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 내리던 날
십이월 중순 목요일이다. 전날 문우들과 암자 트레킹을 다녀와 시내에서 저녁을 먹고 왔더니 귀가가 늦었더랬다. 울산 친구가 택배로 의뢰해 집으로 와 있던 자란만 양식 가리비는 잠들기 전 선도가 좋을 때 삶아 조갯살을 꺼내 뽑았다. 이미 저녁 식후라 따뜻한 가리비살은 먹지 못하고 냉장고 넣어 둬야 했다. 친구는 한 달 전 가리비를 보내주고도 또 보내 정이 넘치길 그지없다.
잠들기 전에 생활 속 일기와 더불어 가리비를 소재로 시조를 남겨두었다. 지난날 피조개와 가리비를 대조시켜 봤다. “젊은 날 방황하던 대학가 포장마차 / 쓴 소주 안주로는 피조개 일품인데 / 주머니 넉넉지 못해 군침으로 다셨다 // 사십 년 사귄 친구 옛정이 새로운지 / 초겨울 제철 맞은 가리비 택배 보내 / 더운 김 살짝 익혀 쪄 반찬으로 삼는다” ‘피조개와 가리비’ 전문이다.
날이 밝아온 아침은 전날 다녀온 청도 두 암자 동선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바위 벼랑을 등진 운문사 북대암과 대운암이었다. “동짓달 초하룻날 운문사 찾았더니 / 법당 곁 감나무에 못다 딴 감송이들 / 비구니 외는 경소리 귀 기울여 듣더라 // 겨우내 시나브로 문안올 까치한테 / 몸뚱이 살점째로 바치는 육탈 보시 / 이듬해 움이 트는 잎 기억하고 있으리” ‘운문사 고목 감나무’
앞서 두 작품은 초등 친구들의 단톡방과 몇몇 지기들에게 모닝 카드처럼 사진과 함께 보낼 시조로 준비해 놓았다. 새날을 맞은 아침은 엊그제 다녀온 본포 강가 풍경에서 물억새를 글감으로 한 작품을 날려 보냈다. 아침 식후는 불편한 무릎을 치료받으러 반송시장 병원으로 갔다. 거의 1년이 되어가는데 작년 연말 친구 선산에서 표고목 자르는 일을 돕다 예기치 않은 부상이었다.
주치의 처방전 따라 주사를 맞고 약국에서 약을 타 나왔다. 하늘은 잔뜩 흐려 오후는 강수가 예보되어 자연학교는 도서관에서 보낼 작정이다. 교육단지 도서관은 장서와 열람석은 여건은 좋으나 식당 사정이 여의하지 못했다. 집 근처 빵집에서 점심으로 때울 빵을 골라 샀더니 주인아주머니는 고급 사탕을 두 봉지 챙겨주어 감사했다. 전번엔 무슨 빵을 덤으로 주어 받은 적 있다.
오후에 온다던 비가 아침나절부터 부슬부슬 내려 우산을 받쳐 쓰고 원이대로를 건너 폴리텍대학 캠퍼스를 지났다. 교육단지 전문계 공고와 인접한 창원도서관 별관 책담으로 들었다. 비가 오는 평일이라 도서관을 찾은 열람자는 적어 한산한 편이었다. 2층 창가로 가 내 지정석이 되다시피 한 자리에서 집에서 못다 읽어 배낭에 넣어간 김삼웅의 ‘다산 정약용 평전’을 꺼내 펼쳤다.
200여 년 전 이 땅에 살다 간 정약용에 대해 여러 사람이 선행 연구를 남겼다.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던 인물에 대한 평가와 해석은 앞으로도 계속 되지 싶다. 절도안치(絶島安置)된 형 약전은 흑산도에서 생을 마쳤고, 주군안치(州郡安置)된 다산은 강진 유배지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소실 정씨(鄭氏) 사이에 ‘홍임’이라는 딸을 둔 기록도 나왔다.
마저 읽은 다산 평전은 사서에게 반납하고 서가에 비치된 책들 가운데 몇 권을 가려내 열람석으로 돌아왔다. 유리창 밖은 빗방울이 튀어 묻었고 도서관 뒤뜰은 비가 와 촉촉이 젖은 모습이었다. 뽑아둔 책 가운데 ‘사유하는 어른을 위한 인문 에세이’라는 부제가 붙은 최준영이 쓴 ‘결핍의 힘’을 펼쳐 보다 점심때가 되어 휴게실에서 준비해간 빵으로 따뜻한 커피와 한 끼 때웠다.
식후 열람석으로 돌아와 기업가이자 사회활동에서 알려진 영국인 비카스 샤가 쓴 ‘생각을 바꾸는 생각들’을 읽었다. ‘이 시대에서 필요한 리더십은 무엇인가’라는 꼭지에서는 미국의 강연자이며 베스트셀러 작가 게리 하멜을 비롯한 명사 6인의 어록과 일화를 소개했다. 날이 저물기 전 도서관을 나와 친구가 기다린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옮긴 자리는 잔을 채워준 역에 충실했다. 23.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