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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25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제1독서 : 신명 30,1-5
제2독서 : 에페 4,29―5,2
복 음 : 마태 18,19ㄴ-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한 염색공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모두가 바쁘게 그리고 정신없이 일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한 여직원이 실수로 등유가 들어 있는 램프를 염색 테이블 위에 떨어뜨린 것입니다.
램프가 깨지면서 램프 안의 등유가 쏟아져서 테이블 위에 올려 있었던 작업물들이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공장 직원들은 일을 멈추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냐면서 화를 내기 시작합니다.
쉬지도 못하고 열심히 일한 작업물이 이렇게 엉망이 되었으니
원망의 눈길이 사고의 원인인 여직원에게 모두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화를 내지 않고 그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거든요. 즉, 테이블에는 여러 가지 염색약으로 인해 얼룩이 아주 심했는데
등유를 쏟아버린 부분만 얼굴이 깨끗하게 지워진 것입니다.
이렇게 화를 내지 않고 관찰한 사람이 바로 ‘드라이클리닝’을 발명한 장 밥티스트 졸리입니다.
솔직히 우리들은 자신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 잘못에만 머물러 있으면서 그 사람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미움의 굴레에 갇혀 있으면 미움의 감정만 커진다는 것 외에 변화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부정적인 마음이 커지면서 지금의 삶을 더욱 더 어렵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앞서 드라이클리닝을 발견한 장 밥티스트 졸리처럼 이런 가운데에서도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은 어떨까요?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희망 안에서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서로 반목하면서 살아온 지가 벌써 70년이 가까워졌습니다.
그동안 상대를 향한 비방과 비판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북측을 적으로 제시하면서 ‘무찌르자 공산당’을 외치면서 놀았던 어렸을 때의 기억도 떠올려집니다.
중간 중간 화해의 상황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서로의 이익 차로 인해서
다시 대결 모드로 변경되어서 긴장이 고도되는 상황도 참으로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념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 더욱 더 갈등을 키웠던 것이 우리나라의 역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요즘 남북한의 관계가 점점 희망적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우리 민족이 바랐던 바람들이 이제 드디어 결실을 맺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더 이상 미움의 감정만을 내세우는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제는 미래를 바라보면서 큰 희망 아래 하나 될 수 있는 우리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더욱 더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또한 주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바로 사랑의 마음으로 모여 있는 곳에 함께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더 이상 미움 등의 부정적인 감정에 매여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희망의 미래를 바라보면서 주님 안에서 이룰 큰 사랑을 완성하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면 어떨까요?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6월 30일과 7월 14일에 강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하겠다고 답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 뒤에 전화가 왔습니다. 사정이 생겼으니 보류해 달라는 전화였습니다.
하면 하는 것이고, 하지 않으면 않는 것이지 보류를 해 달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나빴습니다.
저의 시간과 저의 사정은 생각하지 않고 무시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니 저는 더 심했습니다. 하느님께 잘하겠다고 다짐을 해 놓고도 번번이 약속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저는 약속 날을 잡지도 않았고, 제멋대로 하느님께 저의 결정을 통보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런 저를 하느님께서는 기분 나빠 하지 않으셨고, 언제나 제가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도록 기다려 주셨습니다.
저는 자매님께 다시 전화를 드렸습니다. 일단 약속은 한 것으로 알겠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약속이 취소되면 제게는 자유시간이 생기는 것이고, 강의에 대한 부담도 없어지는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야기하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런 저의 모습을 어여쁘게 보아 주실 것 같았습니다.
아스라한 기억이 있습니다. 왜 다투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친한 친구와 싸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키가 컸던 친구는 저의 목을 잡았습니다. 상대적으로 키가 작았던 저는 친구의 급소를 잡았습니다.
우리는 서로 눈물을 흘리면서 상대방의 아픈 곳을 잡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아픈 곳을 놓아 주었고, 눈물을 그치고 함께 하드를 사 먹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가 잡은 상대방의 아픈 곳을 놓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서로에게 무기가 되었던 손은 서로를 보듬어 주는 화해와 용서의 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홍익인간의 한반도는 5000년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고조선의 시대는 잘 모르지만, 삼국시대는 국사 시간에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삼국은 서로 다른 체제와 법을 가지고 700년가량 지냈습니다.
돌아보면 한반도는 거의 700년 동안 3개의 나라가 공존하면서 지냈던 역사가 있습니다.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해서 백제와 고구려를 통합하여 한반도를 통일하였습니다.
통일 신라는 300여 년, 고려는 400여 년, 조선은 600여 년을 한반도에서 통일된 왕조를 이루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일본의 36년 식민통치를 지냈고, 남과 북이 분단된 70년을 살고 있습니다.
한반도가 서로 다른 나라로 지낸 것이 처음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통일된 나라를 이루었던 체험이 있었고, 같은 말과 같은 역사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언젠가는 다시금 하나 된 나라를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참으로 화해하고, 민족이 하나 될 수 있는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 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먼저 자신을 성찰하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힘으로는 힘든 일이지만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찰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용서는 조건이 없습니다.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용서는 용서하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의 제2 독서는 용서의 구체적인 행위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산가족이 만나고, 남과 북이 단일팀으로 국제경기에 나가고,
남과 북의 예술인들이 평양과 서울에서 공연하고,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백두산 관광도 계속되고,
서울, 평양을 이어주는 고속도로, 철도가 개통되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정치와 군사적인 통일은 아직은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분야는 우리가 서로 협력을 하기로 마음만 먹으면 못 할 것도 없는 일들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남과 북이 대화와 협력으로 풀어나가던 일들입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이 함께 하시어, 우리 사회의 갈등이 치유되기를 기도하며,
남, 북의 화해와 일치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합니다
칼을 들고 주님께 다가가지 마십시오.
전삼용 요셉 신부
유투브에 있는 ‘왕따를 구한 일진’이란 사연을 옮겨봅니다.
난 스무살의 남자야. 사실 난 내 은인이자 친구를 찾고 있어. 난 중학교 때 왕따였어.
일진 애들한테 괴롭힘 당한 건 아니야.
소위 말하는 일진은 아닌데, 나대는 애들한테 하루가 멀다 하고 맞고 다녔지.
내 꿈이 작곡가였는데 게네들이 내가 아끼는 음악 공책도 찢고 담배 사오라고 시키고 돈도 뺏고 …
(공학이었어) 진짜 극도의 괴롭힘을 당했지
하루하루가 지옥이었고 학교는 두려운 곳이 되어갔어. 자살도 생각해봤고 시도도 해봤어.
음악도 접었고 가난한 집안의 부모님이 돈 모아서 사주신 엠피쓰리도 뺏겼어.
진짜 마지막엔 칼 들고 나 괴롭히던 애들 찌르고 자살할까 생각하고 집에서 부엌용 식칼도 챙겨갔어.
그날이었어. 내가 찾고 있는 내 은인인 친구가 우리 반에 찾아왔어. 그 애는 솔직히 말하면 일진이야.
나 같은 왕따랑은 거리가 멀었지. 근데 그 애가 우리 반에 오더니 음악책을 빌리더라고.
“음악책 있는 사람!” 하면서 소리치는데 나랑 눈이 딱 마주쳤어. 그라고 나한테 음악책을 빌려갔지.
난 당연히 안 돌려줄 줄 알았는데 쉬는 시간에 책을 돌려주러 온 거야.
그러더니 나보고 음악 하냐고 물어보더라고.
내가 당시에 음악공책이 없어서 음악책에다 악보 그리고 좀 끄적끄적 해놨거든.
그래서 내가 했었는데 지금은 안 한다고 하니깐 개가 자기도 음악 한다고.
악보 그려져 있기에 물어 봤다고 하더라.
근데 신기한 건 그 뒤로 개가 우리 반에 자주 오는 거야. 그것도 나 만나러.
그래서인지 나 괴롭히던 애들이 내 주위에 얼씬도 안 하더라고. 물론 가방에서 칼은 꺼낸 적도 없지.
그러던 어느 날 애가 학교에 안 왔나봐 우리 반에 맨날 오더니 그날은 안 오더라고.
난 티는 안 냈지만 걔를 기다렸지
솔직히 그렇게 잘 노는 애가 나한테 관심 가져 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얘랑 있으면 괴롭힘 안 당하니까.
그런데 그날 사건이 터졌어. 걔가 안온 틈을 타서 다시 나를 괴롭히는 거야.
이 새끼가 감을 잃었네 뭐네 하면서 침 뱉고 가위로 내 머리카락 자르고 발로 차고
점심시간 내내 괴롭힘을 당했고 난 이성을 잃었지 계속 가방 속 칼이 생각나더라고.
필사적으로 뛰어가서 가방에 칼을 꺼내 들려는 순간에 우리 반 문이 열렸어.
개가 온 거야 병원 갔다 지금 온 거였다고.
하여튼 개가 엄청 어이없는 표정 짓더니 나 때리던 애들을 무차별적으로 때리는 거야.
똑같이 침 뱉고 가위로 머리 자르고 교복 찢고.
다섯 명이서 나 괴롭혔는데 다섯 명이 애한테 맞다가 한명은 실신했고 네 명은 내가 항상 하고 있던 꼴처럼 됐어.
그리고 나한테 오더니 내 교복 찢어진 거 벗기고 자기 교복 주더라. 자기는 어차피 잘 안 입는다고.
근데 얘도 징계를 받았지 애 한명이 실신하고 네 명이 엄청 다쳤거든.
정학 먹었는데 정학 끝나고 학교 온 날 아침 조회시간에 운동장에서 교장이 표창장 주더라.
정학은 그 다섯 명의 부모가 항의를 심하게 해서 그런 거였고 결국 다섯 명 다 강제전학 처분을 받았어.
하여튼 그날 난 모든 걸 털어놨지. 사실 자기는 음악 하는 거 아니라고.
처음에 눈 마주쳤을 때는 그냥 눈 마주쳐서 빌려달라고 했던 건데,
가까이 가서 보니까 교복이 찢어지고 슬리퍼 자국도 있고.
그래서 왕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도가 지나친 거 같아서 며칠 붙어 있어 봤다고.
그러려면 명분이 필요했고 내가 음악 하는 거 같기에 자기도 음악 한다고 거짓말 한 거고...
난 고등학교를 예고로 진학해서 열심히 음악하고 장학금도 받고 지금 여기까지 왔네.
원하는 대학에도 들어갔고 방학 때는 학교에서 외국도 보내준대.
아 진짜 보고 싶다 친구야. 연락해 010-5877-
뒷자리는 옛날 너네 집 비번이야. 진짜 고맙고 넌 내 은인이다 고맙다 친구야.
미움이라는 칼을 지니고 살아가던 한 아이가 일진이라는 한 친구를 만나니
자신의 칼을 꺼낼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만약 그렇게 보호해주는 친구가 있는 데도 미움으로 칼을 꺼내들었다면
그 일진 친구는 더 이상 도와주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를 이용해 복수를 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이 대신 복수해 주시는 분이시지 우리가 그분의 힘을 빌려 복수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만약 내 안의 미움의 칼을 빼 들고 있다면 아직 누군가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결코 내 미움의 칼을 빼들고 휘두르기를 바라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보호를 계속 받고 싶다면 미움은 가방 깊숙이 숨겨두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라고 물어볼 때,
일곱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용서에 관한 말씀은 바로 위의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라는 말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청해야 주님께서 들어주시는데,
‘한 마음’으로 청한다는 말은 이 ‘두 사람’이 서로 미움의 칼을 겨누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서로 미워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기도해봐야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서로 간에 미움의 칼을 빼 들고 스스로를 지키려하고 있다는 말은
더 이상 주님의 도우심을 믿지 않는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없애려 하면서까지, 스스로 제사를 드려가면서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왕권을 지키려 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떠나신 것과 같고,
골리앗까지 이기게 해 주셨는데도 스스로의 힘을 측량하기 위해 병적조사를 하여
주님께서 7만 명을 죽여 버리신 것과 같으며,
자신의 지혜로 돈을 모으기 위해 수많은 정략결혼을 하여 이방 아내의 신을 섬긴 솔로몬 때문에
남북이 분열되게 된 것과 같습니다.
미움은 스스로 자기를 지키려 하는 마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하느님을 스스로 거부하는 행위이고
그런 상태에서 하는 기도는 모두 위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미움으로 서로 갈라진 사람들이 통일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혼자 헤엄쳐 30명을 구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구소련의 촉망받는 수영선수 샤바르시 카라페트얀입니다.
1976년까지 세계기록11개. 월드챔피언쉽 우승17회.
유럽챔피언쉽 우승13회. USSR챔피언쉽 우승7회를 기록하였습니다.
1976년 9월16일 어떤 한번하기 기계결합으로 중심을 잃은 버스가 10m물속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때 그 주변에서 달리기를 하던 샤바르시가 그 현장을 보고 바로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결국 혼자서30명을 구조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용기는 혹독한 대가를 가져왔습니다.
구조과정에서 생긴 상처로 폐렴과 패혈증 46일간 의식불명상태가 이어졌습니다.
그 후로 샤바르시는 깨어났지만 두 번 다시 수영경기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사고 며칠 후 전차사고는 크게 보도됐지만 보도된 기사에선 샤바르시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언론들은 진실을 은폐하고 영웅이 된 것은 지켜보기만 했던 구조대원들이었습니다.
2년 후 퇴직을 앞둔 한 검사가 양심선언으로 진실이 밝혀졌습니다.
진실이 밝혀지자 소련국민들은 샤바르시를 국민영웅으로 추대했고
격려와 감사의 편지들이 전국각지에서 쏟아졌습니다.
비록 원하던 올림픽 메달은 얻지 못했지만 소련정부가 국민영웅에게만 주는 특별한 메달을 받습니다.
누군가 샤바르시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가장 괴로웠던 건 무엇이었나요?”
“물속에 뛰어드는 것 외에는 인명구조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실수할까봐 두려웠어요.
물속은 어두웠고 아무것도 안 보였어요.
한번은 사람대신 의자를 끌고나왔는데 한 사람을 더 살릴 수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아직도 악몽에 시달려요...
수영을 그만둔 건 아쉽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사람들을 살린 게 너무 기쁩니다.”
한 사람도 한 사람을 살리는 것만큼 더 기쁜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만약 물에 빠진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친다면
그는 맨 마지막에나 구원의 손길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스스로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기 때문에 미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주님 앞에서 심판 받는 두려움 때문에
자기가 살기 위해서 자기 잘못을 타인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 곧 미움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이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도움만을 바랐다면 주님은 그들을 계속 에덴동산에 살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도를 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자신 안에 미움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명이 기도하라고 하는 것이고 그 두 명이 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기도하다가 미운 사람이 생각이 나거든 기도를 멈추십시오.
어차피 하느님을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니니 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빨리 그 미움의 칼을 집어넣으십시오. 그래야 주님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필요하면 칼은 필요 없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들어야 할 일입니다.
“너희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여 이 땅에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구하라.”(마태 18, 20)
바로 “이 땅”이 우리가 이루어야 할 친교와 화해의 장소라는 말씀입니다.
먼 훗날이 아니라, 평화로운 새로운 새 땅에서가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 바로 지금, 서로 마음을 모으라는 호소입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마태 18, 22)
이는 허물을 탓하지만 말라는 말씀이요, 동시에 무한히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용서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조건이나 단서를 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반드시 죄를 고백해야만, 혹은 용서를 청해야만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때로는 완고하고 고집부리더라도 혹은 계속해서 똑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더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도 남북의 형제들끼리 적대 논리로 서로를 적으로 강요당하며,
서로 죽이는 살인 연습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적이 아니라, 형제가 되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적대감과 대립을 몰아내야 할 일입니다.
편견과 거짓과 위선을 몰아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와 용서, 일치와 사랑이 필요할 때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는 특별히 “오늘”이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한 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신명 30, 2-3)
이는 축복과 저주는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이지만, 동시에 인간에게도 달려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분단극복과 화해와 일치의 실현에는 그동안의 우리의 불성실을 성찰하는 동시에,
바로 오늘 우리의 책무와 투신이 요청된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2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새로운 생활 법칙을 말하고 있습니다.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에페 4, 29)
사실, 우리들 사이의 분쟁의 상당한 것들은 잘못된 말이나, 욕, 비난, 중상모략, 거짓말로 시작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남과 북이 서로를 비방하고, 거짓 뉴스와 유언비어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를 멈추고, 오히려 서로를 격려하고 고무, 찬양해야 할 일입니다.
축복을 가져다주는 좋은 말, 기쁨과 칭송의 말을 해야 할 일입니다.
이는 꼭 남북관계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모두 서로에게 그렇게 해야 할 일입니다.
특히 같은 공동체 식구끼리는 더더욱 그러해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라.”(에페 4, 30)
이는 형제들에게 하는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과 온갖 악의”가
사실은 바로 그들 안에 있는 성령께 대한 모독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몸이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서로 욕하고 비방하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형제를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성체조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형제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을 예배드리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웃과 형제를 받아들이고, 동족인 북한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 안에 살아계시는 주님을 경배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라.”(에페 4, 32)
사실, 용서는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거저 받은 것을 마땅히 이웃에게 거주 주어야 할 일입니다.
특히 대립과 반목으로 오랫동안 쌓여온 남북의 적대를 용서로 바꾸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적이 아니라, 형제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용서와 화해, 사랑과 일치를 이루어 나가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돼라.”(에페 5, 1)
그리하여,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화해와 일치를 위해 바치는 향기로운 산 제물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