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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부평에 있는 한 대형교회에서 부목사와 전도사, 직원등 7명이 새벽기도회, 수능저녁기도회, 40일기도회, 송구영신예배, 신년축복성회, 성탄절예배 등은 정해진 근로시간 외에 추가 근무를 한 것이므로 그에 따른 수당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각종 수당과 퇴직금을 교회에 요구하고 이것을 지급하도록 행사해달라는 진정서를 노동청에 냈다고 합니다. 이 7명은 연차유급수당과 퇴직금도 추가해 총 6억 2200만원의 돈을 지급하게 하도록 교회를 조사하라고 노동청에 진정했다고 합니다. 최근 종교인과세와 아울러 교회재정과 관리에 대해 종교탄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시점에 교회내에서 자발적으로 사회에 교회를 고소하고 교회를 조사하라고 진정을 냈다는 것이 충격적이고 이 일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할 지 고민입니다.
아무튼 기독교계의 뉴스에서는 이제 이 진정이 노동청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따라 많은 교회가 비슷한 혼란에 빠지고 성도들의 헌금이 대부분 교회사역자의 ‘노동비’라는 명목으로 더 많이 사용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지금 ‘노동비’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정말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설교하고 말씀연구하고 기도하고 심방하고 교회사역발전 연구를 하는 것이 ‘노동’이라고 생각할까요? 그래서 그들이 받는 ‘사례비’ 자신들이 스스로 ‘월급’혹은 ‘노동인건비’라고 생각하면서 교회사역을 하고 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결국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노동과 밥벌이 수단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주님오실 그 날이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삯꾼목자’라는 말이 있는데 교인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수고하는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돈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목회를 한답시고 그 자리에 있으니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우리가 하는 말씀연구와 기도와 신앙적인 행위를 노동으로 생각하고 어떤 고행의 행위로 생각해서 이뤄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 본문을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을 보면서 오늘과 다음 주 두 주간에 걸쳐 주기도문속의 참된 기도생활에 대해 말씀을 나눌까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신앙생활을 어떤 의무생활 혹은 뭔가 얻어낼 보상을 받을 노동행위로 하지 말고 참 신앙으로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속의 신앙원칙대로 살아가면서 참되고 거룩한 주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면서 항상 지녀야 할 생각, 첫째는 기도는 남들이 배워서 한다고 나도 배워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1장 1절입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제자중 한 명이 세례 요한과 세례 요한의 제자의 관계속에서 한 가지 요청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세례 요한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었는데 우리도 기도를 가르쳐달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해 수많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기도를 배운 적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라고 생각해봤더니 오늘 본문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그전까지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자세, 기도의 모습등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즉,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위치에서 어떤 자세로 등을 설명해주시면서 외형보다는 마음가짐, 어떤 자세나 위치보다는 그 속의 내면적인 본질을 강조하시며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런 수많은 말씀을 듣고도 기도를 배운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세례요한은 기도문을 여러 개 만들고 상황에 따라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많은 종교들이 기존에 해오던 방식과 너무나 똑같습니다. 각종 기도문을 만들고 주문을 외우듯이 그냥 그대로 읽으면 그것이 뭔가 능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만드는 것입니다. 불교도 그렇고 이슬람교도 그렇고 유교도 그렇고 각종 무속종교와 이방종교들의 대부분이 그런 주문, 틀에박힌 기도문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말한 것의 정확한 의미는 ‘세례요한도 여러 기도문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줘서 상황마다 기도문을 외우면서 기도하는데 우리는 정해진 기도문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기도문을 하나 가르쳐주십시오’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2장 18절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사람들은 자기는 돌아보지 않고 남들과 비교하기를 참 좋아합니다. 요한이 가르치는 방법과 예수님이 가르치는 방법은 분명히 다를텐데 다른 사람들도 요한과 예수님을 비교하고 심지어 오늘 본문을 보니 제자들도 예수님과 세례요한을 비교하며 기도의 방법을 똑같이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항상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 더 좋아 보이고 다른 사람들이 하면 자기도 해야 되는 것이 보편적인 인간의 생각인 것이 제자들에게서도 나온 것입니다.
그제 한국축구대표팀 감독이 바뀌어 첫 국가대항평가전을 했습니다. 우리나라보다 FIFA랭킹 25계단이 높은 32위입니다. 우리는 최근 순위발표에서 57위였습니다. 그만큼 어려운 팀입니다. 결과는 우리가 2대 0으로 이겼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러 가지 후기 기사를 보면서 하나 특별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보통 전반전뛰고 후반전 들어가기 전에 약 10분정도의 하프타임이 주어지는데 보통 락커룸에 가서 앉아서 쉬다가 바로 경기장에 들어가 후반전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감독이 된 벤투감독은 후반시작하기 약 5분전에 경기장으로 들어가서 뛰고 있는 선수들에게 스트래칭과 간단한 런닝시간을 가지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전반전 45분을 뛰고 후반전 45분을 더 뛰려면 힘이 들텐데 왜 그렇게 훈련을 시키는 지 알아봤더니 쉬다가 갑자기 뛰면 쥐가 나고 다리접질리고 발과 몸이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고 합니다. 주로 전반전에 아예 운동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을 하면 그런 경우가 많이 생기지만 후반전에도 쉬었다가 바로 격한 상태로 달리게 되면 그럴 수도 있기에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전 세계에 수많은 팀의 수많은 감독이 있는데 그런 시도를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은데 이번에 한국대표팀을 맡은 벤투감독은 항상 그렇게 훈련시키는 감독이라고 합니다.
남들이 어떻게 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르고 옳다면 우리는 우리가 옳게 여기는 것을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꼭 남들이 하는 대로 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특히 그것이 진리의 문제와 상관없는 것이면 꼭 그대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도문을 받아서 기도하는 것이 좋은 것일까요? 기도문없이도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는 것이 바른 것일까요? 물론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 기도문이라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질은 그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을 보시겠습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우리에게 주신 각종 달란트가 따로 있고 각자의 쓰임이 따로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앞에서 나를 돌아보며 내가 하나님앞에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박상훈목사님께서 펴내신 ‘하나님, 왜 이러세요’라는 책에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중세에 어떤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제자들을 다 불러 모았습니다. 그는 하얀 종이의 한 가운데에 선을 그었습니다. 그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선에 손을 대지 말고 이 선을 가늘고 짧게 만들어 보아라!” 제자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를 풀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 뒤에 한 제자가 스승의 의도를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붓을 들고서 스승이 그은 선 옆으로 더 굵고 더 긴 선을 여러 개 그었다. 그러다보니 스승이 그은 선은 상대적으로 가늘고도 짧아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다보면 이런저런 어려운 문제에 부딪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그 문제에 집착하다보면 근심과 염려가 쌓이게 되고 마음에는 기쁨과 평강이 자리 잡을 틈이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한 경우에 그 문제에 너무 매달리지 말고 그럴수록 기도의 줄을 더욱 더 굵고도 길게 늘려야 합니다.
남들이 어떤 신앙으로 어떻게 하면서 은혜받는 것을 보면서 내가 더 잘하려는 마음도 중요하지만 그것속에서 비교의식이 생기고 좌절감이 생기고 내 신앙을 불평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신앙을 망쳐버리는 것입니다.
오히려 남들과 비교해서가 아닌 내가 하나님앞에서 더 바르고 참되게 하는 그 신앙생활을 하면 결국은 그것이 우리를 참된 신앙인으로 만드는 것이고 상대적으로 커보이던 상대의 문제나 우리를 어렵게 만든 것이 보이지 않고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주기도문이 처음 주실 때의 상황을 생각해보며 우리가 깨달아야할 것은 절대 우리가 누구와 비교하면서 뭔가를 해보려고 할 것이 아니라 주님앞에 바른 것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를 살펴보고 남과 비교하면서 신앙생활할 것이 아니라 주님앞에 절대평가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면서 항상 지녀야 할 생각, 둘째는 기도의 응답과 모든 일들의 집행자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기도해야합니다.
누가복음 11장 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례요한이 가르쳐주는 기도문을 보면서 자신들에게도 기도문을 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주신 기도문이 바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주기도문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에서는 일부분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문을 보면서 우리가 정말 어떻게 기도해야하는 지를 다시 한 번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모든 주체는 바로 하나님과 그의 나라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이미 주기도문을 받기 전에 예수님께서 누누이 강조했던 부분임에도 제자들이 깨닫지 못했기에 주기도문의 첫부분에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대해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위대한 과학자인 아인슈타인 박사가 별들이 빛나는 어느 날 밤 프린스턴산책로를 따라 걷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줄곧 밤하늘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겼습니다. 한참 후 그는 한숨을 쉬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어쨌든 원자가 저 하늘을 파괴하지는 못해” 인간의 이성과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하나님의 섭리나 주권을 침해할 수 없습니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처럼 인생의 생사화복은 하나님께 있지 세상의 주권자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주권자는 하나님께서 권세를 주어 세운 사람일 뿐이며, 주권자 중의 주권자로서 절대 주권을 가진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사람의 마음도 움직이시며, 생사화복을 주고자 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따라서 세상의 주권자에게 은혜를 받아 성공해 보겠다고 탄원하기보다는 그들의 맘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것이 참 신앙생활입니다. 주기도문에서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기도할 때의 마음가짐이 바로 이것입니다.
잠언 29장 26절입니다.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을 책임져주시고 결국 우리의 인생의 모든 주권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실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남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이 관여하십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해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기도문속에서 우리가 발견해야할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면서 항상 지녀야 할 생각, 마지막 셋째는 기도는 알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 1절입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실 때의 상황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기도를 하시고 항상 하나님과 소통하며 하나님이신 그 분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 성부하나님과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이어진 것을 말씀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한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우리의 입을 통해 하나님께 묻고 우리의 귀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 내가 할 만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잘 듣지 않습니다. 기도의 입은 발달되어 있는데 기도의 귀는 완전히 퇴화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제자들이 기도를 어떻게 하는 지 가르쳐달라고 하면서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기도문을 여러 편 만들어준 것을 보면서 자신들도 기도할 때 하나님께 말하는 기도의 글귀를 아예 만들어 달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기도에 대해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기도문을 많이 알고 기도의 대한 많은 책을 읽는다고 기도를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수영이나 탁구 혹은 영어공부를 할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수영은 이렇게 하면 된다. 탁구는 이렇게 치면 된다. 영어는 이렇게 말하면 된다.. 이런 식으로 알고만 있으면 뭐합니까? 진짜 수영할 수 있는 지는 물속에 들어가서 진짜 할 수 있는 지 봐야 수영할 수 있는 사람인 지 알고 탁구칠 수 있는 사람인지는 탁구원칙, 탁구점수매기는 법, 탁구라켓의 종류를 말로 물어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탁구장에서 함께 탁구를 쳐봐야 아는 것입니다.
영어에 대해 아무리 배우고 머리에 가득채워두면 뭐합니까? 진짜 이 사람이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인지는 시험장에서 테스트해봐야 하고 영어를 쓰는 외국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지 봐야 알 수 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해봐야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신명기 4장 29절입니다.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
우리의 만남 중에서 가장 위대한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우리의 영혼은 이성을 초월한 놀라운 변화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 우리 자신은 가장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존경심, 즉 자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감추어진 약점은 아무에게도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약점은 부모에게도, 처자에게도, 절친한 친구에게 도 보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만일 약점이 타인에 의해 드러나서 자존심을 잃게 되면 자살까지도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어떠한 악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면 죄를 용서받아 새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떤 가정이라도 가족이 함께 기도하면 행복한 가정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나라라도 국민이 힘을 합쳐 기도하면 부강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흑암의 세력을 물리치며, 불안과 공포를 제하고,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위대한 개혁의 도구입니다.
호세아 5장 15절입니다.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1980년대에 세계 20대 대형교회가 어디 있는 지 살펴보니 미국에 12개, 한국에 8개였습니다. 10년이 지나 1991년에 조사하니 전 세계 20개 대형교회가 모두 한국이었습니다. 같은 성경책, 같은 돈, 같은 목적인데, 한국 교회는 성장하고, 미국 교회는 황폐되었습니다. 이 기간 미국 목사의 기도시간은 평균 기도시간은 하루에 8분이었고, 한국은 30분이었습니다. 다른 점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목회행정이나 목회노하우, 교회이벤트로 교회를 일으키려고 하기 전에 정말 무릎을 꿇고 주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도 한국 목사는 새벽기도, 금요철야, 개인기도등 기도를 많이 한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2000년대 들어서 지금은 어떤 지, 그래도 한국교회 목사는 기도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호언장담을 하기가 참 어려운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기도를 통해 이뤄집니다. 예수님은 밤이 새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기 전에 예루살렘교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장 14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온 마음을 합치고 온 성도가 함께 모여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고 그 때 놀라운 부흥의 역사속에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예루살렘교회에 날마다 하나님의 백성이 더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는 기도문을 외워서 아무런 의미없이 기도하는... 그래서 기도하는 방법을 알고 기도하는 틀대로 형식을 잘 맞춰서 기도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어떤 기도문을 받아 그것을 외우고 그 기도문대로 기도하면 뭔가 제대로 하는 것으로 알고 예수님께 기도문을 가르쳐달라고 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혹시나 저와 여러분들도 어떤 문장을 외우고 어떤 틀을 알아서 그대로 하면 기도잘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도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깊은 곳부터 간절하게 예수님을 찾고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찾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보는 것이 참다운 기도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못배워서 기도못한다 기도하는 방법을 몰라 기도못한다고 핑계대지 말고 정말 하나님을 찾으려는 마음이 있는 지 정말 어려운 일에 대해 간절히 소망하며 하나님께서 만져주시고 고쳐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지를 살펴보시며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여 참된 기도의 사람, 바른 기도로 살아가는 온전한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은 주기도문의 기도의 내용도 있지만 사실 참된 기도의 자세를 가르쳐주셨습니다. 다음 주에 한 주 더 주기도문을 살펴보면서 기도의 내용에 대해 살펴보겠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진정 기도를 할 때 우리는 어떤 마음자세로 기도하는 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신 것처럼 남들 눈치보며 남들과 비교하며 기도하는 것을 하지 말고 우리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다 보시고 내 상황을 다 아시고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며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의 방법을 배워야 잘 하지, 기도의 기술이 있어야지 제대로 기도하지라고 말하지 마시고 기도는 하나님앞에 내 마음을 드리는 것이고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는 것이고 항상 시간을 내어 꾸준히 기도하는 것이 참다운 기도인 것을 깨닫고 항상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주신 주기도문속에서 정말 기도의 참된 마음자세를 깨달아 참다운 기도로 인생에 주님을 모시고 인생에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