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덕(福德)과 공덕(功德) 두 용어는 약간 다르게 사용된다. 좋은 일을 해서 덕을 쌓는다는 입장에서는 비슷하게 사용되지만, 전개되는 방향에 따라서는 다르게 사용된다. 즉 복덕이 인과의 법을 따르는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에 주로 사용된다면, 공덕은 깨달음으로 상승하는 경우에 주로 사용된다.
복덕(福德)은 복이 다하면 힘든 삶으로 떨어진다는 뜻의 복진타락(福盡墮落)이라는 용어에서 잘 드러나 있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는 양무제가 갖가지로 불교를 위한 정책을 편 자신의 행이 얼마만큼의 공덕이 되느냐는 질문하자, 달마대사께서 공덕이 없다(所無功德)고 답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양무제는 많은 사찰을 짓고, 출가한 스님들을 뒷바라지 했으며, 경전의 보급에도 심혈을 기울인 인물이다. 바로 이점을 들어 달마대사께 자신의 공덕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던 것이지만, 자랑스러워하는 무제를 본 달마대사는 그의 선행이 오히려 아만(我慢)과 아상(我相)을 키운 점을 보고는 ‘공덕이 없다.’고 꾸짖은 것이다.
복덕은 자신의 선행에 대한 과보를 당연한 결과로 생각하여 즐겨 받아쓰는 경우를 말하고, 공덕은 그 과보를 다시 깨달음으로 회향하는 경우이다. 보시를 해도 그 보시한 것을 자신만 알고 기쁨으로 삼다가 점차 그것마저도 놓아버리는 무주상보시로(無住相布施)로 옮겨가면 그것이 공덕이 되는 것이다. 공덕이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추진력과 같은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 일어나는 기쁨마저도 놓아버린 사람이 자기 마음에 좋지 않은 감정이나 관념이 머무르게 하겠는가. 이처럼 마음이 청정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공덕이며 곧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수행이 되는 것이다.
계산이 불가능한 엄청난 보시를 한 사람보다 무생법인(無生法忍) 즉 깨달음을 이룬 보살의 공덕이 더 뛰어나다고 했다. 아무리 깨달음에 이를 준비를 많이 했어도 깨달은 이와는 비교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깨달음을 이룬 보살이 깨달을 수 있었던 이유는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복덕을 받지 않는 것은 탐내거나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라 했다. 다시 말해 어떤 관념에도 걸리지 않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한 이가 깨닫는다는 뜻이다.
출처 : 송강 스님 <금강경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