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 사는 우리는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 선생과 정몽주가 지은 '단심가'는 매우 잘 알고 있지만, 변안렬 장군과 변안렬 장군이 지은 '불굴가'는 거의 알지 못한다. 이 두 시조는 후에 조선 제3대 태종이 되는 이방원의 '하여가'에 대한 답가로 고려에 대한 충정을 드러내는 시조이다. 정몽주 선생은 문관이었고, 변안렬 장군은 무관이었다. 변안렬 장군은 정몽주 선생보다 2년 먼저 조선 개국의 혁명 세력에 의해 처형되었다. 변안렬 장군이 잊혀진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인가! 조선 중기 이후 조선 사회가 무관을 경시했기 때문이다. 현재도 다를 바가 없다. 무관이 명예에 죽고 사는가! 무관이 명예에 죽는 것을 사회가 용인하며 인정해 주는가! 아니다.
변안열은 무장으로서 이성계가 고려왕조를 멸망시키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처형되었다. 이방원이 '하여가何如歌'로 변안렬과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려고 했을 때, 대은 변안렬은 '불굴가不屈歌'로, 포은 정몽주는 '단심가丹心歌'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결연한 의지를 표명했다.
何如歌하여가
此亦何如 彼亦何如 城隍堂後垣 頹落亦何如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
차역하여 피역하여 성황당후원 퇴락역하여 아배약차위 불사역하여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랴 성황당 뒷담이 무너진들 어떠하리 우리들도 이같이 하여 죽지 않은들 어떠하리.
不屈歌불굴가
穴吾之胸洞如斗 貫以藁索長又長 前牽後引磨且戞 任汝之爲吾不辭 有慾奪吾主此事吾不從
혈오지흉동여두 관이고삭장우장 전견후인마차알 임여지위오불사 유욕탈오주차사오부종
내 가슴 구멍 뚫고 새끼줄로 길게 꿰어 앞뒤로 끌고 당겨 갈리고 찢길 망정 너희들 하는대로 내 사양치 않으리라 내 임금 빼앗는 일 나는 굽힐 수 없도다.
丹心歌단심가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與之
차신사료사료 일백번갱사료 백골위진토 혼백유야무 향주일편단심 영유개리여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혼백이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 이 있으랴.
대은 변안렬 묘역은 고려말 충신인 대은 변안렬(1334~1390) 선생의 묘소다. 선생의 자는 충가, 호는 대은, 본관은 원주이며 원주 변씨의 시조다.
선생은 원나라 심양후인 변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351년(충정왕 3)에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형부상서에 이르러 공민왕과 노국공주를 시종하여 고려에 환국하였다. 고려에서는 벼슬이 벽상삼한삼중대광 문하찬성사 영삼사사壁上三韓三重大匡 門下贊成事 領三司事에 이르렀다.
선생은 1362년(공민왕 11) 안우를 따라 홍건적을 물리치고 1374년 최영과 더불어 탐라를 정벌하였다. 1380년(우왕 6) 삼도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황산대첩을 거두는 등 무장으로 수많은 공을 세웠다. 1382년(우왕 8)에 도원수로 단양, 안동에서 왜구를 물리친 공으로 원천부원군에 봉해졌다.
이성계의 역성혁명 세력이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하자 선생께서는 고려사직을 지키고자 하였다. 1390년(공양왕 2) 김저 옥사로 무고한 누명을 받고 유배지 한양에서 순절하였다. 김천택의 <청구영언>에 전하는 '불굴가'가 선생의 시가로 밝혀져 고려에 대한 충성심을 엿볼 수 있다.
대은 변안렬 묘역은 현재 경기도 지정문화재 문화재자료 제11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 704-1에 위치해 있다.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를 크게 물리친 변안열(邊安烈) 장군5월의 호국인물로
선정
전쟁기념관은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를 크게 물리친 변안열(邊安烈) 장군을 '5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고2014년 4월 29일 밝혔다.
변안열 장군은 1334년 심양후를 지낸 변량(邊凉)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충가(忠可), 호는 대은(大隱).
17세이던 1351년 원의 무과에 장원급제해 형부상서까지 올랐다. 공민왕과 노국공주를 배종해 고려로 들어와, 공민왕으로부터 원주를 본관으로 하사받아 원주 변씨의 시조가 됐다.
1361년 홍건적의 2차 침입 때 안주만호 안우(安祐)를 따라 홍건적을 격퇴하고 이듬해 개경을 수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예의판서·밀직부사·판밀직사사·지문하부사 등을 역임했다.
1376년에는 부령(扶寧)에 침입한 왜구를 대파해 그 공로로 문하찬성사에 올랐다. 이후에도 왜구의 침입이 그치지 않고 더욱 심해지자 장군은 1380년 양광전라경상삼도도체찰사에 임명되어 도순찰사 이성계와 함께 왜구를 격퇴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당시 처음에는 적군이 아군보다 10배나 많았으나 겨우 70여 명만이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망쳤다. 이때 전사한 왜구의 피로 강이 물들어 6~7일간이나 물을 먹을 수 없었다고 전해질 정도다. 말 1600여 필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병기를 포획했다.
1389년 대호군 김저(金佇)가 우왕의 부탁을 받고 이성계를 죽이려다 발각되어 옥에 갇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장군은 이에 연루되어 한양에 유배되었고 결국 1390년 유배지에서 죽임을 당했다.
2014년 5월 8일 오후 2시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 유관단체와 종중 주요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장군을 추모하는 현양행사가 거행된다.
첫댓글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권력의 추악함과 저열함이 이렇게 드러난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고 했다. 고려의 백성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 새로이 나라를 세우겠다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를 위해 선택한 수단이라는 것이 꼬투리를 잡아 없는 죄를 씌워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우왕의 복위시도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들이 있다. 특히 이성계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히는 황산벌 전투 당시 도체찰사로 사실상 이성계의 상관으로 참전했던 변안렬이 이와 연루되어 제거된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위화도 회군을 함께 주도했던 조민수와의 힘겨루기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난 뒤였다. 구체제
를 대표하던 조민수는 신진세력인 신진사대부가 주도한 전제개혁의 논의에서 힘과 명분에서 밀리며 숙청당해 유배되어 있던 중이었다. 이성계가 주도하는 새로운 정국을 위해서는 새로운 판이 필요했다.
하필 최영의 생질인 김저가 우왕의 명을 받들어 곽충보, 정득후 등과 이성계를 죽이려 모의했다는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공교롭거니와, 더구나 그 사건으로 인해 숙청된 면면이 앞서도 말한 위화도에서 군을 돌리는데는 동참했으나 우왕의 폐위에는 부정적이었던 변안렬을 비롯, 회군을 함께했던 왕안덕, 정지 등의 무장들과 이인임의 동생이며 창왕의 외조부이기도 한 이림 등 이성계의 정국장악에 방해가 될 만한 인물들이 대다수였다. 특히 이 가운데 다시 일부는 이성계가 정권을 장악하고 난 뒤 다시 복권되어 조정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점에서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창왕을 폐위함으로써 함께 창왕을 옹립했던 조민수와 이색을
무력화시키고, 자신이 세운 공양왕을 통해 정국을 오로지 자신이 주도한다.
우왕과 창왕의 출신문제가 불거진 것도 결국 신하로써 무려 두 명의 왕을 폐위시킨데 따른 명분상의 문제와 더불어 창왕이 즉위하는데 힘을 보탠 이색과 조민수를 공격하기 위한 빌미였을 것이다. 물론 이성계 역시 처음에는 창왕이 즉위하는데 반대하지 않았으나 이미 창왕을 폐위시켜야 하는 상황에서는 처음부터 창왕의 즉위를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왕을 옹립하여 국정을 장악했던 이인임처럼, 창왕을 끼고 권력을 쥐려 했던 조민수처럼, 그렇게 이성계 또한 공양왕을 세워 차근차근 새로운 왕조를 열 준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