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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제를 드리라! (레 7:15-18)
백혈병 아들을 둔 아버지가 오랫동안 아들의 백혈병을 간병하다가 절규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는 하나님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내 아들은 주님을 알고 있습니다. 아이는 밥상 앞에서 어김없이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잠들기 전에도 기도를 잊은 적이 하루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잔인합니다. 하나님은 냉혹한 심판자이십니다. 내게 남은 건 오직 아이 하나뿐인데 왜 그 마지막 소망마저 거두어 가시려 합니까?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원하고 있습니까? 내 소망이 그토록 지나친 욕심입니까?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투병의 고통속에서만 십 년의 세월을 살아온 이 아이가 아닙니까? 웃음보다는 눈물 속에서, 기쁨보다는 슬픔에 휩싸여 이제껏 겨우 겨우 견뎌온 가련한 아이입니다. 엄마는 이 아이를 버렸고 아버지는 무능합니다. 그리고 줄곧 아이의 삶을 외면해온 하나님, 당신이지 않습니까? 주님을 믿고 의지해온 아이에게 주님은 너무나 무관심합니다. 아이에 대한 주님의 처사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부당합니다. 억울합니다. 이제 이 아이의 믿음이 옳았기를 바랍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진정한 절대자인 것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 절대적인 힘으로 아이를 살려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합니다. 아이를 살려 주십시오. 아들의 믿음과 아버지의 기원으로 주님에게 애원합니다. 아이를 살려 주십시오. 믿음 없는 자에게 대가를 요구하신다면 차라리 아버지의 목숨을 거두어 가십시오. 기꺼이 아이를 대신하겠습니다. 아이 외에는 당신에게 소망 둘 곳을 잃은 자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다릅니다. 꿈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영리하고 맑은 영혼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나를 대신하십시오. 그리고 아이를 살려 주십시오. 부디 부디… 이런 내용의 기도입니다.
기도의 주제는 감사이다
이 기도에는 세 가지 주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원망입니다. 지금까지 믿어온 하나님에 대한 원망입니다. 내 아들을 이렇게 방치해두는 것은 내 아들의 믿음에 대해서 당신은 너무 잔인합니다 라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기도입니다. 둘째는 체념의 기도입니다. 이제 나는 아버지로서 해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는 아버지로서 무능합니다 라는 체념의 기도입니다. 셋째는 애원의 기도입니다. 내 목숨을 요구하신다면 나를 데려가십시오. 그리고 이 아이는 살려 주십시오 라는 애원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에는 세 가지 주제 외에 다른 주제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요소만으로는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골로새서 4장 2절에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기도의 가장 본질적인 주제는 감사입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화목제에 대해서도 성경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5절에 보면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 희생의 고기는" 화목제 라는 이 제사의 주제가 감사입니다.
16절에는 "그러나 그 희생의 예물이 서원이나 자원의 예물이면" 서원하는 제사가 화목제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백혈병 아들을 둔 이 아버지의 기도는 결정적으로 감사가 결여된 기도입니다. 그러면 현실적으로 이 아버지의 상황에서 감사기도가 가능한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는 감사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해야 됩니다. 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부르짖을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원망하고 체념하고 애원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원망할 수 있고 애걸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하나만 붙잡고도 감사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화목과 감사
그러므로 결정적인 기도의 요소는 감사입니다. 우리가 추수감사절날 감사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는 일상적으로 우리 가운데 늘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믿음은 일상적입니다. 화목제의 제사는 특별히 드리는 제사가 아닙니다. 오늘 주일예배가 화목제입니다. 추수감사절이 화목제입니다. 전도축제가 화목제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시니라."
15절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하나님과 죄인의 화목을 위한 것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화목을 위한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목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는 화목을 이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화목의 요소가 감사입니다. 감사함으로 화목할 수 있고 감사함으로 화목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화해하고 나서 감사를 누리지 못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서로 사과하고 용서하고 화해를 했으면 그때부터는 상대방을 생각만 해도 감사가 나오고 기쁨이 나와야 되는데 화해를 했는데도 상대방을 생각만 하면 울분이 나오고 미움이 나온다면 화목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감사가 우러나와야 화목이 된 것이고 그 감사로 화목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감사해야 됩니다. 더 실제적으로 말하면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감사할 줄 알아야 됩니다. 현실을 보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조건을 보면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의미를 가지고 보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여 집사님의 남편이 구제불능의 술꾼으로 변해 갑니다. 아무리 만류를 해도 안됩니다. 점점 술 때문에 사람이 망가져 가는 것입니다. 하루는 완전히 술에 취해서 집에 들어왔는데 옷이 전부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인이 남편의 옷을 벗겨 샤워를 시키고는 새 옷을 입혀 잠자리에 뉘었습니다. 이 부인이 마음속에 참을 수 없는 울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술로 인해 너무도 오랫동안 사람을 괴롭히니까 이 부인이 자기 분을 억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인은 자기를 통제하면서 한참동안 마음을 추스르는 가운데 잠이 들었는데 잠시 후에 깨어 남편이 자는 모습을 지켜보니 마음속에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토록 밉던 마음이 다 사라지고 평소에 가져보지 못한 감정이 살아났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몇 년간 술에 찌들어 사는데도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 신통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사불성이 되어서도 남의 집에 안들어 가고 자기 집에 찾아오는 것도 신통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망가져 가지만 그래도 자기 신앙생활에는 한번도 핍박을 하지 않은 남편이 고맙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극한 상황에서도 의미를 가지고 보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우리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고 감사의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감사의 마음으로 일을 해야 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맺어 주시는 화목의 열매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화목의 개념은 철저하게 대상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나 혼자 독자적으로 화목하는 것은 화목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화목은 대상이 있습니다.
자신과의 화목
첫째 자기 자신과 화목해야 됩니다.
사도바울은 "너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라"고 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불러주신 부름받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렇게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불러 세워주셨다는 그 존재가치를 알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화목하지 못합니다. 자신을 스스로 헤치고 있습니다. 자기 가치의 존중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를 망가뜨리는 원수가 바로 자신 안에 있는데도 그 장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인생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자신과 화목을 해야 됩니다. 제일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은 자신과 불화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갈등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는 그 사람이 제일 상대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자신과 화목하는 은혜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화목
두 번째는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대단히 질서 있게 가르칩니다. 우리가 사람들과는 형식적으로는 화목했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아직도 화목이 덜된 일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한다는 것은 영적인 측면이고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이 화목은 우리 자신들이 이룰 수 없는 화목이면서도 우리가 반드시 입어야 하는 화목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그만하면 되었다'라는 자리까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과는 화목했는데도 그 사람의 영적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여전히 멀리 계신다면 그 사람 중심에서는 하나님이 임마누엘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그 사람에게 화목이 이루어져 있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직 회개가 바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너의 죄를 사하였노라는 기쁨을 주실 때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제 자신의 이야기를 한 가지 드리고자 합니다. 20년 전에 비자를 받는 일을 위해서 미국 대사관에 여러 번 출입을 했습니다. 제가 서울에 올라와서 미국 대사관 앞을 자주 지나칠 때마다 마음속에 부담이 되는 감정이 하나 있습니다. 80년도에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우리 사회가 굉장히 어려웠는데 특별히 목사님들이 비자 받는 일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그 비자서류에 보면 증명서류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 중에 도저히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증명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재산증명입니다. 그때 재산증명이 안되면 비자가 안나옵니다. 그리고 그 재산증명에 부수적으로 따라 오는 것이 세금증명서입니다. 목사에게는 이것이 없습니다.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예금잔고 증명을 해오라는 것입니다. 통장에 상당한 재산이 있었다는 은행과의 거래관계를 증명해 오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제가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필수적인 증명입니다. 이것을 안 해 가면 신청이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많은 고민을 의논을 하였습니다. 근 일년이라는 시간을 들여서 그것을 만들었습니다. 솔직하게 변칙적으로 했습니다. 위장 등기로 만든 조작입니다. 비자를 받기 위해서 조작을 한 것입니다. 비자를 받고 미국에 다녀온 후 미국 대사관을 볼 때마다 부담이 되었습니다. 할 말 없었습니다. 서울시장 임명된 분이 재산문제 때문에 사표 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임명된 분이 위장전입 때문에 한달 만에 사표를 냈습니다. 이런 사건이 있을 때마다 성령께서 내 마음에 '너도 똑같은 것이다. 너도 위장 범이야'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문제를 두고 마음에 부담이 없도록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제가 다시는 그렇게 안 하겠습니다'라고 다짐하고 지나온 시간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람들 앞에는 감추어져 있고 아무렇지도 않으면서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부담스러운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회개의 절차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어야 됩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자유를 얻어야 됩니다. 이제 나이가 한 두 살씩 먹어가니까 사십대에 못 느끼던 부담이 있습니다. 솔직하게 제가 40대는 노회나 총회에서 말을 함부로 해도 별 부담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책임 있는 일을 맡고 있으니까 남들 앞에 무슨 격려를 받고 하는 것이 점점 인생살이에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모든 것이 부담입니다. 어른이라고 존경해줄 때 존경받을 수 없는 게 내 안에 너무 많기 때문에 부담스럽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부부생활을 하지만 다 모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 모르고 존경하는 것입니다. 다 모르고 지금 의지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모두 화목하십니까? 여러분의 인격과 삶이 하나님 앞에 부담이 없습니까? 이것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영원한 조작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조작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 문제에 대해서 화목이 이루어져야 됩니다.
이웃과의 화목
세 번째는 이웃과의 화목입니다. 이웃 중에 가장 가까운 이웃은 가족입니다. 가족과 화목이 이루어져야 되고 나와 환경 적으로 자주 만나는 사람들과 먼저 화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화목제 제사를 드리고 나거든 고기를 그 날에 다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감사의 제사를 드리거든 그 날에 다 먹고 서원제사를 드리거든 이튿날까지 다 먹으라. 제 삼일에는 전혀 먹지 말라. 만약 먹으면 제사가 무효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감사제를 드릴 때 하나님이 이런 명령을 하시는지 참 오묘합니다. 송아지나 양을 잡아서 화목제를 드리고 나면 제사를 드린 당사자 혼자서 그 제물을 다 먹을 수 없습니다. 하루만에 먹지 못합니다. 가족을 다 동원해야 되고 이웃을 동원해서 그 날에 다 먹어야 됩니다. 화목제 제물을 먹는데는 대상이 없습니다. 미운 사람도 다 와서 먹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사와 서원의 직접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내가 하나님께 서원을 합니다. 그러나 감사의 효력이나 서원의 효력은 이웃과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이웃을 향하여 감사를 나누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지만 그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 안에서 내 감사의 믿음, 서원의 믿음을 나누는 대상은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제사는 여호와께 드리지만 제물은 이웃과 함께 그 날에 나누어 먹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목제가 우리에게 주는 신앙생활의 원리입니다.
오늘 이 예배는 여호와 하나님께 드립니다. 아무도 우리의 예배를 받을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 예배를 받으십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고 받은 은혜는 이웃과 나누어야 된다는 것이 화목제의 교훈입니다.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시116:13-14)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예배가 구원의 잔을 들고 감사하는 화목제입니다. 이 화목제나 속죄제나 번제나 소제나 모든 제사의 핵심적 표적은 생명입니다. 내가 화목제를 드림으로서 내가 하나님 앞에 죄사함 받고 내 생명이 회복되고 감사가 회복된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원과 감사의 표적은 생명입니다. 생명을 두고 서원하라는 것이고 생명을 두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맺는 말
한나가 하나님께 아들을 달라고 서원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한나의 서원기도는 아들이 목표가 아닙니다. 아들은 기도의 제목입니다. 그 아들이 서원기도의 목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한나의 기도는 "그리하면 이 아들을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라는 것인데 여호와께 드린다는 말이 생명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을 받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물질에 담긴 영적인 신앙고백을 받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의 내용은 생명과 함께 하는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육체의 단순한 죽음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원을 하고 감사할 때 육신의 조건만으로 감사가 끝나고 서원이 끝나면 안됩니다. 생명의 의미가 거기에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추수감사절도, 전도축제도, 주일예배도 다 하나님 앞에서 생명으로 인하여 감사하는 화목제사인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이 생명으로 인하여 감사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이끌어주는 교회의 전도사역이 여호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화목제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화목제사의 축복이 여러분들께 충만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