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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독재자 -6- <e-book 출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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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그렇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자유분방했고 권리 주장이 강했으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여자였다는 것을 일깨워준 사람은 이해성이었다.
과거를 깡그리 망각한 채, 마치 온실 속으로 잘못 기어들어간 애벌레처럼 그 온실이 세계의 전부라 믿고, 애벌레→ 번데기→ 성충→ 알→ 부화→의 과정을 몇번씩 되풀이 밟으며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이해성을 만난 것은 어쩌면 불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이해성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 온실 속에서 구속과 속박이 주는 따뜻함 속에서, 알→ 부화→ 애벌레→ 번데기→ 성충→의 과정을 되풀이 밟으며 언제까지고 편안하게 살아갔을 테니까.
혜성을 내가 태권과 결혼을 하기 전 같은 동네에 살았던 친구였다. 실제로는 나보다 이 년 연하였지만 우리는 같은 학교 같은 학년에 함께 다니기도 했었다. 대학도 함께 다녔었다. 내가 중도에서 그만두고 태권과 결혼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따라서 그가 나보다 나이가 두 살이나 적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의 위로 딸만 내리 다섯을 두다가 다 늙어서야 그를 얻게 된 그의 부모는 그에 대한 교육 만큼은 극성스러워 그의 바로 위 누나인 해순이를 입학시키면서 아예 그도 같이 입학을 시켜버린 것이었다. 아마는 늙은 부모의 어린 아들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을 것이다. 늙은 부모는 어린 아들이 조금이라도 더 빨리 크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의 누나인 해순이와도 친구였고 그와도 친구였다. 그런데도 나는 그의 나이가 적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못했다. 학년이 같다는 것 때문인지 그는 해순이한테 누나라 부르지도 않았고, 혹간 그런 말이 들려도 그저 그런가 보다 지나쳤을 뿐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내가 그들과 그리 가깝게 지내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중학교 삼학년 때이던가, 해순이가 평소 잘 어울리는 친구들과 해수욕을 갔다가 익사를 하는 바람에 그와 나는 해순이 없이 친구로 남을 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특별히 어울리거나 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익사를 하기 전의 해순이와도 그랬듯이 해성이 역시도 친구라기 보다는 그저 한 동네에 살면서 아는 사람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대학 때도 마찬가지였다. 공교롭게도 같은 대학에 다니고 있었지만 그를 볼 기회는 매우 드물었다. 학교에서 보다도 동네에서 마주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렇게 마주치면 모르는 척 하기도 뭣해서 어디 가니?, 요즘 잘돼?, 잘 가, 하면 그만인, 그저 서로 얼굴을 알고 지내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몇번인가 친구와 친구끼리 만나다 보니까 찻집이나 호프집에서 어울리기도 했고, 한번은 데모대열에서 스크럼을 짜고 가두시위를 벌이다가 닭장차에 함께 실려간 적도 있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이렇다 하게 특별한 것은 없었다. 더군다나 내가 태권과 결혼을 하면서 학교를 그만둔 뒤로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런 해성을 육 칠 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실로 우연이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서 세 정거장쯤 떨어진 곳에 은행이 있었는데, 그 은행에 갔다 나오다가 그와 마주친 것이었다. 그 정도 거리라면 버스를 타기도 뭣했고 택시를 타기도 그래서 바쁜 일이 아닌 이상 지름길로 걸어 다니곤 했었다.
그날도 땡볕에 양산 받쳐 들고 지름길로 걸어가 일을 보고 나왔다. 그리고 접었던 양산을 마악 펼쳐 드는 참인데 앞에서 다가오는 사내가 걸음을 멈추더니 내 어깨를 툭 치는 것이었다. 놀라서 고개를 드니 육 칠 년 전의 이해성이 덕 버티고 서 있었다.
“저쪽에서부터 유승현 너인 줄 알았어. 이게 얼마 만이야?”
해성은 땡볕 속에서 반팔 와이셔츠 차림으로 환히 웃었다.
나는 펼쳐 든 양산을 그에게 씌워주며 물었다.
“내 이름을 기억해?”
그가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그럼. 내가 유승현이라는 너의 이름을 기억 못할까. 그런데 너는 내 이름을 기억하냐?”
나는 더듬거렸다. 솔직히 그때 나는 그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입에서 뱅뱅거리기만 할 뿐 쉽게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이, 해, 성”이라고 스타카토로 끊어 발음해 줌으로써 가물거리는 내 기억의 끄나불을 끄집어내 주었다.
해성은 직장이 근처라며 맞은편 빌딩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에 S 전자 회사 K 지점 간판이 걸려 있었다.
점심 시간을 이용해 잠깐 나온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은행으로 들어가는 건물 입구의 자판기에서 음료수캔을 뽑아주며 다시 한번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그의 고른 이빨이 양산 그늘 속에서도 유난히 하얗게 빛났다. 그의 치열이 그처럼 고르고 하얗다는 것을 나는 그 날에서야 처음 알았다.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기에 알아봤더니 결혼을 했다더군. 그렇게 일찍 결혼할 줄이야……”
그러면서 해성은 잠깐 쓴 웃음을 지어보였다. 나는 해성의 그 쓴 웃음을 미소로 넘겨버리고 말았다. 그저 스쳐지나간 버스에 대한 아쉬움 같은 것이겠지 했을 뿐이었다.
내가 결혼을 했냐고 묻자 그는 연로하신 부모님 때문에 결혼할 뻔했던 적이 있었지만 아직 혼자라고 했다. ‘결혼할 뻔’ 했던 일이 어긋나고서 미적미적 미루게 되었고, 또한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결혼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을 뿐더러 서둘고 싶지 않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결혼을 해야 될 것 같다고도 했다. 그렇더라도 그의 나이로써는 크게 늦은 건 아니었다.
우리는 빈 음료수 캔을 버리고 헤어졌다. 그리고 그 날 이후부터 종종 만나게 되었다. 해성은 비교적 자주 내 집에 전화를 걸어오고는 했다. 나 역시도 은행에 가거나 그 근처에 볼 일이 있을 때면 그에게 전화를 걸어 밖에서 잠깐씩 만나곤 했다. 길거리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마시며 이야기를 해도 좋고 다방에 들어가 커피 한 잔 마셔도 좋았다. 어느 때는 그가 점심시간을 이용해 내 집에 찾아와 차를 한 잔씩 마시고 돌아가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것이 태권의 구속이나 속박을 벗어나는 행위는 아니었다. 실제적으로는 그러할 것이 분명했지만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해성은 그저 친구일 뿐이었고, 태권에게의 분명한 내 행적에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을 몇 십 분이라는 시간단위로 끼어드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런데 해성은 육칠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 길거리에서 나를 정확히 알아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내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을까. 특별한 관계도 아니었던 사이에 육칠 년의 시간이라면 바로 옆을 지나쳐도 몰라보게 마련일 것이다. 그리고 확실하지 않은 이상 어깨를 치는 등의 행동을 취할 수 없는 것이고 보면 그는 분명히 나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내가 그렇게 일찍 결혼할 줄 몰랐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잠깐 쓴 웃음을 지어보였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아냐?”
어느날 혜성이 말했다.
나는 농담했다.
“누나한테 까불고 있어.”
“농담 아냐. 이해성이가 농담이나 할 사람으로 보여? 나, 어렸을 때부터 승현이 너를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몰라. 그런데 참 이상하지. 웬지 네 앞에는 나설 수가 없었어. 어떻게든 가까이 지냈으면 좋겠는데 그럴 기회도 없었고. 대학 때도 그랬어. 다른 여자애들과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고 집적대기도 했는데 네 앞에서만은 영 아니더라구. 아마 내가 너무 소심하고 용기 없었던 때문이겠지. 몇번인가 호프집에서 어울리게 되었을 때 일부러 네 옆에 앉았는데도 너는 전혀 딴청이고…… 마음을 고쳐먹었지. 용기를 내자고, 정식으로 데이트를 신청하자고 말야. 그런데 정작 마음을 다잡아먹자 네가 보이지 않다라구. 시집을 갔다구…… 그 때의 내 절망감이 어떠했는 줄 알아? 아무튼 갑돌이 갑순이 시대도 아니고 요즈음 세상에 내가 왜 그렇게 멍청했었는지 모르겠어. 너는 모르고 있었겠지만 나는 너에 대해서 훤히 꿰고 있었다구. 네 행동, 버릇, 성격, 잘 쓰는 말, 자주 어울리는 친구, 좋아하는 군것질, 가지고 다니는 책, 옷 입는 것, 헤어 스타일이 몇 달 만에 바뀐다는 것…… 그 모든 것들이 아직까지도 내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어. 그런데 네가 결혼하는 것을 왜 몰랐는지 모르겠어. 하나님이 도우신 거겠지. 만약 그 때 알았으면 일이 나도 크게 났을 것이니 말야. 허허허.”
그는 일부러 크게 소리내어 웃더니 다시 자신의 말을 쓸어덮듯 말했다.
“하고 보면 나는 천재였는지도 몰라. 왜 그런 말이 있잖아. 천재일 수록 소심하고 모든 일에 소극적이라고 말야. 아직도 천재로써의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전혀 없지만. 허허허.”
“자신의 말을 쓸어덮는 데는 천제인데 뭘. 어떻든 이제 봤더니 순전히 내 뒷조사만 하고 다녔구나.”
나는 다시 또 농담했다.
그러나 해성의 얼굴 표정은 뭔지 모르게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거지. 실은 한동안 그 기억들 때문에 여간 힘들지 않았어. 당최 사라져야 말이지……”
나는 그의 어지러운 표정에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해성은 여전히 어리저운 표정인 채 다시 말을 이었다.
“…… 그런데 그동안 너무 많이 변했다. 내가 알고 있는 유승현은 이렇지가 않았었는데…… 이게 아닌데……”
“나이 먹으니까 그렇지 뭐. 벌써 애가 몇 살인데.”
나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다. 하지만 웬지 가슴 한 구석이 퀭하니 뚫리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해성의 어지러운 표정이 나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변했다는 것 때문인지를 나는 미처 가늠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둘 다일 것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해성은 말끝을 흐렸다. 그렇지만 해성의 눈치는 빠르고도 정확했다.
빠르고도 정확한 해성의 눈길에 나는 하나 하나 벗겨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가면과 위선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 깨달아졌고, 진정한 내 모습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도 입술 깨물며 아프도록 자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해성의 예리한 눈은 나의 모든 것을 빠르게 읽어냈다. 그의 눈은 저인망 그믈이었다. 그 그물망에 나의 모든 것들은 하나하나 걸려들었고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못했다. 내가 타인에 의해 조종되는 인형처럼 살고 있다는 것도, 외부로부터의 침입도 안되고 내부로부터의 탈출도 안되는 온실 속에 갇혀 있다는 것도, 더군다나 침입이나 탈출이 있다는 사실 조차도 망각한 채 패쇄되어 있다는 것도, 더 심하게는 내 두개골 속에 나의 대뇌는 빠져나가고 타인의 대뇌가 들어앉은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내 남편 강태권이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도 해성의 예리한 눈은 쉽게 읽어냈다.
나는 해성의 예리한 눈이 두려웠다. 그것으로부터 피해야 된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몸을 움츠렸을 때는 이미 모든 것들이 읽혀진 뒤였다. 그리하여 나는 그의 앞에 발가벗겨져서 떨어야 했다.
아니, 이왕에 발가벗겨진 모습이라면 내가 떨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걸치고 있는 그 어떤 실오라기 조차도 벗어던지고 낱낱이 보여주며 떨림의 강도를 더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는 나뭇꾼처럼 내 날개옷을 감춰 갖고 있는지는 모르니까.
내가 떨고 있다는 것, 차라리 실오라기마저 벗어던지고 낱낱이 보여주고 싶다는 것―, 그것은 균열의 시작이고 반란의 조짐이었다. 잃어버린 내 날개옷을 찾기 위한.
어느날이었다. 공과금을 내기 위해 은행에 갔다가 사람들이 너무 많아 기다리기가 지루해서 해성에게 전화를 했더니 아직 점심 전이라며 같이 하자고 했다. 그리고 은행으로 찾아와 내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나오며 물었다.
“어디로 갈까? 양식? 아니면 한식?”
“아무거나 상관 없어.”
어차피 내가 사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나는 그렇게 말했다. 나에게는 여분의 돈이 없었다. 아침에 공과금을 내겠다고 태권으로부터 돈을 타냈고, 공과금을 내고 나니 몇 천원 밖엔 남지 않았다.
“한식이 낫겠다. 양식은 당최 먹는 재미가 없잖아”
그러더니 해성은 한식집으로 들어갔다. 때가 좀 비껴서인지 한식집은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다. 그는 급히 처리해 넘길 일이 있어서 아직 점심을 못했고 나는 생각이 없어 미루고 있던 터였다.
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자 그가 벽을 붙어 있는 메뉴판을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뭘로 할까? 여러 가지가 있네. 굴비백반도 있고 두부찌게도 있고……”
“알아서 해.”
“그래도 좋아하는 게 있을 거 아냐?”
“상관 없어. 아무거나 잘 먹으니까.”
해성이 잠깐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굴비 백반에 몇가지를 더 추가시켜 주문하며 종업원에게 이것저것 묻기도 했다. 굴비 백반이면 떠 먹을 수 있는 된장 국도 나옵니까?, 하는 따위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해성이 앞 뒤 없이 물었다.
“왜 그렇게 살아?”
나는 얼핏 그의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왜? 내가 뻑벅해 보여서?”
“뻑뻑한 것도 뻑뻑한 것이지만 도대체가 자기 주장이 없잖아. 어느 것도 명확한 게 없이 그저 남 하는대로 따르기만 하고, 음식을 먹는 것도 그래. 둘이서만 같이 들어왔다고 해도 하나가 뭐를 먹든 나는 굴비백반이면 굴비백반, 된장찌게면 된장찌게를 먹을 수 있는 일이라구. 설혹 음식점 측에서 굴비백반은 늦게 나온다며 다른 걸 먹기를 종용해도 내가 먹고자 하면 끝까지 우기고 얼마를 기다려서라도 먹을 수 있는 거야.”
나는 시선을 내리 깔며 쓸쓸히 웃음을 흘렸다.
“나, 그렇게 살아. 나도 모르게 그렇게 돼버렸어. 너무 많이 변했지?”
“이건 변한 게 아니야. 뭔가 잘못된 거라고. 내가 승현이를 잘못 보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런 것은 아니었어.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언젠가 호프집에서 승현이 네가 무척이나 취했던 적이 있었어. 그 때 나는 네가 걱정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잘되었구나 했었지. 핑계 삼아 데이트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니까. 그래서 내가 집을 알고 있으니 바래다 주겠다고 나서자 네가 어떻게 했는 줄 알아? 막무가내로 싫다는 거였어. 죽어도 혼자서 가겠다는 거였지. 부축을 한다는 핑계로 팔장을 끼자 야멸차게 뿌리치고 나중에는 내 따귀까지 올려부쳤어. 그리고는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했지. 그래서 나는 멀리서 뒤따르며 네가 무사히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돌아왔었지.”
“내가 그랬었나…?”
“그 뒤 사과를 할 줄 알았는데 사과도 하지 않고, 전혀 기억을 못하는 것 같더라구. 그래서 그냥 말았지만 오히려 그것은 내게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되었어. 강한 인상을 남겼다고나 할까…… 그런데 지금은 그게 아니잖아. 다시 말하지만 이건 변한 게 아니라 무엇인가 잘못된 거라구.”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잠시 시간을 끌다가 입을 열었다.
“……생각 나? 데모를 하다가 붙잡혀서 경찰서 보호실에서 지냈던 일 말야. 그 때 우리는 우연히 같은 닭장차에 실려 있었지. 네가 학교를 그만두고 결혼하던 그 해 봄이었던가……”
방문이 열리고 주문했던 음식이 들어오면서 해성의 이야기는 중단되었다.
나는 종업원이 가져다 옮겨놓는 음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옛날의 일로 빠져들어갔다.
변한 게 아니라 뭔가 잘못 되었다는 해성의 말. 그리고 데모를 하다가 붙잡혀서 집짝 부려지듯 실렸던 닭장차와 경찰서 보호실……
잃어버린 내 모습은 거기 있었다.
우리는 팔차선 대로를 점거하고 독재타도를 외쳤다. 열을 지어 어깨동무를 하고 뒷사람의 무릎을 베고서 누워 군사정권 물러가라고 외치고 또 외쳐댔다. 앞에서는 농악대가 북과 꽹과리 등을 들고 나와 찢어지고 깨어지도록 두들겨 댔다.
그 날 나는 농악대에 참가하지 않고 다른 학생들의 대열 속에 끼어 있었다. 웬만한 시위에는 농악대가 완전히 갖춰져 앞장을 섰지만 격한 시위 때는 그렇지가 않았다. 북, 꽹과리, 징 등 심장 박동을 강하게 자극하고 두들겨댈 수 있는 것이면 되었다. 다른 것들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웠다. 둥둥 울려대는 북소리는 그대로 심장을 두드려 피를 끓게 할 것이었다.
우리는 피가 끓는 것을 느끼며 북소리에 맞춰 독재타도를 외치고 군사정권과 그 도당들을 처단해야 된다고 외쳐댔다. 이 땅에서 독재는 마땅히 타도해야 했고 타도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 땅에서 군사정권은 몰아내야 할 대상이었고, 있을 수도 없는 것이며,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기득권을 잃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여 적당히 다리를 걸치고 있는 사람들, 묵인과 용납은 못할지라도 밥줄이 매달려 있어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 결국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우리 밖에 없었다. 우리는 잃을 기득권도 없고 밥줄에 얽매이지도 않았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끓는 피는 불의를 용납할 수 없었으니까.
둥둥, 북소리 울리고, 시위대는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일어나 앞으로 밀려가기 시작했다. 전경들과의 팽팽하던 대치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최루탄이 터지고 전경들이 마구 덮치기 시작했다. 아니, 팽팽하던 대치를 먼저 무너뜨린 것은 오히려 진압대 쪽이었는지도 모른다. 한동안 잠잠하던 진압대 쪽이 물러서는가 싶더니 최루탄이 터지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시위대의 북소리가 마구 울리기 시작했으니까.
시위대는 순식간에 대열을 흐뜨리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뒤로 밀리며 뛰고, 지하도로 뛰어들고, 골목으로 뛰어들고, 아무 건물로나 뛰어들었다. 정신이 없었다. 진압대는 진압봉을 휘두르며 쫓아오고, 숨이 막히고, 눈을 뜰 수가 없고, 내장이 쏟아질 듯 기침이 쏟아졌다.
정신 없이 무작정 뛰어들었는데 어느 골목이었다. 나 말고도 여러 명의 학생들이 공처럼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기침이 끝없이 터지고 눈물 콧물이 마구 쏟아졌다. 어떻게도 할 수가 없었다. 팔딱팔딱 뛸 수도 없었고 데굴데굴 구를 수도 없었다. 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조차도 미처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내 머리채를 확 잡아채는 것과 함께 좁은 골목의 여기저기서 툭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명과 아우성과 욕찌거리와 전경들의 군화발 소리가 골목을 휘저었다. 그리고 우리는 덜미 잡힌 짐승처럼 끌려가 닭장차에 실렸다.
닭장차에는 이미 여러 명의 학생들이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엎드려 있었다. 우리는 고개를 처박은 채 군화발에 채이며 설설 기었다. 기침이 쏟아지는 등 정신이 없었지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고개를 조금만 들어올린다 치면 진압봉이 사정없이 날아오고 군화발에 짓뭉개졌다.
우리는 이렇게 실려와 경찰서 보호실 철창 속에 짐짝처럼 부려졌다. 실려오는 도중, 그 경황 속에서도 누군가가 ‘꼬꼬댁’ 하고 닭의 울음소리를 내서 우리들을 웃겼다. 하지만 채 웃음이 끝나기도 전에 진압봉이 날아가 그 친구의 어깨를 가격했고, 우리는 더욱 머리를 처박아야 했다. 한참 그렇게 머리를 처박고서 최루가스 때문에 눈물을 철철 흘리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 아는 체를 했다. 이해성이었다. 우리는 눈물을 철철 흘리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보호실 철창에 짐짝처럼 부려질 때도 함께였다.
그렇게 부려진 다음 길고 지루한 시간이 지나갔다. 대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답답한 시간이 고무줄처럼 길게 늘어지고, 뱀이나 지렁이 같은 징그러운 동물처럼 우리의 몸을 척척 감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니, 꽉꽉 들어차서 움직일래야 움직일 수 없고, 그리하여 서로 찌눌리는 몸뚱어리들이 서로에게 뱀이고 저렁이이고 회충이었다. 퀴퀴한 땀냄새, 발냄새, 입구린내…
해성은 그렇게 쪄눌린 몇 사람 건너에 있었다. 하지만 그가 거기 있다는 것 뿐 특별한 느낌이나 별다른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그와 한 철창에 부려졌다고 해서 부끄러울 것도 없었고 자랑스러울 것은 더더욱이나 없었다. 특별히 그를 의식하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로써는 그저 그가 거기 함께 갇혀 있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고, 몇몇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한 동네에서 살았기 때문에 서로가 빤히 알고 있다는 것이 그중 다르기는 했어도, 어쩌면 가까이 지내면서 함께 거기 들어와 있는 몇몇 친구들 보다도 더 멀리 있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나중에는 그와 함께 거기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거의 기억에 없었고, 그 철창 안에서의 그에 대한 유다른 기억 역시 없었다. 지금에서야 해성이 그 이야기를 꺼내니까, ‘아, 그 때 거기 함께 있었지’ 하는 생각이고, 기억으로 치자면 내 자신에 대한 기억 밖에 다른 것은 별로 떠오르는 게 없었다.
어쨌든 그 날의 그 길고 지루한 시간 끝에 우리는 하나하나 불려나가 조사를 받고 돌아왔다. 조사래야 특별한 것은 없었다. 재학 중인 학교 이름 등 신분을 확인함으로써 단순 가담자와 주동자 혹은 악질분자(?) 따위를 가려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조사를 받고서 우리는 다시 다른 보호실에 갇혔다. 조사를 받고 나면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어 각기 다른 철창으로 들어갔던 것인데, 바로 옆인데다가 역시 쇠창살로 칸막이가 쳐져 있어서 서로를 훤히 볼 수가 있었고 얼마든지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아마도 해성이가 그 날의 나에 대한 행동을 훤히 알고 있는 것은 옆방에서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말했다시피 그가 옆방에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해성은 어떠했는지 몰라도 나는 그와 상관이 없었으니까.
또 다시 길고 지루한 시간이 흘렀다. 지루한 시간을 견디지 못해 더러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자신의 외투를 벗어 뒤집어 쓰고 새우잠을 자기도 했고 더러는 무릎을 세워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들의 냄새를 맡고 있는 행위인지도 몰랐다. 마땅히 사라져야 할 군사정권. 그 군부독재의 타도를 외치다가 머리채 잡혀온 지금 자신들에게서는 무슨 냄새가 나는 것일까. 북소리와 열정은 사라지고 무력감만 남아 있는 지금 자신들은 어떤 냄새를 풍기고 있는 것일까.
철창이 열리고 이름이 호명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면 툭툭 털고 일어나 철창을 빠져나갔다. 단순 가담자로 분류돼 훈방조처되는 것이었다. 어떤 여학생은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 나갔고, 어떤 여학생은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이기라도 한 양 고개를 떨구고 나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남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미적거리다가도 막상 철창을 나서면 걸음을 빨리하는 여학생도 있었다. 그게 우리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자신들의 냄새일 것이었다.
내 이름이 불려진 것은 중간쯤이었다. 내 이름이 불려졌을 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내 이름이 불려졌고, 나는 다시 대답하지 않았다. 골목에서 함께 붙잡혔던 내 친구가 옆구리를 꾹 찔렀다.
“유승현! 유승현 없나?”
“없습니다.”
내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대답이 아니라 그냥 소리질렀다.
제복차림의 사내가 빽 소리쳤다.
“누구야?”
“유승현입니다.”
누군가가 말했다.
모두가 내 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해! …유승현 일어나!”
나는 마지못해 일어섰다.
“유승현, 맞나?”
“네.”
“왜 대답을 안했지? 나가기 싫은가?”
“나가지 않겠습니다.”
“뭐야?”
“나가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살겠다 그건가?”
“어쨌든 나가지 않겠습니다”
“허, 이 계집애 독종이군. 이봐, 괜히 귀찮게 굴지 말고 나오랄 때 나오라구. 너희년들 때문에 우리가 잠 못자고 이짓이라는 거 몰라? 나와!”
나는 꿈쩍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를 밀어내고 있었지만 그 손마저도 뿌리쳤다.
여기저기서 다시 웅성거리고, 제복은 숫제 악다구니였다.
“정말 같잖은 계집애가 귀찮게 구는군. 그래서, 그래서 니깐 게 뭘 어쩌겠다는 거야? 안 좋은 꼴 당하고 싶어서 그래!”
제복은 험악하게 으르렁거렸다. 그러더니 다른 제복에게 턱짓을 하며 나를 끌어내라고 했다.
나는 완강하게 버텼지만 그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고, 결국 질질 끌려서 밖으로 내보내졌다.
내가 왜 그랬을까. 남은 사람들에게 나의 그 어떤 냄새를 남기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집으로 돌아오는데 팬티가 축축하게 젖어들며 견딜 수 없이 불쾌했다. 오줌을 싼 게 아닌가 하여 서둘러 돌아와서 고개 숙이고 팬티를 들춰보니 붉은 핏덩이가 쏟아져 있었다. 생리였다. 핏물 홍건한 팬티에서 비린내가 확 풍겨왔다. 나는 그 비린내를 참지 못하고 구역질을 해댔다. 썩은 생선에서 풍기는 것과도 같은 그 비린내.♧
<계속>
엄청난 폭우와 피해 상황을 알리는 여러번의 재난문자에,
곳곳이 기록적 폭우라는 뉴스에,
민초들의 상처 투성이들을 보니 마음이 우울한 상황인데,
그래도 갑자기 희망의 햇살들이
환하게 비춰 주어서 갑천변에 나가 보았습니다.
첫댓글
그러니요
요즘 뉴스에 아래 지방엔 피해가 많은 것을 봅니다
어째 농장엔 피해는 없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랜만인 듯합니다
우선은 건강이 최곱니다
요즘 건강 때문에 마음고생 좀 하고 있어요
카페에 좀 소홀했지 싶어요
건강 하입 시다
네 늦었지만은 빠른 쾌유을
기원드립니다.
방심은 하면은 안됩니다요.
저도 어제 산행중에는
큰 사고가 아니어서
천만다행으로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