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보이느냐?
(송현 로마노 신부)
자기밖에 모르는 어떤 부자가
랍비를 찾아가서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호소했습니다.
선생님. 수중에 돈이 많은데도 제 삶은 전혀 즐겁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자 랍니는 그를 데리고 창문 쪽으로 갔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부자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습니다.
행인들과 놀고 있는 아이들이 보입니다.
이번에는 거울 앞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거울 앞에서도 랍비는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무엇이 보이느냐?
제 모습이 보입니다.
이 대답에 랍비가 엄중히 타일렀습니다.
유리에 은이 칠해져 있을 때는
밖을 볼 수 없고 오직 자신만 보인다네.
독선과 편견이라는 은을 벗겨내야 이웃을 볼 수 있고
그때에야 비로소 자네 삶에 기쁨이 있을 것이네!
철학자들은 인간의 편견과 독선을 가리켜 `무지의 자식`이나
어리석음의 으뜸`으로 일컬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대상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진리를 찾는 데 있어서도 가장 큰 장애물은 언제나 편견과 독선입니다.
그것들은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거부하고
자신이 만든 틀 안에서 고정관념의 세계만을 고집합니다.
현대 신앙인은 어느 때보다도 각자의 구미에 맞는 하느님을 요구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이 하느님의 말씀을 재는 척도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자기를 바꾸기보다는
하느님을 무시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헌신짝처럼 내던져버립니다.
자신의 기대와 생각대로 일이 성사되지 않으면
주님을 원망하면서 믿음에 회의를 가집니다.
한마디로 하느님마저 인간의 좁은 틀에 끼워맞춰
직접 소유하고 조정하려는 교만과 독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나름대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과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지식과 체험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에는
너무나도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또한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그 피조물의 범주 안에만
머물러 계실 수도 없습니다.
비록 지금 당장 주님의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 해도
끝까지 신뢰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보다 우리의 지혜보다 크신 분입니다.
순수한 믿음을 안과 하느님과 교회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이 약속하신 구원도 누리게 되지 않을까요.
구원을 믿는다면 그 구원에 이르기 위한 신앙의 길도
한 치의 의심 없이 걸어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