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산을 품다 / 권정숙

[김도환]

2016년 포항소재문학작품공모전 최우수상 적산을 품다 / 권정숙

바닷바람이 짭쪼롬하게 불어온다. 담도 없이 어깨 결은 집들이 양쪽에 늘어서 길을 만들었다. 찻집 후루사또야 앞에 청춘 한 쌍이 카메라를 보며 활짝 웃는다. 유카타에 게다를 신은 일본인이다. 조상의 흔적을 찾아온 모양이다. 저들은 어제의 영광을 필름에 담고 나는 가슴 아린 그날의 역사 속을 걷는다.

구룡포 적산가옥거리에 들자 작은 내 키가 한 뼘 더 커 보인다. 단층과 이층이 키를 재지만 너나 할 것 없이 나지막하다. 목 좋은 곳은 상점을 내고 조망 좋은 곳은 살림집을 지었다. 기울기가 심한 양철지붕, 네모반듯한 유리 창틀, 오막조막한 건물들. 시간이 흘러도 포구를 떠나지 못하고 남은 풍경들이 여기가 한때 조선 속의 일본이었음을 전한다.

과거는 땜질해도 아픈 흔적까지 다 가리진 못하나보다. 칠이 벗겨진 곳은 페인트로 덮고 해진 곳은 나무를 덧댔다. 건물 측면은 색이 바래고 담장은 시멘트가 떨어져 나가 얼룩덜룩하다. 우리 역사에도 저리 남루한 시절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그리 편치는 않다.

휘어진 골목 어귀, 검은 집 가슴팍에 액자가 가득 매달렸다.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보니 오래 전,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의 사진들이다. 정신대로 차출된 여옥, 조선인 학도병 최대치, 반전운동가 장하림이 ‘여명의 눈동자’를 굴리고 있다. 우리는 그 시대의 아픔을 잊지 못해 드라마로 되살렸다. 사진을 보니 드라마의 여운이 되살아난다.

묵직한 시간들을 가누지 못했을까. 주인이 떠난 이층집은 향나무가 비스듬히 누워 마당을 지키고 있다. 누워있는 향나무가 마당을 지키는 이층집이다. 잔디와 정원수, 석등과 석탑, 언뜻 보아도 돈 많은 선주집이다. 집주인 하시모토가 풍어를 기원하며 두 손 모았을 정원의 석탑이 어쩐지 낯설다. 네모난 접시를 크기순으로 포개 놓은 듯한 기단을 오른다. 곳곳에서 묵은 기원의 말들이 히라가나로 꼬물꼬물 기어 나올 것만 같다.

일본에서 실어 온 목재로 지은 집이다.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조심스레 오른 이층 창가, 새벽이면 닻을 올리고 저녁이면 만선들로 흥청대는 포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일꾼들을 바라보며 뒷짐 진 하시모토가 서 있는 듯하다. 이 자리에서 선주는 하루 수익을 셈 했을 게다. 두 눈엔 푸른 욕심이 넘실대고 입가엔 느긋한 미소를 흘리며.

씁쓸한 마음으로 등을 돌린다. 널찍한 다다미방에 사무라이들이 휘둘렀을 법한 장검이 칼끝을 숨긴 채 칼집에 꽂혀 있다. 그들을 지키던 신들도 그들을 따라 떠났을까. 신위를 모신 벽 안의 감실이 썰렁하다. 텅 빈 오시이레 앞, 만장처럼 장대에 두 팔 벌린 기모노가 주인이 돌아오지 않는 빈 집을 지킨다.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동해바다는 물 반 고기 반이었다. 가난한 일본의 어부들이 고등어나 청어등속의 고기떼를 쫓아 목숨 걸고 건너 왔다. 그들에게 구룡포는 엘도라도였다. 천여 명이 넘는 일인들이 몰려 와 그들만의 도시를 이루며 살았다. 엄청난 부를 이룬 흔적이 거리 곳곳에 남아있다.

계단마다 줄 선 120개의 석주 사이로 오른다. 열 마리 용 중, 승천하지 못한 한 마리가 빠져있을 구룡포 앞바다가 훤히 보인다. 하늘로 오른 아홉 마리 용이 공원 왼쪽을 지키고 내용을 알 수 없는 송덕비가 바다를 향해 서 있다. 식민지를 깔고 앉아 오래도록 영화를 누릴 줄 알았을까. 방파제 축조와 도로개설에 기여한 일본인의 공을 기리기 위해 해방 한 해 전에 건립된 석주와 공덕비다.

모두 백지였다. 석주에 새긴 일본인 이름도 야스브로의 비문도 성난 구룡포 주민들이 뭉개버렸다. 패전 이후 일본인들이 허겁지겁 돌아간 뒤였다. 더러는 시멘트를 벗겨내고 복원하는 것이 진정한 포용이 아니냐고 한다. 구룡포에서 태어나고 자란 분이 목소리를 높인다. 내 할아버지 할머니의 맺힌 한에 비하면 천만분의 일도 안 되는 분노의 표출은 마땅히 남겨져야 한다고. 저들이 생색내는 도로와 방파제는 그들을 위한 것임을 모르는 구룡포인은 없다고.

외세로부터 침략만 받아오던 민족에게 억압과 수탈은 익숙했는지도 모른다. 일부는 저항하고 대다수는 순응하며 살았다. 마지못해 부역을 나갔고, 내 어장의 고기를 잡아다 바쳤다. 수많은 ‘여옥’이 여자인 것이 한으로 남을 일을 스스럼없이 해치운 그들에게. 저항조차 할 수 없는 민초들은 고기의 배를 가르며 분을 삭였으리라.

일제 강점기는 돌아보고 싶지 않은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다. 치욕의 흔적이자 지배자의 잔재는 숱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남의 땅에 이름을 새긴 것도, 그것을 지워버린 행위도, 그것에서 교훈을 찾는 몸짓도 모두 기록되어야 할 역사다.

백여 년 전 번화했을 거리를 되짚어 나온다. 점방과 찻집과 식당을 기웃거린다. 유카타 차림의 한 무리가 셀카봉을 치켜들고 걸어온다. 제2의 고향이라며 일본인들이 찾기도 하고 한국인들이 관광차 들리기도 한다. 과거를 돌아보고 가는 저 카메라엔 무엇이 클로즈업 되어 담겼을까.

구룡포는 아픈 과거사일지언정 덮어서 가리지 않고 드러내어 품었다. 침략자들이 살다 간 집도, 정원수도, 다다미방도, 우리의 목을 겨눈 칼마저도. 하물며 추억을 찾아 바다를 건너 온 그 때 그 시절의 사람들도 반겨 맞는다. 적국이 남긴 재산, 적산이 문화의 거리로 자리매김 했다는 것은 다름 아닌 포용이다.

유난히 빨간 우편함이 많은 길에 섰다. 인간이 만든 역사는 음모, 질시, 침략, 전쟁으로 점철되어있다. 더는 이 땅에서 아픈 일이 없기를 바라며 내일로 편지를 쓴다. 역사의 흔적은 말이 없고 거기서 교훈을 찾는 것은 인간의 몫이므로.

석양을 안고 배들이 돌아온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는 어부들이 고단한 하루를 누인다. 항해에 지친 배들을 품는 곳, 포구에서 나도 아픈 역사를 품는다.

[난다신 이영희]

가까운 나라 일본은 불가근불가원의 나라죠
요즈음도 많이 삐걱거리는......
역사를 생각해 보는 좋은 작품 올려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노자(노애자)]

'내 어장의 고기를 잡아다 바쳤다.'
우리의 아픈 역사(과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