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다림은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포기한 사람은 기다리지 않고 마음이 떠난 사람은 서성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가능성이 희박한데도 쉽게 등을 돌리지 못합니다. 염병, 사랑 징글징글 합니다. 이슬 샤워를 마친 맨드라미가 뽀송뽀송 존재감 시위를 하는 가운데 농익은 남보라 색 가지는 태양 빛을 열렬히 사모하고 있었어요. 흙 냄새가 정겨운 오솔길을 걸어가면서 늦여름으로 칠까, 벌써 가을이구나 할까 둠칫하다가 종종걸음으로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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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예, 주말이라서 내리막 에스컬레이터를 가동하는 모양입니다. 나이스 위크 앤드 세러데이! 헤겔이 어려운 이유 중에 용어도 한 몫 하는 것 같아요. 즉자, 대자를 아시나요? <즉자>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상태를 의미하며, <대자>는 자신을 인식하고 주체화하는 존재를 말합니다. 즉자적 존재는 외부와의 관계나 목적, 의지를 가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상태인데, 예를 들어 돌이나 나무와 같은 사물은 의지나 목적 없이 존재하며, 인간의 의식 속에서도 미성숙하거나 외부와 소통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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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자>란 직접적 존재, 무자각적 존재, 또는 미성숙한 상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헤겔과 지젝이 왔다갔다 헤깔립니다. 슬라보예 지젝이"정신은 정신이 아닌 것, 자연을 통해서만 들어난다"고 했어요. 종합(헤겔)이 아닌 '부정성의 사유'를 언급한 것 같아요. 내 정신은 부정적인 것(자연)을 내면화 시켜 생명을 획득하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했어요. 대표적 외적인 것이 자연입니다. 내 이성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자연과 부닥칠 때 관념 화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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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의 정신(=이성)은 즉자적으로 가만히 있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어요. 생명은 언제나 죽음과 함께 간답니다. 내가 문을 열고 나가 밖에 있는 '타자'(내가 아닌 것)와 만나 그 부정적인 것과의 대립을 통해서만 정신이 규정된다는 것 아닙니까? 지젝은 부정적인 것들 곁에 머물기, 혹은 부정적인 것들과 함께 하기를 제안합니다. 만약 나(=정신)에게 부정적인 것이 없다면 나는 잠재적으로만 존재하고 현실적이지 못하게 됩니다. 외적인 것이 있어야 만 내 정신은 잠에서 깨어나 운동을 하고 현실화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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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에서 노동(알바)은 자기 자신 안에 묶여 있으면서 정지 상태의 내가 부정적인 것(분리)을 통해 역동성이 생기는 것 같아요. 부정적인 것과의 결합(십자가의 역설)을 통해 생명이 창조된다는 뜻입니다. 거꾸로 모든 우연적인 것-(타자적인 것이 없는 주체)은 원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운동력이 일어 나지 않아요. 결국 부정성이 내 안에 있어서 생명을 보존하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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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예공! 자신이 아닌 것이 곁에 머물러 있을 때만 정신은 주체적 창조가 가능한단다. 두려워 하지 말고 뚫고 나오시라! 예주야! " Run out! "진리는 철저히 찢겨 발겨짐(분리), 즉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자기를 획득하고 창조가 가능해집니다. '균열-틈-죽음'은 나와 상관 없거나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주체의 한복판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 하지 않을까?
2.
정신은 왜 자기 밖으로 나가야 하는가? 나는 나 아닌 것과 부딪쳐야만 비로소 ‘나’가 되는가? 그렇다면 실패·분리·균열 같은 부정성은 제거해야 할 장애물인가, 주체가 탄생하는 조건인가? 이슬 샤워를 마친 맨드라미와 농익은 남보라색 가지, 흙냄새 나는 오솔길을 지나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서는 장면이 묘하게 헤겔적입니다. 계절부터 그렇습니다. 늦여름인가 싶으면 어느새 가을이고, 여름은 여름 아닌 것으로 넘어가면서 오히려 자신이 무엇이었는지를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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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가만히 머무르기보다 자기 아닌 것을 통과하면서 자신을 드러내는데 이것이 헤겔을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입니다. 헤겔에게 '즉자'는 어떤 것이 이미 가능성과 내용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지만 아직 그것을 자기 것으로 의식하고 전개하지 못한 상태에 가깝습니다. 반면 '대자'는 타자와의 관계와 부정을 통과하면서 자신을 자신으로 의식하는 단계입니다. 씨앗을 예로 들면 씨앗에는 이미 나무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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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씨앗이 계속 씨앗으로만 안전하게 남으려고 한다면 나무가 될 수 없습니다. 씨앗은 갈라져야 하고, 자기 모습을 잃어야 하며, 흙과 물과 햇빛이라는 ‘자기 아닌 것’을 만나야 합니다. 즉자 → 자기 밖으로 나감 → 타자와 만남 → 부정 → 자기에게 돌아옴이 운동을 통해 잠재되어 있던 것이 현실화됩니다. 따라서 “내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타자와 만나야 정신이 현실화된다”는 이해는 헤겔의 중요한 부분을 잘 짚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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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단순히 정신에게 ‘나쁜 것’이라는 의미에서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철학에서 말하는 부정은 악이나 불행을 뜻하기보다 ‘내가 아닌 것’, 나의 직접성을 깨뜨리고 한계를 드러내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정신에게 타자는 적이면서 동시에 스승입니다. 혼자 방에 앉아 있을 때 나는 내가 관대한 사람이라고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일하고 돈을 나누고 의견이 충돌하면 그때 비로소 내가 얼마나 관대한지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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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은 나를 방해했지만 동시에 내가 누구인지를 현실화시킨 것입니다. 알바를 하지 않는 사람은 ‘나는 성실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 가능성입니다. 그러나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하기 싫은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의 요구를 견디고, 자신의 욕망을 뒤로 미루어야 할 때 성실함은 현실이 됩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노동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노동하면서 인간은 외부의 대상을 변화시키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도 변화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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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을 만드는 동안 세상도 나를 만듭니다. 여기까지가 헤겔이라면, 지젝은 여기서 한 번 더 비틀어 들어갑니다. 지젝을 ‘헤겔의 종합을 거부하고 부정성만 주장한 철학자’라고 이해하면 조금 어긋납니다. 오히려 지젝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정-반-합으로 모든 모순을 깨끗하게 해결하는 헤겔’ 자체가 잘못 읽힌 헤겔이라고 주장합니다. 지젝이 되살리는 헤겔은 훨씬 불편합니다. 부정을 통과했다고 균열이 완전히 봉합되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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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주체란 그 균열 자체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생겨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지젝에게 부정성은 인생에서 우연히 만나는 몇 가지 나쁜 사건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실패, 상실, 분리, 불일치가 내 밖에서 날아와 완전했던 나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나는 나 자신과 완전히 일치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균열·틈·죽음은 내 주체의 한복판에 있다”는 표현은 상당히 지젝적입니다. 나는 완성된 원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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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가 먼저 있고 나중에 금이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금 때문에 주체가 움직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욕망하고, 공부하고, 사랑하고, 글을 쓰고, 무엇인가를 만들어냅니다. 완전히 충족된 존재라면 움직여야 할 이유조차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곧바로 헤겔의 변증법과 동일시하는 것은 철학적 유비로서는 매우 강력하지만 조심해야 합니다. 죽음을 피해 생명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에 이른다는 기독교의 역설은 헤겔과 지젝의 부정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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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 십자가는 단순한 변증법적 ‘부정의 계기’가 아닙니다. 십자가에는 죄, 사랑, 희생,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고유한 신학적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 역시 모순이 자동적으로 만들어낸 철학적 종합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사건입니다. 그 차이를 지켜야 오히려 철학과 신학의 대화가 더 깊어집니다. 예주에게 건네는 “Run out!”이라는 말도 철학적으로 조금 바꾸면 더 멋있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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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지 말고 밖으로 나가라!" 는 말은 단순히 세상과 싸워 이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미리 완성해놓고 세상으로 나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타인을 만나고, 거절당하고, 실패하고, 인정받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노동하고, 창조하면서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 조금씩 알게 됩니다. "타자는 완성된 나를 방해하는 존재만이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를 현실로 불러내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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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부정적인 것 곁에 머문다는 것은 고통을 미화하거나 불행을 일부러 찾아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피할 수 없는 균열을 만났을 때 그것을 단순히 제거해야 할 오류로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균열이 묻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너는 지금까지 네가 누구라고 생각했느냐?” 어쩌면 맨드라미와 가지도 그렇습니다. 가지는 햇빛 없이 가지가 될 수 없고, 꽃은 흙과 비와 바람 없이 꽃이 될 수 없습니다.
2026.8.21.fri.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