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뻘글이라서 좀 사변적입니다. 추후에 다시 정리를 해보지요. 엑소시즘 영화에 대한 단상- ‘회의(skepticism)’에 대하여 -전후시연구(국문학자), 퇴방 회원 (아래의 글은 무단 도용 및 전재를 금함) 근래에 엑소시즘(exorcism)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충무로에 조금씩 등장하고 있습니다. 「검은 사제들」을 시작으로 「사자」가 두 번째라고 볼 수 있겠네요. 따지고 보면, 「제7의 봉인(1957)」에서 악마와 체스를 두며 자신의 죽음을 지연시키던 한 젊은 십자군 기사의 배역을 맡은 바 있는 막스 폰 시도우가 과거가 무색하리만치 주름 가득한 가톨릭 사제로 나와 어린 소녀의 몸에 들어간 악마(2편에서 이 악마의 정체는 '파주주'로 확인됩니다)와 싸워 끝내 죽음을 맞게 되는 「엑소시스트1(1975)」 이후, 신부가 신의 권능을 대리하여 악마를 물리친다는 '축귀' 또는 '귀신 물리기' 영화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상당히 많이 생산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축귀'는 말 그대로 귀신을 축출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톨릭 의례 중 하나인 '엑소시즘'은 축귀의 하부 장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즉 미성숙한 어린아이가 신비한 권능(마법)을 가지고 절대악과 싸워 승리한다는 해리포터 식의 성장담도 분명히 '축귀'를 바탕으로 하고는 있지만, '엑소시즘' 영화로 분류되지 않는 것을 상기해보면 말입니다.
대체로 '엑소시즘'을 소재로 한 영화의 내러티브는 아주 간단명료합니다. 어느 날 (악마에 의해) 한 희생자로 지목된 사람에게 악령이 씌이고, 백약이 무효하다는 것을 직감한 보호자들이 이성(과학, 의술)의 층위 너머에 있는 초자연적(주술) 영역에 구호를 요청하게 되며, 결국 주술사들이 나타나서 악령을 물리치고 종전의 질서를 회복한다는, 대단히 '단계적이고 순차적인'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영화 평론가들은 엑소시즘 영화든 오컬트 영화든 막론하고, 이 순차적인 스토리라인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사실상 그 영화가 그 영화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관건은 그 평론가가 이야기했던 바와 같이, 어떤 방식으로 연출하느냐, 어떤 내면을 드러내느냐에 있겠지요. 이걸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엑소시스트1」, 「오멘」, 「더 라이트」, 「컨져링 시리즈」 등의 영화들을 보면 이러한 구조가 확연히 드러나는데, 특히 눈 밝은 관객이라면 반드시 앞에 열거된 일련의 영화 목록에서, 또는 목록에 속하지 않더라도 엑소시즘을 소재로 한 영화들에서 아주 높은 확률로 발견되는 공통분모를 알아낼 겁니다. 그것은 바로 '회의(skepticism)'입니다. 아무도 처음부터 '믿었던'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회의(懷疑)’
우리가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고, 거동이 불편하면 구급대를 부르거나 산골 벽촌의 경우 의료진이 왕진을 가기도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문제에서는 완전히 다르게 흘러갑니다. 인류가 '근대성'을 함양하고 소위 말하는 과학, 산업, 기술발전 등을 통해 이전 시대와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발전된 사회와 문명을 이룩하게 되면서 문명의 변두리로 밀려났던, 그야말로 '축출'되었던 이들에게 '굳이' 손을 내밀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회의가 중점적인 문제로 떠오르게 됩니다. 근대화 또는 도시화, 코스모폴리탄이 형성되면서 계속해서 가장 변두리로 밀려나야만 했던 이들은, 근대의학이 발달하기 전 자생적인 민간의료를 담당했던 이른바 무속인 내지는 주술사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과학의 발달로 인해 무속제의들은 사멸해가는 공동체의 옛 문화 정도로만 인식되는 길에 놓였고,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관청이나 지방단체에서 '전통 문화의 보존 대상'으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몸이 아프면 병원을 가지 무당을 찾아가는 일은 그만큼 드물어졌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주술사들에게 구호를 요청하는 일 자체가 대단히 원시적이고 비-문명화된, 비-교양적 행위로 굳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엑소시스트1」에서 카라스 신부의 말을 통해서도 등장합니다. 영화 파일을 갖지 못해 기억에 의존해서 해당 장면을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딸 리건의 광증에 모든 의료적 수단들이 무효로 돌아가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여배우 크리스 맥닐은 교구의 카라스 신부와 거리에서 만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한 질문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다가, 대뜸 맥닐은 '엑소시즘에 대해 물어봅니다.
맥닐: 엑소시즘은 어떤가요? 카라스 신부: (멈칫) 뭐라고 하셨죠? 맥닐: 요즘도 엑소시즘을 하냐구요. 카라스 신부: 아뇨, 이젠 거의 하지 않아요. 맥닐: 언제부터죠? 카라스 신부: 인류가 정신의학이나 우울증에 대해 알고 나서부터죠. 설령 엑소시즘을 한다고 하더라도 교황청의 허가가 필요해요. 맥닐: 신부님. 만약 신부님께서 아는 아이가 악마에 들렸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사이) 맙소사. (울음을 터뜨리며) 바로 제 아이예요, 신부님. 어떡해요? 카라스 신부: 그럴수록 병원으로 데려가세요.
카라스 신부도 이야기하다시피, 엑소시즘과도 같은 주술적 치료행위가 음지화된 원인은 인류문명의 발달 그 중에서도 의과학의 발달에 있습니다. 과거에는 악마에 씌었기 때문에 광증을 보인다고 생각했던 반면, 현대에는 각종 의학이론과 기술을 통해 어째서 광증이 나타나고 그것을 조정하려면 어떤 처방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관리하고 어떻게 약을 투약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시스템'이 갖추어진 것입니다. 이 시스템의 이름은 문명화(civilize)입니다.
이 영화를 보신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크리스 맥닐도 처음부터 카라스 신부와의 면담을 약속한 것은 아닙니다. 제일 처음에는 커다란 병원으로 데려가지요. 그러나 의학적으로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소견을 받죠. 물론 딸의 광증은 날이 갈수록 더해가고, 특히 성상모독까지도 일삼게 되지요. 그런 그녀에게 의대 교수는 신부님이나 주술사를 찾아가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대해 맥닐은 격분하지요. 어떻게 내 딸을 주술사에게 데려가란 말을 의사가 할 수 있느냐, 하고요. 다시 말해 모든 근대적 의학과 문명화 시스템으로 조정되지 않는 변종적 인자가 발견되자, 기존 시스템으로는 그것을 통제하고 순치시킬 수 없어지고 결국 시스템 바깥에서 방법을 찾아보는 데 이르는 것입니다. 대체로 '엑소시즘'을 다룬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러한 '회의'를 거치고 나서야 결국 주술이나 제의를 믿게 됩니다. 「오멘(1972)」은 엄밀히 말해 엑소시즘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아이가 적그리스도라는 것을 처음에는 결코 믿지 않지만, 서서히 믿게 되고 더 나아가 주술사 부겐하겐으로부터 건네받은 칼로 아이를 교회에서 살해하기 직전까지 내몰리는 과정이 상당히 세부적으로, 그리고 괴기스럽게 그려져 있습니다.
또한 잘 기억나지 않는데, 「퇴마록 혼세편」에서도 약간의 주변적인 이야기를 담은 단편들이 있는데요. 아주 약간의 안수 치유력을 가진 목사와 박신부가 벌이는 설전이 등장합니다. 책을 지금 가지고 있지 않아 제목을 알 수는 없습니다. 가톨릭에서 거의 성자에 필적할 만한 기도력을 가진 박신부이지만, 그가 최종적으로 따르려는 것은 가톨릭의 질서 또는 세속 종교의 질서가 아닌 신의 섭리이자 순리입니다. 한빈거사는 박신부를 처음 보자마자 종파가 다름에도 이미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이라는 것을 파악해냅니다. 아무튼 그 단편에서 결국 목사는 박신부를 악마로까지 몰아부칩니다. <말세편>에 등장하는 프란체스코 주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속 종교, 아니 보수적인 기독교는 선과 악이라는 철저한 이분법으로 세상을 파악합니다.신의 질서가 있다면 그것을 어그러뜨리는 악마의 질서가 있는 것이고, 신의 질서는 성도들의 믿음을 통해 부강해져서 마지막 날에 악마의 질서로부터 항복을 받아낸다는 스토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박신부는 선과 악 모두가 필요하다는 세상의 순리를 더 강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통 가톨릭 교단에서 파문된 사람이고, 끝끝내 복권되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파문은 영어로 ex-communicate라는 사실을 잘 기억해두세요.) 이 단편에서 중요한 대목은 이런 것입니다. 기적이 없다면 신을 믿을 수 있는가? 믿으라는 말은 대체 뭔가? 아니, '회의'를 중단한다는 게 대체 뭔가? 이런 질문들이 떠오릅니다.
이 「퇴마록 혼세편」에 수록된 단편이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종교의 기복적 경향을 상당히 전면에 내세워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한국 종교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 말할 때 '기복의 과열 양상'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복을 기원하는 창구로서 종교가 활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가 동일한데, 수능 백일 기도부터 사찰의 기와를 올리는 불사에 이르기까지, 적게는 몇 만원에서 많게는 몇십 억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종교를 그리고 신을, 자신의 기복을 위하여 영접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한국 사회의 양적 경제 성장에 '기독교'가 상당히 많은 영향을 행사했다는 사실을 복기해봐도 좋습니다.) 아무튼, 사람들은 과연 '기적'을 눈으로 보아야만 '신'을 믿게 되는 것일까? 이 질문 자체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논제는 무궁무진합니다. 만약 '기적'을 보지 못한다면 '신'은 부정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모든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변신론(신을 변호함)이 왜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가? 등등등...
물론 박신부는 이 질문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기적을 바라고 신을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는 것이지요. 이 말은 당연히 윤리적인 측면에서 봐야할 문제입니다만, '엑소시즘'에 대해 묻는 현대인에게 약간 다른 뉘앙스로 전달됩니다. '기적(엑소시즘을 통한 치료)을 바라고 신을 믿는 것(엑소시스트에게 연락하는 것)은 어리석다(별 도움이 안 된다).' 정말 마음을 다해 믿지 못하고 유물론적으로, 또는 현상학적으로만 신을 영접하려는 자세도 문제지만, 그것은 단지 윤리적인 문제, 마음쓰기의 문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시간 및 금전 낭비이기도 하다는 것으로 읽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낭비'를 마침내 뛰어넘어 그것을 치르고서라도 원하는 결과를 얻고자 진심으로 갈구한다면, 회의주의를 극복하고 글자 그대로 신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사람은 변화할 것이고 앞으로의 일도 그에 맞춰서 돌아가게 되겠지요. 여기서 말하는 신은 기독교의 신이 아니라, 박신부의 신이자 이상적 성육에 가깝습니다. 순리이지요.
주술이나 제의는 문명화된 인간들에게 그닥 '약발이 신통하지 않은 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쓸모없는 일, 교양적이지 못한 일, 원시적이고 무식한 일'로 받아들여집니다. 하지만 기적을 눈앞에서 목격하면 정말 마음과 몸을 다해 믿고자 하는 신심이 생기게 되겠지요. 박신부는 하지만 이러한 마음가짐마저도 '거짓'으로 보는 것입니다.
기적을 바라고 신을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엑소시즘을 통한 치료를 바라고 엑소시스트에게 연락하는 것은 어리석다. 잘못된 마음가짐일 뿐만 아니라, 요령부득으로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다. 결과적으로 '엑소시즘'의 성공을 이끌어내는 것은 '믿는 일'입니다.
「엑소시스트 3」는 원작자인 윌리엄 피터 블래티가 직접 메가폰을 잡고 뛰어들었지만 그저 본전치기로 끝난 작품입니다. 이 영화의 후반부에서, 악마에 의해 벽으로 밀쳐진 경감은 처음엔 '오 신이여 도와주세요'를 말하다가, 갑자기 '나는 악을 믿는다, 고문과 부패와 부조리와 폭력을 나는 믿는다, 믿는다고 이 망할 놈아!'라는 대사를 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믿는다'의 대상이 바뀝니다. 그런데 신에 대한 찬미가 폭력과 부조리의 악마에 대한 찬미로 바뀌는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스러움'이라는 한쪽 면만을 믿다가, 이젠 '성스러움'과 '불결함' 둘 모두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둘을 믿는다는 것은 순리를 믿는다는 것이지 특정 종파를 믿는다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으라’는 말에 대해 우리는 쉽게 ‘폭력’을 결부시킵니다. 지금까지 그놈의 ‘믿음’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산을 탕진하고 삶을 버리게 되고 급기야 대량살상까지도 정당화 되었는가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은 그런 게 아니라는 겁니다. 또한, 어느 정도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나를 믿으라’ 또는 ‘나의 신을 믿으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무지한 사람들 또는 기복신앙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오독’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나서 '나도 저 분처럼 믿었는데 왜 저렇게 되지 않지'라고 불평합니다. 현자는 답을 고르라고 했지 뭐가 정답이라고 말해준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달마야 놀자」에서 주지스님은 제자들에게 부처를 믿으라고 했지 불상을 믿으라고 한 적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믿으면 됩니다’라는 말을 글자 그대로만 대하면서 깨달음이 부족한 사람들이 ‘믿으면 부자되고 건강해지고 천국간다’라는 기복 조장의 이념을 마음대로 사용해서 온갖 재물을 긁어모으곤 하는 것을, 우리는 이미 가까운 곳에서조차 보고 있습니다. 비신자의 입장에서 보기에, ‘하나님을 믿으면 행복해집니다’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나서 그렇게 전도하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많은 경우 그들은 글자만을 믿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노파심이 든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CCC를 하던 선배에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천국 가거든." 과연 그런 것인가? 그렇게 단순한 것인가? 어쩌다가 학자가 되어버린 저로서는, 이렇게 '천국 간다'라는 단순한 대답이 그의 믿음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 신을 믿게 된다고 해서, 그가 가지고 있는 존재론적인 회의(skepticism)가 없어졌다고 보아야 하는 걸까요? 문제가 과연 그렇게 단순한 걸까요? 천국 가기를 바라기 때문에 신을 믿는 것이라면, 오히려 신에 대해 더욱 더 회의가 들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정말 죽어서 천국 가니까 신을 믿는 거라면, 그 선배에게는 미안하지만 대단한 시간낭비가 아닐까요? 믿으라고 해서 믿는 게 아니라, 또는 성서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믿는 게 아니라, 자신의 번민이 어떻게 혁신되었는가를 말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 다음엔 유령에 대한 철학(Jacques Derrida)을 좀 말해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