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6(일) 색다른 투어 cafe의 아침편지
아버지의 사랑이야기
2015. 12. 5(토) 오후 4시 20분. 웨스턴베니비스 7층 아스타홀에서...
평생을 혼자 걷지 못하고
목발에만 의지해야 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힘든 걸음을 연습하기
시작했던 건 맏이인 내가
결혼 이야기를 꺼낼 즈음이었다.
사람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의족을
끼우시더니 그날부터 줄 곧 앞마당에
나가 걷는 연습을 하셨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얼마나 힘겨워 보이시는지...
땀으로 범벅이 된 아버지는 하루에도
몇번씩 땅바닥에 넘어지곤 하셨다.
〃아빠, 그렇게 무리하시면 큰일나요.〃
엄마랑 내가 아무리 모시고 들어가려고 해도
아버지는 진땀 을 흘리시며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얘야, 그래도 니 결혼식날 이 애비가 니 손이라도
잡고 들어가려면 다른건 몰라도 걸을 순 있어야재...〃
난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그냥
큰아버지나 삼촌이 그 일을 대신해
주기를 은근히 바랬다.
정원씨나 시부모님, 그리고 친척들,
친구들에게 의족을 끼고 절룩거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힘겨운 걸음마 연습이
계속되면서 결혼 날짜는 하루하루 다가왔다.
난 조금씩 두려워졌다. 정작 결혼식날
아버지가 넘어지지나 않을까,
신랑측 사람들이 수근거리지나 않을까...
한숨 속에 결혼식날이 다가왔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제일 먼저 현관에
하얀 운동화가 눈에 띄었다.
누구의 신발인지 경황이 없어서 그냥 지나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결국 결혼식장에서 만난 아버지는 걱정했던 대로
아침에 현관에 놓여있던 하얀색
운동화를 신고 계셨다.
난 가슴이 뜨끔했다.
´아무리 힘이 든다 해도 잠깐인데
구두를 신지 않으시구선...´
당신의 힘이 모자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떠나는 내게 힘을 내라는 뜻인지 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으셨다.
하객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절룩절룩 걸어야했던
그 길이 아버지에겐 얼마나 멀고 고통스러웠을까.
진땀을 흘리시며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하지만 난, 결혼식 내낸 아버지의
하얀 운동화만 떠올랐다.
도대체 누가 그런 운동화를 신으라고 했는지.
어머니일까? 왜 구두를 안 사시고...
누구에겐지도 모를 원망에 두볼이
화끈거렸고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아버지의 무안한 듯한 표정도,
뿌듯해 하시는 미소도 미처 보지 못하고
그렇게 결혼식은 끝났다.
그 후에도 난 화려한 웨딩드레스를 입은 내 손을
잡고 아버지가 걸음을 떼어놓는 장면이
담긴 결혼 사진을 절대로 펴보지 않았다.
사진속 아버지의 하얀 운동화만 봐도
마음이 안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아버지가 위독해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비로소 그 하얀 운동화를 선물했던
주인공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내 손을 꼬옥
잡고 천천히 말을 이으셨다.
〃아가야, 너의 남편에게 잘 하거라.
니가 결혼을 한다고 했을때,
사실 난 네 손을 잡고 식장으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었단다.
그런데 니 남편이 매일같이
날 찾아와 용기를 주었고, 걸음
연습도 도와주더구나.
결혼식 전날에는 행여 내가 넘어 질까봐
푹신한 고무가 대어진 하얀 운동화도 사다 주고,
조심해서 천천히 걸어야 한다고
얼마나 당부를 하던지...
난 그때 알았다.
니가 좋은 사람을 만났다고.
참 좋은 사람을 만났다고...〃
- 좋은 글 중에서 -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 회상(어제의 이야기)
2015. 12. 5(토)은 사랑하는 우리 딸아이의 결혼식날이었습니다. 간밤에 사위에게 전하는 말과 딸아이에게 전하는 편지를 쓰곤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결혼식 날에 행여 실수를 할까 싶어 가슴조이며 베란다에서 수차례나 연습을 했지만, 결혼식 당일에는 많이 떨렸습니다. 이게 바로 아빠의 마음인가 봅니다. 오늘은 토요일이었지만 아침 성당에서 주임신부님 주관으로 열리는 회의에 참석치 않았습니다. 사전 스마트폰 멧세지로 신부님께 전후 사정을 말씀 드렸더니만, 미사 때문에 참석치는 못하지만 가장 멋진 화환을 보내 주시겠다며 위로와 격려를 주셨습니다. 결혼식 날 아침엔 간밤에 작성 완료한 식장에서 낭독할 편지 내용을 프린팅하기 위하여 마나님과 아들녀석과 함께 동행하여 여의도로 향했고, 한참을 기다린 끝에 예쁘게 프린팅된 원고를 들고 예식장으로 향했습니다.
예식은 오후 4시인데도 불구하고 예식장 소속의 미장원에서는 신부 아빠와 엄마 화장을 해야한다고 했기에 12시까지는 도착해야만 했습니다. 처음으로 얼굴과 머리화장을 해보았습니다. 무척 어색했으나 마나님과 아들은 '아빠가 완전히 딴 얼굴이 되었다면서...' 마나님은 평소 그런 모습으로 다니면 참 좋겠다며 침 튕기면서 칭찬을 해주어 나로서는 영~ 어색한 기분이었지만, 그냥 받아 들이기로 했습니다.
우리 마나님도 결혼식장에서 특수 화장을 해서 마치 새색시 같아 보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금방 오후 3시가 되었고, 식장에는 무려 1시간 30분전인데도 멀리 대전에서 申대령 夫婦를 비롯하여 먼 지방에 계신 하객분들이 더 먼저 한분 두분 오시기 시작했습니다. 주말 토요일 오후 늦은 시각이라 가까운 일가친지분들만 오실 줄 알았는데, 연락도 하지 않은 분들까지 많은 하객분들이 참석해 주시어 오히려 놀랐습니다. 정작 감사하기에 앞서 이분들께 어떻게 보은 드려야 할지가 걱정스러웠습니다. 초등학교 동창생들과 고교동창생들이 부부 동반으로 많이 참석해 주셨고, 고향 강릉에서는 장거리니깐 오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했건만 우리 강릉중앙고 44회 최회장을 비롯한 민총무님 등 많은 분들이 이른 아침 대관령을 넘어 달려와 주셔서 눈물이 핑그르 돌 정도로 감사했습니다.
재경고교동문회에서 구순 팔순을 넘기신 대원로 선배님들과 아주 젊은 후배들까지도 참석해 주셨고 그리고 임관 동기생과 옛 군생활 전우들, 대학 동창과 한성동우회, 회사의 많은 임직원 또 우리 성당의 사목위원분들과 구역장님들까지 참석해 주셨습니다. 주말 오후 추운 날씨에 하객분들이 적어 주문한 음식이 남을까 걱정했는데, 이는 그냥 기우였습니다. 특히 용문동의 동네식구들이 다 동원되어 축하해 주시어 말 그대로 큰 잔치가 되었습니다. 토요일 주말 오후 늦은 시각에 우리 아이의 혼사를 빛내기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내어주신 분들께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한편으로는 송구한 마음 금할 수 없었습니다. 저의 교교학창시절 은사님과 또 군대생활을 할때 모셨던 대선배님께서도 참석해 주시어 너무도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바로 빚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분 한분을 절대 잊지 않고 꼭 보은 드려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딸아이의 손을 잡고 어떻게 웨딩음악에 맞추어 걸었는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이 원한 그대로 신랑 아버지께서 성혼낭독을 하면서 인사 말씀을 간단히 멋지게 해주셨고, 사위와 딸아이가 서로 혼인서약문을 자기들이 만들어 낭낭하게 낭독을 했고, 이어 신부 아버지가 사위에게 전하는 편지와 딸에게 당부하는 편지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양측의 형제중에 한명씩 대표가 나와 축하곡을 불렀는데, 정말 오페라 가수답게 모두의 심금을 울리는 음악회 같아서 참으로 좋았습니다.
식장이 좁았던 관계로 많은 하객분들이 다 듣지 못하시고 식당으로 먼저 가신 것이 아쉬웠습니다. 2015년 12월 5일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귀한 날이라 여기 현장의 모습을 담아 기록에 남겨 봅니다. 예식을 마치고 신랑의 부모님과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하면서 정담을 나누었고, 뒷정리를 모든 마친 시각은 밤 9시였습니다. 막내 동생내외가 뒷바라지를 완벽하게 해주었고 집까지 승용차로 배웅해 주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끝으로 이 귀하게 보내주신 하객분들의 정성어린 화환들은 좀 더 가치있게 사용하기 위하여 '한국새생명운동본부'에 기증을 하여 더욱 마음이 가벼웠습니다.
- 오늘의 일기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