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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谷先生文集卷之一 / 詩 / 西山書院
遺祠䨓首下。瞻仰肅余容。雙節精忠幷。一門正氣鍾。義明蹈海志。地接採薇蹤。灑落多觀感。淸風起懦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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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谷先生文集卷之一 / 詩
庚申四月。往興巖書院。祗謁奉審。退坐講堂。遠近士林多來會。以小學設敎。三從弟文吾自報恩亦來參席。拈櫟泉集韻。
철종 | 11 | 1860 | 경신 | 咸豐 | 10 | 70 | 1월, 사직소를 올려 休致를 청하고, 겸하여 二綱八目에 대해 진달하다. ○ 4월, 興巖書院에서 강하다. 忠義壇, 西山書院을 방문하다. ○ 6월, 三川書院을 방문하다. |
洛波萬折亦流東。吾祖盤旋尙有風。敎在藏修絃誦習。禮尊妥享豆籩豐。緬懷薇採西岑上。獨抱麟經左海中。欽仰楣間華衮語。於戱沒世意無窮。右謁祠廟。
高闢緇帷日上東。朱編講討振儒風。築先基底終能達。耕自心田始得豐。濟濟襟紳環席上。洋洋講誦滿堂中。勖哉吾黨勤磨琢。且就訓蒙仔細窮。右賦講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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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谷先生文集附錄 / 年譜
庚申 先生七十歲。
正月 丙寅 戊辰。有衣資食物賜給及存問之命。以先生壽躋七旬。有是命。俾每歲首輸送。 辛未。上疏辭職乞休致。兼陳二綱八目。䟽見文集。○批曰。旣有堯舜君民之志。而懷道長往。不我惠然者。不無慨然于卿矣。至於引年之請。何必如是而後可乎。予方凝佇。毋庸更申。俟間登途。用答至意。 辛巳。上疏辭衣資食物。䟽見文集。○批曰。所賜衣資食物。卽尙齒尊賢之義例。卿何必過加巽辭乎。此乃先修碩德甞所俛膺者。而顧今林下耆舊。以經術匡輔。憂國惓惓之誠。惟卿一人焉。則予安得不特施優典於卿也。卿其安心領受。幡然簉朝。庸副予側席之望。 ○二月 丙申 乙卯。上疏引咎。先生正月䟽中。有大官習於糊塗之語。左相朴晦壽自引請免。故先生上䟽申辨。䟽見文集。○批曰。儒賢引年。非曰無故事。而以予凉德所側席者。卿之幡然。則予何可曲副乎。至於大僚筵奏。不過泛言而已。卿旣以深看爲言。予則曰卿亦深看。望卿更勿以此爲引。不日簉朝。匡輔予不逮焉。○此因左相朴晦壽登筵辭免。有曰向來儒賢䟽中習於糊塗云者。果是着題語也。旣居其位。絲毫蔑效。則尸素之譏。固所當來。他山之攻。臣方拜受不暇。何敢以此爲引。而俯仰慙恧。尤無以自措云云。 ○四月 乙丑 丙戌。行講會于興巖書院。繼行鄕飮酒禮。會者八十餘人。
尋忠義壇,西山書院。○六月 癸亥 辛巳。往尋三川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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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谷先生文集卷之十七 / [墓表] / 伴鷗堂蔡公墓表 甲子
고종 | 2 | 1865 | 을축 | 同治 | 4 | 75 | 5월, 상소하여 萬東廟에 대한 일을 논하다. 공조 판서가 되다. ○ 10월, 대사헌이 되다. |
曩在中廟己卯北門禍作。一時賢俊。擧盡於碪斧之下。此豈但衮,貞輩兇謀搆成哉。殆天不欲使我東被文明之化也。覽其黨籍。至今猶爲志士之興喟。今此蔡公遺蹟。當其士禍之時。見幾色擧。超然獨免。似漢之申屠蟠。而其風節垂後。不可二視於當時被禍。豈不休歟。公生於成化乙巳正月十八日寅時。天資孝友。早登司馬。以學行除安東敎授。興靜庵趙先生相善。而無意進取。弟允龜亦以進士除敎授。携與偕隱于燕公之間。號伴鷗堂。及趙先生中賢良科。公歎曰。此其危哉。後聞趙先生以大司憲。被禍于綾城。尋賜死。公痛哭于合江亭上。因作詩曰。水合雙襟碧。山浮一点靑。南昌仙去後。白首獨登亭。又題亭扁曰。江山麗。明沙好。主人睡。人伴鷺鷺伴人。江干有石。可坐數人。兄弟逍遙之暇。或誦讀於石上。後人稱之以讀書臺云。嘉靖丙午十二月十七日。卒于燕岐合江里。享年六十二。葬于縣東圖峰負艮之原。
蔡允浩 | 1485 | 1546 | 仁川 | 養吾 | 伴鷗堂 |
公諱允浩字養吾。上祖貞簡公忠順。事高麗顯宗。官至平章事。封于仁川。因以爲貫鄕而世襲簪纓。至後孫貴河。官戶曹典書。麗社北牖。隱于杜門洞。卽七十二賢中一。而號多義堂。享于尙州
蔡貴河 | 13?? | ? | 仁川 | 多義堂 | 貞義 |
熊淵(熊淵 書院),大邱西山書院。入本朝。參議昇。縣監宗賢。佐郞蕃禮。進士孝範。卽公之高曾祖禰也。妣全州李氏。正郞珏女。配安東金氏。進士時仲女。有淑德。後公二年戊申卒。與公同窆。有二男。曰祥曰禎。皆以文學聞。祥二男。軫星,畢星。曾玄以下。多不盡錄。今公之十二代孫宗漢。託余爲銘。而公之世遠矣。屢經兵燹。遺稿散佚。只有五絶與亭扁數三句語。幸以尙傳。一臠足以知全鼎。何必多乎哉。遂就此撮書于石。斯足以不朽公矣。又何待余言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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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谷先生文集卷之十五 / 墓誌 / 姊夫縣令李公墓誌 甲寅
철종 | 5 | 1854 | 갑인 | 咸豐 | 4 | 64 | 9월, 長子 宋恪老의 高山 任所에 가다. |
公昔委禽而來。軒然碧梧之秀。挹其內則玉溫氷潔。先君嚴毅簡默。寡許可。每稱公眞實誠愨。來煕雖蒙騃。己心識之。乙未夏。余縻官入京。訪公于蕉泉之衖。公亦已尋仕路。而蕭然孤居。不改寒素㨾。欵余留止。或終晷永夕。而接其辭氣。靜如古井。淡如大羹。淸坐相對。始若無味。而然談論之及於邪正淑慝。同異得失。亦劈劃精微。凜乎不撓。余益動聽嚮仰。而伊後十餘年。遂成離濶。公遽下世矣。余今跧伏窮鄕。齒髮益衰。久謝筆硯。而公之仲弟應在。以書來託公幽誌。來煕固不敢當。亦何敢終辭。公諱憲在。字穉章。其先韓山人。麗季有稼亭牧隱二先生最大顯。世襲簪冕。七傳而至諱慶流。文佐郞。殉節于倭亂。贈職旌閭。享于
李慶流 | 1564 | 1592 | 韓山 | 長源 | 伴琴 |
尙州忠義壇。有孫曰諱廷夔官吏參號歸川。與二宋先生爲道義交。是生諱涬。郡守。受業於尤翁門。己巳後棄官。仍不出。公之五世祖也。高祖諱秉哲參奉。曾祖諱華重郡守。祖諱舒永府使。長子學生羲簡早卒。第二子府使羲贊。出后於叔父僉樞諱周永。娶延安金氏牧使槃之女。繼娶密陽朴氏正言猷煥之女。公是金氏出也。僉樞公廼命公爲學生公後。所後妣杞溪兪氏。縣監洪柱女也。公以正宗乙巳十二月十一日生。資質端重。擧止詳愼。由其素性而一於純實。中辛卯司馬。癸巳。授西部都事。旋移翊衛司侍直。陞活人署別提,秋曹佐郞,正郞。丙申。出監洪川縣。己亥。爲掌苑署別提,宗簿寺主簿。庚子。除臨陂縣令。甲辰。爲司甕院主簿。冬。遭府使公憂。哀毁踰制。未及再期。卒于憲宗丙午八月十六日。壽六十二。用其年十月。葬于結城三山先壠之某坐原。配恩津宋氏。郡守諱啓楨女。同春堂文正公諱浚吉七世孫也。先公十有四年而卒。葬于結城某里某坐原。別有誌。未有産育。取季弟愨在之子承存爲嗣。後配豐川任氏。學生百兼女。承存妻金氏。卽公內舅之孫而健秀之女也。公孝友因心。生甫八歲。金夫人捐世。育于祖母黃氏。事之如母。婉柔順適。每侍府使公。端拱起敬。油油翼翼。言笑行動。不敢放肆而懈怠。左右服勤。克盡子職。季父午堂公生同年而幼相遊。及長。禮貌整肅。坐必偶。應對甚謹。至老不衰。遇諸弟。友愛甚篤。未或以拂言淚色相加。嘗隨府使公之鎭安任所。公纔過弱冠。而刻謹身二字於小牌。藏佩寓警而不使人知。其所用力。恒在於省躬修行。凡世俗芬華博雜之好。無一經意。是以徵逐絶罕。杜門却掃。兀然對一床書。得於靜養有素可知已。晩從蔭仕。畏義守法。東南數邑。爲治寬簡。專務公廉。而未或撓奪於窮乏。槖無近膩。嗚呼。公威重爲質而任其眞卛。不設畦畛。謹飭爲規而篤於行誼。人無間言。浮沉寸祿而淸約自律。跡不及於要路。世之知公者。皆以謂悃愊無華。近於實際。聖人論文質之辨。畢竟斷之以從先進。盖敦本之意也。就此而可以觀公之所存乎。余文旣蕪拙。病又侵尋。神識消亡。縱欲揄揚隱潛而不可得。謹因公仲弟錄示之語。參以誰昔之所覩記。略爲敍次。而亦何敢一毫浮飾。以違公務實之美意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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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谷先生文集卷之十七 / 謚狀 / 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訓鍊院事行折衝將軍薪島鎭僉節制使諸公謚狀
諸景彧 | 1760 | 1812 | 諸敬彧 | 漆原 | 敬植, 景植 | 忠襄 |
公諱景彧。字景植。諸氏爲諸葛忠武侯之裔。有曰長史諱忠。東來。至勝朝有諱漢。以高尙之義。爲王所嘉。命取複姓之諸字爲氏。至諱文儒。佐忠宣王。策三重大匡壁上功臣同平章事。封㓒原。子孫因以爲貫焉。入我朝。有諱沬。當宣廟壬辰島夷之亂。倡義多斬獲。特拜星州牧使。竟以力戰殉節。後贈兵曹判書謚忠壯。寔公之六世祖也。高祖諱汝恢蔭主簿。曾祖諱命珏。祖諱顯泰。皆通德郞。考諱祥富。妣平山申氏。同中樞大賢女也。公以英宗庚辰十一月三十日。生于外家。始産之夜。有光繞屋。外王父同樞公常曰。生膺異兆。骨格非品。必有他日之成就也。甫三歲失怙。母氏哭臨之時。必與之偕。恒以爲度。見者稱其至性。稍長。事母愉婉。盡其愛敬。壬寅遭憂。哀毁踰節。衰絰未嘗去身。每日必展墓。不以風雨或廢。至壬子。正廟曠感忠壯公立殣之事。卽施褒崇之典。錄用後孫。特令公勸武兼。付內禁衛額外壯勇衛。乙卯春。御春塘臺。親試忠勳後裔。射藝賜弓矢。遂擢丙科。特賚錦緞朝衣一襲。仍除武臣兼宣傳官。又命躋忠壯公祠板于忠節祠。竪碑于戰地。皆使公董其事。遷陞訓鍊院主簿。尋出鎭雲寵。捐俸出力。繕修要阨。以爲緩急備。北俗專尙弓馬。少文識。公爲刱書舍。延師訓誨。民多化之。比瓜歸。髫白擁路。有送至百餘里者。以前職陞判官僉正。復出海西虞侯。關防保障之地。蕩然無備。城廨器械之頹廢者。公盡心完葺。叙勞進階折衝。歷五衛羽林將。純廟辛未十二月。關西土寇洪京來等。脇衆倡亂。先犯嘉山。主倅鄭蓍死之。時昇平日久。狃安成習。倉卒臨變。皆惟劫失措。淸川以北州縣。往往有委符屈膝者。賊遂連陷八郡。報至。中外震駭。公解官在家。奮然揮涕曰。吾以吾祖之孫。受先王殊遇之恩。不能效吾祖之以死禦難。何顔立於世。亦何以歸拜吾祖於泉下乎。卽日仗劒而西。壬申元朝。抵平壤。觀察使李晩秀。署以爲淸北召募將。翌日馳入安州。節度使李海愚見公忠義憤發。甚壯之。聞于朝。分城中兵二百餘屬之公。以全允起爲行軍將。鄭云達爲書記。卽夜到淸川江。擊舷作歌曰。壯士奮怒大江平兮。有如此水去不還兮。時嘉山,博川間諸冦。爲安州兵所敗。走入定州。閉城自守。公行募兵。又得百餘人。四日。至城東止陣。靑南北諸軍。皆環屯城外。莫敢與賊交鋒。公謂諸將曰。賊新衂之餘。軍心未定。守備未完。宜及此擊之。若引日留時。使之衆整守堅。非計也。諸將從公言。翌朝分兵爲二起兵。虞侯李海昇,左營將尹郁烈。引兵進於南門。点旗鳴鼓。示其出擊之狀。使倡義將玄仁福卛義兵。持攻城具。先爲備待于東門。公與肅川府使李儒秀,順川郡守吳致壽。隨後進攻。公爲前鋒。手握巨斧。直進斬關。斧下數四。門幾碎。賊衆驚懼登樓。撤板力拒之。矢石雨下。諸軍不敢進。而各自退散。公以隻身羸卒。當堅城全力。勢無容措。不得已遂回本陣。歎曰。兵固死地。而一見矢石。不戰而自潰。紀律如此。將何以辦賊。旣而朝廷拜公爲薪島獨鎭節制使兼淸北防禦將。以李堯憲爲廵撫使。遣中軍朴基豐。領訓局一千兵先至。公見基豐論戎事。持畫明的。辭氣激昂。極言攻城之不可緩。基豐亦聳聽。十五日。京營關西兵合勢大擧。具雲梯衝車。三面幷進。定州牧使徐春輔,博川郡守李運植合兵攻其南。公又居前援抱。奮勇疾趣。城中殊寂若。賊狙伏女垣。伺其近而矢丸齊發。公顧視後軍不繼。梯車亦未到。公躍馬還出而促之。復向城下。時天雨路濘。車陷軸折。後軍又不卽至。公知事不濟。乃麾軍誓衆曰。今日之事。吾與此賊不俱生。麾下士敢有反顧者斬。遂挺身大呼直前。肉薄登陴。飛丸驟至。中額墜馬。公奮髯撫槍。起且仆者累矣。麾下士舁還乃絶。喪至節度營。始就棺斂。已經數日。怒目勃勃。面如生。事聞。上震悼。特贈三道統制使。命㫌其閭。靷葬悉自官庇。且以忠壯公延謚。未及公生前。因大臣筵奏。自度支賜其需。趁未葬行之。返輿之日。一營將士。莫不雨泣而送之。沿道觀者。知與不知。亦皆齎嗟。義之感服。可以見秉彝所同矣。是歲五月一日。葬于坡州鳴鶴山。以宅兆不利。庚戌。移于報恩甑山。辛亥。又移于茂朱東鰲山子坐之原。公歿甫踰月。賊皆破滅。翌年。賜祭于立殣之地。
設忠義壇。以平賊日。祀公及鄭蓍,許沆,韓浩運,白慶翰,林之煥,金大宅。竪碑紀其蹟。定人又立祠五峰山下。幷享壇祀諸義士。命遣官致侑。宣額表節。壬子秋。諸章甫又請進秩。加贈兵曹判書。仍命賜謚。其狀德之文。碑誌之銘。當世大人君子。皆樂爲之揄揚闡發。足爲徵信於來後。朝家隆報之典。羣彦贊頌之辭。更無餘憾。豈不盛哉。配光山金氏。通德郞厚鼎女。一男安國蔭仕武擧。歷郡邑前僉使。二女李復源,南孝百。安國男漢緯縣監,漢網,漢紀,漢綸。女崔範九。公身貌不踰中人。方面郁髯。贍略過人。性又剛毅樸直。遇事敢爲。志之所定。更無撓奪也。自幼內行純篤。人皆稱美。及通仕籍。隨處殫誠。居官。所至具有績。及其效節也。義激于中。不能自已。奮起於千里之程。甘蹈必死無幸之地。戰不旋踵。少無顧悔。嗟乎。人道之大。惟仁與義。仁之於父子。義之於君臣。得之天賦。不以古今而存亡。不以夷夏而豐嗇。則其所在致死之理。人孰無之。然而苟無素養之厚。則平居暇日。高談忠節。而及夫臨利害。遇事變。蒼黃恐劫。忘其仁義之性。斁其綸綱之懿者多矣。可勝歎哉。若公者。其所素養。異乎世之從事於章句文辭之間。而惟全其賦得於天者。推諸孝而移于忠。能辦取舍於急難之際。以樹大節。則其爲世敎之重。國家之光。儘是忠壯之肖孫。尤豈不卓卓乎偉歟。今公之胤子安國。以有易名之成命。要余爲狀。不能以不文辭。其世系官閥及事功大者。略據於諸公撰述。第錄如右。以俟太常之採以上聞。
[주-D001] 贍 : 膽
1 | 경기……청하였는데 | 유생 오성술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연명 상소를 올려,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 순국(殉國)한정시, 백경한(白慶翰), 허항(許沆), 한호운(韓浩運), 임지환(林之煥), 제경욱(諸景彧), 김대택(金大宅) 등 7인의 서원을 건립해 달라고 청하였다. 《承政院日記 純祖 12年 7月 30日》 | 순조(純祖) |
2 | 임신년의 …… 다하였으니 | 임신년의 난리는 홍경래의 난을 가리킨다. 홍경래는 평안북도 평민 출신으로 향시를 통과하고 대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당시 한양에서는 시골 선비에 대한 차별이 심해 관직 진출이 어려웠는데 특히 서북 출신은 조선초부터 고려의 유민으로 구분되어 천한 신분으로 여겨져 더욱 등용되지 못했다. 이에 홍경래는 동료들을 규합하고 1811년 12월에 봉기하였다. 난이 발발한 직후 가산군수 정시(鄭蓍, 1768~1811)는 군민을 모아 적에 대항하려다 사로잡히자 투항을 거부하여 살해당하였다. 한호운(韓浩運)ㆍ백경한(白慶翰)ㆍ박지환(朴之煥)ㆍ허항(許沆)ㆍ제경욱(諸景彧)ㆍ김대택(金大宅) 등 6인도 난리 중에 의(義)를 지켜 모두 순절하였는데, 이들을 칠의사라고 한다. | 매산집(梅山集) |
3 | 제경욱(諸景彧) | ?~1812.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칠원(漆原). 자는 경식(敬植). 무과에 급제했다. 1811년(순조11)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 전사하였다. 삼도수군통제사에 추증되고, 난이 평정된 날에 칠의사사(七義士祠)의 단을 쌓아 제사 지냈으며, 정주의 오봉산(五峯山)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제향 하였다. 시호는 충양(忠襄)이다. | 강재집(剛齋集) |
4 | 제경욱(諸景彧) | ?~1812.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칠원(漆原), 자는 경식(敬植)이다. | 수사록(隨槎錄) |
5 | 제경욱(諸景彧) |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 반란군이 가산(嘉山)을 함락하자 서울에서 평안도 감영으로 가서 출정하기를 자원하니, 관찰사 이만수(李晩秀)가 청북 소모사(淸北召募使)로 차출하였다. 신도 첨사(薪島僉使)에 제수되었고 농성하던 적군과 싸우다가 탄환을 맞고 전사하였다. 삼도 수군통제사에 추증되었다. 《日省錄 純祖 12年 1月 3日, 12日, 16日》 《剛齋集 贈統制使諸公行狀》 | 순조(純祖) |
6 | 제경욱(諸景彧) | 임진왜란 때 순절(殉節)한 충장공(忠壯公) 제말(諸沫)의 후손으로. 홍경래의 난에 소모장(召募將)으로 정주성(定州城) 전투서 전사하였다. 《純祖實錄 12年 1月 16日》 | 순조(純祖) |
7 | 제공 | 제경욱(諸景彧, 1760~1812)으로, 본관은 칠원(漆原), 자는 경식(敬植)이다. 홍경래(洪景來) 난 때 순절하였다. | 강재집(剛齋集) |
8 | 증선천방어사 …… 청합니다 | 《승정원일기》 순조 12년 1월 19일 조에 보인다. | 무명자집(無名子集) |
9 | 칠의사 | 1811년(순조11)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 반군에 항복하지 않아 죽거나 전투 중에 죽은 정시(鄭蓍), 한호운(韓浩運), 백경한(白景翰), 임지환(林之煥), 허항(許沆), 제경욱(諸景彧), 김대택(金大宅) 등을 말한다. 이들을 배향하기 위해 정주(定州)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웠다. 《純祖實錄 24年 6月 9日》 《哲宗實錄 6年 9月 5日》 | 순조(純祖)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