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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일환 목사(장안중앙교회)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최일환목사
하나님 한분만으로 충분합니다.
삼상17:45~49
2009년 2월 15일 장안중앙교회 주일낮예배 최일환 목사설교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48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49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설교:
우리나라가 여러 가지로 어렵습니다. 어떤 분은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놓여 있다고 합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합니다.
미국으로부터 시작된 경제 위기 여파로 세계 각국이 경제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과거 역사를 살펴보면 경제 위기는 백성들을 힘들게 하고 그 어려움은 결국 변란이나 전쟁으로 몰고 가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어려운 시국에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어렵다, 어렵다, 어렵다 말은 하면서도 나라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한사람이 바로 서 있으면 하나님은 그 한사람 때문에 이 나라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한사람이 바로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왕, 사울 한 사람이 문제가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왕으로 오래 있으면서 점점 교만해 졌습니다.
블레셋이 쳐들어 왔을 때 하나님의 종인 사무엘만이 집례할 제사를 자기가 주관하여 예배합니다.
그런데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는 자기 생각을 앞세워 불순종을 합니다. 자기 보기에는 그렇게 다 죽이는 것보다는 양들과 소를 살려 하나님께 예물로 드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을 합니다. 결국, 그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은 사울 왕을 버리시기로 작정하십니다. 하나님은 순종이 제물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교만하면 불순종하게 되는데 그 교만을 도저히 용납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납니다.
삼상16:14절을 보세요.
“14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왜 하나님의 영이 그를 버리고 떠났나요?
그가 하나님께 교만하고 불순종하게 됨으로 하나님은 그것을 도저히 용납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이 떠나니 곧바로 악령이 들렸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면 마귀는 절대로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왕이 그러니 이스라엘의 국가와 군대의 사정은 어느 지경인지 상상이 되겠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 주변의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습니다.
이 블레셋은 오늘날의 ‘팔레스타인’입니다. 팔레스타인이란 단어는 블레셋의 영어 표현입니다.
사울 지도자 한사람이 온전히 서지 못하고 국력이 쇠약하게 되니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트리려는 악한 세력, 블레셋이 침범을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 어려운 시국에 기도해야 합니다. 지도자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서야하고 기도하면서 올바른 판단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사단의 나라가 넘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당시 사울이 왕으로 이끄는 이스라엘의 군대 모습을 살펴보세요.
엘라 골짜기를 가운데 두고 양국이 대치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그런 대치국면이 16절에 보니 40일 동안 지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군대의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그들에게는 군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다 왕도 그 전쟁터에 나와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막강한 무기도 있었고 군량미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40일 동안 블레셋 골리앗에게 철저하게 조롱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뭐가 문제일까요? 왜 대 이스라엘이 이 지경이 된 것일까요?
1. 허상 앞에 기가 죽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사울 왕이 악령이 들어 헤매고 있었습니다.
성령이 떠난 지도자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 도움을 입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문제가 닥쳤을 때 “하나님 어찌 하오리까?”기도 한 번 못합니다.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지도자가 국가 위기를 어떻게 극복 하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나라도 장로 대통령이 세워졌지만 그가 하나님 앞에 겸손이 머리 숙이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의지하여야 할 것입니다.
반면에 블레셋의 골리앗은 어떻습니까?
군사들의 숫자는 얼마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들 앞에는 골리앗이 있었습니다. 그는 걸리버 여행기의 거인같이 어마어마했습니다. 제가 언젠가 공항에서 최형만 선수를 마나본적이 있습니다. 와~ 그 신장이 대단하더군요. 그가 나타나자 청년들이 난리입니다. 핸드폰으로 찍느라고... 그러니 그가 달려가는데 쿵쿵거리며 달려갑디다. 그런데 그 최형만 선수는 골리앗과 비교하면 어린아이 같은 지경입니다.
삼상17:4을 보세요.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의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의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이요”
골리앗의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입니다. 한 규빗이 보통 45~50센티인데 최소 45센티라고 한다면 키가 작게는 약 290센티이고 크게는 330센티입니다. 우리 보통 사람의 두배의 키입니다. 그리고 머리에는 놋 투구를 쓰고 몸에는 비늘 갑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가 갖고 있는 칼은 얼마나 무거운지 베틀채 같아서 철이 육백세겔 정도였습니다. 너무 무거워 장정 한사람이 전문적으로 그 칼을 들고 다녀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누가 그를 상대할 수 있었습니까?
그러나 그는 사람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 자체를 조롱합니다. 완전 농락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허상(虛像)이란 말입니다. 겉만 대단하고 우렁차고 멋져 보입니다.
살기가 등등하고 대단해 보이지만 그것은 한 인간에 불과하고 돌맹이 한방에 나가떨어지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오늘날도 이런 허상에 사람들은 기가 죽어 있습니다.
겉모습이 화려하고 장엄하여 내 기를 죽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러지 않습니다. 모세는 대 애굽 제국의 바로 왕 앞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헤롯왕과 빌라도 총독 앞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허상에 불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우주를 창조하시고 운행하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허상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허상이고 무기력한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마치 골리앗이 다윗이 던진 돌맹이 한방에 고목나무 쓰러지듯 넘어간 것처럼 세상의 허상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의 손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멘 입니까?
2. 패배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이스라엘 군대는 적어도 수만명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허상 앞에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왜요? 골리앗을 바라보니 “싸워보나 마나”라는 패배의식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스라엘 군대 내에는 내노라 하는 장수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전쟁을 여러 번 해보았기 때문에 노련한 장군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아무도 골리앗에게 못 나갑니다. 24절을 보니 심히 두려워하여 도망을 쳤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이스라엘 왕까지도 기가 죽어 파배의식이 있었습니다.
사울 왕도 이미 패배의식에 잡혀 있습니다. 뭐라 합니까?
33절 보세요.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너는 소년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다.> 어려서부터 용사였던 사람이 누가 있습니다. 사울의 말속에 이미 “안 된다, 해보나 마나다” 하는 패배의식이 가득한 것입니다. 마귀의 괘략중에 괘략은 우리 속에 “안된다, 못한다, 해보나 마나다.” 라는 패배 의식을 심는 것입니다. 그러니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영적 싸움입니다. 그러기에 힘들고 어렵습니다. 우리의 상대는 마귀 사탄이며 귀신들입니다. 그들은 영물입니다. 우리기 그들과 싸워 이긴다는 것은 이시당초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에게 마귀를 대적하라 하십니다.
약 4:7에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셨습니다. 엡 6:11에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하셨습니다. 또 벧전5:8~9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하셨습니다.
마귀는 영물이고 우리는 육신을 입은 연약한 인간인데 어떻게 대적하라 하실까요?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연약하나 내속에 거하시는 분이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그러기에 살아계신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라면 그 믿음은 가짜이거나 죽은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에게 늘 신상당부합니다.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한다. 이 말을 성경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여호수아 1:9에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성경에 두려워 말라는 말만 142번입니다. 그러니 그와 비슷한 말까지 하면 수백 번입니다.
전능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믿으면서도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면 어찌 하나님이 그를 들어 쓰겠습니까?
죄송하지만 똥개도 주인이 함께하면 진돗개에게 덥벼듭니다.
그런데 전능한 하나님이 아버지신데 비실비실 거리면 어떻게 그것을 믿음이라 하겠습니까?
3.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실제를 믿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군사력도 있었고 군인도 있었고 여러 가지로 다 갖추었으나 그 군대 속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사람, 하나가 없었습니다.
한사람이면 되는데 그 한사람이 없었습니다. 누구요?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삶속에 실제로 믿어지는 사람, 이 한사람이면 일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40일 동안 서로 대치만하고 그 어려운 상황을 해결할 해결자가 그 중에 한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현장에 그런 사람 한사람을 보내주셨습니다. 그가 어린 소년 다윗입니다. 다윗은 그런 말도 안되는 상황을 보자마자 외칩니다.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그러면서 왕 앞에 섭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할렐루야!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돌맹이를 물맷돌에 채우고 달려가면서 골리앗에 믿음의 선포를 합니다.
45절을 보세요.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아멘?
이 선포를 잘 살펴보세요. 다윗은 이 전쟁이 자기와 골리앗의 싸움이라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간다 하므로 이 전쟁을 골리앗과 하나님의 싸움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적 전쟁은 우리와 골리앗의 전쟁이 아닙니다. 그것은 게임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쟁은 하나님과 사단의 전쟁입니다. 아멘? 그러기에 백전백승입니다.
47절 하반절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전쟁의 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아멘?
왜요? 신명기 1장 30절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보다 앞서 가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사울왕의 이스라엘 군사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도 복음을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믿고 하나님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승리하지 못하고 날마다 깨지는 것입니까?
왜 이스라엘 군대처럼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것일까요? 왜 다윗처럼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서 승리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무기 문제입니까? 능력 문제 입니까? 숫자가 부족해서일까요? 아니면 가방끈이 짧아서입니까? 아닙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 속에 있는 믿음이 실제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믿음은 그의 생활에 실제가 된 믿음이었습니다.
34~37절을 보세요.
34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37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다윗은 자신이 양치기 생활을 하면서 생활 속에서 겪었던 구체적 사례를 들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승리케 하심을 고백합니다. 그런 살아 있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런 처참한 상황을 보면서 그냥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 믿음은 나를 움직이게 합니다. 그리고 참 믿음은 내 환경도 변화되게 합니다. 아멘?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간 사람들은 다 환경이 변화되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변했습니다. 요셉도, 모세도, 믿음의 사람들은 환경을 바꾸었습니다.
백부장도 그랬고 혈루 병을 12년 앓던 여인도, 문등병자도 실제된 믿음으로 주께 나가므로 환경이 변했습니다.
그래서 히 11:6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러기에 따라서 합시다. “/나를 움직이지 못하는 믿음은 /결코 믿음이 아닙니다./”
다윗과 당시 이스라엘 군대의 장수들의 믿음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복음의 실제인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였습니다.
그분의 전능함을 믿는 믿음의 실제를 소유한 사람은 환경을 돌파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사람은 아무런 기적을 체험치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내가 갖고 있는 믿음이 실제가 될 수 있을까요?
1. 구원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번 중고등학생회의 수련회는 주제가 “구원을 확신하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의 주 되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나를 위해 부활하신 것이 믿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어디 있나요? 성경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하나님의 약속이며 나를 위한 언약임이 믿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믿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상고하면서 살펴보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경이 믿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로마서10장 17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믿어지는 은혜를 체험해야 합니다. 믿어지게 하는 것은 하나님 영역입니다. 우리는 듣고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믿어지게 하셔서 그 믿음이 살아 있는 실제가 되게 하십니다.
2.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나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현상과 증거는 무수히 많습니다. 우주를 보아도 일수 있고 우리 사람의 창조를 보아도 알 수 있고 나 자신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이 뭡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은 하나님 존재를 설명하려 하지 않고 태초에 천지를 창조했다고 선언함으로 당신의 살아계심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태초라는 단어, 창조하는 단어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단어입니다.
그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었던 다윗이 위대한 왕이 되었듯이 우리도 그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한다면 인생관도 바뀌고 살의 자세도 바뀌고 결과도 달라 질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입으로는 믿는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믿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확신이 필요합니다. 이것도 믿어져야 합니다. 인위적으로 “믿습니다, 믿습니다” 해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어져야 합니다.
3. 하나님이 내편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창조주에 멈추지 않고 그는 우리의 왕이며 우리의 주인이며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당신의 자녀편입니다.
여러분 자식이 공부도 못하고 속만 썩이고 좀 부족하다합시다. 옆집에 철수는 공부도 잘하고 생기기도 잘생겼고 해도 여러분이 죽을 때 내 재산 옆집 철수에게 주어라 할 사람이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자식 편입니다.
아브라함이 좀 실수해도 일방적으로 아브라함 편입니다. 다윗이 엄청난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다윗편입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다윗이 그 고백을 합니다.
시 118:6~7에
“6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7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어린 다윗이 돌맹이 5개만 들고 골리앗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 상황을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그러니 어찌 그냥 계시겠습니까? 한방에 넘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앞에 골리앗,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네 편이다. 내 이름을 믿으라.” “내가 너를 돕겠다.”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내 믿음이 실제가 되어야 하나님이 일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너는 네 인생의 전쟁에서 내가 승리케 함을 믿으라, 그리고 내안에서 즐겨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 한분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신 그것 하나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은 풍성한 은혜를 예비하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그분의 도우심을 바라보세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 보세요. 주님 한분만으로 충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통성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