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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과학관 - 피렌체 : 갈릴레오 박물관 과학계의 최강 듀오, 다빈치와 갈릴레오를 만나다
hanjy9713
2024.01.22. 06:51조회 11
피렌체 : 갈릴레오 박물관
과학계의 최강 듀오, 다빈치와 갈릴레오를 만나다
313년에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한 이래 서양 역사는 1,000년 동안 기독교 왕국이었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말이 대변해 주듯이 신에 관한 지식만이 유일하게 존중할 만하고 가치 있는 지식으로 칭송받던 중세는 15세기가 도래하면서 한순간에 무너졌다. 대신 인간의 가치를 존중하는 새로운 근대 세계가 펼쳐졌다. 역사학자들은 이 커다란 전환에는 크게 세 가지 사건이 중요했다고 평가하면서 이것을 ‘3R(Revolution, 혁명)’이라 부른다.
첫 번째 혁명은 문예 부흥 운동인 르네상스(Renaissance)다. 고대인들이 도달했던 화려한 학문과 예술의 정점으로 다시 되돌아가자는 운동이다. 또 다른 혁명은 교황청 등에 소속된 성직자들 없이도 평신도인 내가 직접 하나님과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음을 만천하에 공표한 종교개혁(Reformation)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근대과학사학자인 허버트 버터필드(Herbert Butterfield)가 역사의 전면에 내세웠던 과학 혁명(Scientific Revolution)이다.
과학 혁명은 1542년에 출간된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1)라는 책에서 시작되어 1727년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Principia)』2)로 종결된 천문학과 물리학에서의 대혁명적 전환을 의미한다. 버터필드는 앞의 두 가지 혁명이 과거로 돌아가자는 회귀적인 특성을 가졌다고 한다면, 과학 혁명이야말로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 근대라는 거대한 물결을 새롭게 열었던 미래지향적이고 전진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인류가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었던 데에는 이 세 가지 혁명이 별개로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각각 서로의 배경, 원인 또는 그 결과로 뒤섞여 일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일은 제일 먼저 무역업을 통해 부를 획득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을 중심으로 펼쳐졌는데 그들 중 가장 왕성했던 곳이 바로 피렌체, 영어로는 플로렌스라 불리는 도시였다.
아르노 강이 가로지르는 도시 피렌체는 영화나 소설에도 자주 등장한다. 아름다운 강을 내다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잔뜩 안고 피렌체로 여행을 온 영국의 젊은 아가씨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는 영화 <전망 좋은 방>이나 일본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의 배경지로 굉장히 유명하다. 또한 아르노 강의 가장 오래된 다리인 베키오 다리는 세계의 연인인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군주론』이라는 명저를 집필하여 이 도시의 통치자에게 헌정했으나 결국 다시 돌아오지 못한 마키아벨리의 회한이 서린 도시이기도 하며, 비너스의 탄생이라는 걸작을 잉태한 보티첼리의 도시이기도 하다.
아르노 강변과 어우러진 피렌체
아름다운 저녁노을과 도시의 야경을 감상할 수 있는 미켈란젤로 광장에 서 있는 거대한 복제품 다비드 상은 도시 전체가 미술관이자 박물관인 도시의 특성을 잘 보여 준다. 특히 중세 이후 정치적 활동의 중심지였던 시뇨리아 광장의 넵투누스 분수 주변에 있는 메디치의 청동 기마상과 미켈란젤로의 진짜 다비드 상은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낸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피렌체를 세계인의 도시, 역사적인 도시로 만들었던 것은 그곳을 통치하며 뛰어난 과학자와 예술가, 철학자와 사상가들을 끌어모았던 메디치 가문이다.
토스카나 지방에서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별로 내세울 것 없던 메디치 가문은 교황청과의 은행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획득한 이후 정치력을 확대하여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서구 유럽의 역사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교황을 넷이나 배출하고 프랑스 왕비 둘을 포함하여 수많은 유럽 왕조와 친인척 관계를 맺은 메디치 가문은 이후 300년 동안 피렌체와 고향인 토스카나 지방을 다스렸다. 이 가문의 특징은 전쟁을 일으키는 대신 수많은 예술가와 과학자를 저택으로 초청하여 아낌없이 후원하고 격려하는 문화 활동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가장 활발한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특히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1464)는 돈을 버는 것보다 훨씬 큰 즐거움은 돈을 잘 쓰는 것이라며 문화와 예술의 강력한 후원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그는 멀리 오스만제국까지 사람을 보내 수많은 고전 문헌을 모으도록 명했는데, 이렇게 모아진 문헌들을 읽고 번역하면서 다양한 지적 세계가 열릴 수 있었다. 또 사람들은 원전(原典)을 직접 접하고 싶은 호기심을 키워 갔다.
고대 학문 세계에 대한 지적 호기심, 이것이 바로 르네상스의 시작을 이끌었던 힘이다. 사람들은 아랍 세계를 통해 재번역된 그리스의 저작물이 아니라 고대 원전을 직접 보고 배우면서, 화려했던 고대 학문 세계의 부활을 꿈꾸었던 것이다. 코시모의 뒤를 이은 로렌초 데 메디치 역시 폭넓은 인문주의적 교양을 지닌 인물로 철학과 인문학을 널리 장려하고 후원했다.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 예술품과 지적 활동의 결과물이 그들의 화려했던 시절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셈이다.
도시 피렌체에 남아 있는 작품 중에서 단연 최고 걸작을 만든 이는 이 도시에서 한동안 살았고 또 도시에 머무는 동안 도시의 자양분을 충분히 흡수하며 성장한 두 인물이다. 한 사람은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이면서 기구 제작자로 활동하였던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고, 다른 한 사람은 건축가이고 화가이자 장인이었고 학문적 예술가로 활동하던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다. 창의성의 아이콘으로 자주 언급되는 이들 두 인물이 지적 황금기인 르네상스기에 도시 피렌체에 머물렀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특히 아르노 강변에 위치한 갈릴레오 박물관은 갈릴레오가 이루어 낸 놀라운 과학적 성과들과 함께 그가 제작했거나 사용하였던 실험 기구들을 선보이고 있다. 가난한 수학 강사였던 갈릴레오는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며, 결국 네덜란드의 한스 리퍼리가 발명했다던 망원경으로 목성이 4개의 위성을 가지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 과학적 사실에, 메디치 가문이 목성을 귀히 여긴다는 점과 이 집안에 아들이 4명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메디치 가문의 별들’로 이름 붙였다.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헌정으로 손꼽히는 갈릴레오의 놀라운 정치적 행동에는 다분히 속셈이 숨어 있었고, 갈릴레오는 그 대가로 메디치 가문의 궁정 수학자이자 철학자라는 높은 직위와 보수를 받게 되었다.
갈릴레오 박물관 모습
피렌체가 키워 냈고 또 피렌체에 묻힌 갈릴레오는 1564년 이탈리아의 북서부에 위치한 피사에서 태어났다. 의사가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의학부에 입학했으나 첫 번째 해부 수업에서 충격을 받고 심한 구토를 일으켜 의학 공부를 포기하고 말았다.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원래 부모의 뜻에 따라 의사가 되려고 의학부에 입학했다가 해부 광경을 못 견디고 뛰쳐나온 두 명의 유명한 과학자가 있다. 한 사람은 바로 갈릴레오고, 다른 한 사람은 찰스 다윈이다. 갈릴레오는 천문학과 물리학에서 그리고 다윈은 생물학에서 혁명적 전환을 가져온 인물인데, 만약 이들이 모두 의사가 되었다면 과학의 발전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원하지 않던 공부를 해야 하는 갈릴레오는 어느 날 성당에서 설교를 듣다가 너무 지루해지자 고개를 돌려 우연히 천장에 걸린 샹들리에를 주목하게 되었다. 그에게 샹들리에는 정지한 것이 아니라 중앙에 매달려 아주 천천히 흔들리는 것으로 보였고, 샹들리에가 한 번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은 동일하게 보였다. 당시 시계는 아주 고가의 물건이었기 때문에 시간을 재기 어려웠던 갈릴레오는 자기 팔의 맥박이 규칙적이라는 사실을 활용하여 진자의 등시성3)을 알아내게 되었다. 당시에는 흔들거리는 물체의 폭이 좁을수록 시간이 적게 소요될 것으로 믿었는데, 갈릴레오는 진자가 진동하는 주기는 진폭과 무관하게 일정함을 발견했다.
1589년에 갈릴레오는 친구 수학자들의 도움으로 피사 대학교에서 수학 강사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가 기울어진 피사의 사탑4)에서 무게가 다른 두 개의 물체를 떨어뜨리는 실험을 통해 두 물체가 동시에 바닥에 떨어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일화는 그가 시대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시대를 이끌어가는 개척가였던 그는 기존의 불필요한 관습도 거부했는데, 특히 대학에서 강의할 때 가운을 입어야 한다는 규정을 신랄하게 비판한 탓에 선배 교수들이 그를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1591년에 갈릴레오는 피사를 떠나 파도바 대학교로 자리를 옮기면서 피렌체에 살게 되었고, 이곳에서 학생들에게 개인 교습을 하거나 각종 기구를 제작하는 일로 돈을 벌면서 수학 연구를 수행했다.
그는 『운동에 관하여(De Motu)』라는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이론 대신 낙하하는 물체에 관한 완전히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다. 고대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을 ‘변화하는 과정’으로 정의하고서 변화하는 모든 자연현상을 운동으로 표현했다. 그에게는 어린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는 것도 운동이며, 나무에 꽃이 피는 것도 운동이었다. 그는 또 운동을 ‘자연스러운 운동’과 ‘부자연스런 운동’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자연스런 운동은 물 · 불 · 공기 · 흙이라는 4가지 원소가 자연스럽게 자기 영역을 찾아가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모든 것은 부자연스런 운동이라고 불렀다.
그에게는 무거운 돌덩이를 위로 쏘아 올리는 것은 부자연스런 운동으로, 부자연스런 운동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외부로부터의 힘인 동인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문제는 화살과 같이 던져진 물체가 따르는 궤도를 어떻게 자연스런 운동과 부자연스런 운동으로 설명할 것인가였다. 던져진 물체, 즉 투사체는 일정 부분 수평 방향의 운동을 하다가 아랫쪽으로 떨어지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수평 방향의 운동은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는 발상의 대전환을 이루게 된다. 풀리지 않는 문제를 잡고 고민하느니 차라리 그것을 풀 수 있는 문제로 바꾼 다음에 바꾼 문제를 풀어내는 것이다. 왜 투사체가 포물선 모양을 따르는지에 대한 원인을 설명할 수 없다면 원인의 문제에 더 이상 관여치 말고, 대신 운동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정확하게 관찰하고 기술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의 전환 덕분에 그는 운동을 수평 방향과 수직 방향의 운동 성분으로 분해할 수 있었으며, 양쪽 방향 성분의 크기를 합성하여 운동 궤도의 방향과 그 크기를 정확히 기술해 낼 수 있었다. 또한 물체가 외부의 동력이 작용하지 않는 한 처음의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하려는 경향인 ‘관성’의 개념에도 도달했다.
갈릴레오 박물관 내부
갈릴레오 박물관은 2010년 6월에 피렌체 과학사 박물관에서 새롭게 출발했으며, 멀리 메디치 가문의 ‘세계지도 방(Map Room)’에 기원을 두고 있다. 세계지도 방은 57개의 문과 당시까지 알려진 세계의 지도를 그려 넣은 벽장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한쪽 끝에는 천상계와 지상계를 나타내는 거대한 구가 천장으로부터 매달려 있었다. 여기에 1657년 조직된 치멘토 아카데미(Accademia del Cimento)가 실험 활동을 통해 새로 제작했던 과학 기구들이 더해졌다. 치멘토는 이탈리아 어로 ‘위험한 시도’ 혹은 ‘실험’을 의미하는 것으로, 갈릴레오를 비롯하여 비비아니, 보렐리, 토리첼리 등 당대의 쟁쟁한 과학자들이 대거 회원으로 활동했다. 10여 년 정도 존속되었던 이 아카데미는 당대 실험과학의 메카였으며 이후 그 정신은 영국의 왕립 학회와 프랑스의 왕립 과학 아카데미로 이어졌다.
1608년 10월에 갈릴레오가 ‘멀리서 볼 수 있는 기구’로 불리던 망원경을 발명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공방을 차려 실험 및 수학 기구를 제작해 주고 돈을 벌어야 했던 오랜 경험 덕분이었다. 1591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갈릴레오는 유산은커녕, 아버지가 남발한 지불 약속을 지키라는 요구에 몹시 시달렸다. 특히 거액의 지참금을 챙겨 여동생을 시집보내야 하는 책무감을 떠안게 된 그는 컴퍼스와 같은 기구를 만들어 팔거나 군사학, 기계학, 천문학 등에 관한 개인 교습으로 수입을 보충했으며 심지어 학생을 하숙시키기도 했다. 그가 해부학 실험실을 뛰쳐나오지 않고 의사가 되었더라면 쉽게 해결되었을 돈 걱정 때문에 그는 한동안 많은 고생을 한 셈이다. 하지만 결국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큰 용기를 냈고 또 그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역사에 위대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갈릴레오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망원경을 직접 제작했는데, 처음에는 3배 정도의 흐릿한 배율을 가진 것이었지만 점차 30배까지 확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으로 ‘감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그 결과는 너무나도 놀라웠다. 망원경으로 바라본 달은 매끈한 구(球)가 아니라 분화구와 산들로 뒤덮여 있었고, 태양의 흑점 역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주기로 움직이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우주의 중심은 달을 경계로 해서 불완전한 지상 세계와 완전한 천상 세계로 구분되는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은 완전 잘못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완벽하던 목성은 4개나 되는 위성을 가지기까지 했다. 갈릴레오는 이 놀라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미 알려진 옛 별들보다 10여 배나 많은 별을 보았다. 그러나 이전에 어떠한 천문학자도 알거나 관찰하지 못한 네 개의 행성을 발견했다는 사실은 다른 것과 비길 수 없으리만치 커다란 놀라움을 준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으로 발견한 새로운 사실 때문에 케플러의 태양중심설을 지지하는 그룹에 속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종교재판에 두번이나 회부되었다. 첫 번째 약식으로 진행된 종교재판에서는 갈릴레오에게 향후 태양 중심의 우주론을 우주의 현실이라고 가르쳐서는 안된다고 금지했지만, 천문학적 · 수학적 가설로 주장하는 것까지 금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1633년 4월에 있었던 두 번째 정식 재판에서 갈릴레오는 고문의 위협에 소신을 굽히고 말았다. 그가 재판장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다.”고 말했다거나 재판 기간 중에 고문을 받았다는 말은 사실 다 후세가 만들어낸 이야기다. 갈릴레오는 재판은 받았지만 바티칸 궁전 안에 거주했고 하인의 시중도 받았으며 또 건강이 나쁘고 고령이라는 점 때문에 가택 연금 정도로 감형되었다.
이러한 갈릴레오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갈릴레오 박물관에는 그가 제작했던 군사용 컴퍼스 · 기하학 컴퍼스 · 무장된 자철석 · 빗면 낙하 실험 장치 · 목성의 위성을 발견할 때 사용했던 망원경 렌즈 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흥미롭게도 이곳에는 100년 동안 사라졌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찾은 ‘갈릴레오의 오른쪽 손가락’과 ‘치아’를 볼 수 있다.
1642년에 사망한 갈릴레오의 시신은 95년 만인 1737년에 피렌체 산타크로체 성당으로 이장되는데, 이때 그를 광적으로 따르던 추종자들이 그의 시신 일부를 훔쳐 도망쳤다. 특히 이들 중 안톤 프란체스코 고리라는 사람은 갈릴레오의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을 가져갔는데, 하늘을 향하고 있는 갈릴레오의 가운뎃손가락은 1905년까지 수집가들 사이에서 비밀리에 거래되었다가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러다가 최근 한 수집가의 눈에 띄었는데, 그동안 이탈리아의 한 후작이 보관하던 것을 그의 후손이 내용물이 무엇인지 몰라 경매장에 내다 팔았던 모양이었다. 내용물이 신체 일부라는 데 호기심을 가진 수집가가 이것을 과학사 박물관 및 피렌체의 문화 관련 관료와 학자들에게 자문을 의뢰했고, 결국 갈릴레오 박물관은 그것이 갈릴레오의 신체 일부임을 밝혀냈다. 거의 300년이 다 되어 피렌체는 갈릴레오의 신체 일부를 되찾게 된 것이다.
갈릴레오 박물관의 전시물, 안토니오 산투찌의 혼천의
2013년부터 갈릴레오 박물관에서는 아주 특별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동전에 들어 있는 과학(Science in Coins)’이 그것이다. 15세기부터 20세기까지 주조된 403개의 동전과 각종 메달을 통해 과학의 역사적 성과를 보여 주고 있다. 누구나 짐작하듯이 17세기 동전들 중에는 갈릴레오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전이 전시되어 있다. 1680년경에 청동으로 주조된 72mm 크기의 갈릴레오를 그려 넣은 동전에는 앞면에 갈릴레오의 얼굴과 ‘GALILEVS LYNCEVS - AETAT L(50세 때의 모습)’라는 글자가, 뒷면에는 그가 사용한 망원경과 다음 글귀가 새겨져 있다.
“NATVRAMQVE NOVAT - MEMORIAE OPTIMI PRAECEPTORIS VINC. VIVIANUS.”
“자연의 법을 바꾸다 - 스승의 기억에 부쳐. 비비아누스.”
피렌체의 정신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빈치 지방에서 태어난 레오나르도(Leonardo da Vinci)’라는 이름이 말해 주듯 ‘성’을 가지지 못한 채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그가 도시 피렌체를 만난 것은 14세 때로, 당시의 대표 화가이자 ‘대스승(그레이트 마스터)’이었던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공방에 도제 견습생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화학과 금속학, 수학과 해부학, 시각생리학과 원근법 등 화가가 되는 데 필요한 다양한 기술을 배우고 열심히 습득했다. 20세가 되던 해 그는 예술가와 의사로 구성된 피렌체 화가 조합에 가입하고 정식 회원이 되었으며 이제 독립해도 좋을 만큼 충분한 실력을 갖추었다. 하지만 그는 베로키오를 돕기 위해 10년을 더 피렌체에 머물렀다. 30세가 될 무렵에야 그는 겨우 도제를 마감하고 정든 피렌체를 떠나게 되었다.
다빈치는 나중에 다시 피렌체로 되돌아오는데, 돌아오기까지 17년 동안 밀라노에서 보냈다. 그가 왜 밀라노로 떠났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아마도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작이 자신의 예술적이고 과학적인 능력을 키워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찾아간 그에게 스포르차 공작은 화장실 하수도를 놓는 일, 중앙난방시설을 설치하는 일 그리고 밀라노 공의 연회를 연출하는 잡다한 일을 맡겼다.
이에 주눅 들지 않았던 다빈치는 연회 때 정교한 의상과 가면, 신기한 기계 등을 선보임으로써 손님들의 칭찬을 받았고, 결국 스포르차 공작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는 이후 전속 화가이자 군사 기술자이며 건축가로 일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과 교류했고, 식물학 · 광학 · 수력학 · 천문학 · 해부학 등 온갖 분야에 대한 관심을 키워 나갔다. 특히 그가 1495년~1497년에 걸쳐 그린 <최후의 만찬>은 미술가적 천재성과 과학적 구도의 완벽함을 보여 주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다빈치가 다시 피렌체로 돌아온 때는 1499년 프랑스 왕 루이 12세가 밀라노를 침입할 무렵이다. 대략 1503년부터 약 4년에 걸쳐 그렸지만 미완으로 남겨진 위대한 걸작 <모나리자>는 바로 이 시기에 탄생한 것이다. 피렌체 대부호 지오콘다의 아내를 모델로 삼아서 ‘리자 부인’이라는 뜻의 ‘모나리자’로 칭한 이 작품은 눈썹이 없는 것에 대해 사람들의 말이 많았다. 미완성이어서 그렇다는 주장과 복원 과정에서 지워졌다는 주장이 맞섰는데 최근 과학자들의 분석 결과는 처음에 눈썹이 옅게 그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모나리자의 가장 큰 매력은 웃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은은한 미소인데, 몇 년 전 미국과 네덜란드 과학자가 공동 개발한 감성 인식 소프트웨어로 그 미소를 분석했더니 행복한 감정이 83%, 혐오 9%, 두려움 6%, 화 2%가 섞여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관람했으며, 가장 많은 책에서 인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많이 노래로 소개되거나 패러디된 명화인 <모나리자>는 현재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모나리자>가 이렇게까지 유명하게 된 데는 1911년에 발생했던 도난 사건의 영향이 컸다. 프랑스 언론은 루브르 박물관의 관리 소홀을 맹렬히 비판했고, 경찰은 심지어 화가 피카소까지 용의선상에 두고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다. 2년 동안이나 미궁에 빠져 있던 이 사건은 어느 날 피렌체에서 거짓말처럼 해결되었다. 모나리자의 액자를 만드는 작업에 참여했던 페루자라는 화가가 10만 달러에 <모나리자>를 팔려고 우피치 미술관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황당한 것은 그가 재판장에서 진술한 내용이었다.
“내가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를 가지고 태연히 걸어 나올 때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피렌체의 화가가 피렌체의 여인을 그린 그림을 조국의 품에 되돌려주기 위해 가져온 것이 잘못인가?”
다시 피렌체에 머물면서 다빈치는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는 이제 회화보다는 수학 연구에 더 몰두했으며, 매일의 생각과 연구를 꼼꼼하게 메모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30년 동안 계속된 이 메모 습관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그의 미술, 문학, 과학의 원리를 재현할 수가 있다. 그의 친필 노트가 가장 많이 보관된 곳은 영국 윈저 성의 왕립 도서관으로 약 600쪽 정도가 보관되어 있는데, 그 가치가 우리나라 돈으로 6조 원이 넘는다고 한다.
다빈치의 설계를 토대로 제작된 군함과 글라이더
그는 수백 장의 스케치를 남겨 놓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총포와 대포를 싣고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일 수 있는 전차, 적의 포탄이 외벽을 뚫더라도 여전히 떠 있을 수 있는 선체가 2중으로 된 배, 태엽으로 조정되는 시계,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리는 기중기 등이다. 특히 그는 비행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새가 날아가는 원리를 알기 위해 자세히 관찰했으며, 다양한 비행기구를 기획했고 낙하산, 행글라이더와 네 사람이 힘을 모아 움직이는 헬리콥터까지도 구상했다.
그는 또 사체에 대한 해부가 의학 대학교 해부실 말고는 엄격하게 금지되던 상황에서 30여 구의 사체를 직접 해부하고, 이를 소와 새 등 동물의 구조와 비교했다. 시체를 냉동시킬 방법도, 방부제도 없던 시절에 시체 썩는 냄새를 참아 가며 오랜 시간 동안 수행한 해부 결과는 그가 남긴 인체 해부도 등에 자세하게 담겼다. 그가 남긴 200여 개의 인체 묘사도는 “끔찍할 정도로 분해된 시체들과 밤마다 함께 지내며” 고통을 참아 낸 노력의 산물로 이후 그의 연구는 해부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과학기술과 문화 예술의 융합이 새로운 창조성의 원천으로 주목받는 작금에 갈릴레오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도시 피렌체에 남긴 ‘흔적’은 도시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기억이 더해져 오늘도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 내고 있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피렌체 : 갈릴레오 박물관 - 과학계의 최강 듀오, 다빈치와 갈릴레오를 만나다 (세계의 과학관, 2015. 10. 25., 조숙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