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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6.25전쟁 73주년되는 날입니다. 나라를 위해 순국하신 분들의 희생을 기억하며, 다시는 이 땅에 이러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코리아 연방통일이 아닌 평화통일의 그날이 속히 오기를 간절히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월마트는, 현재 직원만 230만명이고, 전 세계 모든 기업 가운데, 매출 1위에 있습니다. 기업의 가치는, 465조 7천억입니다. 이러한 기업이 부실한 기업이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이 기업은, 매우 부실해서 직원 월급까지도 몇 달이나 밀렸던 기업입니다. 이러한 기업에게, 구원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제시하는 계약서에 싸인만 하면, 1,000억을 투자하겠다는 겁니다. 매우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계약서를 작성하는 날이, 수요일 저녁이었습니다. 이 기업의 사장은 “샘 월튼”이었고, 철저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는, 기업의 어려움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일예배 시간에 목사님의 설교를 듣던 중, “예배하라”는 말씀이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투자하겠다는 기업이, 수요일 저녁에 계약서를 작성하자고 제의를 했던 겁니다. 이 계약서에 싸인만 하면, 그의 기업은 되살아 날 수 있고, 직원들에게 밀린 월급도 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요일의 그 시간은, 수요예배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샘은 투자자의 제의를 거절하고, 수요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이러한 그를 보고 주변에서는, “바보다, 어리석다, 광적인 신앙이다”라며, 손가락질을 했고, 직원들의 원성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이상하게도 회사가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거액의 투자자는 떠났지만, 하나님께서 샘의 손을 잡아주신 겁니다. 진짜 바보는 “샘 월튼”이 아니었습니다. “파우스트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작가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독일의 문학가이자 철학자로, 세계 문학사의 거인이며, 널리 인정받는 독일 르네상스의 거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당대의 사람들은, 이러한 괴테를 가리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나를 행운아라며, 불행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내 자신은 ‘나는 행복하다’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의 진정한 행복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겁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둔 상황입니다. 이스라엘은 수많은 블레셋 군대를 보고, 두려워하는 가운데, 날이 갈수록 탈영병이 급속도로 늘어났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사울과 약속한 사무엘은 정한 기한이 지나도록 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어쩔 수 없이, 왕의 권한으로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고, 블레셋과 전투를 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울이 왕의 권한을 앞세워, 제사장의 권한을 침해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사에 대해 말씀하시길, 레위 지파 출신의 제사장들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는 제사장 고유의 권한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사울이 왕의 권한으로 제사를 드린 것은, 엄격한 월권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울이 월권하여 스스로 제사를 드렸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태도가 변했다는 겁니다. 그는 왕으로 즉위할 때의 겸손한 자세와 신본주의적 신앙을 버리고, 자신의 왕권으로 무엇이든 이루고자 하는 인본주의적 태도를 가졌던 겁니다. 결국, 사울은, 이러한 인본주의적 태도로 인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대신하여, 신본주의적 왕정을 수행할 다윗을 예비하셨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사울이 상황 윤리에 입각하여 절대적인 원칙을 버리고, 각각의 개별적인 상황 하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인본주의적 태도를 취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울의 “부득이한 신앙”을 살피는 가운데, 우리 안에 만연해 있는 인본주의적 상황윤리에 따른, 사울적인 불신앙을 떨쳐내고, 다윗과 같이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8 - 9절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믿는 신앙은, 인내합니다.
본문은 사울이 사무엘을 대신하여 제사를 드린 1차적인 이유를, 출전에 앞서 제사를 집전해야 할 사무엘이 정한 기일이 지나도록 길갈에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기다렸으나”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와이이헬”로, 그 의미는 “기다리다, 소망하다”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이 사무엘을 단순히 기다린 것이 아니라, 전쟁의 승리를 위해 사무엘이 하루속히 오기를 간절히 소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정한 기일 내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극히 초조하고 불안해진 사울은 자신이 직접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번제를 마치자마자, 사무엘이 왔습니다. 마치, 사울이 직접 제사를 드리기를 기다렸다가 온 것과 같았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사울이 그렇게 조바심을 내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조금만 더 기다렸더라면, 그러한 불순종의 사람, 망령된 사람으로 낙인찍히지 않았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입니다. 기왕에 기다렸으니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고, 그의 제사를 하나님이 기뻐하셨을 겁니다. 이를 보면, “신앙은 기다림의 인내”가 중요합니다. 번제와 화목제는 사울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사무엘이 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제사장만이 제사를 드리도록 규정되어 있는 제사 제도를 모독하고, 왕인 자신이 스스로 제사를 드린 사울의 행위는, 단순히 하나님의 계율 하나를 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자세가 잘못되었던 겁니다. 이는, 죄에 죄를 더하는 것이었고, 제사 제도 자체를 모독한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망령된 태도를 가감없이 보여준 것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울의 인본주의적인 태도는, 본장 뒤의 15장에서 또다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스스로의 판단 하에, 아말렉의 왕 아각을 살리고 우양을 남기는 죄를 범하는 데서, 그 절정이 드러납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믿고 그 날이 저물 때까지, 온전히 사무엘을 기다렸어야 했습니다. 이를 보며, 성도된 우리도 부득하여도 기다려야 하며, 부득하여도 해서는 안 될 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은 번제의 형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기에,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지 않으면서, 제사만은 꼭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그가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면, 그처럼 하나님의 사람인 사무엘의 말을 어기고, 임의로 제사를 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만 반드시 행해져야 할 형식으로 생각했기에, 사무엘의 도착이 늦어지자 자신이 임의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제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가인의 제사와도 같았던 겁니다. 사울의 제사는,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행위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이러한 사울의 모습을 통해, 부득한 상황에서, 인본주의적이며, 형식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바라봄으로, 하나님의 경륜을 믿고, 믿음으로 인내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2 - 13절을 보시면,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이라고 합니다. 부득함으로 인한 잘못된 예배보다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본문 12절을 보시면, 사울의 변명은 간단명료합니다. “부득이하여” 입니다. “부득이하다”는 것은 “자기편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 회피할 수 없는 상황”을 말합니다. 이러한 본문 12절을, 히브리어 원어적 의미를 살려 직역하면, “그리고 내가 여호와의 면전에 간청하지 못했다”입니다. 이는, 사울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은혜를 구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간청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위기 속에 있었던 사울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채 무조건 제사만 드리면 된다는 인본주의적인 생각에 근거를 둔 행위였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을 향한 사울의 신앙은, 이방인들이 행하는 무속적인 신앙의식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본문에서, 자신이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번제를 드린 행동에 대해, 자신의 생각과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상황으로 인해 부득이하게 저질러진 것이라고 변명합니다. 이것은, 사울의 내면에 있었던 극도의 불안감을 보여주는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믿음보다는, 인간적인 계산에 근거한 불신앙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었고, 오직, 현실적 상황에 너무 몰입했기에,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없었던 겁니다. 우리가 바둑이나 장기를 두다 보면 위기에 몰릴 때가 있습니다. 도무지 위기를 극복할 묘책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훈수하는 사람이 보면 참 좋은 묘책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사자는 당면한 위기에 집착한 나머지 그 묘책을 보지 못하는 반면, 훈수하는 사람은 당면한 문제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넓은 관점에서 대국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당면한 문제에만 집착하면,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의 묘책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현실적 상황에만 집착하면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상황이 아무리 급박하고 인간적으로 볼 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법에서 벗어나 행동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서도 하나님의 정죄를 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상황 윤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상황 윤리”란, 1966년 “조셉 플레쳐”라는 사람이 쓴 책의 제목이 대중화된 표현으로, 우리가 앞에서 말한 부득이한 상황을 정상 참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개인이나 교회, 그리고 어떤 공동체가 윤리적인 선택을 할 때, 그에 따른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들은 특히,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보편타당성과 불변성에 의문을 던지며, 그 상황에서 가장 큰 계명을 쫓아 사랑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계명을 범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 윤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독교에서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사울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였습니다. 이처럼 성도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게 되면 반드시 올무에 걸리게 됩니다. 마 10: 28을 보시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두려워해야지, 오히려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한다면, 당장에는 편할지 몰라도, 결국에는, 사울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득한 현실적 상황을 넘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4 - 15절을 보시면,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사무엘이 일어나 길갈에서 떠나 베냐민 기브아로 올라가니라 사울이 자기와 함께 한 백성의 수를 세어 보니 육백 명 가량이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14절은, “지금은”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통해 이스라엘을 건국하려 했지만, 사울의 월권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이 바꾸었음을 보여줍니다. 본문에서 사무엘은 사울을 만나자,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며 크게 책망합니다. 사울이 사무엘 대신 제사를 드린 것이 죄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이, 전쟁을 잘 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겁니다. 사울은, 자신의 왕권을 전쟁과 연결시켜, 자신이 전쟁에서 승리함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가져야, 계속적으로 왕권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블레셋의 위협 때문에, 하나님을 잊어버렸던 겁니다. 그가 왕으로 지내는 지난 3년동안,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이, 어느새 관심 밖의 일이 되었습니다. 그랬기에, 전쟁에서 패할 것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하는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행동을 취했습니다. 이러한 실수가 오늘의 우리에게도 일어납니다. 성도인 우리는 분명,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고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장 보이는 것에 급급할 때가 많습니다. 현실의 다급함은, 언제나 우리를 그럴듯한 명분으로 유혹합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생활의 염려와 다급한 위기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릴만한 타당한 명분을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성도가 되도록 언제나 믿음 안에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또한, 본문 14절에서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고 합니다. 사무엘의 이 말은,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선택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 선택의 기준에는, 사람의 혈통이나 출신, 외모, 직책, 이런 것이 변수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그가 곧,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과연,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외모로나 학벌로나 문벌로나 어떤 면으로든,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다고 한탄하거나 좌절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마음에 들도록 더욱더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안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기에, 사울처럼 인본주의적인 삶과 신앙 속에서, “부득이하여”라며 취해서는 안 될 행위를 취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사울이 아니라, 부득이한 가운데서도 한결같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다윗과 같은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