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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6일(사순절 후 첫 번째 주일)
누가복음 18:1-8
낙심을 이기고 기도하면 응답의 기쁨을 누립니다.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영국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은 “진정 위대한 일은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끈기에 의해 이루어진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미국의 제30대 대통령인 캘빈 쿨리지(Calvin Coolidge)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끈기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재능도 대신할 수 없다. 재능이 있지만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너무나 많다. 천재성도 대신할 수 없다. 이 세상은 교육받은 부랑자들로 가득하다. ‘끝까지 밀고 나가라’라는 구호가 여태까지 인류의 문제를 해결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석공이 큰 돌을 쪼개기 위해서 망치로 돌을 100번을 내리쳤습니다. 하지만 돌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101번째 망치를 내리치자 돌이 둘로 쩍 가라졌습니다. 마지막 타격만으로 돌이 갈라진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101번째 망치질이 없었다면 돌은 갈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인호, 「기도하면 달라진다.」(서울: 두란노, 2021); 「생명의 삶 플러스」(서울: 두란노, 2022년 3월호), p. 17에서 재인용.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기도’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기도해 왔고, 기도의 응답을 경험해 왔으며, 앞으로도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믿으며,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도하면서도 너무나 자주 낙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도 기도를 포기하고 싶은 충동을 너무나 자주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그렇게 중요하고 확실한 것이라면,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완벽한 해답을 제시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기도하면서도 너무나 자주 불확실성의 문제를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재판장이 좋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챘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는 좋은 재판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재판장에게 요구되는 첫 번째 덕목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재판장은 사람을 위하여 재판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하여 재판할 것인지를 먼저 결정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재판장이 재판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입니다(대하 19:6).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재판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에게서 좋은 판결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이 재판장은 사람을 무시했습니다. 좋은 재판장에게 요구되는 덕목 중에 하나는 사람에 대한 이해와 공감능력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공감하지 않고, 그저 법전만 딸딸 외워서 내리는 판결이 좋은 판결일 수는 없습니다.
몇 해 전에 우리 사회를 훈훈하게 했던 판결이 있었습니다. 박주영 울산지법 부장판사 이야기였습니다. 청년들 몇 명이 동반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해서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박주영 판사가 청년들에게 “부디 잘 살아 달라.”는 말을 남기고 그들을 선처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청년들이 돌아갈 때 따뜻하게 차비까지 건네주었습니다.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이 판사를 칭찬하는 댓글이 많이 달렸습니다. 심지어 ‘박주영 판사의 DNA를 복제해 모든 판사를 박주영 복제인간(클론)으로 대체하자’는 댓글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박주영 판사가 다른 성범죄에 대해서 내린 판결 기사를 읽은 사람들은 박주영 판사를 비난하는 댓글을 많이 달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재판을 통해 그 판사를 판단합니다. 실제로는 판사 한 사람인데, 재판 결과에 따라 그 사람이 영웅이 되기도 하고, 악당이 되기도 합니다. 모든 재판에는 양면성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판사는 언론에 휘둘려서는 안 되고, 자신이 내린 판결을 통해 세상과 소통해야 합니다. 박주영 판사는 “좋은 재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좋은 재판은 승패에 무관하게 당사자가 만족하는 재판이죠. 친절한 진행, 세심한 기회 제공, 정당한 결론과 설득력 있는 판결 등일 겁니다. 하지만 핵심요소를 한 가지만 들라면 ‘좋은 판사’라고 하겠습니다. 좋은 판사가 좋은 재판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듣고, 신중히 판단하고, 공감하는 재판이 좋은 재판의 예가 될 수 있지만, 당장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면 앞뒤 가리지 않고 신속하게 개입하는 재판이 더 좋은 재판일 겁니다. 나쁜 판사가 좋은 재판을 할 수는 없습니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11070600025&code=940301#csidx0ed2923882637c8982846e03a9fb941
좋은 판사가 좋은 재판을 합니다. 그러나 나쁜 판사가 좋은 재판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2020년 9월 ‘법원의 날’에 좋은 재판을 해온 공로를 인정받아 대법원장 표창을 받았던 박주영 판사의 이야기입니다.
자, 예수님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재판장에게서 좋은 재판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었습니다. 이 과부는 자주 재판장에게 가서 자신의 원수에 대한 자신의 원한을 풀어 달라며 애원했습니다.
자, 어떤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이 재판장은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이었습니다. 이런 불의한 재판장이 하찮은 과부의 요청에 관심이라고 기울였겠습니까? 이 과부가 사회적으로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개정개역판 성경에는 3절을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표준새번역 성경에는 이 구절을 “내 적대자에게서 내 권리를 찾아 주십시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과부는 자신의 부당한 이득을 취하거나, 사사로운 원한 관계를 해결받기 위해 재판장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과부는 적대자로부터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재판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과부의 노력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재판장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혀 해결의 실마리가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4절에 보면,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재판장의 인격이나 자질로 보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얼마동안 듣지 않다가 후에 그의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과연 그 계기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 한 음성으로 4절과 5절을 읽겠습니다.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과부의 끈질긴 간청은 재판장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재판장이 생각할 때, 이 과부는 자신의 원한이 풀릴 때까지 자신을 찾아와서 괴롭게 할 사람이었습니다. 재판장은 과부의 상황이 얼마나 딱한지, 과부의 권리가 얼마나 정당한 것인지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을 귀찮게 하는 것이 싫었을 뿐입니다. 과부가 지닌 가장 강력한 무기는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태도였던 것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5절에 기록된 “괴롭게 하리라”는 헬라어 표현이 “눈을 쳐 멍들게 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과부의 끈질긴 요청으로 인해 재판장이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될 것임을 예측하게 됩니다.
자, 이제 이야기는 종반전을 향해 달려갑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했던 "불의한 재판장"은 이제 "하나님"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십니다(시68:5).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했던 “과부”는 이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로 바뀌었습니다.
여러분은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셨습니까? 네, 들으셨습니다. 불의한 재판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재판장은 과부가 자신을 번거롭게 하니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고 말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과연 오래 참으시겠습니까?
예수님은 단언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8절 상).”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 한 가지 의문점을 더하셨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8절 하)”
예수님의 질문은 회의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에게서 믿음을 보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노아의 때(눅 17:26-27)’와 ‘롯의 때(눅 17:28-29)’에 세상 사람들에게서 믿음을 보기가 어려웠던 것과 유사합니다.
애초에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던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1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제자들이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마치 과부의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간청이 불의한 재판장을 움직였던 것처럼, 제자들도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믿음이었습니다.
이쯤해서, 우리는 혼란에 빠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일종의 혼란과 충돌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에서 “얼마 동안(4절)”이라는 시간이 강조됩니다. 불의한 재판장은 과부의 간청을 “얼마 동안” 듣지 않다가, 끈질긴 여인의 태도를 보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속히(8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드리는 기도가 “얼마 동안” 응답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큰 이의가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마치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곧바로 물건이 나오는 자판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즉시” 그 기도가 응답된다면, 우리는 또 얼마나 교만해지겠습니까? 내가 기도를 잘 해서, 하나님이 나만 특별히 사랑하셔서 기도하는 족족 “즉시” 응답된다고 착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드리는 기도 중에 ‘어떤 기도’는 너무나 더디게 응답이 됩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드려서 내 생전에 응답되지 않는 기도제목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기도하다가 낙심하게 됩니다. 우리는 종종 기도 응답이 더디거나, 응답될 가능성이 희박한데 무슨 이유로 헛된 힘을 빼느냐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겠다는 약속이 우리 귀에 거짓말처럼 들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기도가 우리의 일상적인 기도응답을 다루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기도응답에 대한 약속은 누가복음 11장에서, 한 밤 중에 찾아온 친구를 위해 떡 세 덩이를 구하는 기도로 나타납니다.
누가복음 11장에서는, 우리의 기도의 대상으로서, 한 밤 중에 찾아온 굶주린 친구가 나옵니다. 그리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기도 응답의 약속이 나옵니다. 이것은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기도응답의 약속입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은 종말론적인 시각을 다루고 있습니다. 8절 하반부에서 누가는 “인자가 올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다가 낙심하는 이유는 이 세상을 공의로 다스리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1장의 주기도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라가 임하시오며(눅 11:2)”라는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일상적인 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드려야 할 또 하나의 기도는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어쩌면 불의한 재판장을 찾아가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찾게 해 달라는 과부의 기도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일상적인 기도이면서, 동시에 공의로 그 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위한 기도였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권리’를 속히 찾아주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에 비로소 성취될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기도는 우리가 즉시로 응답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속히 그 권리를 찾아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속히”가 “즉시”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속히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지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 때와 시간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께서는 우리에게 오래 참으셔서,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고 계실 뿐입니다(벧후 3:8-9).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정 가운데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교회와 민족과 세계 열방 가운데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항상 기도하되 낙심하지 마십시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할 때,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권리를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기도응답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이 세상에 불의와 악함이 기승을 부리더라도, 여러분은 항상 기도하되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불의한 재판장 앞에 나아가 “나의 권리를 찾아 주소서”라고 외쳤던 과부의 끈질긴 기도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야기기를 하나 전해 드리고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이야기의 제목이 특이합니다. ‘골골 팔십’의 기도입니다.
나의 어머니는 고생을 많이 하셔서 그런지 젊은 날부터 몸에 병을 달고 사셨다. 처녀 때는 10년만 더 살면 한이 없겠다고 하셨고, 결혼하셔서 우리 삼 남매를 낳고는 이 아이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살면 한이 없겠다고 하셨고, 다음에는 아이들 시집 장가는 보내고 가야 할 텐데 하셨다. 그런데 어머니는 삼 남매가 다 결혼해 맏손자들이 대학생이 된 지금까지도 건강하게 잘 살고 계신다.
가끔씩 아버지가 “당신 옛날부터 10년만 더 살면 좋겠다고 하더니, 정말 오래 잘 버티네?”라고 농담을 하시면, 어머니는 장수 비결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건 내가 일찌감치 내 주제 파악을 잘했기 때문이야. 내 몸이 약하다는 걸아니까 항상 조심을 했어. 그런데 건강한 사람들은 오히려 교만하게 자기 건강은 걱정 없다고 큰소리 뻥뻥 치다가 큰 코 다치는 경우가 많더라.”
어머니의 희한한 장수 비결을 나는 웃으면서 들었지만, 자신의 연약함을 늘 인정하고 조심했던 모습에서 겸손을 느낄 수 있었다. 영적인 세계에서 기도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모든 문제를 자기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수퍼맨적 사고방식보다, 골골팔십의 자세로 평생 기도해야 하리라.
-한홍, 「기도, 하늘의 능력을 다운로드하라」(서울: 생명의 말씀사, 2010); 「생명의 삶」(서울: 두란노, 2012년 9월호), p. 31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골골팔십의 기도’를 배우십시오. 짧고 굵게 살려고 하지 말고, 가늘고 길게 살려고 하십시오. 일생 기도의 자리를 잘 지키십시오. 기도 응답이 더디다고 낙심하지 말고, 항상 기도에 힘쓰십시오. 특별히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십시오.
여러분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할 때, 이미 여러분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권리를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기도가 지금 즉시 응답되지 않더라도, 속히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반드시 응답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의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우리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여러분의 믿음을 잘 지켜 나가시길 바랍니다. 우리 함께 기도의 자리를 잘 지킵시다.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기도의 응답이 더디더라도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