리 있어서 ‘눈 닿는 곳 끄트머리에 불쑥 솟아 있는 저것이 환상은 아닐까’의심이 가는 산맥의 모습을 그려 넣으라. 산맥은 굽이 굽이 흐리지 않는다. 가파르고 조밀하며 뽀족한 톱니 모양으로 들쑥날쑥 솟아 있다. 산맥은 우리와 산맥 사이에 있는 작은 능선이나 농가들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하다. 때로는 푸른빛, 때로는 보랏빛을 띠기도 하지만, 대개는 투명해 보인다. 마치 얇은 큰 천을 산 모양으로 베어서 걸쳐 놓아, 그 너머에 숨어 있는 바다의 빛이 베어 나오는 듯하다.
나는 아버지에게 차가 없었던 것을 내가 누린 축복의 하나로 생각한다. 그러나 친구들 대부분은 차가 있어서 가끔 나를 태워 드라이브를 시켜 주었다. 그 덕분에 이 멀리 있는 대상들을 ‘가 보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던 안타까움’이 아니라 ‘가 본 추억’으로 기억할 만큼은 찾아가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평상시에는 마치 달처럼 아득히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느껴지곤 했다. 마음만 내키면 어디든지 달려갈 수 있는 무시무시한 권능은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내부 연소 기관이 달린 물건이 아니라 두발 달린 인간을 표준 삼아 거리를 가늠하곤 했다. ‘거리’라는 단어의 개념을 훼손할 기회가 내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운전자들에게는 ‘작은 공간’밖에 되지 않을 곳에서 ‘무한한 부’를 소유할 수 있었다. 현대 운송수단에서 가장 무섭고 진정한 특징으로 거론되는 것은 ‘공간을 없애 버린다’는 점이다. 정말 그렇다. 운송수단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영광스러운 선물 하나를 없애 버린다. ‘거리’를 평가 절하하면 지독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결국 할아버지 세대는 10마일만 여행해도 해방감이나 순례자가 된 느낌이나 모험하는 느낌에 젖었던 것과 달리 요즘 아이는 100마일을 여행해도 같은 느낌을 받지 못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물론 공간이 싫어서 없애 버리려는 것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렇게 공간이 싫다면 지금 당장 관 속에 들어가 눕는 것이 어떨까? 거기에는 공간이라는 것이 거의 없으니 말이다.
이상의 것들이 내가 아서를 만나기 전 야외에서 누렸던 즐거움이었는데, 아서는 이 모든 즐거움을 공유했을 뿐 아니라 더 확고하게 해 주었다. ‘소박함’을 찾는 아서의 탐색 덕분에 나는 다른 사물들을 보는 법도 배우게 되었다. 아서가 아니었다면 냄비에 들어가는 평범한 푸성귀의 아름다움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몇이랑이면 그만이야”라고 아서는 말하곤 했다.
“양배추는 자라는 평범한 이랑만 볼 수 있으면 그만이지, 뭘 더 바라겠어?”
그가 옳았다. 그는 종종 지평선으로 쏠린 내 시선을 돌려 산을타리에 뚫린 작은 구멍이나 아침의 고요함에 젖어 있는 농가 뜨락, 헛간 문 아래로 기어 들어가려고 애쓰는 회색 고양이, 돼지우리에 먹이를 쏟은 후 빈 양동이를 들고 돌아서는 구부정한 할머니의 주름지고 자애로운 얼굴을 보게 해 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좋아했던 것은 소박한 것과 소박하지 않은 것이 날카롭게 병치되어 있는 풍경이었다. 이를테면 기름진 땅에 비좁게 늘어선 푸성귀들이 급격히 자기들의 영토를 확장시키고 있는 부엌 앞 작은 텃 밭 주변을 가시금작화와 노출된 바위가 둘러싸고 있을 때처럼, 또는 떠오르는 달빛 아래 왼쪽으로는 돌조각들이 널려 있는 채석장 웅덩이가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연기를 피워올리는 굴뚝과 잠자리를 준비하는 농가의 창문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보일 때처럼.
그 즈음 대륙에서는 1차 독일 전쟁의 마구잡이 살육이 자행되고 있었다. 상황이 그러했던 데다가 내가 군대 갈 연령이 되기 전에 전쟁이 끝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내 또래의 잉글랜드 청년들이 징집되어 갔듯이 나도 입대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일랜드에는 징집 제도가 없었다. 스스로 이런 결정을 했다는 것을 큰 자랑거리로 여기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하면 전쟁에 더 깊이 신경 쓰지 않았도 된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심장이 좋지 않았던 아서는 도저히 입대가 불가능했으므로 이런 문제로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전쟁을 어느 정도 마음 한쪽으로 밀어내 버릴 수 있었는데, 어떤 이들은 이것을 수치스러운 행동이라 할 것이고 어떤 이는 믿어지지 않는 행동이라고 할 것이다. 현실도피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현실과의 협약 내지는 경계 짓기였다고 말하고 싶다. 결과적으로 나는 조국을 향해 이렇게 말한 셈이었다.
“시간이 되면 갈 테니 그 전까지는 날 건드리지 말라. 필요하다면 네 전쟁터에서 죽겠지만 그 전까지는 내 인생을 살겠다. 내 몸을 앗아가도 정신은 앗아가지 못한다. 나는 전투에 참여하겠지만, 전투에 관련된 글을 읽지 않겠다.”
이런 태도에 대해 변명이 필요하다면, 현재 학교에서 행복하게 지내지 못하는 소년은 미래를 멀찌감치 미루어 놓고 생각하는 버릇을 익힐 수밖에 없다고 말하겠다. 다음 학기 걱정으로 지금 방학을 망친다면 소년은 절망에 빠지고 말 것이다. 또 내 속에 있던 해밀턴 가의 기질이 루이스 가의 기질을 늘 견제하고 있었다는 점도 언급할 수 있겠다. 나는 자신을 괴롭히는 기질이 어떤 것인지 익히 보아 온 터였다.
물론 이런 태도가 옳다 해도, 이런 태도를 너무 쉽게 채택하는 내 속의 특질이 다소 불쾌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소식을 읽거나 전쟁에 대해 인위적이고 형식적인 대화를 나누느라 시간과 정신을 소모하는 끔찍한 일을 피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거의 후회하지 않는다. 군에 대한 지식이나 전투에 대한 정확한 지리적 설명이 없는 신문 기사, 사단장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왜곡되고, 보고 과정에서 더 심하게 왜곡되며, 기자들의 묵인하에 ‘부풀려진’기사를 읽는 것, 내일이면 다시 뒤집힐 내용을 파악하려고 애쓰는 것, 부정확한 증거 앞에 벌벌 떨거나 지나친 희망을 품는 것은 확실히 정신을 잘못 사용하는 일이다. 평화시에도 학생들에게 신문을 읽도록 권장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아이가 십대 때 신문에서 읽는 내용은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대개는 과장되거나 잘못 해석된 것임이 드러난다. 그것들은 진짜 사실도 아닐 뿐 아니라 시간이 흐른 다음에 보면 대부분 중요하지도 않은 것들이다. 따라서 신문을 읽은 사람은 자신이 읽은 내용의 대부분을 내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속한 것과 선정주의를 즐기는 치료 불가능한 취향을 익히게 되며, 캘리포니아에서 어느 여배우가 이혼을 했네, 프랑스에서 기차가 탈선을 했네, 뉴질랜드에서 네 쌍둥이가 태어났네 하는 기사들을 하나하나 뒤적이는 치명적인 습관을 익히게 된다.
당시에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 학기가 시작될 무렵에 찾아오던 고통은 전부 사라졌다. 그런데도 학기를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즐거웠다. 방학은 점점 더 근사해졌다. 우리의 어른 친구들, 특히 마운트브라켄의 사촌들은 이제 덜 크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손윗사람들은 덜 자라거나 거꾸로 나이를 먹음으로 써 아랫사람들과 정신연령이 비슷해진다. 즐거운 만남과 멋진 대화의 시간이 이어졌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서 외에 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끔찍한 ‘사교 행사’, 즉 댄스 파티는 끝이 났다. 이제는 초대를 거절해도 된다는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결혼 관계로 연결된 사람들이나 아주 오래 알고 지낸 이웃들 내지는 옛 동창들(어쨌든 여자는 여자였다)의 작은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은 모두 즐거웠다. 그들을 거론하기는 쑥스럽다. 그러나 마운트브라켄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을 말하지 않고 내가 살아 온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상 더 말하기는 망설여진다. 자기 친구를 칭송하는 일은 좀 뻔뻔한 일이다. 여기서 제이니M이나 그 어머니, 혹은 빌이나 그 부인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겠다. 소설에서는 지방의 한적한 사교계가 주로 침침한 색으로 그려진다. 내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스트랜드타운과 벨몬트 사람들은 크든 작은 내가 알고 지낸 어떤 집단 못지않은 친절과 재기발랄함과 아름다움과 심미안을 가지고 있었다.
집에서는 아버지와 실질적으로 결별한 상태에서 겉으로만 다정하게 지내는 관계가 지속되었다. 커크 선생님에게 배우고 돌아올 때마다 사고력과 말솜씨가 조금씩 더 명료해졌기 때문에, 아버지와 실질적인 대화를 나누기가 점점 더 힘들어졌다. 나는 말의 또 다른 면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리고 미숙했던 탓에, 커크 선생님의 무미건조함과 다소 음산한 명로함에 버금가는 아버지의 풍부한(모호하긴 하지만)다변多辯과 넉넉함과 유머를 제대로 음미하지 못했다. 그 당시에는 청소년답게 아버지의 특징을 귀찮은 것으로 가차 없이 매도해 버렸지만, 그 후에 다른 어른들에게서 그런 특징을 발견했을 때에는 애교 있는 약점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사이에는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견해차가 아주 많았다. 한 번은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형의 편지를 받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그 즉시 당신도 그 편지를 보자고 하셨다. 아버지는 편지에 나온 어떤 사람에 대한 표현을 읽으면서 혀를 차셨다. 나는 형을 변호하기 위해 그 편지는 아버지를 대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고 항변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버지가 대답하셨다.
“네 형은 네가 나에게 편지를 보여 주리라는 걸 알았고, 또 보여 주기를 바랐어.”
사실 형은 내가 잘 아는 바대로, 아버지가 안 계실 때 편지가 도착할지도 모른다는 실날 같은 가능성에 어리석은 희망을 걸고 편지를 쓴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가능성은 상상도 하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당신이 허용하지 않은 사생활의 권리에 대한 요구를 권위로 깔아뭉개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그런 요구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아예 상상하지 못하셨다.
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내 평생에 가장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데(물론 변명하려는 것은 아니다)도움이 된다. 나는 전여 믿지 않으면서도 믿는 척 견진성사 준비를 하고 견진례를 받고 첫 영성체를 받아 자기 죄를 먹고 마셨다. 존슨 박사가 지적했듯이, 용기가 없다면 다른 덕목들 또한 우연이라면 모를까 존손할 수 없는 법이다. 비겁함은 위선으로, 위선은 신성모독으로 이어졌다. 그때 내가 스스로 하고 있는 짓의 진정한 본질을 몰랐을 뿐 아니라 알 수도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한껏 엄숙한 체하면서 거짓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진짜 생각을 말씀드린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아버지가 보수성을 띤 전통적인 부모들처럼 벼락을 칠 분이어서가 아니었다. 정반대로 아버지는 아주 다정하게(처음에는)대답하실 분이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어디 한번 다 털어놓고 얘기를 나눠 보자꾸나”라고 하실 것이다. 그러나 내가 처한 입장이 진짜 어떤 것인지 아버지가 고려하도록 만들기는 영 불가능할 것이다. 이야기의 실마리는 금세 실종되어 버리고 온갖 인용문과 일화와 회고담으로 가득 찬 대답이 쏟아질 텐데, 그 당시 나는 그런 것들을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흠정역 성경의 아름다움, 기독교 전통이나 정서나 특징의 아름다움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만약 아버지의 대답에 승복하지 않고 계속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명확히 하려 든다면, 우리 사이에는 분노가 일어날 것이고 결국 아버지에게서는 벼락 소리가, 내게서는 약하지만 짜증스러운 말대꾸가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번 불거진 주제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했듯이 하는 것보다는 이 모든 상황을 감당하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이 모든 상황을 감당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아람왕의 군대장관은 림몬의 신당에서 절을 했어도 용서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참 하나님을 림몬만큼도 믿지 않으면서도 성전에서 절하고 있었던 수많은 죄인들 중 한 사람이었다.
주말과 평일 저녁에 아버지 곁에 꼭 붙어 지내는 것은 고역이었다. 왜냐하면 그때야말로 아서가 가장 시간을 내기 수월한 때였기 때문이다. 평일에는 혼자 완벽한 고독 속에 지낼 수 있었다. 물론 팀과는 어울렸다. 팀에 대해서는 진작 이야기했어야 하는데 기회를 놓쳤다. 팀은 우리 집 개였다. 내가 올디의 학교에 다닐 때부터 우리와 함께 살았고 1922년에야 죽었으니, 아일랜드 산 테리어 종으로서는 장수 기록을 세운 셈이다.
그러나 팀과 어울렸다는 데에는 그리 큰 의미가 없었다. 내가 산책할 때에는 팀이 동행하지 않기로, 이미 오래 전에 합의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나는 팀이 걷고 싶어하는 거리보다 훨씬 더 먼 거리를 걸어다녔는데, 팀은 그때 이미 베개 내지는 드럼통 밑에 다리가 네 개 달린 형상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다른 개들이 다니는 곳으로 다녔다. 팀은 겁쟁이가 아니었지만(자기 홈그라운드에서 악착같이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다른 개들을 싫어 했다. 산책하다가 멀리 다른 개가 보이면 산울타리 뒤로 사라졌다가 100야드나 지난 다음에 다시 나타나곤 했다. 우리 형제가 학교에 다닐 때 팀의 성격이 형성된 만큼, 우리가 다른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이런 것을 배운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팀과 나는 주인과 개라기보다는 같은 호텔에 투숙한 다정한 두 여행객 같은 사이였다. 우리는 서로 만나 시간을 보내다가 정중하게 헤어져 각자 제 길을 가곤 했다. 내 기억에 팀에게는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친구는 이웃에 사는 붉은 사냥개로서 중년에 접어든 점잖은 개였다. 아마 그 개는 팀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나는 불쌍한 팀을 사랑했지만, 팀은 전혀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고 성취욕도 없었으며 가장 심란한 모습을 한 네 발 동물처럼 보였다. 정확히 말해서 팀은 한 번도 주인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그저 가끔씩 동의를 해 주었을 뿐이다.
빈 집에서 보내는 긴 시간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느라 즐겁게 지나갔다. 나는 한창 낭만주의에 빠져 있었다. 그 당시 내가 지니고 있었던 겸손한 마음(독자로서)을 그 후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다른 시들만큼 즐길 수 없는 시들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즐길 수 없는 시들이 열등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단지 시인에게 싫증이 났거나 내 기분이 좋지 않은가 보다 생각했을 뿐이다. 나는<엔디 미온Endymion>의 지루함을 순전히 내 탓으로 돌렸다. 키츠의 관능성을 이루는 ‘혼절Swoony'의 요소(포르피로가 ’정신을 잃어 갈‘때처럼)를 좋아해 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실패했다. 나는 셀 리가 키츠보다 틀림없이 낫다고 생각했고ㅡ그 이유는 잊어버렸지만ㅡ키츠를 더 좋아하지 못하는 것을 유감스러워했다.
그 시기에 내가 가장 위대하게 생각했던 작가는 월리엄 모리스였다. 나는 북유럽 신화에 관한 책에 인용되어 있는 이름을 보고 그를 처음 알았다. 그렇게 해서 <볼승 집안의 시거드Sigurd the Volsung>를 읽게 되었다. 나는 노력한 만큼 그 시를 좋아하게 되지는 못했는데, 이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그 운율이 내 귀에 그리 흡족치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아서의 서가에서 《세계의 끝에 있는 우물 The Well at the World's End》을 발견했다. 나는 그 책을 보았고ㅡ목차를 흝어보았다ㅡ. 그 책에 빠져들었으며, 바로 다음 날 내 책을 사기 위해 시내로 달려갔다.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을 때 흔히 그렇듯이 이 책도 부분적으로는 옛것을 되살리는 듯ㅡ아주 어린 시절에 읽었던 ‘갑옷 입은 기사’를 되살리는 듯ㅡ보였다. 그때부터 <이아손의 삶과 죽음The Life and Death of Jason>, <지상의 낙원 The Earthly Paradise>, 산문으로 된 기사 이야기 등 그의 작품을 닥치는 대로 읽어 나갔다. 이렇게 새로운 즐거움이 점점 커지면서, ‘월리엄 모리스’라는 글자가 ‘바그너’라는 글자가 발산하는 것과 같은 마력을 지니게 되었음을 문득 깨달았을 때, 거의 배신자가 된 듯한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아서는 책의 몸을 사랑하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 나는 늘 책을 아꼈다. 형과 나는 사다리는 거침없이 잘라 버리면서도, 책에 침 묻은 손자국을 내거나 가장자리를 너덜너덜하게 만드는 것은 부끄러운 일로 여겼다. 그러나 아서는 단순히 책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책 그 자체에 반해 있었다. 나도 금세 그렇게 되었다. 각 쪽의 구성, 종이의 촉감과 향기, 책장을 넘길 때마다 매번 다르게 나는 소리들은 감각적인 즐거움을 주었다.
이참에 커크 선생님의 흉을 하나 보아야겠다. 선생님은 종종 내가 새로 산 고전 텍스트를 가져가서 그 험한 손으로 걲고 책표지가 휠 때까지 구부려서 책장마다 선생님의 흔적을 남기곤 했다.
“그래, 생각난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노크 선생님의 한 가지 결점이었지.”
“아주 나쁜 결점이었어요.”
내가 말했다.
“거의 용서할 수 없는 결점이었지.”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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