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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끼
아프다, 새벽 세 시 반 쌀 씻고 밥을 한다
슬프다, 사는 것이 밥 먹는 일이라니
기쁘다, 잘 사는 것이 밥 잘 먹는 일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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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컥
감나무 새순들이 봄비에 꼼지락거렸다
기린을 보러 가자고 약속했던 아버지
결 고운 생전 모습이 혼잣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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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공양
죽비를 꺼내 들어 봄비를 매질하나
구름의 설법 듣고
산 아래 좌선하는
통도사
홍매화 몇 송이
소문보다 일찍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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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가창오리 떼 날아올라 하늘을 뒤덮을 때
그렇게 자유롭게 날아오르고 싶었다
내 안의 마른 풀들도 흰고래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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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관계증명서
팔자에 돈복 없고 넘쳐나는 일복 앞에 잘 먹고 잘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열 개의 프라이팬이 동시에 달궈지다
젊은 연애인의 사망 뉴스를 보면서 고장 난 브레이크 트럭 같은 삶이라도 먼 들판 살얼음 밟고 봄소식은 올 것이다
우연히 만나서 필연으로 만든 운명 무릎에 뉘어 놓고 귓밥도 파주면서 이불귀 바로 펴주며 잘 자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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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꽃
장대비 마당에서 읍소하듯 피고 있다
화병에 꽂을 수 없는 간절한 꽃의 생애
꽃잎에 꽃잎이 겹쳐
주검들이 떠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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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와 양귀비꽃
비 개인 주남지에 구름도 마실 간 날 달팽이가 목숨 걸고 지켜ㅕ가는 꿈 하나는 길 건너 양귀비 꽃밭에 흙집 한 채 짓는 일
붉은 요 층층이 깔고 옷고름 풀고 싶은 오매불망 마음 둔 곳 수풀 지나 절벽인가 철 철 철 피 흘린 달팽이 양귀비꽃도 얼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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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들빼기김치
산과 들 어디든지 함부로 꽃 피우고 재빨리 펼쳐든 늦가을 찬서리에 생전의 비릿한 풋내 한뎃잠을 설친다
허리에 복대 차고 억장이 무너지는 쓴맛을 우려내는 소금 같은 일주일 언젠가 꽃이 찾아왔던 고들고들 고들빼기
찹쌀풀에 갖은 양념 깊은 맛이 더해지면 잃었던 입맛에 쌉싸름한 향을 물고 밥도둑 제 발로 걸어와 발자국 찍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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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쌈밥
물때는 씨알 좋은 손맛으로 유혹하고 산 위에 사람들은 바다가 너무 궁금해 바다의 숨결에 설레고 낚싯대는 성급하다
등 높고 통통해서 이름값 하는 국민 생선 속살 한입 베어 물면 어둠 속에 빛나는 아득한 등 푸른 바다 고래가 살고 있다
사랑이 간절해서 첫 고백은 힘이 들고 피 되고 살이 되는 말을 찾아 살이 빠진 허기진 남자를 위해 밥상을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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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문동 이야기
태생이 닮은꼴이라 큰 죄라도 되는 듯이 춘란을 닮았다는 그럴듯한 오해 두고 그 무슨 변명을 할까 내 이름 찾고 싶다
성성한 서릿발에 귀 시린 한겨울도 언제나 겸손하게 푸른 잎을 지켜내고 오종종 자주 꽃대를 봄이 되면 밀어냈다
계절의 강을 지나 추위가 풀리면 노숙의 여독도 거친 숨을 고르고 선명한 뿌리의 지문 발걸음이 경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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