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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牛)
養牛由來歲月深(養牛由來歲月深)-너를 길러온 지 몇 해이던고
石田耕牛深時間(石田耕牛深時間)-돌투성이 밭갈 때가 언제이던가
牆耒不知何歲月(장뢰부지하세월)-담벼락에 세워둔 쟁기는 언제 쓰려는가
歲月流去銹故障(歲月流去銹故障)-세월이 가는 동안 녹이 슬고 말았네
餘力無用草喰牛(여력무용초식우)-풀만 먹고 자란 소 힘이 남아돌건만
耕耘畦畝爲耮作(경운휴무위노작)-쟁기질은 경운기가 도맡아 하네
田耕無牛審見我(전경무우심견아)-할 일 없는 소 나만 쳐다보니
生草今來積載函(생초금래적재함)-적재함에 있는 풀 언제 주려는가
최태석
소(牛)를 먹는 고기로만 취급된 모질게 변한 세상
위의 이중섭 그림 “황소”는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전시 중인 이중섭화가의 작품 중 하나이다.
필자는 1984년경 태평로에 있는 당시의 삼성 동방갤러리에서 “이중섭 전시회”
를 처음 관람한 중에서 “황소” 작품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종이 살 돈이 없어 담배 은박지에 그리거나 아주 작은 소품의 그림들이었다.
이중섭은 가족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소”를 자주 등장시키는 것이 눈길을 끌었다.
그의 대표작중 하나인 “길 떠나는 가족”에도 소가 등장했다.
위의 사진의 “황소”도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거칠게 콧김을 내뿜으며, 입을 거칠게
벌리고 부리부리한 눈 귀와 뿔과 털을 세우고 있는 황소의
모습은 화폭에서 뛰쳐나올 듯 한 살아있는 인상을 준다.
이 황소 그림에 대하여
김현숙 덕성여대 교수는 “이중섭의 소 그림 중 대표작이며, 전란으로 궁핍했던 1950년대의 시대상황과 불우했던 작가의 삶에 대한 절규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소(牛) !
특히 우리민족의 생활 속에서 소는 가족과 같은 존재였다.
최근까지에도 다큐 영화 “워낭 소리”의 주인공인 경북 봉화 산골 농부 최원균 할아버지(85세 2013. 10.1 별세)와 “누렁이 소”가 평생의 생활에서 도 잘나타나있다.
죽어서도 할아버지 뜻에 따라 누렁이 무덤 가까이에 묘지를 모신 것이다.
애완동물로서 개가 사람을 잘 따른다고 충견(忠犬)이나 개의 비(碑)가 곳곳에 있지만 소도 개 못지않은 굳은 신의를 지키며 절절한 사랑을 드러낸 이야기가 많다.
그중 하나가 경북 산동면 인덕리의 의우비(義牛碑) 이야기다.
주인과 함께 밭을 갈던 중, 습격한 호랑이로부터 주인을 구하였다.
그 후 주인이 죽자 먹는 것을 중단하고 단식 끝에 따라 죽었다.
경북 상주 박물관 옆에는 의우총(義牛塚)이라는 소무덤과 비석이 있다.
이웃에 살며 자신을 사랑해주던 김보배 할머니가 사망하자
누렁이는 이 묘소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할머니가 살던 집으로 들어가 할머니 영정에 문상했다고 한다.
1992년 7월 신문에 크게 보도된 적이 있다.
춘원 이광수(李光洙892~1950)는
사람을 위해 일생을 봉사하다가 죽은 후까지도 살과 뼈와
가죽을 사람에게 내어 주는 소의 미덕을 칭송하는
“우덕송(牛德頌)” 수필을 썼다.
“그의 느리고 부지런함, 그의 유순함, 그러면서도 일생에 한두 번 노할 때에는 그 우렁찬 영각, 횃불 같은 눈으로 뿔이 꺾이도록 맥진(驀進)함, 그의 침묵함···.”
황희정승과 소 이야기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여 지금도 식자(識者)들의 화제(話題)속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황희 정승이 길을 가다가 밭에서 농부가 두 마리의 소에 멍에를
씌워 밭가는 것을 보고 황희 정승이 묻기를,
두 소 중 어느 것이 더 일을 잘하는가 ?
하니 농부가 조용히 황희정승 가까이 와서 귀에 대고 작게 말하기를, 이 소가 낫습니다. 하였다.
황희 정승이 괴이하게 여겨, 왜 귀에 대고 말하는가 ? 하니,
농부의 대답이, 비록 가축이지만, 그 마음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지요.
비교 평가를 받는 소의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농부의 말을 들은 황희 정승은 그 다음 부터는 남의 장단점을 말하지 않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이 이야기는 남의 장(長) 단점(短點)을 말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사자성어인
“불언장단(不言長短)”이라는 말이 탄생한 계기가 된 일화이다.
조선조 세조때의 문신인 강희맹(姜希孟1424~1483)은 그가 쓴
“금양잡록(衿陽雜錄)”에서
“땅을 갈 때 소가 없는 사람은, 장정 아홉 명을 고용해 쟁기를
끌어야 소 한 마리의 힘을 대신할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간이 중노동에서 벗어나게 된 두 가지 계기가 “기계와 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선조들은 소를 사람과 같은 대우를 하였다.
지금도 소의 쟁기로 농사짓는 마을이 있다.
경남 남해 남쪽 바닷가 다랭이마을이다.
다랭이는 비탈에 만든 계단식 논을 말한다.
45도 경사진 산기슭 계단에 논배미가 뱀이 기어가듯 조성되어
있다.
논 한 배미가 세 평에서 서른 평으로 좁고 길어서 농기계가 못
들어가니 소 힘을 빌려야 농사를 지을 수 있다 한다.
1990년대 단편 소설“빛의 걸음걸이”를 쓴 소설가 윤대녕(尹大寧, 1962.5.1. ~)은 어릴 적 충남 예산 할아버지 집에서 자랐다.
소 등에 올라타 개울 건너고 들을 누볐다. 밤에 무서운 꿈을 꾸다 깨면 방 옆 외양간에서 소가 푸우 하고 몰아쉬는 숨소리에 안심하곤 했다고 했다.
사촌형 대학 등록금을 대느라 소를 팔기 전날 밤 외양간 앞에서 숨죽여 우는 소리가 들렸다. 큰아버지였다.
이튿날 대문을 나서며 소는 자꾸 자기가 살던 외양간을 뒤돌아봤다.
윤대녕에게 소는 식구였기에 “소를 먹거리로 이야기하는 건 가슴 아픈 일”이라고 했다.
12대에 걸쳐 만석(萬石)부자집인 경주 교동의 최부자집 집터는
풍수지리상 소가 누워있는 “와우혈(臥牛穴)”이라고 했다.
소는 쇳소리인 워낭소리를 귀로 들어야 한다고 해서, 최부자집
옆에는 일부러 쇳소리 나는 대장간을 만들었다고 했다.
지금 신흥종교인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는 증산교(甑山敎)의
교조(敎祖)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의 분파(分派)이다.
구한말 강증산(姜甑山)은 소를 두고 예언하기를
“조선의 삼팔선이 세계의 상씨름 판인데, 씨름판에서 소(牛)가 나가면 판을 걷게 되리라"고 예언한 바 있다.
농기계의 발달로 소가 들에서 사라진 시대에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한민족에게 소는 예사롭지 않은 상징을 지닌 동물임을 시사 하는 이야기다.
만해 한용운은 말년에 서울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이란 이름의 북향집을 짓고 살았다.
지금도 있다.
“심우(尋牛)”은 “소를 찾는다”는 뜻이다.
지금은 가축이나 동물을 죽이는 도축(屠畜)은 법으로 정해져 있다.
조선 시대에도 소의 도축과 소 절도범에게는 형벌이 엄했다고
한다.
소를 도살하면 오른쪽 팔 아랫마디에 “도살우(盜殺牛)”라고
문신(文身)을 새겨 넣고 처자와 함께 먼 섬으로 쫓아냈다고 하였다.
소는 태어나 열 달쯤 지나면 불에 빨갛게 달군 쇠로 콧구멍을 뚫렸다.
거기 코뚜레를 끼우고 곧장 밭으로 나가 쟁기 끄는 훈련을 시작한다.
소는 목에 멍에를 메고서 평생 쟁기와 써레를 끌었다.
고마운 집짐승이자 소중한 재산이었다.
옛사람들은 소를 “생구(生口)”라고 불렀다.
“생구(生口)”는 원래 집안 하인이나 종을 일컫는 말이었다.
“소는 농가의 조상”이라는 속담도 있다. 소를 조상처럼 위한다는 뜻이다.
1960년 “대지(大地)”의 작가 펄벅 여사가 한국을 빙문했을 때
지게에 볏단을 짊어진 농부가 소달구지를 끌면서 타지 않고 곁에서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감동했다고 하였다.
무거운 달구지를 끄는 소를 힘들지 않게 하기 위해 달구지를 타지 않고 짐을 지고 걷는 모습이 이채로웠던 것이었다.
펄벅이 쓴 “살아있는 갈대(The Living Reed)”는
1963년도에 출판한 역사 소설로 한국을 배경으로 19세기 말부터 해방 때까지 한국 근대사 격동기에 살아간 한 양반 가족 4대(代)의 이야기를 쓴 소설이다.
이 소설 첫머리에
“한국은 고상한 사람들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라고 극찬한 것은
소를 포함한 한국의 전통사회의 경험들이 개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국 고전에도 소는 중요한 존재로 등장한다.
요임금은 순임금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었으나,
순임금은 다음 임금 자리를 물려줄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허유(許由)라는 고사(高士)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찾아가서
“내가 천하를 물려줄 당신을 만나니 기쁘기 한량없소이다.
당신이 이 나라 임금이 되어 민생을 보살펴 주시오“ 라고 말했다.
그러나 허유(許由)는 임금 자리를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리고 그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영천(潁川)으로 달려가서,
“임금 자리 맡으라”는 소리를 더럽다면 면 양쪽 귀를 번갈아 씻고 있었다.
그때 마침 소부(巢夫)라는 사람이 소를 타고 와서 소에게 물을
먹이려던 참이었다.
소부는 허유에게 귀를 씻는 까닭을 물었다.
허유는 “임금 자리 맡으라는 더러운 소리를 들어서”
들은 귀를 이 맑은 물에 씻는다고 말하니,
소부(巢夫)는 소에게 물 먹이려던 중단하고 강 상류로 올라가며,
더러운 말을 듣고 더럽혀진 귀를 씻은 더러운 물을 소엔들 어찌 먹일 수 있겠느냐 면서,
상류에 올라 소에게 맑은 물을 먹였다는 고사가 있다.
사람 이상으로 소를 귀하게 생각하는 이야기다.
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편에는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흔종(釁鍾-새로만든 종(鐘)에 짐승의 피를 바르는 의식)에 쓰기
위해 끌려가는 소가 죽는 것이 무서워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고
양(羊)으로 대신하게 한 것을 맹자가 인(仁)의 마음이라고 칭찬했다는 고사가 나온다.
장자(莊子)도 인간은 모름지기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갓 태어난 송아지는 무심히 눈을 뜨고 있을 뿐 아무 것도 마음에 두고 있지 않다고 했다.
예기(禮記) 왕제(王制) 편은
諸侯無故不殺牛 大夫無故不殺羊
“제후(諸侯)는 연고 없이 소를 죽이지 않으며, 대부(大夫)는 연고 없이 양을 죽이지 않는다”
라고 하여 소는 제후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후한서(後漢書) 양서전(楊書傳)에 양서(楊書)가 자신의 뛰어난 재주로 인해
조조에게 죽임을 당한 후 양서의 아비인 양표(楊彪)가 부모와 자식지간의
지극한 정을 표현한 “지독지애(犢之愛)”란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는다는 뜻으로 소가 지닌 지극한 모성을 상징하고 있는 예이다.
불교(佛敎)와 소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태자 때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인데 성(姓)에 해당하는 “고타마”의 뜻은 “가장 좋은 소, 거룩한 소”의 의미라고 하였다.
불교에서는 십우도(十牛圖)의 논리가 있다.
심우도(尋牛圖)라고도 하는데 절에 가면 주로 대웅전의 옆 뒷벽에 열 개의 그림 속에 동자가 소를 찾는 그림이다.
십우도는 대승불교의 차원에서 나온 것이이라 한다.
십우도(十牛圖)는 남송대의 곽암사원(廓庵師遠)에 의해 지어진 것이다.
그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설명하기 위해 열 가지 소의 그림을 그리고 거기다 송(頌)을 붙였다.
십우도(十牛圖) 즉 심우도(尋牛圖)를 요약하여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①심우(尋牛)-동자승이 소를 찾고 있는 장면이다.
자신의 본성을 잊고 찾아 헤매는 것은 불도 수행의 입문을
일컫는다.
②견적(見跡)-동자승이 소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그것을 따라간다.
수행자는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본성의 발자취를
느끼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③견우(見牛)-동자승이 소의 뒷모습이나 소의 꼬리를 발견한다.
수행자가 사물의 근원을 보기 시작하여 견성(見性)
에 가까웠음을 뜻한다.
④득우(得牛)-동자승이 드디어 소의 꼬리를 잡아 막 고삐를 건 모습이다.
수행자가 자신의 마음에 있는 불성(佛性)을
꿰뚫어보는 견성의 단계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⑤목우(牧友)-동자승이 소에 코뚜레를 뚫어 길들이며 끌고 가는 모습이다.
얻은 본성을 고행과 수행으로 길들여서 삼독의 때를
지우는 단계로 소도 점점 흰색으로 변화된다.
⑥기우귀가(騎牛歸家)-흰 소에 올라탄 동자승이 피리를 불며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더 이상 아무런 장애가 없는 자유로운
무애의 단계로 더할 나위없이 즐거운 때이다.
⑦망우재인(忘牛在人)-소는 없고 동자승만 앉아 있다.
소는 단지 방편일 뿐 고향에 돌아온 후에는
모두 잊어야 한다.
⑧인우구망(人牛俱忘)-소도 사람도 실체가 없는 모두 공(空)임을
깨닫는다는 뜻으로 텅빈 원상만 그려져 있다.
⑨반본환원(返本還源)-강은 잔잔히 흐르고 꽃은 붉게 피어 있는
산수풍경만이 그려져있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깨닫는다는 것으로
이는 우주를 아무런 번뇌 없이 참된 경지로서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⑩입전수수(入廛垂手)-지팡이에 도포를 두른 행각승의 모습이나
목동이 포대화상(布袋和尙)과 마주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육도중생(六道衆生)의 골목에 들어가 손을
드리운다는 뜻으로 중생제도를 위해 속세로
나아감을 뜻한다,
즉 불성(佛性)을 소에다 비유하여 이것을 깨치겠다고 생각하는
단계인 초발심(初發心) 에서부터 끝에서는 깨달음조차 초탈하고
대중 교화에 나서는 단계까지를 열 가지 그림으로 묘사한 것이다.
심우도(尋牛圖)
斫來無影樹(작래무영수)-그림자 없는 나무를 하다가
燋盡水中漚(초진수중구)-물 속 거품을 모두 태웠버렸구나.
可笑騎牛者(가소기우자)-우습구나, 소 타고 가는 사람이여
騎牛更覓牛(기우갱멱우)-소를 타고서도 다시 소를 찾다니.
휴정(休靜) 서산대사(西山大師)
불경(佛經)인 능엄경(楞嚴經)에서는 소를 “대력백우(大力白牛)”라고 불렀다.
“힘이 엄청나게 센 흰 소”란 뜻이다.
힌두교(印度敎)의 암소 숭배자들은 암소를 자신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늙어서 우유도 짤 수 없는 암소를 아무 소용없다고 죽이는 행위는
어머니가 늙었다고 살해하는 행위와 동일하게 여긴다.
인도의 암소는 힌두교의 윤회설과 관련돼 있다.
악마로부터 소에 이르려면 86번의 윤회를 거쳐야 하는데, 87번을 윤회하면
인간이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암소를 죽인 사람의 영혼은 가장 낮은 단계로 미끄러져 이 모든 과정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기독교의 성경속 소 숭배사상은 철저히 우상숭배로 낙인찍힌다.
기독교속의 소는 “제물(祭物)”에 사용되는 희생물(犧牲物)에 불과했으며
가축(家畜)인 소는 인간과 가장 가까우면서,
인간에게 완전히 희생하고, 인간을 대신한 제물이었던 것이다.
출애굽이후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에게 야훼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요구하였을 때 아론이 재빨리 하나님을 대신할 다른 신으로 금송아지 상을 만들었던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신성한 소 “아피스(Apis)”를 숭배하던 이집트 풍습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그대로 행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가축(家畜)으로서 소에 관한 인도주의적 규례는 성경에는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다.
구약성경 출애급기 23장 12절에
“너는 육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 칠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것이며---”
신약성경 누가복음 13장 15절에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에게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구약성경 신명기 25장 4절, 고린도전서 9장 9절에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아야 한다”
구약성경 출애급기 23장 4절에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 돌리지며--”
소는 살아서는 사람을 위한 노동을 대신하여 주고, 우유를 주어 사람을 건강하게 한다,
또 사람을 대신하여 신께 바치는 제물로 쓰인다.
죽어서도 고기, 뼈, 가죽, 그리고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선짓국으로 쓰이게 한다.
쓸개까지도 우황(牛黃)이란 한약재로 변하여 사람의 건강을 도운다
삶과 죽음 모든 것을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아닌 남을 위해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버리는 행위를 일컬어 “희생(犧牲)”이라 하는데 이것은 본디 하늘에 제사지내는 제물에서 유래한 말로 모두 소를 지칭하는 말이다.
“희생(犧牲)”이란 한자(漢字)를 보면 두 글자가 소우(牛) 변으로 되어있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에게 친근한 소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은 사람이
소를 죽일 때뿐이라고 한다.
소를 죽일 때 차마 그 슬픈 눈을 차마 볼수 없어서 예전부터
우리나라에선 소를 잡기 전에 보자기를 씌우고 정화수를 소의 몸에
뿌리는 의식을 해왔었다.
소를 타고
太平容貌恣騎牛(태평용모자기우)-태평한 모습으로 편하게 소에 걸터앉아
半濕殘雨過壟頭(반습잔우과롱두)-비안개 축축한 들길을 가네.
知有水邊家近在(지유수변가근재)-저 물가 가까운 곳에 집이 있는가.
從他落日傍溪流(종타락일방계류)-그를 쫓아 흐르는 냇물 곁에 석양이 지네.
곽여(郭輿)
이중섭의 “황소”그림이 새삼 오늘날 사람의 인성(人性)을 돌아보게 한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