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두 왕이 세워짐
삼하 2:1-11
1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2 다윗이 그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을 데리고 그리로 올라갈 때에
3 또 자기와 함께 한 추종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다윗이 다 데리고 올라가서 헤브론 각 성읍에 살게 하니라
4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았더라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을 장사한 사람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니이다 하매
5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령들을 보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6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7 이제 너희는 손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할지어다 너희 주 사울이 죽었고 또 유다 족속이 내게 기름을 부어 그들의 왕으로 삼았음이니라 하니라
8 사울의 군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이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
9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더라
10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이스라엘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사십 세이며 두 해 동안 왕위에 있으니라 유다 족속은 다윗을 따르니
11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이 된 날 수는 칠 년 육 개월이더라
삼하 2:1-11 / [유다 지파의 왕이 된 다윗] 다윗이 여호와께 물었다. `이제는 제가 유다 지파의 성읍들 중 한 성읍에 들어가 살아도 되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올라가라!' 고 대답하시자 다윗은 `제가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되겠습니까?' 하고 다시 물었다. 여호와께서는 `헤브론으로 올라가라!' 고 대답하셨다. 2) 이리하여 다윗은 자기의 두 아내, 즉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나발의 아내였던 갈멜 여인 아비가일을 데리고 헤브론으로 올라갔다. 3) 다윗의 부하들도 가족을 모두 거느리고 그와 함께 올라가서 헤브론 주변에 있는 여러 성읍들을 차지하고 살았다. 4) 그러자 유다 지파의 장로들이 헤브론으로 올라와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자기들의 왕으로 세웠다. [다윗왕과 길르앗야베스 주민] 유다 왕이 된 다윗은 사울의 시체를 거두어다가 장사 지낸 사람들이 바로 길르앗야베스의 주민들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5)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사신들을 보내어 이렇게 전하였다. `여러분이 사울왕의 시체를 장사 지내 줌으로써 그분에게 끝까지 충성하였으니, 여호와께서 그 충성을 보시고 여러분에게 보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6) 이제는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변함없는 사랑과 진실하심을 베풀어 주시기 바라는 마음으로 나도 여러분에게 그와 같이 좋은 일로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7) 비록 여러분의 왕 사울은 죽었어도 유다 지파가 이미 나를 자기들의 왕으로 세워 놓았으니, 여러분도 실망하지 말고 오히려 강하고 담대한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8) [허수아비 왕이 된 이스보셋] 사울의 왕가가 전쟁으로 패망하자, 그의 군사령관이었던 아브넬이 이스라엘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넬의 아들 아브넬은 이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요단강 동쪽으로 건너가 얍복 강가의 성읍 마하나임으로 갔다. 요단강 서쪽에 있는 이스라엘 지역은 블레셋 족속의 세력이 뻗쳐 있어 일부러 안전한 곳을 택한 것이다. 이스보셋은 본래 `여호와의 사람'이라는 뜻의 ㄱ) 리스위라는 이름을 썼으나 나중에 `바알 우상의 사람' 이라는 뜻의 이스바알이나 `치욕의 사람'이라는 뜻의 이스보셋으로 불렸다. (ㄱ. 좀더 정확한 발음은 `이쉬비'이다) 9) 아브넬은 마하나임에서 이스보셋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우고, 길르앗 지역과 아술 지방과 이스르엘 평원과 에브라임 산지와 베냐민 지파를 다스리게 하였다. 그런데 갈릴리 지역의 아술 지방과 이스르엘 평원의 이스르엘 지역은 블레셋의 통치를 받던 행정 구역상의 이름으로서, 여기서는 이스보셋이 블레셋 족속의 영주에 불과하였다. 10) 이스보셋은 40세에 왕이 되어 2년 동안 다스렸다. 사울이 죽은 뒤에는 유다 지파만이 다윗을 왕으로 모셨으며, 11) 다윗은 유다 왕으로서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동안 다스렸다.
다윗이 헤브론으로 올라가 유다 지파의 왕이 됩니다.
헤브론 이주(1-3) “그 후에”는 사울이 전사한 후 얼마 동안 다윗이 시글락에서 머물렀음을 암시합니다. 그때에 시글락에 머물던 다윗에게로 많은 용사들이 몰려왔기 때문에 다윗의 세력이 강해졌습니다(대상 12:1-22). 다윗은 무력으로 왕권을 차지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지만 그는 기름 부음 받은 자답게 권력욕을 내려놓고 먼저 여호와의 뜻을 여쭙니다. 다윗은 대제사장의 에봇에 달린 우림과 둠밈을 통해 여호와의 뜻을 알아보았고, 헤브론으로 올라가라는 지시를 따라 그곳으로 이주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울 왕과 달리 철저하게 여호와의 뜻에 순종하는 다윗의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과 함께 두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그를 따르던 모든 추종자들이 헤브론으로 올라와 정착하였으며, 다윗의 적극적인 지지자들이 되었습니다.
유다 족속의 왕(4-7) 일찍이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던 다윗(삼상 16:13)이 마침내 두 번째 기름 부음을 받고 유다 족속의 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앞으로 온 이스라엘 왕으로 즉위하는 문제가 남아있었으나 이는 시간문제였을 뿐입니다(약 7년 6개월 후). 하나님의 계획은 어떠한 반대가 있을지라도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유다의 왕으로서 다윗이 처음으로 한 일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칭찬한 것입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사울 왕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삼상 11:1-11), 사울 왕의 시신을 가져다가 정중히 장사지내었습니다(삼상 31:11-13). 다윗 왕이 술수에 능한 정치꾼이었다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경계하였겠지만 오히려 그들을 칭찬하였고, 앞으로도 사울 왕처럼 그들을 지속적으로 돌보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이러한 포용정책은 훗날 온 이스라엘이 통합되는 효과로 나타납니다.
두 왕의 대치(8-11)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였습니다. 사울 왕이 죽었지만 사울 왕의 잔재세력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 사후에 군대장관 아브넬은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그는 허울뿐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워 왕국의 틀을 갖추었습니다. 다윗 왕을 지지하는 세력은 유다 지파 하나였으나 아브넬과 이스보셋 진영은 많은 지파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뻔합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은 다윗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이스보셋은 다윗 왕을 돋보이게 하는 들러리에 불과합니다. 다윗 왕은 여호와의 계획이 이루어질 때까지 7년 6개월 동안 묵묵히 리더십을 키워갔습니다.
적 용 : 다윗은 내 편이 아닌 사람들까지 포용할 줄 아는 큰 그릇이었습니다. 당신은 이러한 다윗의 모습에서 무엇을 배웁니까?
위산구인 공휴일궤(潙山九仞功虧一簣) 서경에 이르기를 아홉 길이나 되는 산을 만드는 공이 한 삼태기의 흙 때문에 무너진다라고 했습니다. 성공적인 일을 마치기 위해서는 끝까지 방심하는 일 없이 착실하게 노력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위험요소가 없어진 상황이며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까지 받은 다윗은 바로 왕위에 오르지 않고 하나님의 의견을 구합니다. 오랫 피난생활로 매사 신중하고 인내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훈련되어진 다윗의 모습은 우리에게 인내의 긴 시간을 기도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신중함을 갖추도록 보여주는 듯합니다.
호크마 주석
=====2:1
그 후에 - 본장과 전장(前章)사이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경과하였음을 나타내 주 는 관용적 표현이다.역대상의 기록에 의하면 다윗은 사울의 전사 소식을 듣고서도 얼마 동안은 블레셋 땅 시글락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삼상 25:5-7).그리고 이때 더욱더 많은 용사들이 다윗에게로 몰려왔기 때문에 그의 세력은 더욱 강성해진 듯하다(대상 12:1-22).이는 곧 이제 다윗이 전사한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등극할 때가 이르렀음을 시사해 준다(Pulpit Commentary).
여호와께 물어 - 아마도 이때 다윗은 우림과 둠밈(Urim and Thummim)으로 여호와께 물었을 것이다.그 근거로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들 수 있다.첫째,우림과 둠밈을 단 에봇을 아비아달 대제사장이 입고 있었는데,당시 그가 다위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삼상 23:6).둘째,다윗은 과거에도 아비아달의 아버지 아히멜렉에게 우림과 둠밈을 사용,하나님의 뜻을 물어봐 달라고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삼상 22:10).한편 이처럼 다윗은 사울의 사후(死後)자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는 정세(政勢)속에서도 자기의기분에 따라 행동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았다.이러한 다윗의 행동은 중요한 일에 부딪칠 때마다 취한 행동으로서(5:19;삼상 22:10),이는 그가 그만큼 자기의 앞길을 하나님께 맡기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 - 이제 사울이 죽은 시점에서 다윗은 고국으로 돌아오려 한다.그런데 이와 관련 다윗이 특별히 유다 땅을 염두에 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왜냐하면 이스라엘에는 아직 사울 가문을 추종하는 적대 세력이 있었으니(8,9절)그는 자기 지파,유다 땅에서 필시 정착지를 구하려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Lange).
헤브론 - 예루살렘 남서쪽 약 40km 지점에 위치한 고성(古城)이다.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Kirjath-Arba)이며(수 15:13;삿 1:10) '헤브론'(Hebron)의 뜻은 '연합','친교'이다.그런데 여호와께서 새로운 정착지를 찾는 다윗에게 헤브론으로 가라고 명하신 까닭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1)헤브론은 유다 지파의 성읍이며 유다 지파 지역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서 다윗이 유다 지파의 세력을 업고 왕이될 정치적인 거점으로 알맞은 곳이었기 때문이다(4절).(2)헤브론은 여호수아 시대에 갈렙에게 패퇴당한 아낙 자손들이 차지했던 요새로서(수 15:13-17)산지가 성읍으로 둘러싸인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3)그리고 무엇보다도 헤브론에는 다윗과 친분이 두터운 유다의 장로들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삼상 30:26,30).
=====2:2
이스라엘 여인 아히노암 - '아히노암'(Ahinoam)의 뜻은 '호감가는 형제'이다.그녀는 다윗이 자신의 첫번째 아내 미갈을 발디에게 빼앗긴 후 새로이 취한 또 다른 아내이다.삼상 25:43 주석 참조.그녀는 다윗에게 한 아들을 낳았는데 곧 장자(長子)암논이다(3:2).
갈멜사람...아비가일 - '아비가일'(Abigail)의 뜻은 '아버지가 기뻐하심'이다.아름답고 지혜로운 여인으로 본남편 나발 사후(死後)다윗에게로 개가(改嫁)하였다.삼상 25:39-42주석 참조.그녀 역시 다윗에게 아들을 낳았는데 일명'다니엘'(대상 3:1)이라고도 하는 '길르압'이다(3:3).
=====2:3
종자들과 그들의 권속들을...헤브론 각성에 거하게 하니라 - 삼상 27:2에는 당시 다윗을 추종하던 자들의 수가 600인 이었던 것으로 나온다.그런데 이들에게도 권속(眷屬)들,즉 딸린 식구들이 있었다 하니 적어도 그 수는 두배 이상이었을 것이다.게다가 이들에게는 아말렉족에게서 탈취한 무수한 양떼와 소떼도 있었다(삼상 30:18-20).따라서 아마 다윗은 이들을 헤브론에 다 수용치 못하고 헤브론 및 그 인접한 성읍들에 분산 수용하였을 것이다(Lange, Matthew, Henry, Pulpit Commentary).
=====2:4
유다 사람들이...왕을 삼았더라 - 일찍이 야곱은 유다 지파에 대하여 예언하기를 그들 중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나올 것이라고 하였다(창 49:8,10).그런데 그때 이후 약 85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비록 유다 족속만의 왕이긴 하나 다윗이 왕위에 올랐으니 비로소 그 예언은 성취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물론 이 예언은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한 때에 보다 본격적으로 성취되었긴 하나(5:1-3)그 궁극적 성취는 '실로'(Shiloh)곧 유다 혈통을 좇아 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므로 궁극적으로 성취되었다.창 49:10 주석 참조.
기름을 부어 - 다윗은 그의 일생동안 다음과 같이 세 번 기름부음을 받았다.(1)약 15년 전 사무엘에게서(삼상 16:13),(2)본절에서 유다의 장로들로부터 유다의 왕으로,(3)약 7년 6개월 후 이스라엘 장로들에게서 온 이스라엘 왕으로(5:3).그런데 다윗의 두번째,세번째 기름부음은 원칙적으로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하신 사건이었으며 그 결과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두,세번째의 기름부음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아무튼 성격상 두번째,세번째의 기름부음은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구체화되는 사건,즉 다윗이 실제로 왕위에 오르는 공식적인 행사였다.우리는 여기에서(1)하나님이 말씀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삼상 15:29) 과 (2)하나님께 인정받는 자는 당시에는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필경에는 승리한다는 영적 진리(요 16:33)를 발견하게 된다.
사울을 장사한...길르앗 야베스 사람들 - 길르앗 야베스(Gilead-Jabesh)는 요단 강 동편,므낫세 지파의 영토내에 있는 성읍이다(민 32:39,40).벧스안에서 동남쪽으로 약 20km 지점에 위치한 이곳 일대는요단 강 동쪽 유역에서 가장 비옥한 땅으로 일찍부터 알려져 있다.그런데 이곳 사람들이 생명을 걸고 사울의 시체를 되찾아 엄숙히 장례를 치뤄 준 까닭(삼상 31:11-13)은 일전에 그들이 암몬 왕 나하스에게 포위당했을 때 사울이 와서 구해 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삼상 11:1-11).
=====2:5
사자들을 보내어 - 이는 다윗이 왕위에 오른 후 공식적으로 행한 첫 행사로 그 의미가 적지 않다.그러면 다윗이 이처럼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사자들을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혹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1)야베스 사람들은 사울에게 큰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므로(삼상 11장)그들의 오해가 없도록,즉 다윗이 사울 왕을 반역하여 스스로 왕이 된 것이 아님을 그들에게 설득하기 위해서(7절)라는 견해(Keil & Delitzsch Commentary,Vol. II, p. 293). (2)그들도 다윗을 왕으로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라는 견해(Matthew Henry).그러나 이 견해만을 주장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왜냐하면 다윗은 정치적인 이해 관계보다 하나님의 공의(公義)에 더 큰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왕적 권위가 사람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다는 진리를 아는 사람으로서 그와 같이 얄팍한 수를 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1:14,15). 따라서 다윗이 이처럼 저들에게 사자들을 보낸 근본 이유는 자기를 대신하여 사울의 시체를 장사지낸 야베스 사람들의 선행에 보답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는 앞서 다윗이 사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한 '활 노래'(1:17-27)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다윗이 사자들을 보낸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노고를 치하한 것은 그의 진실된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지 결코 정치적 이해 관계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2:6
은혜와 진리 - 이 두 단어는 하나님의 언약(covenant)과 관계된 용어들이다.그중 먼저'은혜'(Kindness)로 번역된 '헤세드'(* )는 단순한 관대함이나 인자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적 사랑을 의미한다.즉, 이는 하나님의 언약대로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어 그의 보호를 받게 되는 은혜를 의미하는 말이다(출 19:5,6;신 5:32,33).다음으로 '진리'(truth)로 번역된 '에메트'(* )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식언(食言)치 않으시고 그대로 지키신다는 의미의 '진실'을 말한다(삼상 15:29).따라서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하나님과의 언약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풍성한 복을 받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이 용어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Lange).
=====2:7
손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할지어다 - 성경에서 '손'은 종종 '힘'이나 '능력'을 상징한다(창 9:2;14:22;32:11;출 2:19;레 26:25).그리고 '담대히 할지어다'라는 말의 직접적 뜻은 '용맹의 아들이 되라'이다.따라서 본절은 내가 너희를 보호할 터이니 '낙심말고 힘을 내라'(공동 번역)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그런데 이는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약속이다. 즉 일찍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암몬의 침략 위기에서 사울 왕의 도움으로 구출된 경험을 한 바 있다 (삼상 11장).그러나 사울 왕이 없는 지금 저들은 외적의 침략을 두려워할 수 밖에 없었다.그러므로 다윗의 이와같은 의사는 왕적 권위로서 저들을 보호하겠다는 최상의 약속이었던 것이다.
=====2:8
넬의 아들 아브넬 - 그의 아비넬(Ner)은 사울의 숙부였으니(삼상 14:50),아브넬(Abner)은 사울의 사촌이자 이스보셋의 당숙(堂叔)이다.
이스보셋 - 대상 8:33;9:39에 의하면 그는 사울의 넷째 아들로서 그 본명이 에스바알(Esh-baal)로 되어 있다.에스바알은 '바알의 사람'이란 뜻인데 이것이 '부끄러움의 사람'이란 뜻인 이스보셋(Ishbosheth)으로 바뀐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측된다.당시 '바알'(* )이란 히브리어는 '주인',또는'주님'을 의미했다.그러나 후대에 이스라엘에 바알 종교가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바알이란 말을 경멸하게 되었다.그 결과 아마 사람들은 이름에 포함된 바알이란 말을 '부끄러움'이란 의미의 보셋(* )으로 바꾸어 버렸을 것이다.'여룹바알'이란 이름이 '여룹보셋' 또는 '여룹베셋'(11:21)으로 바뀐 것도 아마 같은 이유에서 일것이다 (Keil and Delitzsch ,Lange ,Rust ,Pulpit Commentary).
마하나임 - '두 진영' 또는 '두 군대'라는 뜻이다. 이곳은 유서깊은 땅으로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고향 가나안으로 돌아가던 중 천사들을 만났던 곳이다(창 32:1,2).때문에 야곱은 그곳을 '마하나임'(Mahanaim)이라 칭하였는데 그 정확한 위치는 분명치 않다.다만 추측컨데 요단 동쪽 갈르엣과 압복강 사이에 위치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은 갓 지파와 므낫세 반(半)지파의 기업 경계에 위치했으므로 아브넬과 이스보셋은 이 두 지파를 쉽게 통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수 13:26,30).한편,이곳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다윗이 위기에 처했을 때 피신하였던 곳이기도 하다(17:24,27;19:32).
=====2:9
길르앗 - 다윗이 이곳의 야베스 거민들에게 사절단을 파송한 바 있으에도 불구하고(4-7절)길르앗 족속이 이스보셋을 추종한 것으로 보아 아직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민심을 온전히 얻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술 - 이곳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추측들이 있다.(1)'그술'(Geshur)을 가리킨다는 추측이다(시리아역과 벌게이트역).즉 필사자(筆寫者)가 '게슈리'(* )라는 말을 '아슈리'(* )라는 말로 잘못 베꼈다는 것이다(Pulpit Commentary).그러나 그술은 아람 소국(小國)의 하나로서 다윗 시대에 자신의 황을 모시고 섬겼던 지역이다(3:3).따라서 이 추측은 옳지 않다. (2)보다 가능성 있는 추측으로 아술(Ashur)이 아셀(Asher)성읍과 그 지역을 가리킨다는 추측이다(Keil & Delitzsch).즉, 아셀 성읍은 이스라엘 동편에 위치한 곳으로 길보아 전투 때(삼상 31장)블레셋에게 빼앗겼으나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다시 점령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Bachienne).이 추측은 바로 다음에 이스라엘이라는 지명이 나오는 것을 볼 때 매우 가능성이 있다(Rust).
이스르엘 - 요단 강에서 길보아 산(삼상 31:1)을 거쳐 갈멜 산 부근을 지나 지중해에 까지 뻗쳐 있는 비교적 넓은 계곡과 평야 지대이다.하지만 사울 당시 이스라엘은 길보아 전투에서 패하여 이곳을 블레셋에게 빼앗겼다.그런데 이스보셋이 이곳의 왕이 되었다고 하니 분명 아브넬이 다시금 군사들을 규합하여 정복하였을 것이다.
=====2:10, 11
두 해 동안...일곱 해 여섯달 - 두 통치자의 통치 기간이 서로 상이하다.그러나 이것은 매우 당연하다.왜냐하면 다윗은 사울 왕의 사후(死後)얼마 안 있어 유다의 왕이 되었으나(1-4절)이스보셋은 5년여 동안 아브넬과 함께 재편성한 군대를 이끌고 블레셋과 싸워 빼앗겼던 땅을 다시 탈환한 뒤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Bunsen,Ewald,Keil and Delitzsch Commentary, Vol.II, p.296).
< 설 교 >
영적 지도자의 기본자세
삼하 2:1-7 / 박봉수목사
어느 시골 길에 한 농부가 소달구지를 끌고 터덜거리며 가고 있었습니다.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택시가 다가왔습니다. 택시 기사가 농부에게 길을 묻습니다. “동막골을 가려면 어디로 가야합니까?” 농부가 대답합니다. “저도 그리로 가니 저를 따라 오십시오” 그리고는 말없이 터덜거리며 갈 길을 갑니다. 택시 기사가 가슴을 치며 그 뒤를 따릅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지도자들은 그저 따라만 오라고 합니다. 따라 갈 수가 없는데 따라오라 합니다. 따라가고 싶지 않은데 따라오라고 합니다. 마치 택시가 소달구지를 뒤 따라가는 것 같습니다.
오늘 훌륭한 지도자, 존경 받는 지도자, 그리고 능력있는 지도자를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잘 이끌어주면 큰 역사를 일으킬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합니다. 오히려 지도자들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지도자 때문에 걱정하고 지도자 때문에 힘이 듭니다.
대표적으로 정치 지도자들이 문제입니다. 대통령, 국회의원, 그리고 위정자들이 국민을 실망시키고 힘들게 합니다. 경제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기업 총수들이 각종 비리에 연루되어 국민을 속상하게 합니다. 뿐 만 아니라 사회 각계 지도자들도 그렇습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국민의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영적 지도자들은 어떻습니까? 안타깝게도 기독교 지도자들이 국민들의 신망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에게 진심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약 3: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야고보 사도는 지도자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도자가 잘못했을 때 지도자에게는 추종자들보다 더 큰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 지도자들이 잘못했을 때 하나님께서 직접 준엄한 심판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지도자가 되면 큰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껏 지도력을 발휘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지도자에게 따르는 무거운 책임입니다. 지도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지도자가 되려고만 해서는 안됩니다. 좋은 지도자가 되고자 해야 합니다. 어떻게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에만 관심을 기울여서는 안됩니다. 어떻게 좋은 지도자로서 좋은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크고 작은 지도자들입니다. 혹은 국가나 사회에서 혹은 교회에서 혹은 가정에서 저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 지도자로 섬기고 있고 또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요? 좋은 지도자로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기본자세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다윗이 유다의 왕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정말 좋은 왕이 되었습니다. 좋은 지도자로서 나라를 잘 이끌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좋은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는 참 훌륭한 영적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좋은 영적 지도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영적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자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이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1. 하나님께 묻는 자세
본문 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 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다윗은 사울이 죽은 뒤 왕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제 유다로 올라가서 왕이 되겠다면 막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모든 백성들이 바라는 일이었습니다. 부하들이 그렇게 하기를 청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사실 다윗은 15년 전에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왕으로 세우시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적이었던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될 수 있는 기회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점점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서 사울과 정면으로 대결해서 왕위를 빼앗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묻는 지도자였습니다. 이런 태도가 다윗을 좋은 영적 지도자가 되게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묻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1.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지도자들이 좋은 지도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뜻대로 밀어붙이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의 생각, 추종자들의 뜻을 모른 채 일을 추진하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 채 일을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은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귀를 열어야 합니다. 국민과 추종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2.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지도자들이 좋은 지도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이 누구인지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운 사람인데 자신이 스스로 선 것인 줄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은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물으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서면 자기가 누구인지 재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3.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지도자들이 좋은 지도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할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시급히 해야 할 일은 뒤로 미루고 급하지 않은 일에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은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물으면 지금 해야 할 일을 깨닫게 됩니다. 시급히 해야 할 일 최선을 다해서 몰두해야 할 일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영적 지도자들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좋은 영적 지도자가 되려면 기도를 잘해야 합니다.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기도에 실패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의 소원을 아뢰는 일에 몰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설득하는 일에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를 설득하시도록 내 마음을 하나님께 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저명한 기독교 저술가 게리 스몰리라는 분이 [관계 DNA]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날마다 자기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➊ 이 세상의 모든 기대 수준을 가능한 제로까지 낮추면서 하루를 시작하길 ➋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받아들이길 ➌ 모든 당황스런 경험은 하나님을 경배할 기회로 삼기를 ➍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면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지 묻는 기도를 드린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좋은 영적 지도자는 좋은 기도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 좋은 기도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께 묻는 기도입니다.
2.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자세
본문 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윗이 그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을 데리고 그리로 올라갈 때에 또 자기와 함께 한 추종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다윗이 다 데리고 올라가서 헤브론 각 성읍에 살게 하니라”
다윗이 유다의 왕이 되기 위해 헤브론으로 갈 때 온 가족들을 다 데리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자기를 따라 다니며 고생했던 사람들 그 가족까지 모두 데리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지도자는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압니다. 자기를 위해 애썼던 것 늘 기억해 줍니다. 함께 고생했던 것 다 보상해 줍니다. 그래서 늘 그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습니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말이 있습니다. 한비자(韓非子)의 내저설편(內儲說篇)에 나오는 말입니다. '토끼 사냥 끝내자 사냥개 삶아 먹는다’는 뜻의 고사성어입니다. 적국을 멸망시킨 후 공(功)이 있는 모신(謀臣)은 쓸모없어 버림받는다는 뜻으로도 인용됩니다.
YS 정부시절에 국회의장을 하다가 그만 둔 김재순씨가 처음으로 사용하여 일반에 널리 알려진 말이다. 우리 정치 풍토를 한 마디로 꼬집는 말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정치 지도자들이 따르는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지 못하는 근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좋은 지도자는 결코 토사구팽을 모릅니다. 두고두고 감사하고, 두고두고 보살펴주고, 두고두고 함께 합니다.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인물을 꼽는다면 단연 링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인들의 삶 속에 링컨이라는 이름이 가장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인들이 가장 즐겨 타는 차가 링컨 컨티넨탈 또는 링컨 리무진입니다. 이 차를 타고 거리를 달리다 보면 링컨 애비뉴, 링컨 스트리트, 링컨 파크 같은 지명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차에 내려서 주차요원에게 팁을 주려고 돈을 꺼내면 지폐에 또 링컨이 나타납니다. 5달러짜리 앞면에는 링컨 초상화가 있고, 뒷면에는 링컨 기념관 사진이 있습니다. 그리고 링컨이 명해서 써 넣은 ‘In God, We Trust’라는 문구도 있습니다. 게다가 링컨의 생일을 기념해서 공휴일로 정하고 있습니다.
링컨이 암살당한지 무려 150년이 지났는데도 미국인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그의 통합의 리더십 때문입니다. 링컨이 재임하고 있는 동안 미국은 가장 극렬한 분열상을 보였습니다. 남북이 갈려서 전쟁까지 치렀습니다. 그는 이 극렬한 분열을 치유하고 남북을 하나로 통합했습니다. 반대자들까지 포용했고 심지어 적까지 그 품에 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지도자는 사람들과 함께 합니다.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합니다. 특별히 정적의 마음까지 움직여 그들을 돌려 세웁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합니다.
3. 선한 일을 추구하는 자세
본문 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령들을 보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 지어다.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다윗이 왕이 되어 제일 먼저 한 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사울 왕의 장례를 치러준 사람을 찾아서 치하하는 일입니다. 그토록 자기를 괴롭혔던 사울 왕이 죽었습니다. 그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 치른 사람 어떻게 보면 괘씸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냥 모른 체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찾아서 칭찬합니다.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상을 주려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영적 지도자는 선한 일을 도모하는 사람입니다. 늘 그 마음에 선한 일을 생각합니다. 늘 선한 일을 추진합니다. 늘 선한 일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함께 한 사람들에게 보람을 느끼게 해 줍니다.
딛 2:14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엡 2:1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 선한 일을 하도록 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하도록 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신 목적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결국 좋은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도자로 세우신 이유가 바로 선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사람입니다.
■ 영국의 여자 오토바이 선수 가운데 안드레아 콜먼이 있습니다. 이 분이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눈여겨 본 것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오지에서는 병이 나도 치료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병원은 도시에나 있고, 타고 갈 차도 없고 닦여진 도로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단한 치료로 건질 수 있는 생명도 버려지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녀는 몇 달러짜리 부품이 없다는 이유로 버려지는 오토바이를 보며 이것을 어떻게 아프리카에서 활용할 방법이 없을까를 생각했습니다. 당시 아프리카에 의약품을 기부하는 곳은 많았지만 그것이 오지까지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건강을 위한 기수’(Riders for Health)라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1996년 레소토에서 47대의 오토바이로 의약품을 수송하고 환자들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곧 그들의 활동은 아프리카 전역으로 번져 나갔습니다. 그들이 배달한 모기장만으로도 아프리카에서 말라리아 사망률을 20%나 떨어뜨렸고, 지난 15년 동안 만여 명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업화되어 2005년 매출만 5백만 파운드에 달했습니다. 현재는 마을마다 환자 수송용 오토바이를 한 대씩 기증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한 여인의 작은 선행에 대한 동기가 이처럼 큰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영적 지도자는 선한 일을 꿈꿉니다. 선한 일을 창조해 냅니다. 그래서 좋은 지도자 주변에는 좋은 일들이 새롭게 시작됩니다. 좋은 일의 열매들이 풍성하게 거둬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도자가 중요합니다. 좋은 지도자가 세워지면 공동체에 좋은 일들이 가득합니다. 반면에 나쁜 지도자가 세워지면 공동체에 힘겨운 일들 고통스러운 일들이 가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 지도자들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좋은 영적 지도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영적 지도자의 자질을 갖추어야 합니다. 우선 늘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또한 좋은 일을 추구해야 합니다.
어디로 가리이까?
삼하 2장 1~4절 / 박찬길목사(좋은교회)
「10-10-10 인생이 달라지는 선택의 법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너럴 일렉트릭(GE)의 최고 경영자를 역임한 잭 웰치의 부인인 수지 웰치가 지었습니다. 현대인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지혜롭고 현명한 결정을 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겁니다.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은 이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하나, 다른 회사로 옮겨야 하나? 이성간에는 이 사람을 계속 만나야 하나, 헤어져야 하나? 부모들은 아이에게 운동을 계속 시켜야 되나, 그만 시켜야 하나? 사업하는 이들은 신규 사업에 투자해야 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어서 결정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겁니다.
저자는 중요한 결정을 앞둔 현대인들에게 텐텐텐의 법칙을 적용하라는 것입니다. 텐텐텐 법칙이란 의사 결정을 할 때에 10분 후에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10개월 후에는 어떤 결과가 나타날 것인가? 10년 후에 나는 어떠한 결과가 나타날 것인가를 미리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10-10-10의 법칙은 때로는 단기, 중기, 장기적인 결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10분 후는 바로 지금, 10개월 후는 예측 가능한 미래, 10년 후는 아주 먼 미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실 10-10-10의 법칙을 활용하면 10분 후의 내 모습을 생각할 수가 있고, 10개월 후의 내 모습을 생각할 수가 있고, 10년 후의 내 모습을 예측하기 때문에 내 삶에 많은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정확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미래를 알 수가 없고 세상이 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한치 앞도 모르잖아요. 한 치는 1.2inch, 3cm인데, 검지손가락의 첫 마디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허리케인 샌디가 말해주고 있잖아요. 삼일 전부터 대피했는데, 쓰나미와 같은 엄청난 피해가 났잖아요.
여러분,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시대에 살면서 어떻게 하면 미래에 되어 질 일을 정확하게 결정할 수가 있을까요? 다윗을 통해서 비결을 배우고자 합니다. 다윗의 일생은 순탄한 생애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나서 양을 키우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다윗은 어린 나이에 전쟁에 나가서 싸우는데 승승장구합니다.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아집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사울 왕은 심기가 불편해집니다. 다윗을 죽이면 왕위가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해서 10여 년 동안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됩니다.
시편 57편은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엔게디 굴에 피신하여 있으면서 자신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재앙이 지나가기까지 피하리이다.’ 사울 왕이 3천명의 군사를 대동하고 수색하니까 재앙이라고 표현합니다. 뿐만 아니라 남들에게 비방을 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자들 가운데 산다고 말합니다.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쫓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창과 화살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과 같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30세의 나이로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되었을 때에도 고난의 삶을 살아갑니다. 친아들인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아버지를 죽이려고 합니다. 세상에 이런 비극이 어디 있어요. 아버지가 자식에게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이지요. 사무엘하 15:30에 보면 다윗이 피난 갈 때에 맨발로 머리를 숙이고 울면서 갔다고 했습니다.
시편 3편에 보면 다윗이 압살롬을 피할 때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1절에서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얼마나 대적이 많으면 사랑하는 아들까지 대적이 되어서 자기를 쳤겠어요? 2절에서는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압살롬에게 쫓겨 다니는 다윗 왕의 모습을 사람들이 보고는 다윗 시대는 갔어. 다윗은 하나님께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말을 듣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인지 짐작이 갑니다. 시편 116:3,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란과 슬픔을 만났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의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가만히 보면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면서 다윗의 이름을 집어넣습니다. 마태복음 1:1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이삭도 있고 야곱도 있고 요셉도 있는데 성경은 다윗을 넣습니다. 다윗의 믿음과 신앙을 하나님이 인정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사도행전 13:22의 말씀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의 어떠한 신앙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을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을 봅니다.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 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께 묻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유다의 한 동네로 올라가도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올라가라고 하시니까 그러면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묻습니다. 다윗은 조급해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여쭈는 사람이었습니다. 왕이 되기 이전에도 하나님께 여쭈었고, 왕이 된 이후에도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역대상 14장에 가면 다윗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블레셋 사람이 듣고 다윗을 잡으려고 쳐들어옵니다. 다윗이 이 말을 듣고 하나님께 여쭙니다. 14:10,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올라가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다윗이 지금 하나님께 여쭐 때가 아닙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미 르바임 골짜기에 쳐들어왔기 때문에 군대를 동원하는 명령을 내리고 갑옷을 입고 전쟁터로 나가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묻고 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이 응답하시지요.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어떻게 되었을까요? 새번역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11절, “홍수가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듯이, 하나님께서 나의 손으로 나의 원수들을 그렇게 휩쓸어 버리셨다.”
다윗은 환경과 조건에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지혜와 경험을 의존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여쭈는 사람이었습니다.
블레셋이 다윗에게 패한 뒤에 분했는지 다시 침략합니다. 군대를 재정비해서 전력을 갖추고 르바임 골짜기로 쳐들어 온 겁니다.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군대가 동일한 무기로 싸우는 전쟁입니다. 이쯤 되면 다윗은 블레셋과 싸운 경험이 있으니까 곧 바로 나가서 싸워도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역대상 14:14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다윗이 또 하나님께 묻자온대” 다윗은 다시 하나님께 묻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올라가도 되겠습니까? 주께서 그들을 저의 손에 넘겨주시겠습니까?” 다윗은 변함이 없어요. 자기의 경험을 의지하지도 않고, 자기 생각을 내세우지도 않아요. 언제나 하나님께 물어요.
이때에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시나요? “하나님이 이르시되 마주 올라가지 말고 그들 뒤로 돌아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그들을 기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나가서 싸우라” 하나님의 작전이 바뀌었어요. 지난번처럼 정면에서 공격하면 진다는 뜻입니다. 블레셋이 준비하고 왔기 때문에 전과 동일하게 나가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뒤로 가라는 거예요. 어떻게 되었어요. 쫓아낸 것이 아니라 게셀까지 이르렀다(역대상14:16)고 했어요. 영토가 확장된 겁니다.
여러분, 사무엘하를 1장부터 읽어보면 다윗이 굳이 하나님께 묻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무엘하 1장에서 사울 왕이 죽습니다. 다윗에게는 호재이지요. 15년 전에 다윗이 목동이었을 때에 기름부음을 받았잖아요.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쓰신다는 징표입니다. 왕이나 제사장이나 예언자나 선지자로 부르실 때에 기름 부음을 받는데, 다윗은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쓰신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이 죽었어요. 그러면 누가 왕이 될 차례입니까? 다윗이지요. 다윗도 알고 다른 사람도 압니다. 그래서 다윗이 유다로 올라가서 왕이 되겠다고 해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백성들이 바라는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다윗은 유다 지파이기 때문에 쉽게 왕으로 추대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다로 올라 가리이까 묻지 않고 그냥 올라가도 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 물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급하게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하지도 않았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권리를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올라 가리이까” “어디로 가리이까”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는 다윗의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크고 작은 것을 떠나서 하나님께 여쭙는 겁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묻는 겁니다. “올라 가리이까” “어디로 가리이까”, 내 방법이 있어도 먼저 하나님께 묻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께 여쭐 때에 승리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묻을 때에 길이 열리고, 문제가 해결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울의 실패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역대상 10:13-14,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 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주셨더라.” 사울은 하나님께 묻지 않았어요.
여러분,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가름하는 것은 실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물었느냐? 묻지 않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는 사람은 성공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묻지 않으면 실패하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사업하다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하게 되었습니다. 사업의 어려움은 재정적인 것이잖아요. 돈 많은 사람을 만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이사야 31장을 읽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31:1-3,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의 말씀들을 변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들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들을 치시리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집사님이 이 말씀을 읽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렇지. 내가 지금 어렵다고 애굽을 찾아서 가는구나. 하나님은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돈 있다고 생각하는 애굽과 같은 사람을 찾고 있구나.” 그로부터 사람의 도움 받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나아와 무릎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사업이 어렵다고 애굽을 찾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사람을 만나게 해주셔서 사업의 어려운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물었더니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축복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묻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최상으로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여쭈고 응답을 받아서 헤브론으로 올라가지요. 헤브론에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4절을 봅니다.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았더라”
헤브론 지역은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요충지이고, 유다 지파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헤브론으로 올라가니까 유다 사람들이 다윗에게 찾아와서 기름을 부어 왕을 삼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다윗을 헤브론에 올라가라고 하신 이유는 다윗을 공식적으로 유대의 왕으로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올라 가리이까” 묻는 사람에게 최상으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어디로 가리이까” 여쭈는 사람에게 가장 복되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도우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 여쭈어서 이런 복과 은혜를 누리고 싶지 않으십니까?
어떻게 하면 이런 복을 받을 수가 있을까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크게 두 가지잖아요. 달라는 기도하고 묻는 기도입니다. 마태복음 7:7,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11절에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달라고 기도하면 좋은 것으로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필요한 것이 많잖아요. 달라고 하세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시고, 은사를 달라고 기도하시고, 취직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고, 배우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고, 자녀를 믿음으로 키우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최상으로 응답하실 줄로 믿습니다.
묻는 기도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다윗처럼 “올라 가리이까” “어디로 가리이까”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내 생각은 내려놓고, 내 경험은 인정하지 말고,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말고, 세상 유행에 동요되지 않고, 인간적인 꾀를 부리지 말고 하나님께 묻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의례적으로가 아니라 진실하고 간절하고 애절하게 하나님께 묻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3주 전에 LA에 집회를 다녀왔잖아요. 집회를 한 달 앞두고 부흥회를 해 달라는 연락이 왔어요. 시간이 없지요. 어떻게 설교를 하나 고민이 되었어요. 일반 설교도 그렇지만 부흥회는 하나님이 그 교회에 하고 싶으신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은혜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아무 설교나 하지 못하는 겁니다. 참 고민이 되었어요. 더군다나 그 교회의 사정을 모르는데, 교인 연령층도 모르고, 담임목사님도 모르고, 아는 것이라고는 생수의 교회 이름 밖에 없어요.
대책이 서지를 않아서 기도했어요. “하나님, 무슨 설교를 해야 되요? 어떤 설교를 해야 돼요? 그 교회에 하고 싶으신 말씀이 무엇이에요?”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100시간을 기도하라고 말씀하세요. 그대로 순종했어요. 쉽지 않았어요. 지난달에 청장년부 모임도 있었고, 북가주 자마 컨퍼런스가 3일 동안 있었고, 전교인 체육대회도 있었어요. 기도할 시간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도 어떻게 해요? 하나님께 묻는 방법 밖에는 없잖아요. 100시간 기도하면서 “하나님, 어떤 설교를 해야 돼요?” 계속해서 물었어요. 나중에는 종이와 펜을 방석 앞에 갖다가 놓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적었어요. 그 말씀을 모으니까 설교문이 나왔어요.
놀라운 사실은 첫 시간부터 하나님께서 움직여 주셨어요. 별다른 설교를 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전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얼마나 은혜를 받는지 몰라요. 어느 장로님이 이런 말씀을 하세요. “강사님이 프로가 아닌 것은 분명한데 프로의 역사가 나타나요” 누구의 역사에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 묻는 기도를 했더니 헤브론의 역사를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집회를 마치고 왔는데 우리 교회의 어느 성도님이 찾아왔어요. “목사님, 직장에 취직이 안 되어서 다른 곳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타주로 이사하겠다는 겁니다. 얼마나 안타까워요.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렸어요.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 묻고 응답을 받아서 움직이는 겁니다. 직장을 따라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뉴욕에서 오라고 해서 갔어요. 그러면 뉴욕에서 리타이어 할 때까지 일합니까? 레이업 당할 수도 있고, 회사가 문 닫을 수가 있어요. 그러면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LA로 이사하고, 평생을 그런 식으로 살아갈 겁니까? 매번마다 애굽과 같은 곳만 찾아서 다닐 겁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다윗처럼 하나님께 여쭈어야 합니다. “하나님, 어디로 가야 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오라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라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 곳으로 가면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 있어요. 그곳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사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사명에 움직이는 것입니다.
제가 그 성도님에게 특별 기도를 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가라 하시면 미련 없이 가고, 하나님이 여기 있으라고 하면 있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얼마 있다가 연락이 왔어요. 40일 동안 100시간을 기도하겠답니다. 지금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취업을 앞두고 있거나, 결혼을 앞두고 있거나, 사업을 계획하고 있거나, 이사를 계획하고 있거나,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먼저 하나님께 기도해서 물으세요. 저의 경험으로 보면 날수를 작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간이 중요한 것 같아요. 며칠 동안 몇 시간을 기도할 것인지 계획하고, 하나님께 묻는 기도를 하세요. “하나님, 어떻게 해야 돼요? “올라 가리이까” “어디로 가리이까” 열심히 묻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응답받아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없어도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하나님께 여쭈세요. 조급해하지 말고 시간의 여유를 갖고 하나님께 물으세요. 돈이 없으면 빚을 내서라도 서너 달 동안 간절하게 기도하세요. 몇 달 뒤에 움직인다고 손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이 손해이지요. 굳은 각오를 가지고 진실하고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작정하고 기도하지 않았음에도 오라는 곳으로 가도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로마서 8:28,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기도하지 않고 움직여도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나중에 후회합니다. 더 열심히 하나님께 묻는 기도를 통하여 확실한 응답을 받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후회하게 됩니다. 몰랐을 때는 후회해도 아쉬움이 없지만, 알면서도 묻지 않았을 때에는 얼마나 많은 아쉬움이 있는지 모릅니다.
요즘 우리교회 성도들 중에는 인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시가를 지내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무엇인가를 결정할 시기에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떠한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다윗처럼 “올라 가리이까” “어디로 가리이까” 하나님께 물으시면 어떠시겠습니까?
오늘 눈앞의 현실이 어둡고 답답해도 하나님께 여주는 기도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헤브론의 축복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니겠어요? 하나님께 묻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 인생을 책임지고 한 걸음 한 걸음 동행하시면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다윗의 믿음과 신앙을 따라서 하나님께 여쭈어 응답받아서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시기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어디로 가리이까” 하나님께 여쭐 때에 응답하셔서 헤브론의 사건이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시간표
이대성목사(광성교회) / 삼하 2:1-4상
베드로후서 3장 8절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그는 이 구절을 보는 순간 무릎을 탁 치면서 감탄했습니다.
“역시,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다르셔. 하나님의 하루는 천년과 같단 말이지? 정말 대단해.” 그리고는 얼른 계산기를 두드려 봅니다. “하루가 천 년이라. 일년은 365일! 천년이면 무려 365,000배가 된단 말이네?”
그는 신이 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더도 말구요 1만원만 주십시오.” 그러면 얼마 달라는 거죠? 36억 5천만원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응답이 즉각 왔습니다.
“그래? 좋다! 그런데 더도 말구 하루만 기다려라.” 얼마나 기다리라는 겁니까? 천 년입니다. 욕심 부리다가 보기 좋게 하나님께 한 방 맞은 겁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어떤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적잖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이런 식으로 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을 이용합니다. 마치 자기가 주인이고, 하나님은 심부름꾼인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 당장 좋은 것을 많이 달라고 졸라댑니다. 그렇게 해서 급기야 자기 욕심을 채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올바른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에게 득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신앙이란 하나님을 나에게 맞추는 게 아니라, 내 마음과 내 생각을 하나님께 맞추는 것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과 내 생각을 하나님께!’ 이것이 곧 ‘신본주의 신앙’이요, ‘하나님 주권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신앙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고, 지나친 욕심을 부리거나 서두르지 않습니다. 비록 당장은 어렵고 힘들어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가장 좋은 때’를 기다립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시간표’(God’s timetable)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시간표대로만 살면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맞는 자 다윗이 바로 그런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처럼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추어 살고자 애쓰고 힘쓸 때에 진정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을 영위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째로,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시간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시간표를 살펴보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런 내용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예비하셨습니다.(삼상16:13, B.C. 1025년 경) 그런데 정작 왕이 된 것은 훨씬 후의 일입니다. 그것도 단 번에 왕이 된 것이 아니라, 두 단계에 걸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있습니다.
1차적으로는 사무엘하 2:1-4절 상반절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만의 왕이 됩니다.(B.C. 1010년 경) 그러니까 기름부음을 받은 지 15년이 흐른 뒤입니다. 사울에게 쫓겨 다니면서 박해를 받은 지도 10여 년이 흘렀을 때입니다.
2차적으로는 사무엘하 5:1-5절에 기록된 대로 전체 이스라엘 통일 왕국의 왕이 되고 있습니다. 대략 B.C. 1003년경입니다. 5:5절을 보면 다윗이 헤브론에서 대략 7년 6개월 동안 유다 지파의 왕 노릇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얼른 인간적인 생각을 해 보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동안 쫓겨 다니면서 오랫동안 고생했는데, 이제 사울 왕도 죽고 없으니까 하루라도 빨리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나라도 혼란스러워서 정말 그게 좋을 듯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그러셨을까요? 물론 다윗을 더 많이 연단하시려는 뜻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때를 맞춰 주시려고 그랬던 것입니다. 타이밍을 맞추시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입니다. 당시 상황을 마음속에 그려보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그 당시 사울 왕은 죽었지만 아직은 혼란기입니다. 사울 왕가에 남은 세력도 여전히 있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 사이에서도 일부이긴 하지만 사울 왕 죽음의 배경에 혹여 다윗이 개입이 되지 않았나 하는 의혹의 눈길이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윗은 사울의 박해를 피해 다니다가 적국인 블레셋에 망명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충분히 의심받을 만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쿠데타 세력으로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다윗이 왕이 되면 통치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물론 다윗이 거느리던 군사들이 있었으니까 무력으로 정복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계적으로 다윗이 이스라엘의 통치권을 가지도록 했습니다.
먼저 유다 지파는 다윗의 출신 지파니까 쉽게 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 후 7년 6개월 동안 이런 저런 변화가 있었고, 결국 나머지 지파들도 스스로 자기들이 몰려와서 다윗을 왕으로 추대하게 된 것입니다.
5:3절.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매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매 그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니라.”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소원하시고 계획하셨던 신본주의적 왕국(神本主義的 王國)의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위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는 그런 왕의 모습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습이 이루어지기까지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당신의 시간표에 따라 저와 여러분에게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이루어 주시는 참으로 신실하신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시간표를 바라보는 자세입니다. 다윗은 오랜 세월 신앙의 연단을 통해 성숙한 신앙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시간표를 인식하면서 그에 따른 합당한 신앙 자세를 지니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신앙 자세는 과연 어떤 것들이었을까요?
첫째,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뢰입니다. 여러분! 다윗은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으시면서 약속하신 것을 100% 믿었습니다.
이런 신뢰의 믿음이 없었다면 다윗은 자기 본위로 인간적인 행동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 그 분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기의 인생을 책임져 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부도율 0%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하신 약속은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민수기 23:19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그렇습니다. 여러분? 다윗은 한 번도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으신 신실하신 하나님을 절대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편 27:14절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사람도, 권세도, 물질도 신뢰할 게 못되고 오로지 하나님만이 우리가 신뢰할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다윗처럼 하나님만을 절대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계획대로 완벽하게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입니다. 여러분! 다윗은 이미 오랜 세월을 기다렸습니다. 그도 사람일진대 어찌 고난의 세월이 고통스럽지 않았겠습니까? 그 역시 인간적으로 고난의 종지부를 속히 찍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또 기다려야 된다니... 맥이 빠질 법도 합니다. 그러함에도 그는 안달하지 않았습니다. 허겁지겁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인내하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승리를 거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성급하게 구는 것은 도대체 왜 그럴까요? 자기 욕심 때문입니다. 우리가 욕심을 품고 성급하게 움직이다 보면 자칫 잘못하면 망하고 맙니다.
야고보서 1:14-15절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잠언 19:2절 “지식 없는 소원은 선하지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잘못 가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에 보면 성급하게 욕심 부리다가 혼쭐이 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야곱입니다. 그는 모태에서부터 형 에서를 제치고 족장으로 선택받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참고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당연히 이루어주십니다. 그런데 성급하게도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와 함께 작당 모의를 하고 있습니다.
형 에서로부터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사질 않나... 눈과 귀가 어두운 아버지 이삭을 속여 축복 기도를 받지 않나...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오히려 큰 일을 당합니다. 형 에서가 살기등등해서 죽이겠다고 달려듭니다.
이에 부랴부랴 집을 떠나고 있습니다. 밧단아람으로 향해 가다가 빈 들판에서 돌베개 베고 자는 야곱의 쓸쓸한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후 20년을 한 마디로 개고생을 합니다.
자기는 잔머리를 굴려서 약삭빠르게 차지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더 늦어진 것입니다. 요즘은 세상이 하도 스피드 시대가 되다 보니 머리를 잘 굴려야 살아남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잔머리 굴리면 당장은 잘 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이라면 우직해 보여도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입니까? 모든 것을 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릴 끝까지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현대인들이 얼마나 조급하고 성급한지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그런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풍자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인내의 신앙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저에게 인내를 주십시오. 그런데 지금 당장 주십시오!”
여러분, 이렇게 기도하면 정말 심히 곤란합니다. 비록 현실이 힘들고 답답해도 끝까지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십시오.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데, 감옥에서 관원장 둘을 만납니다. 하루는 불안한 기색이 있어 물어보니 꿈을 꾸었다는 겁니다.
그 꿈을 해석해 주니까 정말 그대로 떡 맡은 관원장은 처형당하고,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이 된 겁니다. 출옥한 관원장이 나가면 요셉을 당장 꺼내 주겠다고 철썩 같이 말하더니 감감 무소식입니다.
인간적으로 얼마나 야속했을까요? 그래도 요셉은 꾹 참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로 부터 만 2년 후 하나님이 좋은 때를 맞춰 역사해 주고 계십니다. 창세기 41:1절 “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
바로 왕이 꿈을 꾸었는데 무슨 뜻인지 몰라 전전긍긍해 합니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는 감옥에 있는 그를 급히 불러서 바로 왕의 꿈이 7년 풍년, 7년 흉년임을 해석해 줍니다.
그리고 흉년이 너무 심해서 큰일 날테니까 그 비방까지 알려줍니다. 감동받은 바로 왕은 요셉을 일약 국무총리로 세우고 있습니다. 만약 술 맡은 관원장이 출옥하면서 즉시 그를 꺼내 주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정말이지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하심입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의 현실이 너무나도 답답해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을 것을 믿고서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셋째, 하나님 뜻에 대한 철저한 순종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급해도 정도를 걷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윗은 정도를 걸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도 사람인지라 실수를 했습니다.
사울을 두려워 하다가 국경을 넘었고, 블레셋에 망명해서 아기스 왕에게 붙어살다가 혼쭐이 났습니다. 그래도 그는 정도를 걸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정도는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길 즉 하나님의 뜻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진정 하나님 뜻대로 살고자 애쓰고 힘썼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무엘상 24장과 26장을 보면, 최소한 두 번 사울 왕을 결정적으로 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는 사울을 그냥 살려 주었습니다.
측근 부하들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다그쳤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에게 손을 댈 수 없다면서 끝까지 선을 지키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거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하 2:1절을 보면 다윗이 얼마나 철저하게 정도를 지키려고 애를 썼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다윗은 그 동안의 시행착오를 거울삼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여쭈었고,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헤브론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뜻대로만, 정도(正道)로만 걸어가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그 인생을 책임져 주시고, 한 걸음 한 걸음 그를 인도해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도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정도를 걸어가야 합니다.
사람이 어렵고 답답하게 되면 반칙을 범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집니다. 그렇게 하면 뭐라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다른 길로 가다가 쫄딱 망하는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는 다른 길로 가면 안 됩니다.
이런 예를 들어 볼까요? 명절에 자주 보는 풍경인데요? 자동차로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주차장처럼 꽉 막혀 서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편을 보니까 휑하니 비어 있고 자동차들이 씽씽 달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반대편으로 건너가면 됩니까?
안 됩니다. 아무리 이쪽이 막혀 있어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방향이 전혀 다르기에 도리어 대형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꽉 막혀 있어도 우리는 정도로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신대륙의 바하마 열도에 도착한 것은 1492년 10월 12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험한 항해 도중에 참으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힘든 것은 선원들이 항해가 길고 어려워지니까, 자꾸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동쪽으로 갈 것을 고집했습니다. 계속 가면 신대륙이 나온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바로 전날인 10월 11일 선원들이 폭동을 일으키며 돌아가자고 데모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마침내 바하마 제도에 상륙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매일 기록한 항해 일지는 언제나 이런 말로 끝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동쪽으로 전진했노라!” “우리는 오늘도 주님 인도하심따라 나아갔노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제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낙심하지 말고 주님과 함께 정도를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갈라디아서 6:9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누구의 때입니까? 하나님의 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열매를 거두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매튜 헨리는 “우리의 마지막 날을 준비하는 것이 매일의 일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도 그렇고, 인생의 마지막인 죽음을 준비하는 것도 그렇고, 인류의 마지막인 종말을 준비하는 것도 그래야 합니다.
왜냐하면 매일은 여러분 ‘남은 인생의 첫날’(The first day of the rest of your life)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날마다 오늘은 남은 인생의 첫 날이요, 또한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는 종말론적인 신앙을 품고서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힘차게 전진해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런데 혹여 여전히 아직까지도 내 시간표만을 주장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Right now!’(지금 당장!)으로 일관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시간표는 내 시간표와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내 생각보다 많이 지체되고 늦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시간표에서 결코 변함이 없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진정 하나님 당신의 시간표라면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틀림없이 가장 좋은 것이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으면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 많이 생깁니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기적도 나타나고... 불치병도 낫게 되고... 넘치도록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에 하나 예수를 열심히 믿었는데도 더 나빠졌다면 그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적은 커녕 상식적인 일도 도리어 잘못되고... 질병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재정 상태 또한 전혀 회복될 기미가 없다면...
여러분은 그래도 예수 믿으시겠습니까? 그래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너무나도 크게 착각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예수 믿고 열심히 신앙생활 했다고 말하는데 결국은 자기 열심인 겁니다.
기도생활도 열심히 하는 것 같은 데, 내가 원하는 기도를 열심히 드리고 있는 겁니다. 모든 것이 다 내 중심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삶은 눈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면서도 이것이 마치 신앙생활인양 착각하며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을 살라는 겁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여 주시겠노라 약속해 주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명령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가복음 16장 15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복음 전파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턱없이 부족하지만 복음 전파가 주님의 명령이요, 우리의 사명일진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그래도 우리가 주님이 원하시는 그 일을 하고자 애쓰고 힘쓰면... 우리 주님께서 함께 역사하사 확실한 표적을 보여주시겠다는 겁니다.
마가복음 16장 20절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그러므로 여러분? 비록 오늘 눈앞의 현실이 답답하고 캄캄하다 할지라도 전혀 낙심하지 말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시간표를 절대적으로 믿고서 먼저 주님 명령에 순종하여 복음 전파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보여주실 하나님의 시간표를 기대하면서 묵묵히 우리 주님과 함께 ‘복음 전파’라는 정도를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반드시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제자답게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힘차게 나아갈 때에 늘 항상 승리할 뿐만 아니라, 누르고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다윗은 먼저 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
삼하 2장 1~4절 / 이선영목사
1.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도 여러분께 가득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무엇이 먼저 할 것인지에 관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면, <먼저>라는 말을 자주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할 것이 있고 나중에 할 것이 있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 할지라도, 먼저 할 것을 하지 않으면,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성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 7:3-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은, 영어에서는 <Above>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모든 것보다 더 높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라”는 말씀은 영어로 “Go at once”로 지체하지 말고 곧바로 가서 화해하라는 뜻입니다.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는 말씀은 “First take log out”로 우선적으로 자기 눈에서 들보를 먼저 빼라는 뜻입니다.
2. 무엇이 우선적인 것일까요? 어떤 분은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것이 우선적인 것이라 할 것입니다. 급한 것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노라면, 급하지 않은 것이 없지요. 그렇기에 항상 급한 것 먼저 하느냐고 허둥대며 살게 마련입니다. 평생 급한 것부터 해결하느냐고, 막상 내 인생에 중요한 것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우선적인 것, 먼저해야 할 것은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내 인생이기에 내가 꼭 살고 싶어하는 것을 사는 것입니다. 급한 것에 마음을 빼앗겨 살다 보면, 내 인생의 중요한 것은 살아보지도 못하고 지나가 버립니다.
저도 그렇지만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것에 마음이 쏠립니다. 그래서 늘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살게 됩니다.
특히 저 같은 경우는 어려서 아버님으로부터 “부모 얼굴에 흙칠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기에, 늘 다른 사람에게 욕먹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 자신에 대하여 솔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부모님께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항상 잘 하려고 했고, 좋은 소리를 들으려고 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내가 내 인생을 사는 것인가? 아니면 부모님의 꼭두각시로 사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나이가 50이 넘으면서, 누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내 인생을 살아야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무엇이 먼저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3. 오늘 말씀은 사울 왕이 죽은 후에, 다윗이 유다 땅으로 내려가서, 먼저 유다 사람들의 왕이 되는 내용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서, 먼저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 제가 유다의 한 성읍으로 올라가도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내용을 보면, 다윗은 먼저 유다 사람들이 사는 땅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자신이 유다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그렇게 물었던 것입니다.
또 다시 하나님께 묻습니다. “유다 지파의 땅 중에 어느 지역으로 가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헤브론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헤브론 땅은 갈렙이 아낙 자손을 몰아내고 얻은 땅입니다. 헤브론 땅은 이스라엘의 최초의 땅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장사하기 위해 직접 돈을 주고 산 땅입니다.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아브라함 조상 때부터 물려온 땅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두 아내와 가족, 그리고 자기를 따르는 추종자들을 데리고 헤브론 땅에 내려가 거기서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땅에 원래부터 살고 있던 유다 사람들이 찾아와서 다윗에게 기름을 붓고 유다 사람들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유다 사람들도 다윗의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을 우선으로 여기고 사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입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음에도,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 하여 몇 번이고 살려준 것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다윗이 고향을 찾아준 것이 또한 고마웠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유다지파의 사람들은 다윗과 같은 사람이 자기들의 지도자가 되어주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먼저 유다 지파의 땅으로 가고자 한 것을 묵상할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좋아하셨습니다. 헤브론 땅으로 가라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4. 그런데 유다는 자신이 유다 지파였기에 자기 고향으로 가고자 유다 땅을 선택한 것일까요?
자신이 사울 왕이 죽이려고 하므로 너무도 오랜 세월 도망자의 삶을 살았기에, 너무도 지치고 힘이 들어서 고향 땅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일까요?
인간적인 면에서 그런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다윗이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신앙에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유다 지파의 땅으로 가는 것이 옳으냐고 하나님께 물었던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사무엘을 통하여 기름부음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리고 유다 지파에서 통치자가 나온다는 조상적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이 정말 그 사람이 맞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유다 지파의 땅으로 가는 것이 좋겠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유다 지파에서 다스릴 자가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창세기 49장에, 야곱이 자기의 12아들에게 축복기도를 할 때에 4번째 아들, 유다에게 이렇게 기도합니다.
창 49: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규”란 지도자의 가슴에 붙이는 흉패입니다. 그리고 “실로”란 “그 흉패를 가진 자”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유다 지파에서 이스라엘 다스릴 자가 세워진다는 말씀입니다.
5. 다윗이 유다 사람들이 사는 땅으로 가고자 한 것은 자신의 평안함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자 하는 믿음의 발로였던 것입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유다 지파의 사람들이 찾아와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이 되게 한 것입니다.
다윗은 가장 우선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먼저 실천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신앙인이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할 것인지를 배웁니다.
먼저 하나님에게 마음을 두고 살기에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과 사람을 쫓아가면, 유행에 따라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정치에 따라 휘둘리게 마련입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헷갈리지 않고, 두려움이 없이 강하고 담대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겠다는 갈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야 하겠다는 그 갈망이 그를 살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자 함이 그의 영혼에서 시원하게 솟아나는 생수였습니다.
6. 예수님은 갈증에 빠진 여인이 우물을 긷기 위해 샘터를 찾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영혼이 시들지 않고, 시원한 생수를 마시며 신앙을 잘 지키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가장 우선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속에서 솟아나는 생수가 우선인 것입니다.
다윗은 가장 우선적으로 붙잡은 것이 유다 지파에서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통치자가 나온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유다 지파의 땅으로 가는 것을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먼저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구약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예수님처럼 우리의 신앙을 인도하시는 분이 다윗이라는 뜻입니다.
다윗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7. 목이 말라서 우물을 길으러 나온 것은 여인에게는 급한 일입니다. 우리 말에도 목마른 자가 샘을 판다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한 번 다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 가장 기본적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4:23,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가장 중심적인 것, 가장 기본적인 것을 “참되게 예배하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되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영과 진리로 참되게 예배할 때, 그 마음에 시원한 생수가 솟아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참되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참되게 예배 드리는 것이 가장 우선적이라는 말씀입니다.
8. 어떻게 예배 드리는 것이 참되게 예배 드리는 것이지요? 이런 말씀은 날마다 들어도 부족함이 없는 말씀입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하나는 예배드릴 때, 이 자리에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반드시 믿는 것입니다. (2) 또 하나는 하나님을 찾아서 예배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 상 주시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시간, 이 말씀을 믿고, 그러한 자세로 예배 드림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반드시” 이 자리에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되게 예배하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하시는지요?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어떻게 느껴지는지요?
우리의 마음을 참되게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진지하게 하잖아요. 정말로 참되게 하나님을 믿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을 우리를 참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참되게 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참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가장 먼저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내 안에 살아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원한 생수를 솟아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9. 다윗은 10년이 넘도록 도망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집에 있어도 갈 수가 없었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어도 따뜻하게 지낼 수가 없었습니다.
굴에 숨든지, 나무 밑에서 쪼그리고 자든지 항상 숨어 살았습니다. 숨어있어도 마음이 평안하지 못했습니다. 사울이 자객을 보내서 자신을 죽일 것만 같았습니다.
“이게 사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삶이 이런 것인가” 하면서 흔들리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다윗의 마음을 붙잡아준 것이 있습니다. 그 때마다 자신의 삶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바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를 참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만이 그의 마음을 참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 참된 것이 있었기에 그는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낙심하였다 가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가짜 같은 세상에 머물러 있었을지라도, 그의 마음에는 참된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10. <진짜 이야기> 하나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닥터 지바고 이야기입니다. 닥터 지바고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이유는 2차세계대전의 패허 속에서도 다음과 같은 인간애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닥터 지바고의 이복 형인 예브그라프 장군이 타냐에게 묻습니다. "너는 어떻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니?"
타냐가 말하기 싫은 태도를 지으면서 말합니다. “혁명 중에 길거리는 불바다가 되고 군중들의 요란한 소리로 복잡한 상황에서 아버지와 헤어졌어요.”
예브그라프 장군이 다시 묻습니다. "정말 아버지와 어떻게 헤어졌어? 솔직히 한번 말해봐라."
그러자 타냐가 대답합니다. “사실 아버지가 내 손을 놓고 빨리 달려가셨기 때문에 아버지를 놓치고 말았어요.” 아버지가 딸의 손을 붙잡고 도망치다가 딸의 손을 놓고 혼자 달려가는 바람에 헤어졌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장군이 타냐에게 말합니다. "내가 사실을 말해주마. 도망친 로마노프는 사실 너의 친아버지가 아니란다. 너의 아버지는 닥터 지바고야! 만일 그가 네 친아버지라면 아무리 거리에 불이 나고 복잡해도 결코 네 손을 놓치지 아니했을 것이란다."
그제야 타냐는 로마노프가 자기 아버지가 아니고 닥터 지바고가 아버지인 것을 느낍니다.
진짜 아버지라면 어린아이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내동댕이치고 혼자 도망칠 것이 아니라 안고라도 뛰었을 것입니다. 그는 진짜 아버지가 아니었기에 아이를 내동댕이치고 혼자 도망간 것입니다.
11. 여러분 가짜가 많은 세상입니다. 자칫하면 인생이 속을 수 있습니다. 생명과 같은 시간을 허비해 버릴 수가 있습니다.
급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평생 허둥지둥 급하게 살다가 끝날 수 있습니다. 가장 우선적인 것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먼저 유다 땅으로 내려가 유다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왕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응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자기 지파의 사람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면, 그의 왕의 자리도 흔들리는 터전이었을 것입니다.
항상 인생이 하나님의 손안을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다윗왕의 인내와 긍휼
곽창대목사 / 삼하 2:1-5:5, 5:1-5) 온 이스라엘의 왕, 다윗: “인내와 긍휼”
오늘은 다윗이 유다 족속의 왕이 된 후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받기까지의 7년 6개월의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이 됨 (2:1-4)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이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내가 유다의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헤브론으로 올라가라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2:1).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자기 사람들을 데리고 시글락에서 헤브론으로 이동합니다(3절). 그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사람들로부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7년 6개월 동안 유다 족속을 통치합니다(4절 상반절, 2:11). 헤브론은 그 당시 가나안의 남부지역 가운데 중요한 성읍이었습니다.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친서를 보냄 (2:4-7)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이 된 후에 먼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친서를 보냈습니다. 삼상 31장(11-13절)에서 살펴보았듯이 요단강 동편에 거주하고 있던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이 죽어서도 치욕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밤중에 약 21km를 행군하여 벳산 성벽에 매달린 사울의 시신을 수거하여 자기 성읍으로 돌아가 장사지내고 일주일을 금식하며 슬퍼했습니다. 40년 전에 길르앗 야베스가 암몬의 침공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사울이 이스라엘 전역에 통지하여 대군을 모아 진격하여 암몬을 물리치고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을 구해주었는데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사울 왕에게 입은 그때의 은혜를 잊지 않고 지금 보답한 것입니다. 이 훈훈한 소식을 들은 다윗이 사울을 향한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의 충정을 칭찬하는 친서를 보낸 것입니다. 그렇게 한 것은 사울 편에 서있는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도 결국 다윗이 품어야 할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분열 (2:8-11)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어 유다 지파를 통치할 때에 나머지 지파는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이 통솔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넬이 사울의 남은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서 이스보셋을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습니다(8-9절). 그때가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왕이 된지 5년가량 지났을 때입니다.
삼상 14:50에 따르면 아브넬과 이스보셋은 사촌지간입니다. 곧 확인하겠지만 이스보셋은 아브넬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마하나임은 요단강 동편의 중요한 성읍으로서 이전에 이삭의 아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에 들렀던 곳입니다(창 32장). 얍복강 부근입니다. 길르앗 야베스에서 2-30km 남쪽에 있는 성읍입니다.
그 당시 요단강 서편은 블레셋이 관할했습니다. 블레셋으로 망명했던 다윗도 외형적으로는 블레셋의 가드 왕의 봉신이었습니다. 아브넬이 이스보셋을 데리고 요단강 동편의 마하나임으로 이동하여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운 것은 유다 족속의 왕인 다윗과 블레셋의 영향권 너머에 임시정부를 세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 이스라엘에 두 왕이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분단국이 된 것입니다.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운 것은 회생 불가능한 권력을 잠시라도 연장하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족상잔의 내전 (2:12-3:1)
이스보셋의 군대장관인 아브넬과 군사들이 다윗의 군대장관인 요압과 군사들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양측의 군사들이 기브온 못 가에서 대치했습니다. 아브넬이 요압에게 대표청년들을 선발하여 겨루자고 제안했습니다. 양측에서 각각 12명의 군사들이 나섰는데 대표군사들 모두가 전사했습니다. 그리고는 전면전으로 이어졌습니다. 맹렬한 싸움 끝에 다윗의 군사들이 승리했지만 요압의 동생 아사헬이 아브넬의 뒤를 추격하다가 아브넬의 창에 찔려 전사합니다. 그날 해가 졌을 때 휴전하기로 하고 이스보셋의 군사들은 마하나임으로 다윗의 군사들은 헤브론으로 돌아갔습니다.
내전의 결과를 2:30-31절에서 간략히 정리합니다. 3;1에서는 내전 이후의 상황을 요약합니다.
헤브론에 낳은 다윗의 아들들 (3:2-5)
다윗이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동안 유다 족속의 왕으로 통치할 때에 자녀들을 낳았는데 여기서는 6명의 아내들에게서 낳은 6명의 아들들의 이름만 열거합니다. 6명의 아내들은 그 당시 이스라엘과 인근 나라의 명문가의 딸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다윗이 결혼을 통하여 여러 부족들과 동맹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국내외적으로 다윗의 통치력이 강화되었으며 다윗의 가문과 왕실이 사울의 가문과는 달리 크게 번성했음을 드러내줍니다. 여기에 열거된 6명의 아들들 가운데 암논, 압살롬, 아도니야는 훗날 다윗 왕가에 불화와 반역을 일으켰고 그로써 왕실에 칼부림이 일어났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이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됨 (3:6-5:5)
이스보셋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2년 동안 다윗과 이스보셋(사울)의 집 사이에 전쟁과 암투가 이어졌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이 단락은 일곱 개의 소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아브넬과 이스보셋의 갈등 (3:6-11)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마하나임에서 임시정부를 세운 아브넬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웠습니다. 6절에서 밝힌 대로 아브넬이 임시정부의 실세였습니다. 심지어 아브넬은 사울 왕의 첩까지 취했습니다. 그 당시 왕의 아내나 첩을 취하는 것은 자신이 왕이라고 선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스보셋이 아브넬에게 어찌 그 같은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아브넬은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운 자신을 개국공신으로 여기는 대신에 개 같이 취급한다고 크게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는 이스보셋의 나라를 다윗에게 넘겨주겠다고 맹세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11절을 보면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두려워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고 기록합니다.
2) 다윗과 아브넬의 민족통일을 위한 회담 (3:12-21)
아브넬이 전령을 다윗에게 보내어 민족의 통일을 위하여 협상하자고 제의합니다. 제의를 받은 다윗이 조건을 내겁니다. “네가 올 때에 사울의 딸이요 나의 아내인 미갈을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네 제의가 진실한 것으로 알겠다.”고 합니다. 이스보셋과 아브넬이 이미 딴 남편의 아내가 된 미갈을 강제로 빼앗아 다윗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아브넬이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베냐민 지파 사람들에게 다윗에게 나라를 이양하면 블레셋의 지배에서 우리가 벗어나게 될 것이라고 회유합니다. 그리고는 아브넬이 20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다윗에게로 가서 언약을 맺습니다. 다윗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배설했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습니다. 아브넬은 다윗에게 나라를 이양하는 공로를 인정받아 자신이 통일왕국의 군대장관이 될 것으로 확신했을 것입니다.
3) 아브넬이 요압에게 살해됨 (3:22-30)
전쟁에 나갔다가 돌아온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이 다윗과 아브넬 사이에 민족통일의 협상이 성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요압은 다윗의 누이의 아들이자 유다 지파에서 권력서열로 제2인자였습니다. 그러한 자기와 한 마디 상의 없이 민족통일의 막중한 의제를 논의한 것에 마음이 크게 상했습니다. 더구나 자기 동생 아사헬이 아브넬의 창에 찔려 전사한 것이 얼마 전이었습니다. 집안의 원수인 아브넬이 자기를 제치고 통일조국의 2인자가 되는 것, 결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압은 마하나임으로 귀가하고 있는 아브넬에게 전령을 보내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다시 헤브론으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돌아온 아브넬을 요압이 성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살해합니다. 사무엘서 기자는 요압의 살해 동기가 개인적인 복수심 때문이었다고 밝힙니다(27절).
4) 아브넬의 죽음에 대한 다윗의 처신 (3:28-39)
아브넬이 요압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이 엄중한 사건을 지혜롭게 해결합니다. 우선은 그 살해사건이 요압의 개인적인 복수로 빚어진 사건임을 천명합니다. “나와 내 나라는 이 사건에 관여한 바가 없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결백하다.”는 뜻입니다(28절). 그리고 요압과 그의 집안에 하나님의 저주가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합니다(29절). 아브넬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르면서 다윗이 솔선하여 애가를 부르며 진심으로 애도하고 금식했습니다. 그로써 백성들이 다윗의 진심을 알게 되어 기뻐했다고 본문은 기록합니다(36-37절). 그 당시 다윗은 큰 죄를 범한 요압을 처단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자신의 힘없음을 한탄하면서 하나님께서 심판해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39절).
5) 이스보셋이 측근에 의해 살해됨 (4:1-8)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스보셋과 그의 백성들은 아연실색했습니다. 이스보셋의 임시정부는 큰 혼돈에 빠졌습니다. 그 틈을 타서 기회주의자들이 등장했습니다. 이스보셋의 군 지휘관 두 사람이 집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이스보셋을 살해하여 목을 베고는 그의 머리를 가지고 다윗에게로 도망쳤습니다.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라고 왕을 살해한 자신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의로운 행위였다고 떠벌렸습니다.
6) 다윗이 이스보셋의 살해범들을 처형함 (4:9-12)
다윗은 이스보셋을 살해한 자들을 악인으로 판결하고 처형했습니다. 그들의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 가에 매달았습니다.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오게 하여 아브넬의 무덤에 합장했습니다.
7) 나라의 통일 (5:1-5)
이로써 나라의 통일에 방해되는 거침돌이 모두 제거되었고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습니다(5:1-3).
(삼하 5:4-5) 『[4] 다윗이 나이가 삼십 세에 왕위에 올라 사십 년 동안 다스렸으되 [5]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
오늘 설교의 부제를 “인내와 긍휼”로 정했습니다. 인내와 긍휼은 이스라엘의 왕이 반드시 함양해야 할 품성입니다.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인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품성을 함양하고 그 품성으로 하나님과 백성들을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녀야 할 대표적인 품성들을 열거합니다.
(골 3:12-14)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 대표적인 품성들은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서함, 사랑입니다. 이 품성들은 예수님에게 드러난 하나님의 품성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에게서 드러난 하나님의 품성 가운데 두 가지가 돋보입니다. 인내와 긍휼입니다.
1. 인내
1)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긴 과정을 감내했습니다.
다윗이 사무엘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아 이스라엘의 차기 왕으로 내정된 때가 10대 말인데 그때부터 사울 왕에게 박해를 받아 10여년의 세월을 도망자 신세로 지냈습니다. 사울이 죽은 후에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지만 그러고도 7년 6개월이나 지나서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다윗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고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앞서 보았듯이 이스보셋은 아브넬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이스보셋이 사울 왕의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의 차기 왕이 된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아브넬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스보셋을 왕으로 사사로이 추대한 것입니다. 이스보셋은 무늬만 왕이었습니다.
이스보셋과 달리 다윗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다윗을 이스라엘의 차기 왕이 되도록 기름을 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유다 지파 사람들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아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고 이제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아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까지 전 과정을 하나님께서 주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셨고 그 작정하신 대로 이루셨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것은 그 시작과 과정에 하나님의 섬세한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복했습니다. 그랬기에 다윗은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나서서 서둘러 왕이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길이 다윗에게 열렸고 백성들이 한 마음이 되어 다윗을 자기들의 왕으로 기쁘게 맞이한 것입니다.
2) 다윗은 이스라엘의 최 변방에 있는 길르앗 야베스의 주민들이 자기를 왕으로 인정할 때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은 사울이 죽은 후에도 변함없이 사울을 지지한 갈르앗 야베스 주민들을 위협하거나 진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울을 향한 그들의 변함없는 애정과 충성을 칭찬하면서 이제 사울 왕이 죽었으니 유다 지파가 자기를 왕으로 수락한 것처럼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도 그래주기를 기대한 것입니다.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은 이스라엘의 최 변방인 요단강 동편에 거주했었는데 그 주민들이 자기를 주군으로 환영한다면 다윗이 명실상부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때가 오기를 다윗은 기다렸습니다. 가장 적절한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실 것을 다윗이 믿은 것입니다.
3) 2년가량 다윗의 군사들이 이스보셋의 군사들과 어쩔 수 없이 전쟁할 수밖에 없었지만 전력이 크게 약화된 이스보셋의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대규모의 병력을 투여하여 공격하지는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무력으로 점령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통일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온 이스라엘의 마음을 얻는 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스보셋의 정권이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개인적인 복수심과 다윗을 향한 서운함이 뒤엉켜 아브넬을 암살한 요압을 다윗이 당장에 징벌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긴박하게 요동쳤던 분열과 통일의 전환기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실 때를 바라보며 기다렸습니다. 다윗은 실로 인내의 대가였습니다.
2. 긍휼
앞서 살펴본 대로, 사울이 죽은 후에 사울의 정권을 이어받은 자들은 군대장관 아브넬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었습니다. 이 둘은 사촌지간이었습니다. 아브넬은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이루기 위하여 처음에는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웠다가 나중에는 다윗에게 붙으려고 했습니다.
아브넬의 공로로 나라가 통일이 된다면 다윗 다음으로 2인자의 자리를 아브넬이 차지할 것이 뻔했으므로 다윗의 군대장관인 요압은 심기가 아주 불편했습니다. 더구나 아브넬이 동생 아사헬을 죽인 원수이기에 기회를 엿보다가 아브넬을 살해했습니다. 요압이 정적인 아브넬을 제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넬과 요압은 다윗의 정적은 아니었습니다. 둘 다 다윗 편에 선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 편에 선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이기적인 야망을 위해 다윗 편에 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윗을 통일왕국의 왕이 되게 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방식으로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개인적인 야망과 이기심에 사로잡혀 배신과 기만과 폭력을 행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구약성경을 살펴보면, 아브넬과 요압 같은 사람들이 심심찮게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세상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는데 왜 그 같은 사람들이 날뛰고 있을까요?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지는 않지만 성경의 답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상황, 그런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구속사를 이루어가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우리는 부조리하고 불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세상을 휘어잡고 있는 듯이 보이는 교만하고 이기적인 자들, 불의를 밥 먹듯이 행하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그렇게 기도하다보면 우리는 어느덧 다윗처럼 긍휼의 사람이 됩니다.
다윗은 아브넬이 요압에게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아브넬을 살해하라고 자신이 요압에게 지시한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오해가 풀리지 않으면, 나라가 통일된다고 할지라도 갈라진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제대로 된 통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요압이 아브넬을 살해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즉시 지혜롭고 민첩하게 처리합니다. 그 일에 자신이 무관하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천명합니다(3:28). 그리고 큰 악을 범한 요압을 저주합니다(29-30절).
아브넬의 장례식을 다윗이 친히 주관합니다(3:31-39). 유다 지파의 사람들에게 옷을 찢고 굶은 베를 띠고 애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다윗이 친히 상여를 뒤따라가서 아브넬의 시신을 헤브론에 장사했습니다. 아브넬의 장례를 국장으로 거행한 것입니다. 무덤에서 다윗이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백성들도 함께 울었습니다. 다윗이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노래하면서 진심으로 슬퍼했습니다. 백성들도 다시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하며 울었습니다. 그날 다윗은 금식하며 아브넬의 죽음을 못내 아쉬워했습니다. 그 장례식을 통하여 백성들이 다윗의 진심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큰 슬픔 가운데서도 다윗이 자신들의 왕이 된 것을 기뻐했습니다(36-37절). 다윗은 물론 백성들도 긍휼의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다윗은 이스보셋을 살해한 자들을 처형한 후에 이스보셋의 머리를 헤브론으로 가져와 아브넬의 무덤에 합장했습니다(4:11-12). 무고한 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입니다. 다윗의 그 같은 마음이 바로 긍휼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인내와 긍휼의 사람이 된 것은 그가 기도했기 때문임을 오늘 본문은 강조합니다.
1)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이 자기 사람들과 함께 어디로 가야할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2:1).
2)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했습니다(2:6).
3) 큰 악을 범한 요압에게 하나님께서 징벌하시기를 간구했습니다(3:28-29, 39).
기도는 하나님의 품성을 함양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필수적인 도구요 은혜의 방편입니다.
신구약성경에서 기도에 관련된 말씀은 아주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에 관하여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그 가운데 두 부분만 살펴보겠습니다.
1) (눅 11:9-13)
(눅 11:9-13)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요약하면,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끈질기게 기도하라 그러면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뜻입니다. 이미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것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5:18에서 사도 바울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명령합니다. 왜 우리가 성령님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까? 성령님의 충만을 받으면 우리의 내면에 거룩한 지혜와 신령한 능력이 생깁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선한 열매가 맺힙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될까요?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의 소원을 간절히 끈질기게 아뢰면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가장 좋기는 성령의 충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위하여 끈질기게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응답하셔서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2) (요 15:7-9)
(요 15:7-9)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 저녁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다락방강화(요 13-16장)입니다. 다락방강화 가운데 15장에서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그 비유에서 제자들을 향한 자신의 소원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열매를 많이 맺는 것입니다(8절). 그 열매는 사역의 열매와 인격의 열매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사역의 열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전도의 열매 즉 영혼의 열매입니다. 인격의 열매는 예수님의 성품을 닮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할까요? 그래야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며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8절).
어떻게 하면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을까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저절로 열매가 맺히듯이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께 붙어있으면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우리에게 넘치게 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는 비결은 예수님께 붙어있으면 됩니다. 예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하고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것이요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으로 충만한 자가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과 깊이 교제하는 것일까요? 그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아주 단순하고 분명하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열매를 많이 맺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따라 기도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친밀하게 교제할 때 순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려면 우선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특히 다락방 강화에서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제자들에게 거듭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새 계명입니다.
그런데 우리 힘만으로는 사랑의 계명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사랑의 회복과 실천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우리에게 성령님을 충만히 부어주십니다. 성령님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사하시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즉 사랑을 잘 실천하라고 주시는 선물이 성령님의 충만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성령님으로 충만합니까? 아니면 성령님께서 여러분 속에서 슬퍼하시거나 근심하시거나 탄식하시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다면 여러분 속에 성령님께서 이미 내주해계십니다. 그러하기에 여러분은 자신이 성령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분명하게 아실 것입니다. 지금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여러분을 기뻐하고 계시는지 슬퍼하고 계시는지 여러분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지금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기뻐하시지 않으신다고 느낀다면 여러분에게 사랑의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맡겨주신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심령에 자리 잡고 있는 죄입니다. 사랑의 상실과 결핍이 바로 죄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상실과 결핍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님으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 드렸듯이 회개를 뒤로 미루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지금 즉시 사랑의 회복을 위해 몸부림치면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성도 여러분, 요즘 여러분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여러분에게 기쁨과 활력을 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무거운 짐처럼 여겨집니까? 후자라고 한다면 빨리 생각을 바꾸어서 여러분을 향한 예수님의 관심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들을 향하신 예수님의 최고 관심사는 우리가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성령님으로 충만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면 됩니다. 자꾸 예수님을 생각하면 됩니다. 항상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기도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최고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되 최선을 다해 사랑하려고 기도하면 성령님으로 충만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다윗처럼 인내와 긍휼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 모두 다윗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하여 끈질기게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성령님으로 충만한 사람, 인내와 긍휼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끝) 찬송 455장
요약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헤브론으로 가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7년 6개월 동안 유다 족속을 통치합니다(2:1~4). 왕이 된 다윗은 사울 편에 서있는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을 품기 위해 그들에게 친서를 보냅니다(2:4~7). 다윗이 유다 지파를 통치할 때 나머지 지파는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이 통솔했는데, 아브넬이 사울의 남은 아들 이스보셋을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습니다(2:8~9). 그래서 한 이스라엘에 두 왕이 대립하게 됩니다(2:12~3:1). 당시 다윗은 결혼을 통하여 여러 부족들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국내외적으로 통치력을 강화합니다(3:2~5). 반면 이스보셋은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운 아브넬과 갈등이 일어납니다(3:6~11). 이어 다윗과 아브넬이 민족통일을 위한 회담을 하고 언약을 맺습니다(3:12~21). 이때 아브넬은 다윗에게 공로를 인정받아 통일왕국의 군대장관이 될 것으로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은 아비넬이 고위 관직에 오르는 걸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복수심 때문에 요압이 아브넬을 성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죽입니다(3:22~30).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이 사건을 지혜롭게 해결합니다(3:28~39). 아브넬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스보셋과 그의 백성들이 혼란에 빠졌을 때 기회주의자들이 나타나 이스보셋을 살해하고 다윗에게 보고합니다(4:1~8). 그러나 그들은 다윗에게 처형당합니다(4:9~12). 이로써 통일에 방해되는 거침돌이 모두 제거되었고,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일시킵니다(5:1~5).
바울은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인내, 용서, 사랑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녀야 할 대표적인 품성이라고 말씀합니다(골 3:12~14). 본문에 나타나는 다윗의 모습에서는 인내와 긍휼이 돋보입니다.
먼저 인내입니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은 후로 왕이 되기까지 약 20년 동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고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의 사울을 향한 애정과 충성을 칭찬하면서 자기를 왕으로 인정할 때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가장 적절한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스보셋의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대규모의 병력을 투여하여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브넬을 암살한 요압을 당장 징벌하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은 긍휼입니다. 아브넬과 요압은 이기적인 야망을 이루기 위해 다윗 편에 섰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윗을 통일왕국의 왕이 되게 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했습니다. 요압이 아브넬을 살해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그 일에 자신이 무관하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천명하고 큰 악을 범한 요압을 저주했습니다(3:28~30). 이어 아브넬의 장례를 국장으로 거행했습니다(3:31~39). 다윗이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노래하면서 백성들과 함께 진심으로 슬퍼했습니다. 이에 백성들은 큰 슬픔 가운데서도 다윗이 자신들의 왕이 된 것을 기뻐했습니다. 다윗은 물론 백성들도 긍휼의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이어 이스보셋이 살해되었을 때도 다윗은 이스보셋의 머리를 헤브론으로 가져와 아브넬의 무덤에 합장했습니다(4:11~12). 무고한 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입니다. 다윗의 그 같은 마음이 바로 긍휼의 마음입니다.
다윗이 인내와 긍휼의 사람이 된 것은 그가 기도했기 때문입니다(2:1, 6, 3:28~29, 39). 기도는 하나님의 품성을 함양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방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끈질기게 기도하면 성령님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눅 11:9~13). 이미 성령님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성령님을 주신다는 것은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엡 5:18). 성령님의 충만을 받으면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하게 알게 되고 선한 열매가 맺힙니다(요 15:7~9). 열매를 풍성히 맺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며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받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을까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저절로 열매가 맺히듯이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됩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면 됩니다. 친밀하게 교제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따라 기도하는 것입니다(요 15:7).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상실과 결핍이 바로 죄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상실과 결핍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님으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회개를 뒤로 미루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지금 즉시 사랑의 회복을 위해 몸부림치면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들을 향하신 예수님의 최고 관심사는 우리가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려면 항상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기도하면 됩니다. 그러면 다윗처럼 인내와 긍휼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 모두 다윗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하여 끈질기게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성령님으로 충만한 사람, 인내와 긍휼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공을 위해 필요한 4가지
삼하 2:1-7 / 이한규목사
< 콘텐츠로 승부해서 성공하라 >
사람이 인물이 되려면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 즉 역사 앞에 두려워할 줄 알고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며 바른 길로 나아가야 한다. 역사는 칼로 흥하면 칼로 망하고 악인은 반드시 심판 받는다고 무언으로 말한다. 혹시 악인이 죽을 때까지 떵떵거리고 잘살면 심판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후대에 심판을 받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참된 역사의식을 가지려면 하나님의 심판까지 생각해야 한다.
어떤 성도는 영어의 히스토리(history,역사)를 ‘히스 스토리(His story,그분의 이야기)’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하면서 역사는 하나님의 이야기라고 한다. 실제로 역사는 하나님이 직접 써 내려가시는 이야기다. 네트영어의 원리에 의하면 history는 story에서 파생된 단어이고 story는 store에서 파생된 단어다. store는 ‘물건을 하나하나 쌓은 것(곳), 삶을 하나하나 쌓은 것, 건물을 한 층 한 층 쌓은 것(곳)’을 뜻한다. 결국 히스토리는 수많은 삶과 일과 사건들을 차곡차곡 높이 쌓아놓은 ‘스토리 더미’를 뜻한다.
사람이나 단체나 기업이 영향력 있게 되려면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특히 고난과 역경과 실패를 딛고 일어선 스토리 더미인 히스토리까지 있으면 큰 인물 가능성이 커진다. 히스토리가 없는 대박 성공은 쉽게 무너져도 히스토리가 있는 성공은 지속력이 있다. 모든 성공이 다 영향력 있는 성공은 되지 않는다. 창조성을 기반으로 형성된 콘텐츠를 하나하나 쌓아가는 히스토리가 있어야 그 성공이 지속적이고 영향력도 넘치게 된다.
필자는 1992년 인천에서 미국 기독교선교연맹(C&MA,미국성결교) 소속 목사로 한국에서 첫 번째 교회를 개척했다. 지난 31년간의 한국 사역은 고독과 고난의 순간들이 쌓인 역사였다. 그래서 지나온 세월이 상처와 아픔보다는 역사가 되어 히스토리가 있는 성공 기반을 닦았다. 가끔 초교파적인 신생 선교 교단으로서 교단 내의 갈등이 생겨 사람들이 염려하면 필자는 자신 있게 말한다. “이런 갈등이 우리 교단을 깨뜨리지는 못해요.” 지난 세월에 쌓아놓은 히스토리가 그런 자신감을 생기게 한 것이다.
또한 한국에서 초창기에 홀로 사역할 때 동지도 없고 만날 사람조차 거의 없고 가진 것이 너무 없어서 그저 하나님만 의지하고 매일 새벽마다 말씀과 기도로 씨름하면서 말씀 콘텐츠를 하나씩 쌓아갔다. 그것들이 히스토리가 있는 성공 재료가 되어 마침내 <월새기(월간새벽기도)> 발행이 이뤄졌고 <월새기 영어판> 비전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이 주신 창조성을 토대로 하나씩 차곡차곡 쌓은 콘텐츠를 가지고 승부해서 이룬 성공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실패할 때 무너지지 않고 실패를 실력의 어머니로 만들려면 내가 잘할 수 있는 콘텐츠 개발에 힘쓰라.
< 성공을 위해 필요한 4가지 >
본문은 사울이 죽은 후 다윗이 블레셋의 시글락 성에서 유다의 헤브론 성으로 돌아와 유다 지파의 왕이 되고 사울을 장사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치하하는 장면이다.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삶을 통한 교훈으로서 성공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1. 기도
다윗은 중요한 일을 앞두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고 행동했다(1절). 그것이 다윗의 핵심 성공비결이었다. 진실한 기도는 최대 성공 자본이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18세에 왕위에 올라 정치를 전혀 몰랐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나라를 이끌어 재임 기간 중 영국을 세계 최고의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사람들이 수시로 어떻게 그렇게 정치를 잘하느냐고 물으면 여왕은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나라를 잘 이끌 수 있었다고 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혼자서는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없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나라의 모든 복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손길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기도하라. 사람은 내일 일을 알 수 없다. 사고 많은 세상이기에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갑자기 큰 고통이 닥칠 수 있다. 그런 가능성을 안다면 어떻게 기도 없이 살겠는가? 기도가 있기에 담대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여행도 보내고 유학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기도는 최대의 안심시키는 도구다. 소원 성취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달라는 기도는 가장 절실히 해야 하는 것이다. 저도 자세히 살펴보면 <월새기 영어판> 비전 성취의 기도보다 가족과 성도의 생명과 건강을 지켜달라는 기도를 훨씬 더 많이 한다. 기도가 있기에 불안을 이길 수 있고 창조성과 인내심이 넘치게 되면서 성공 가능성도 높아진다.
2. 결단력
다윗이 유다의 어디로 갈지에 대해 묻자 하나님이 헤브론으로 가라는 응답을 주셨다(1절). 그 응답을 받고 다윗은 과감히 결단해서 당시에 상당한 군사적인 기반을 구축했던 시글락 성을 포기했다. 그리고 두 아내 아히노암과 아비가일을 데리고 헤브론으로 올라갈 때 추종자들과 그들의 가족들까지 다 데리고 올라갔다(2-3절). 그처럼 살면서 좋은 생각만 잘하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일이라면 과감히 그 일로 뛰어드는 결단력을 갖추라.
예전에 하루에 새벽 기도를 8시간 한다는 평신도가 있었다. 일시적인 작정 기도 기간에는 그렇게 기도할 수 있지만 매일 그렇게 기도한다는 영적인 허영심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는다.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라면 매일 1-2시간 기도하고 나머지 6-7시간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해내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좋은 일로서 꼭 해야 할 일은 과감히 실천으로 옮겨야 하나님이 복 주신다.
참된 결단력은 집중력을 낳는다. 집중력이 없는 결단력은 사실상 결단력이 없는 것이다. 말과 생각으로만 결단해서 실천이 없거나 며칠 만에 결단이 흔들리는 것은 결단한 것이 아니라 결단 쇼를 한 것이다. 죄책감이나 미안함 때문에 결단 쇼를 하면 선한 변화는 이뤄지지 않는다. 결단하고 집중력 있게 결단한 대로 밀고 나가야 고민과 기복과 스트레스도 줄어들면서 평안도 얻고 성공 가능성도 커진다.
3. 통합력
다윗이 헤브론으로 돌아오자 유다 사람들이 그를 반갑게 맞이하며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았다(4절). 그리고 왕이 된 후 제일 먼저 취한 일은 오늘날로 말하면 국민통합 조치로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을 장사해 준 것을 치하하고 축복한 일이었다(5절).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사울에게 특별히 충성했기에 새로 왕이 된 다윗에게는 최대의 야당 지파가 될 수 있었지만 다윗은 넓은 마음으로 그들의 선행을 치하했다. 그때 그들에게도 다윗에 대한 호감과 충성심이 생겼을 것이다.
리더는 많은 사람을 품으려는 통합형 사고를 가져야 복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 사람 간에 차이가 있고 경계선이 있는 것은 현실이다. 그런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사회적 경계선을 진짜 경계하고 사회적 장애물을 진짜 장애로 여기고 타파하려는 사람이 복된 리더가 된다. 욕망이 넘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 거룩한 도전을 하고 예수님처럼 사는 작은 예수가 되어 세상을 평화롭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성도의 핵심 사명이다.
세상 사람은 힘이 있으면 그 힘으로 상대를 불의하게 죽여 놓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 세상에서 교회는 세상의 찌그러진 부분을 펴는 거룩한 공구가 되고 평화를 낳는 어머니의 품이 되어야 한다. 세상이 하나님의 뜻대로 운행되지 않고 잘못된 길로 가면 용기 있게 잘못된 세상 권위에 저항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펼치려는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비로소 교회는 교회답게 되고 성도는 성도답게 된다.
4. 감화력
사울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치하한 후 사울이 죽었어도 꿈과 비전을 잃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게 살라면서 “사울이 죽은 것을 잊어버리고 기름 부음을 받은 나와 함께 새롭게 내일을 개척하자.”라는 식으로 말했다(6-7절). 다윗은 사울에게 충성했던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진심으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길 원했다. 충성하는 사람은 어디에 가서도 충성하기 때문이다. 그처럼 다윗에게는 사람을 이끄는 감화력이 있었다. 그런 감화력이 언제 생기는가?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찬란한 비전을 공유할 때다.
어떤 교회에서 연말에 예결산 제직회가 열렸다. 그때 교인들과 재정부는 목회자의 사례비를 올려 드리려고 애썼지만 목회자는 사례비를 올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래서 그 제직회에는 소리 없는 은혜와 감동이 넘쳤다. 그처럼 목회자와 교인이 서로를 감동시킨다면 얼마나 복된 공동체가 되겠는가? 어떤 목사는 교인들이 달가워하지 않는 일을 뚝심 있게 추진해도 교인들이 잘 시험에 들지 않는다. 왜 그런가? 평소에 사심 없이 목회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양보도 하면서 교인들을 소리 없이 감동시키기 때문이다.
감화력은 사람을 선한 방향으로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감화력의 핵심 원천은 하나님은 경외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거룩함이다. 계산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으로는 잠시 사람을 움직일 수 있어도 오래 움직이지는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감화력은 성령 충만의 열매다. 권세나 능력이나 물질도 사람을 어느 정도 움직이지만 사람을 진심으로 움직이면서 선한 영향력을 미치려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신앙생활을 할 때 예수님을 믿기만 하지 말고 예수님을 닮기까지 해서 깨끗한 영혼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참된 성공을 이루라.
피스 메이커
삼하 2장 4~7절 / 홍문수목사
잘 아시는 대로 올림픽은 전쟁과 분쟁을 그치고 세계 인류가 스포츠를 통해 평화를 도모한다는 취지로 시작되어 흔히 ‘인류 평화의 제전’으로 불리곤 합니다. 근대 올림픽의 기원이 된 고대 올림픽 역사를 보면, 그리스 각 도시 국가의 청년들이 한데 모여 체력과 기예를 겨루는 축제로 그 기간 중에는 모든 전쟁을 중단했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올림픽은 세계 인류에게 귀한 잔치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말은 인류 평화의 제전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진정한 평화와 거리가 멀다는 사실입니다. 테러의 위협으로 안전 요원이 무려 7만 명, 선수 1인당 7명꼴이라고 합니다. NATO 군대까지 동원되고, 안전 비용은 무려 15억 유로(약 2조 1,000억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작 개최국인 그리스 사람들은 계엄령 하에서 지내는 것처럼 불편과 불안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죠?
우리에겐 평화가 중요합니다. 평화가 없으면 아무리 소유가 많아도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마음속에, 가정에, 국가와 세계인류에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평화를 만들어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만드는 평화는 언제나 불완전합니다. 언제라도 폭발해 버릴 수 있는 휴화산 같은 평화에 불과합니다. 오직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고전14:33)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인간에게 평화가 깨지고 말았습니까? 에덴동산에서 뱀, 즉 사단의 유혹으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의 언약의 증표인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함으로 평화가 깨지고 만 것입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지고, 연이어서 가정의 평화가 깨지고, 결국은 온 세상의 평화가 깨진 것입니다. 사단은 갈등과 다툼을 일으키는 트러블 메이커(Trouble-Maker)입니다. 죄에 빠진 인간도 마찬가지 트러블 메이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평화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평화를 누릴 수 있고, 더 나아가 평화를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모범이 됩니다. 그는 항상 마음속에 평화가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시련과 고통이 있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마음에 평화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 평화는 자신이 의지적으로 만든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의 마음속에 평화가 있었기에 더 나아가 평화를 만드는 피스 메이커(Peace-Maker)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행복한 인생이었으며, 행복을 나눠주는 인생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평화를 사랑하는 다윗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함께 살펴보면서 저와 여러분도 평화를 사랑하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다윗의 신앙과 삶 : 피스메이커의 모델
본문은 사울 왕이 전쟁터에서 죽고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자 지파의 왕이 된 직후에 일어는 사건의 기록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행한 일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가 어떤 신앙과 인격의 소유자인가가, 그리고 왕으로서 어떤 정치를 했는지 파악할 수 있는 가늠자가 됩니다.
4절(하) 보면, 사람들이 다윗에게 보고한 내용이 나옵니다. 무엇입니까? 사울의 시체를 장사한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 보고를 들은 다윗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5절~7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5절 → 사자(심부름꾼)들을 보냈습니다. 무엇하러 보냈죠? 다윗의 원수 사울의 편이니까 보복했나요? 그게 아니죠. 축원합니다. “ ...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대단한 일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사울의 시체를 장사한 사람들을 괘씸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하나도 남김없이 색출해서 처형할 케이스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축복을 빌어줍니다.
* 6절~7절 → 계속 하나님의 은혜를 축원하면서, 더 나아가 자기가 보상해주겠다고 다짐합니다.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이제 너희는 손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할지어다 너희 주 사울이 죽었고 또 유다 족속이 내게 기름을 부어 저희의 왕을 삼았음이니라” 이제 자기가 왕이 되었으니 책임지고 포상해 줄 터이니 아무 염려 말라는 겁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야베스 사람들이 다윗 앞에서 벌벌 떨 일입니다.
보통의 상식으로 보면 정말 희한한 일입니다.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나 다윗은 원수 사울을 용서하고, 심지어 그의 공적(功績)을 포용하고 인정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인간 본연의 모습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그의 성숙한 신앙에서 우러나온 겁니다. 다윗은 자신의 사사로운 이기심이나 이해관계를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가 자기 정권욕만 추구했다면 결코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 겁니다. 정반대로 야베스 사람들을 탄압하고 처형했을 겁니다. 자기편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은 사울도 그의 편에 선 사람들도 용서하고 포용함으로 화해하고, 더 나아가 통합된 이스라엘을 이루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평화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마5:43~45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다윗의 이런 모습은 비단 본문에만 나오는 게 아닙니다. 사무엘 上, 下 도처에 나옵니다.
그 중에 가장 두드러진 대목을 몇 가지 찾아보기로 합니다.
* 삼상24:, 26: → 사울에게 쫓기다가 오히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만났는데, 그냥 지나갑니다. 당장이라도 사울의 핍박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이 기름 부은 왕이라며 살려줍니다. 자기가 다음 왕이 될 것이지만,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연스럽게 왕권이 이양되기를 바랐단 것입니다.
* 삼하1:17 이하 → 사울과 요나단을 애도하며 지은 노래(哀歌)가 나옵니다.(활 노래)
그리고 이 노래를 지가 혼자만 부른 게 아니라, 유대 사람들에게까지 가르쳐 부르게 합니다.
삼하1:19 보면 사울과 요나단을 가리켜 칭송을 합니다. “이스라엘아 너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심지어 삼하1:24에서는 사울의 업적을 치하합니다. “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저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사울이 많은 과오를 범했지만 그래도 일부 공이 있었습니다. 암흑 같은 사사 시대를 끝내면서 이스라엘에게 외적의 침략과 궁핍으로부터 구해 주었습니다. 붉은 옷을 입혀주고 금 노리개를 채워줬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번영을 가져다 줬다는 표현입니다.
다윗이 요나단에 대해 애통해 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사울에 대한 태도는 정말 대단합니다. 사울을 용서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그의 공적을 칭송까지 하다니! 보통은 정권이 바뀌면 직전 통치자의 과오나 들추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왕(前王)을 인정함으로써 반대 세력까지 다 포용합니다.
* 삼하2:8 이하 →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 군대장관 아브넬이 정권을 세우고 저항 ... 그러나 할 수 없이 싸우면서도 인내하며 관용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동족 간의 싸움과 분열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7년 6개월의 시간을 끌면서도 무력으로 하지 해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스보셋 정권이 스스로 자멸하게 되고, 마치매 다윗이 이스라엘 통일 왕국의 왕이 됩니다.
* 삼하3:36 → 이런 원칙을 지키는 다윗의 모습에 백성들이 감동을 받고 절대 신뢰하게 됩니다.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 삼하5:1~3 →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다윗에게 찾아가 왕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삼하5:1 “ ... 보소서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이다” 신뢰와 사랑의 표현입니다. 만일 다윗이 무력으로 사울의 세력을 진압하려 했다면 힘으로 억누를 수는 있었겠지만, 진정으로 사랑과 신뢰를 받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무력으로 억누르는 것은 겉보기에 그럴 듯하지만 결코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언젠가 폭발하는 불안정한 휴화산과 같은 것입니다.
다윗은 이처럼 원수라도 용서하고 포용하고 인정함으로 참 평화를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자신도 평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고, 모든 백성에게 평화를 나눠줄 수 있었습니다. 사울이 자기에게 충성하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다윗과 괜한 갈등을 일으키고 핍박했던 ‘트러블 메이커’였다면 다윗은 문자 그대로 ‘피스 메이커’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신앙과 삶을 본받아야 됩니다. 그게 곧 바른 신앙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라고 하면서도 얼마나 갈등과 평지풍파를 일으키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도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많은 불안과 고통을 가져다주는지 모릅니다. 우리 신앙은 달라야 합니다. 다윗처럼 피스 메이커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2] 그리스도인의 특권과 사명 : 그리스도의 평화를 선포하는 피스메이커
우리는 다윗의 모범을 따라 피스 메이커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 중요한 특권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오늘 이 시대를 위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입니다. 우리는 이 특권을 누리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다음 몇 가지를 실천해야 될 것입니다.
① 평화의 복음 전파 : 평화를 위해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것은 복음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평화가 깨진 것은 인간의 죄악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 죄가 있는 한 마음의 평화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입지 않으면 우리 마음 속에 참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평화를 회복시키기 위해 친히 화목 제물이 되신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의인이 됨으로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게 됩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여러분, 이 평화가 없으면 세상 모든 것을 소유해도 불안합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인간 관계에서도 마찬가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상호 간에 진정한 사랑과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엡2:13~1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이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 ... )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 ” 이렇게 해서 가정의 평화, 민족의 평화, 세계의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 복음화, 민족 복음화, 세계 복음화를 우해 헌신해야 됩니다.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는 평화를 전하는 일입니다. 선교도 마찬가지 세계에 평화를 전하는 일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사야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52:7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지난 주간에 중국 단기선교를 다녀왔습니다. 선교는 정말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새삼 느껴졌습니다. 새 개의 가정교회를 방문했는데, 생전 처음 보는 분들입니다. 앞으로 다시 볼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천국에서나 다시 볼 분들입니다.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금방 마음을 열고 가까워졌습니다. 서로 반가워하며 악수하고 얼싸안았습니다. 헤어질 때는 아무 섭섭해 했습니다. 특별히 두 교회에서 30명이 세례를 받았는데, 목사도 즐겁고 동행한 우리 교인들도 즐겁고, 본인들도 즐겁고, 현지 교인들도 즐겁고, 선교사는 두 말 할 필요도 없고 ... 금세 하나가 됐습니다. 이게 바로 평화의 복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모두 이 복음을 전파함으로 우리 가운데, 우리 민족과 세계 인류 가운데 평화를 만들어가는 피스 메이커의 사명을 감당하기 바랍니다.
② 용서 : 다윗이 용서함으로 모든 이스라엘 민족을 평화로 이끌었던 것처럼 용서는 평화를 창출합니다. 보복은 악순환을 가져옵니다. 용서만이 사람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17세 어린 시절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로부터 13년 동안 애매하게 종살이,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러나 그는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총리가 된 후에도 형들에게 보복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에 형들이 두려워하자 오히려 눈물로 그들을 위로합니다. 그리고 형들은 물론이고 후손들의 부양까지 책임지겠다고 약속합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만일 요셉이 보복을 했다면, 그 형들의 후손들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아마 보복의 악순환이 지속됐을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롬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그러나 용서가 말처럼 그리 쉬운 게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어렵다 못해 불가능합니다.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지 이런 이야기를 책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두 상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경쟁 관계라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가운데 앙숙이 됐습니다. 안타까워하시던 하나님께서 천사에게 가서 중재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사는 한 상인에게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소원이 뭐요? 무슨 소원이든 하나님이 다 들어주신다고 했소.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당신의 라이벌인 그 상인에게는 그 두 배를 주실 겁니다.” 그 상인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한참 생각에 잠겼던 그가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답니다. “제 눈 하나를 뽑아주시오.” 상대방이 잘 되는 꼴은 절대 못 보겠다는 겁니다.
오직 예수님의 용서를 체험한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용서를 실천함으로 평화는 만들어집니다. 다윗은 진심으로 용서할 줄 알았던 사람이기에 본인이 먼저 평화를 얻고 행복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용서를 실천함으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평화를 만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③ 화합 : 하나님은 화목하고 연합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마치 부모님이 자식들에게 무슨 특별한 효도나 선물보다 우선 동기 간끼리 화목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롬12:18 보면 뭐라고 말씀합니까?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우리가 서로 화합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반대로 화합하지 못하고 분쟁과 다툼으로 갈등하고 분열되면 싫어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마12:25 “ ...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여러분, 다윗이 축복을 받고, 그의 통치 기간 중에 이스라엘이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었던 비결이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바로 화합입니다. 다윗과 백성, 백성과 백성이 화합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다윗은 화합의 정치, 상생의 정치를 구현했던 사람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정치인들이 말로는 화합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문자 그대로 화합의 정치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모습을 심히 기뻐하시고 다윗을 축복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자화상은 어떻습니까? 오늘 마침 8.15 광복 59주년인데 나라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착잡해집니다. 신문을 보고 방송을 들으면 정말 짜증이 날 지경입니다. 국내외적으로 좋은 소식이 거의 없습니다. 다 아시는 내용이지만, 아직 북핵 문제는 미결 상태 그래로죠. 국제 유가는 연일 퐁등하죠. 중국은 고구려가 자기 땅이었다고 주장해서 속을 긁고 있죠. 한미관계는 비끗거리죠. 선진국들은 저 앞으로 달려가고, 뒤에서는 후진 경쟁국들이 바짝 다가와 추월할 태세죠. 요즘 경제 신문을 보시면 자주 접하게 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브릭스(BRICs)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4개국의 영문 첫글자를 조합해서 만든 신조어입니다. 그 4개국이 곧 브라질(B), 러시아(R), 인도(I), 중국(C)입니다. 그 중에서도 중국은 우리 바로 옆에서 위협적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번 중국에 다녀오면서 피부에 닿으리만치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남부의 지방 도시들이었지만, 그곳에서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역력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행들이 이구동성으로 중국이 무섭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국내적으로 보면 또 어떻습니까? 새 정부가 들어선 지 1년 반이 흘렀습니다. 그러면 안정될 만도 한데 계속 시끄럽습니다. 17대 국회가 들어서면서 새 정치를 한다고 큰 소리를 쳤지만 구태 그대로입니다. 곳곳에서 분열과 갈등의 모습 투성이입니다. 여야, 노사, 지역, 계층, 세대간, ... 어디 하나 화합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구석이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 부패 문제도 속히 청산되어야 하지만, 갈등과 분열의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어려울수록 더 화합해야 되는데, 그리고 화합하면 큰 역사가 일어날 텐데 ... 이것 해결하면 나머지 문제는 다 해결될 텐데 ... 정말 안타깝습니다.
민주 정치는 다양성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조화와 일치가 없으면 난장판이죠. 획일적인 일치야 나쁘지만 다양한 목소리가 하모니를 이루는 게 민주 정치의 묘미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는 다양성만 있지 조화의 일치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우리 한국인의 기질을 꼬집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재미 교포에게 들은 말인데, 얼마나 통용되고 일리가 있는지 모르지만 한번 들어보십시오. 외국인들의 상점이 많은 지역에 한국인이 한 명 들어가면 외국인들이 겅계하기 시작한답니다. 그 다음 두 명이 들어오면 잔뜩 긴장을 한답니다. 한국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보면 다들 똑똑하고 능력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세 명이 들어오면 안심을 한답니다. 왜 그럴까요? 이제 자기들끼리 싸울테니까 걱정할 게 없다는 겁니다. 듣기 싫은 소리지만 한번 귀기울여 들어볼 말입니다. 혹시 우리들에게 서로를 인정하고 화합하는 게 부족한 게 아닌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여러분, 시너지(Synergy)라는 말을 아시죠? 협력을 통항 상승 작용을 의미합니다. 여러 사람들리 힘을 합치면 정말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말도 있습니다. 아너지(Anergy)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분열과 갈등으로 인한 상충 작용을 가리킵니다. 서로 분열되고 갈등이 많으면 결국은 무력화되어 망하는 법입니다.
여러분, 밀림에서 가장 강한 동물이 무엇일까요? 동물 학자들에 의하면, 개미랍니다. 왜 그런가요? 개미 한 마리는 살짝 누르기만 쉽게 죽는 아주 약한 동물입니다. 그러나 협력하면 심지어 수 km 줄을 지어 다니며 맹수라도 격멸할 수 있는 위력을 발휘합니다. 우리 모두가 배울 지혜입니다.
사실 우리 한국인도 잘 보면 협력을 잘 하는 민족입니다. 2002년 월드컵 대회 때 얼마나 대단했습니까? 그 붉은 물결,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리고 1997년말 IMF 외환위기 직후에 온 국민이 장롱에 있는 금까지 꺼내다 바치며 금모으기 했던 것을 기억해 보면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 모습이 다 어디로 갔는지 답답할 뿐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이 솔선하여 곳곳에서 화합 운동을 일으키면 좋겠습니다. 서로 인정하고 격려하고 하나가 될 때 반드시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혹시 우리의 역량이부족해도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또 합심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반드시 이 나라 이 민족을 일으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다윗은 평화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평화를 체험한 사람,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평화를 사람들과 나눌 줄 아는 사람, 가슴이 넓어 모든 사람을 포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피스메이커였던 것이죠. 그래서 자기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 신앙이 참되다면 우리도 동일하게 피스메이커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특권이요 사명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도 다윗처럼 피스메이커로 행복을 나누며 사는 아름다운 인생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삼하 2장 1~11절 / 양인국목사
1. 다윗은 평생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인도하심에 따라 살았다. 이로 인하여 그는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는 고백을 가지고 살 수 있었다. 물론 이 고백은 다윗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산 체험을 통하여 갖게 된 고백이다. 놀라운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았을 때 언제나 형통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하심 분으로서 실수가 없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는 사람은 형통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다윗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산 결과가 어떠한지 볼 수 있을 것이다.
2. 본문의 내용이다. 사울이 죽은 후, 사울처럼 다윗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람은 이스라엘 가운데 없었다. 다윗은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시글락으로부터 유다로 올라가기를 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먼저 이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 물었다. 이처럼 다윗은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마다 먼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것만이 최선의 길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은 인도하심을 받기 원하는 다윗에게 언제나 인도의 말씀을 주심으로 그를 인도하셨다.
1절의 말씀이다.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여기 “그 후에”란 사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은 후를 말한다. 그때 다윗은 “내가 유다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라고 하나님께 여쭈었다. 우리는 여기 다윗의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산다는 것은 결국 기도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우리는 시편 제1권(1-41편)을 묵상하고 있다. 여기 기록된 시편들은 대부분 다윗이 쓴 시인데, 그 시들은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들이다. 이 내용들을 묵상할 때 깨닫게 되는 것은 다윗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기도가 생활화 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그리고 인도하심이 잎요할 때마다 하나님께 나갔다. 이로 인하여 다윗은 형통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실제로 우리가 시편을 통하여 다윗이 한 사람의 믿음의 사람으로서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형통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요인들을 살펴보면 결정적인 요인이 기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놀라운 사실은 다윗뿐만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그들 모두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됨으로부터 구원해 주기 위한 일을 위하여 택함 받은 모세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이스라엘 가운데 말씀이 희귀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사무엘 역시 기도의 사람이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사는 것이 합당한 삶인지에 대하여 이정표가 되는 다윗도 기도의 사람이었고 선지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엘이야도 기도의 사람이었다. 신약의 사도들 역시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교 역사 가운데도 동일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 등 개혁자들 역시 기도의 사람들이었고 웨슬러를 포함하여 각 시대 부흥운동의 주역들 모두가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의 삶 가운데 기도가 생활화 된다면 믿음의 사람으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다윗이 하나님께 인도의 말씀을 구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헤브론으로 올라갈 것을 말씀해 주셨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가족과 그리고 자신과 함께 한 모든 사람과 함께 헤브론으로 올라가서 그곳에 거하였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였기 때문에 인도의 말씀을 주셨을 때 그 말씀에 순종했을 뿐 “어째서”라고 묻지 않았다.
4절의 말씀이다.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았더라(2:4)” 다윗이 헤브론에 거하였을 때 유다 사람들이 다윗에게 와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을 삼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헤브론으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를 왕으로 세우고자 하심이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의 말씀에 따를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준비해 두신 놀라운 계획을 완성해 가시기 위해 다음 단계로 나갈 길을 준비해 두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끝까지 인도의 말씀을 따라 산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신 놀라운 일들이 우리 가운데 완성 되는 것이다.
8,9절 말씀이다. “사울의 군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이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더라” 사울의 죽음이 다윗에게 이스라엘 왕이 되는 것을 보장해 준 것은 아니었다. 사울의 군대 장관 아브넬이 마하나임에서 사울을 계승하여 그의 넷째 아들 이스보셋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때 이스보셋의 나이는 사십 세였다. 여기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이란 다윗을 왕으로 세운 유다를 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말한다. 그러므로 다윗은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왕으로만 만족해야 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위하여 또 다시 칠년 여섯 달을 기다려야 했다. 놀라운 사실은 다윗은 왕이 되고자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울에게 쫓기어 도피하는 생활을 할 때에도, 그리고 자신의 군대를 가지고 있었을 때에도 사울의 왕 됨을 인정했고 그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사울이 죽은 후 다윗의 집은 점점 강성해 갔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해져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울의 집으로부터 왕권을 빼앗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았다. 이와 같은 기다림은 다윗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도록 충분히 준비 될 수 있게 하였고, 또한 평화로운 방법으로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왕이 될 수 있도록 했다. 이와 같은 다윗의 모습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왕이 되려고 집착하는 모습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하루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실하게 살려는 자의 모습이었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때까지 기다렸다. 우리는 다윗을 통하여 믿음의 사람들에게 기다림의 중요성을 교훈 받는다. 실제로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역사는 사백년이라는 오랜 시간의 기다림 가운데 일어난 역사이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칠십년이라는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메시야의 오심도 기다림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고 오순절의 역사도 기다림 가운데 임한 역사다. 만일 모세에게 기다림의 시간이 없었다면 모세가 될 수 있었을까? 세상의 구주로 오신 주님에게 삼십년의 기다림의 시간이 없었다면 대속의 사역을 완성하실 수 있었을까? 이와 같은 물음들은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과 오늘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물음들이다. 실제로 우리는 성경과 경험을 통하여 기다려야 할 때 기다림으로 온전함으로 세워지는 것을 경험해 왔고, 반대로 기다려야 할 때 기다리지 못함으로 넘어지는 것을 경험해 왔다. 실례로서 다윗은 기다려야 할 때 기다림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지만 동일하게 기름부음을 받은 여로보암은 기다려야 할 때 기다리지 못함으로 넘어졌다.
이처럼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아갈 때 기다림의 중요성을 아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다림의 시간을 허락해 주시고 그 시간을 통하여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할 수 있도록 준비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지식의 유무에 따라 우리가 넘어지기도 하고 세워지기도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믿음의 삶에서 기도의 중요성과 기다림의 중요성을 교훈해 주셨다. 우리가 이 교훈의 말씀에 따라 항상 기도를 통하여 주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일을 아름답게 이루실 때까지 기다린다면 우리는 다윗처럼 시간이 더해 갈수록 우리와 우리의 집이 강성해갈 것이다.
다윗의 나라 세우기
이상웅목사 / 사무엘하 2:1-7
다음 달이면 마중물교회가 시작된 지 15주년이 됩니다. 참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순식간에 지난 듯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15주년을 맞으며 무슨 말씀을 나눌까 생각하다가 마중물의 가치를 다시 한번 점검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교인 훈련을 받을 때 마중물의 7가지 가치에 대하여 배우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실성, 종의 도, 한 사람, 균형감, 자원함, 과정중심입니다. 예배당에 들어오는 2층 계단에도 하나씩 쓰여있고, 주보의 첫 페이지에도, 중보기도지에도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가치를 존중하는 교회가 되기 원했고, 나름 노력했습니다. 혹 잊고 지내지는 않을까 싶은 마음과 새롭게 다짐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나누려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던 다윗이 유다의 왕으로 세워지는 내용입니다. 구약에서 다윗의 나라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나라를 세워지는 과정을 보면서 ‘과정 중심’의 가치에 대하여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또한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과정 중심’의 가치를 존중하고 따르는 것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1. 거처를 헤브론으로 옮기다
오늘 말씀은 “그 후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1절입니다.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이 말은 오늘 본문의 배경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후가 언제입니까? 1:1입니다.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쳐죽이고 돌아와 다윗이 시글락에서 이틀을 머물더니”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은 후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오랫동안 도망자 신세로 지냈습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변방을 전전했지만, 나중에는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어서 블레셋의 용병이 되었습니다. 블레셋이 사울 왕과 전쟁했을 때, 용병인 다윗도 참전해야 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란한 상황에서 다행히 다른 블레셋 사람들의 의심으로 동족과의 전투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전투에 동원되었다가 돌아온 사이 시글락에 있었던 가족들이 아말렉 사람들에게 납치되었고, 뒤쫓아 가족들을 되찾아 돌아온 이틀 후 사울 왕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에게 오랜 고통의 원인이었습니다. 사울 왕이 죽었다는 소식에 기뻐해야 합니까, 슬퍼해야 합니까? 만약 여러분이 다윗이었다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개인적으로는 고통의 원인이 사라졌지만, 국가적으로는 큰 위기와 슬픔이었습니다. 다윗은 깊은 애도의 시간을 보낸 후 자신의 거취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더 이상 블레셋 땅에 머물 필요도 없고,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하나님은 오래전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구나’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사울을 대신하여 왕이 되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당시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기브온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사울의 편에 서서 다윗을 죽이려 했었습니다. 후환이 두려워 다윗을 환영할 리 없었습니다. 이를 생각하면 이스라엘 어디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습니다.
시글락에 그대로 머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갈 곳도 없었습니다. 다윗 혼자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들과 자신의 추종자들, 즉 600명의 군사와 그의 가족과 함께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들의 운명이 달린 것입니다. 이때 다윗은 무엇을 했습니까? 1절입니다.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그나마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유다 지파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유다 지파의 한 성읍으로 가라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또 아뢰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성읍입니까?’ 헤브론이란 응답을 받았습니다.
과정 중심의 출발점은 기도입니다. 과정 중심의 가치를 존중한다면, 기도로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묻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성경은 사울의 실패의 원인, 죽음의 원인이 무엇이라 말합니까? 역대상 10:13-14입니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 하나님께 묻지 않고 신접한 자에게 물었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도로 시작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너무 똑똑해서 그렇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장 좋은 길이고, 하나님도 이것을 원하실 것이기에 묻고 응답을 기다리기에 앞서서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2. 유다 지파의 왕이 되다
다윗과 일행은 하나님께 지시받은 땅 헤브론으로 이주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의 용병으로 있었기에 헤브론에서 이를 문제 삼지 않을까 불안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유다 지파 사람들은 과거 다윗이 유다 땅에 숨었을 때, 그 위치를 사울에게 보고했었기에 다윗이 이를 문제 삼지 않을까 염려했을 것입니다. 4절 상반절입니다.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았더라” 그러나 유다 지파 사람들은 다윗을 기름 부어 왕으로 삼았습니다. 둘 사이의 긴장 관계가 해소되고, 드디어 다윗이 왕이 되었습니다.
사무엘에게 왕으로 처음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은 15년 전입니다. 그 이후 사울의 수금 타는 신하가 되었고, 골리앗을 쓰러뜨렸고, 사울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질투로 인해 도망자로 10년을 살았습니다. 그런 후 왕이 되었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그러나 이 또한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이 정도 고생시키고, 왕의 수업을 받게 했으면 바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실 만도 한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12지파중 유다 지파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7-8절입니다. “사울의 군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이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더라” 나머지 11지파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이 상태로 또 7년 반을 지나게 하셨습니다. 결국, 처음 왕으로 기름 붓고 22년 6개월만에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패역한 사울을 대신할 왕으로 다윗을 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리 오랜 시간이 걸리게 하신 것입니까? 22년 6개월이란 시간은 꼭 필요했던 시간이었을까요? 왕이 민생을 살피기 위해 평상복 차림으로 다니는 것을 미복잠행(微服潛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이스라엘 구석구석을 다니며 민심을 살피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서두르지 않으셨습니다. 뜻을 정하시고 한걸음 한걸음 과정을 밟아서 22년 6개월만에 그 뜻을 이루셨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르심을 받고 100세의 나이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모세는 왕궁에 있을 때 쓰시지 않고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목자로 지내게 한 후 쓰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쓰시기 위해 훈련과 연단의 과정을 겪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빨리빨리, 속전속결을 좋아합니다. 빨리 결과가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과정 중심의 가치를 존중하는 성도는 조급하지 않습니다. 지금 어떤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까? 막막하고 답답한 현실이라 할지라도 낙망하지 않고, 현실에 충실하게 대처하며 배워야 합니다. 잠언 21:5입니다.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조급함의 결과는 궁핍함입니다. 현대인들은 조급증에 걸려 있는 것 같습니다. 빨리 무엇인가에 도달하지 않으면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영끌해서 집도 사고, 주식도 샀다가 궁핍하게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긍정적 결과에 도달하지 않으면 자신의 삶이 가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작년말 잠언을 묵상하다가 마음에 남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30:24-28입니다.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준비하는 개미와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임금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손에 잡힐 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 작지만 지혜로운 것 넷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힘이 없는 개미는 부지런히 미래를 대비합니다. 사반은 토끼나 너구리라고 하는데,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안락한 집이 아니라 절벽과 바위틈에 집을 짓고 거주합니다. 메뚜기는 임금, 지도자가 없지만 놀라운 질서와 단결심을 가졌습니다. 도마뱀은 날카로운 이빨이나 독이 없습니다. 자신을 보호하거나 공격할 무기가 없기에 도마뱀은 왕궁에 있어도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아서 내버려 둡니다.
약하고 힘없는 세상의 미물도 지혜롭게 살고 있습니다. 아니 지혜는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열악한 현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다윗은 열악한 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지혜로운 왕이 되었습니다. 요즘 젊은 부부 중에는 자녀를 잘 키울 자신이 없어서 안 낳는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자랄 환경도 안 좋고 제대로 키우려면 돈도 너무 많이 드니, 자녀에게 좋은 것을 제공하지 못할 바에는 낳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부러 자녀를 나쁜 환경에 몰아넣을 필요는 없지만, 주어진 현실에 충실하게 살아가며 그 안에서 미래의 훌륭한 자산을 얻는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무엇이 되었다는 결과보다 무엇인가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배우는 지혜가 우리를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3. 길르앗 야베스를 축복하다
다윗이 유다 지파의 왕이 된 후 첫 사건으로 기록된 것이 무엇입니까? 4하반절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을 장사한 사람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니이다 하매” 새로 왕이 된 다윗에게 누군가 사울을 장사한 사람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블레셋은 사울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 못 박아 두었습니다. 왕이 죽었지만 블레셋이 두려워서 아무도 감히 그 시신을 장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길르앗 야베스 사람이 용기있게 그 시신을 장사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왜 다윗에게 알렸을까요? 이 소식을 전한 사람은 다윗과 사울을 적대적인 관계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사울에게 충성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린 것입니다. 조심해야 할 대상을 말해준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5-6절입니다.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령들을 보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에 전령을 보내 여호와께 복을 받을 것을 전했습니다. 다윗도 이 선한 일을 갚겠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의 첫 사건은 상징적 의미가 깊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왜 이 사건을 첫 사건으로 기록했을까요? 다윗이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사울에게 충성했던 사람도 끌어안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왜 그런 용기있는 행동을 한 줄 알고 있었습니다. 40년전, 사울이 처음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을 때의 일입니다. 암몬 사람들이 길르앗 야베스를 공격하여 포위하였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우리가 조공을 바칠테니 화친을 맺자고 했습니다. 암몬은 ‘너희가 오른쪽 눈을 다 빼고 오면 화친을 맺어 주겠다’고 모욕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울이 군대를 모집하여 이끌고 와서 암몬을 물리쳤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사울에게 받은 그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신의를 저버리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사실을 알았고, 이들의 신실함을 높이 평가했던 것입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사울을 장사지내면서 다윗에게 미운털이 박혔겠구나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그런 자신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끌어안는 다윗을 보면서 새로운 충성심을 가지게 했을 것입니다. 또한 이 사실은 근방 이스라엘 전역에 퍼졌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단지 사울 왕을 따랐다는 이유만으로 다윗의 미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비록 사울과 껄끄러운 관계에 있었고 블레셋의 용병으로 있었지만,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그들의 마음을 얻으려 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위해 힘으로 지배하는 것보다 모든 백성의 신뢰와 지지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과정 중심의 가치를 존중한다는 것은 나와 다른 입장이었다 해도 그것만으로 그 사람을 배척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끌어안고 하나 되려 합니다. 오늘날 지도자가 바뀌면 자기 사람으로 물갈이를 합니다. 그래서 라인을 잘 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나라를 세워가는 과정에서 내치기보다는 포용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 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다윗의 나라를 어떻게 세워가셨는가, 그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가정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과 중심이라면 1등, 최고만이 웃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정 중심이 되면 모두가 웃을 수 있습니다. 과정 중심의 가치를 따라 하나님께 기도로 묻는 습관을 가집시다.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묻고, 그 인도함을 따라 현재에 충실하며 지금을 통해 지혜를 배웁시다. 그리고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의 입장도 존중하며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합시다. 과정 중심의 가치를 실천하는 마중물 성도 되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시간표
삼하 2장 1~4절 / 홍문수목사
삼하2:1~4a, 5:1~5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다가 흥미로운 구절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베드로후서 3장 8절 말씀이죠. 그는 이 구절을 보는 순간 무릎을 탁 치며 감탄했습니다. “역시,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다르셔. 하나님의 하루는 천년과 같단 말이지. 정말 대단해.” 그리고는 얼른 계산기를 두드려봅니다. “하루가 천 년이라 ... 그러면 무려 365,000배가 된단 말이네” 그는 신이 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더도 말구요 1만원만 주십시오.” 그러면 얼마 달라는 거죠? 36억 5천만 원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응답이 즉각 왔습니다. “그래, 좋~다. 그런데 더도 말구 하루만 기다려라.” 그러면 얼마나 기다리라는 거죠? 천 년입니다. 욕심을 부리다가 보기 좋게 한 방 맞은 겁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통해 어떤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적잖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이런 식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을 이용합니다. 마치 자기가 주인이고 하나님은 심부름꾼인 것처럼 말입니다. 당장 좋은 것을 많이 달라고 졸라댑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욕심을 성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신앙의 모습이 아니고, 더더욱 성숙한 신앙의 모습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자기에게 참 복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참 신앙은 하나님을 나에게 맞추는 게 아니라, 내 마음과 내 생각을 하나님께 맞추는 겁니다. 이게 곧 ‘신본주의 신앙’이요 ‘하나님 주권 신앙’입니다.
우리가 이런 신앙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지나친 욕심을 부리거나 서두르지 않습니다. 비록 당장은 어렵고 힘들어도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가장 좋은 때’를 기다립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시간표’(timetable)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시간표대로만 살면 반드시 승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가장 복스러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다윗이 그런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 시간 다윗의 생애 가운데 하나님이 갖고 계셨던 시간표는 어떤 것이었는지 함께 살펴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다윗이 그 시간표를 깨닫고 순종할 때 얼마나 복된 인생을 살게 됐는지 함께 살펴봅니다. 우리도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시간표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시간표에 맞춰 살아감으로 진정으로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1]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시간표 :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분류 설교전당 우리 인간의 시간표는 무조건 ‘지금’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급하게 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필요하면 하나님도 지금 당장 역사하시고, 우리에게 좋은?것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 하나님은 시간을 적당히 멀찌감치 잡습니다. 그리고 범사를 조종하며 타이밍을 맞춰 가십니다. 그래서 결국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런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다윗에게 기름 부어 왕으로 예비하셨습니다.(삼상16:13, B.C. 1025년 경) 그런데 정작 왕이 된 것은 훨씬 후의 일입니다. 그것도 단번에 왕이 된 게 아니라, 두 단계에 걸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1차적으로는, 삼하2:1~4a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만의 왕이 됩니다.(B.C. 1010년 경) 그러니까 기름부음을 받은 지 15년이 흐른 뒤입니다. 사울에게 쫓겨 다니며 핍박 받은 지는 10여 년 흘렀을 때입니다. 상당히 오랜 시간이죠. 2차적으로는, 삼하5:1~5에 기록된 대로 전 이스라엘 통일 왕국의 왕이 됩니다. 대략 B.C. 1003년경입니다. 5:5절 보면, 다윗이 헤브론에서 대략 7년 6개월 유다 지파의 왕 노릇을 했습니다.
얼른 인간적인 생각을 해 보면 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동안 쫓겨 다니며 오래 동안 고생했는데, 이제 사울왕도 죽고 없어졌으니 하루라도 빨리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나라도 혼란스러워서 정말 그게 좋은 듯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무려 7년 6개월이란 세월을 지체하십니다.
너무 답답하고 지루해 보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왜 그랬을까요? 다윗을 더 많이 연단하시려는 뜻도 있겠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때를 맞춰주시려고 그랬던 것입니다. 타이밍을 맞추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당시 상황을 마음속에 그려보시면 무슨 말인지 대충 이해가 되실 겁니다.
그 당시 사울 왕이 죽었지만 아직은 혼란기입니다. 사울 왕가에 남은 세력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 사이에는 일부에서나마 사울 왕 죽음의 배경에 혹시 다윗이 개입이 되지 않았나 하는 의혹의 눈길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윗이 핍박을 피해 다니다 블레셋에 망명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충분히 의심받을 만하죠. 자칫 잘못하면 쿠데타 세력으로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분위기 가운데 다윗이 왕이 되면 통치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겁니다. 물론 다윗이 거느리던 군사들이 있었으니까 무력으로 정복할 수도 있었겠죠. 그러나 하나님은 단계적으로 다윗이 이스라엘의 통치권을 갖도록 했습니다. 먼저 유다 지파는 다윗의 출신 지파니까 쉽게 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 후 7년 6개월 동안 이런 저런 변화가 있었고, 결국 나머지 지파들도 스스로 자기들이 몰려와서 다윗을 왕으로 추대하게 됩니다. 5:3절.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매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매 저희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니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소원하시고 계획하셨던 신본주의적 왕국(神本主義的 王國)의 모습입니다. 다른 이방 나라의 왕처럼 권력의 힘으로 군림하고 탄압하는 게 아니라, 위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는 왕의 모습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습이 이뤄지기까지 시간을 끄셨던 겁니다. 이게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시간표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시간표에 잘 순응했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다윗의 성숙한 신앙을 배울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시간표를 바라보는 자세 : 신뢰, 인내, 순종
다윗은 오랜 세월 신앙의 연단을 통해 성숙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시간표를 인식하면서 그에 따른 합당한 신앙 자세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그 결과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왕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다윗의 신앙 자세는 어떤 것들이었을까요?
①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뢰 : 다윗은 오래 전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시면서 약속하신 것을 100% 믿었습니다. 이런 신뢰의 믿음이 없으면 다윗이 자기 본위로 인간적인 행동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오랜 세월 자신의 삶을 신실하게 인도해주신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분이 작은 오차도 없이 자기 인생을 책임져 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부도율이 0 %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말씀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민23: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애3:20~22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다윗은 식언치 않으시는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을 굳게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27:14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사람도, 권세도, 물질도 신뢰할 게 못되고 오직 하나님만 신뢰할 만한 분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만 굳게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계획대로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②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 : 다윗은 이미 오랜 세월을 기다렸습니다. 그도 사람인데 어찌 고난의 세월이 고통스럽지 않았겠습니까? 그 역시 인간적으로 고난의 종지부를 속히 찍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기다려야 된다니 맥이 빠질 법도 합니다. 그런데 그는 안달하지 않습니다. 허겁지겁하지 않습니다. 진득이 인내하며 기다립니다. 결국 승리하게 되죠.
여러분, 사람들이 성급하게 구는 것은 대개 왜 그렇습니까? 욕심 때문입니다. 그러나 욕심을 품고 성급하게 움직이면 자칫 잘못하면 망합니다. 약1:14~15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잠19:2 “지식 없는 소원은 선치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그릇 하느니라
성급하게 욕심 부리다 혼이 난 사람이 있죠. 야곱입니다. 그는 모태에서부터 형 에서를 제치고 족장으로 선택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진득이 기다리면 하나님이 자연스럽게 이뤄주실 겁니다. 그런데 성급하게 어머니 리브가와 함께 달려듭니다.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사질 않나, 눈과 귀가 어두운 아버지 이삭을 속여 축복 기도를 받지 않나 ...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오히려 큰 일을 당합니다. 형 에서가 살기등등하게 죽이겠다고 달려듭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집을 떠납니다. 밧단아람으로 행해 가다가 빈 들판에서 돌베개 베고 자는 야곱의 쓸쓸한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후 20년을 고생 고생합니다. 자기는 잔머리를 굴려서 약삭빠르게 차지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늦어진 것입니다.
요즘 세상이 하도 스피드 시대가 되다 보니까 머리를 잘 굴려야 살아남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이 있어요. IQ, EQ가 좋아야 하듯이 JQ가 좋아야 한답니다. JQ는 ‘잔머리 지수’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잔머리 굴리면 당장은 잘 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실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JQ보다 FQ가 좋아야 합니다. FQ는 신앙 지수(Faith Quotient)를 말합니다.
우직해 보여도 신앙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게 좋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어렸을 때 이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식구가 많아서 가마솥에다 밥을 했잖아요.
배가 고프면 어머니가 부엌에서 밥하는 데 가서 살그머니 뚜껑을 열어봅니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면 밥이 설익습니다. 또 묘목을 심고 며칠 후 궁금합니다. 그래서 뿌리를 뽑아봅니다. 아무 소식이 없으니까 다시 심었다 또 뽑아보고 ... 이러기를 몇 번 반복하면 나무가 그냥 죽고 맙니다. 성급하게 굴면 이렇게 됩니다. 현대인들이 얼마나 조급하고 성급한지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까 성도들도 그런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풍자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인내의 신앙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저에게 인내를 주십시오. 지금 당장 주십시오.” 정말 곤란합니다.
현실이 힘들고 답답해도 진득이 인내하며 기다릴 때 승리합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십시오. 애매하게 감옥살이하는데, 감옥에서 관원장 둘을 만납니다. 하루는 불안한 기색이 있어 물으니 꿈을 꾸었다는 겁니다. 해석해 주니까 정말 그대로 떡맡은 관원장은 처형당하고, 술맡은 관원장은 복직이 됩니다. 출옥한 관원장이 나가면 요셉을 도와주겠다고 하더니 감감 무소식입니다. 인간적으로 얼마나 야속했을까? 그래도 요셉은 꾹 참고 기다렸습니다. 그로부터 만 2년후 하나님이 좋은 때를 맞춰 역사해주셨습니다. 창41:1 “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하숫가에 섰는데 ... ” 바로 왕이 꿈을 꾸었는데 무슨 뜻인지 몰라 전전긍긍합니다. 그때 술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죠. 급히 왕에게 불려갑니다. 바로왕의 꿈이 7년 풍년, 7년 흉년임을 해석해줍니다. 그리고 흉년이 너무 심해서 큰일 날 것임을 알려주면서 비방까지 알려줍니다. 감동받은 바로 왕은 요셉을 일약 국무총리로 세웁니다. 만일 술 맡은 관원장이 출옥하면서 금세 그를 꺼내 주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겠죠.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는 현실이 답답해도 이런 일이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③ 하나님의 뜻에 대한 철저한 순종 :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급해도 정도를 걷는 게 중요합니다. 다윗은 정도를 걸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물론 그도 사람인지라 실수를 했었죠. 사울을 두려워 하다가 국경을 넘었고 블레셋에 망명해서 아기스 왕에게 붙어살다가 혼이 났습니다. 그래도 그는 기본적으로 정도를 걸었습니다. 정도는 곧 하나님의 뜻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사무엘상 24장과 26장을 보면, 최소한 두 번 사울 왕을 결정적으로 살해할 수 있는 기회에 그냥 살려 주었습니다. 측근 부하들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다그쳤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에게 손을 댈 수 없다면 끝까지 선을 지켰습니다. 이게 쉽지 않습니다.
본문 삼하2:1절을 보면 다윗이 이제 얼마나 철저하게 정도를 지키려고 애를 썼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라 다윗이 가로되 어디로 가리이까 가라사대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그는 그동안의 시행착오를 거울삼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여쭈었고,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헤브론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뜻대로만, 정도(正道)로만 걸어가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 인생을 책임지시고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려울수록 정도를 걸어가야 합니다. 사람이 어렵고 답답하게 되면 반칙을 범할 유혹에 빠집니다. 그렇게 하면 뭐라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거죠. 그러나 다른 길로 가다가 망하는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다른 길로 가면 안 되죠. 예를 들어 요즘 휴가철에 자주 보는 풍경인데요, 자동차로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주차장처럼 꽉 막혀 서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편을 보니까 휑하니 비어 있고 자동차들이 씽씽 달립니다. 그러면 건너가야 되나요? 아니죠. 아무리 이쪽이 막혀있어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막혀도 정도로 가야 됩니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신대륙의 바하마 열도에 도착한 것은 1492년 10월 12일이었다. 그런데 항해 도중에 참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힘든 것은 선원들이 항해가 길고 어려워지니까 자꾸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동쪽으로 갈 것을 고집했습니다. 계속 가면 신대륙이 나온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바로 전날인 10월 11일 선원들이 폭동을 일으키며 돌아가자고 데모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마침내 바하마 제도에 상륙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매일 기록한 항해 일지는 언제나 이런 말로 맺어졌다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동쪽으로 전진하였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낙심하지 않고 정도를 걸어가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갈6:9에도 말씀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저와 여러분의 시간표는 어떤 겁니까? 혹시 지금 당장으로 일관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 생각에 지연될 수도 있습니다. 늦어질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우리 인생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이란 사실입니다. 나님이 최선으로 계획하신 것이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눈앞의 현실이 답답해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때를 잠잠히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대로 정도를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시간표를 보는 다윗의 신앙을 본받아 남은 생애 꼭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물음
삼하 2장 1~7절 / 이종윤 목사
다윗은 이스라엘 왕으로 지명되었으나 하나님의 지시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청년시절 곤고한 날에서부터 모든 일을 먼저 주님께 묻고, 응답을 받은 후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께 인정받으며 승리했습니다.
I. 여호와께 묻고 인도함을 구하는 것은 성도의 의무다.
다음과 같은 이유를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묻고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아버지가 되시고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양은 목자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랑(배우자)이십니다. 선지자, 제사장, 왕이신 주님을 모시고 의논하며 인도함을 받는 것이 가장 현명한 삶입니다.
스스로 옳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어리석은 때이며, 가장 강하다 할 때 실패자가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 묻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의 목적을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위해' 삶을 사는 것은 그리스도께 물을 때 가능합니다.
II. 주께서 아시는가?
"저희가 지도자들을 세웠으나 나의 모르는 바며"(호8:4).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모르는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모른다고 하시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 주님께 묻지 않고 하는 일은 주님의 아실 바 아닙니다. 사울의 패인과 다윗의 승리 비결은 하나님께 묻고 일을 처리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행하면 성공할 수 없으며 성공했다 해도 주님이 모르시는 성공이므로 축복이 될 수 없습니다. 둘째 주님 허락 없이 일방적으로 하는 일은 주님의 아시는 바 아닙니다. 물음과 허락은 다르고, 물음과 통고는 다릅니다. 비록 하나님께 물었으나 허락 없이 하면 하나님께 거역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니까 허락하시고, 주님의 일이니까 허락하신다는 속단은 잘못된 것입니다. 더디더라도 허락을 기다려야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이스마엘을 낳게 되고 그 결과는 불행케 됩니다. 셋째 주님의 방법대로 되지 않으면 주님의 아실 바 아닙니다. 문제는 무엇을 했느냐 보다 어떻게 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주님께 묻고 주님이 아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III. 하나님의 인도는 어떻게 오는가?
그러면 하나님의 인도는 어떻게 오며,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은 계기된 말씀으로 인도하시고, 둘째 영적 유익과 하나님께 영광 되는 길로 인도하시며, 셋째 섭리를 따라 인도하시고, 넷째 경험 많고 일관성 있는 성도의 충고를 통해(설교자의 입술 통해) 인도하시며, 다섯째 분명한 감동으로(성령으로)인도하십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을 때 겸손히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들을 받고 지킴으로 말씀 가운데 약속된 복을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의 관계 맺기
삼하 2장 5~7절 / 이익환목사(욥바교회)
지난 주 책을 읽다가 ‘인간관계 O2O’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O2O는 Online to Offline의 약자인데, 온라인에서 맺는 관계가 오프라인의 관계를 대신한다는 것이다. 온라인에서 밥을 먹거나 스터디 할 사람을 찾는 것은 물론이고, 취미생활이나 여행을 함께 할 친구까지 찾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일회성 만남에 그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 편하게 느낀다고 한다. 휴지처럼 한번 쓰고 마는 것이기에 이런 관계를 ‘티슈인맥’이라고 한다. ‘랜선이모’라는 말도 알게 되었다. 유튜브나 블로그에 공개된 남의 집 아이를 보며 마치 친조카인듯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라 한다. 오프라인 관계에 지친 사람들이 랜선으로 맺어진 관계에 더 편안함과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관계를 떠나서 살 수 없다. 과거에는 관계에 쏟는 에너지를 어느 정도 감수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는 사람이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관계를 맺고 싶은 욕망을 SNS를 통해 충족하면서 진짜 관계에 대한 필요를 대신하고 있는 현실이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에는 다윗이 사람들과 관계 맺는 장면들이 나온다. 그가 어떻게 사람들과 연결되는지 살펴보며 지혜를 얻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삼하 2:1,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다윗을 죽이려 했던 사울은 죽고 없다. 도망자로서의 다윗의 삶이 드디어 끝났다. 그의 나이 서른에 이제 인생의 새로운 기회가 열린 것이다. 다윗은 이제 왕권을 얻기 위해 그의 인생의 속도를 높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렸다. 그는 인생의 방향을 하나님께 구했다. 그는 유다지파의 한 성으로 올라가야할지 하나님께 물었다. ‘올라가라’는 응답을 받았다. 그러면 어디로 가야할지 또 물었다. 그리고 ‘헤브론으로 가라’는 응답을 받았다.
왜 헤브론일까? 유대인 랍비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헤브론이란 지명의 어원에서 찾는다. 헤브론의 동사형은 레하벨(לחבר) 인데, ‘to connect’, ‘연결하다’란 뜻이다. 하나님이 다윗을 무언가에 연결해주기 위해 헤브론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이다. 헤브론은 잘 알다시피 족장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그리고 그들의 아내들이 다 이곳에 묻혔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모든 유대인에게 우리 아빠(아비누), 우리 엄마 (이마누)이다. 다시 말하면 헤브론은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의 엄마 아빠가 묻힌 곳이다. 정신적인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폴 존슨은 ‘이곳이야말로 4천 년 유대인의 역사가 시작된 곳, 시간과 공간 속에 닻을 내렸던 곳이다’라고 말한다. 랍비들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헤브론으로 인도하신 이유가 그를 유대인들의 정신적인 뿌리인 족장들과 연결시켜주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다윗의 정통성을 그들의 조상과 연결시켜주신 것으로 보는 것이다. 나름 의미가 있는 설명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헤브론에 올라간다. 두 아내와 자기와 함께 했던 600여명의 추종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을 다 데리고 올라가 헤브론 각 성읍에 살게 한다.
삼하 2:4,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았더라” 다윗은 유다 지파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는다. 그의 두번째 기름부음이다. 왕이 되어 그가 했던 첫번째 일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이었다. 삼하 2:4,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을 장사한 사람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니이다 하매”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왕이 아니었다. 그들은 사울에게 속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사울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암몬 사람들이 길르앗 야베스를 침략하려 했을 때 사울이 전쟁을 이끌며 그들을 구해주었다. 사울이 길보아 산에서 죽었을 때 누구보다도 슬퍼했던 사람들이 바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블레셋이 사울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 못 박았다는 사실을 알고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시체를 가져와 장사하고 칠 일 동안 애도하며 금식했다.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이 사실을 말해준 것이다.
삼하 2:5-7절의 NLT번역이다. he sent them this message: “May the LORD bless you for being so loyal to your master Saul and giving him a decent burial. May the LORD be loyal to you in return and reward you with his unfailing love! And I, too, will reward you for what you have done. Now that Saul is dead, I ask you to be my strong and loyal subjects like the people of Judah, who have anointed me as their new king.”
loyal이란 단어가 세 번 쓰였다. ‘충성스러운’이란 뜻이다. 다윗은 사울에 대한 그들의 충성을 칭찬했다. 하나님께서 충성된 그들을 충실하고 변함없는 사랑으로 갚아주시기를 축복했다. 그리고 한가지 더 그는 길르앗 사람들에게 유다사람들처럼 ‘자신의 강하고 충성된 국민 (my strong and loyal subjects)’이 되어주길 요청했다. 하나님 나라는 충성된 사람들을 통해 세워지고 확장됨을 다윗은 알았던 것 같다.
삼하 2:8-9, “사울의 군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이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더라” 사울의 군사령관이었던 아브넬은 사울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고 다윗과 대결하게 된다. 다윗은 지역은 작지만 헤브론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초에 확고한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반면 아브넬은 옛 영광을 빼앗길까봐 힘을 규합하며 다윗보다 훨씬 더 많은 많은 지역을 확보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초하지 않았기에 아브넬은 보이는 힘을 추구하며 거기서 안전감을 얻으려 했던 것이다.
삼하 2:12-13, “넬의 아들 아브넬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신복들은 마하나임에서 나와 기브온에 이르고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다윗의 신복들도 나와 기브온 못 가에서 그들을 만나 함께 앉으니 이는 못 이쪽이요 그는 못 저쪽이라”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의 부대와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의 부대가 기브온 못가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 아브넬은 요압에게 먼저 싸움을 제안한다. 이스보셋 편의 12명과 다윗의 신복 중에 12명이 대표로 싸웠다. 결과는 다윗의 신복들의 승리였다. 어디서 차이가 났을까? 나는 그것이 충성의 차이라고 보고 싶다. 다윗의 신복들은 광야에서 다윗과 함께 고생하며 충성된 관계로 맺어졌던 것이다. 충성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을 던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싸움에서 요압의 동생 아사헬이 아브넬을 뒤쫓다가 그에 의해 살해된다. 그리고 이후 아브넬은 요압에 의해 살해된다.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을 슬퍼하며 애가를 지어부른다. 자신과 적의 관계였지만 다윗은 음식먹기를 거부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삼하 3:36-37,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아니라”
다윗은 적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충성되었기에 자신의 유익을 위해 행동하지 않았다. 그의 기준은 하나님이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큰 지도자였던 아브넬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자기 사람이지만 칼로 악을 행한 요압을 오히려 저주한다.
아브넬의 죽음 이후 권력의 공백을 틈타 쿠데타가 벌어진다. 이스보셋왕의 군지휘관 두 명이 이스보셋을 살해한 것이다. 그들은 그의 머리를 다윗에게 가져온다. 다윗이 좋아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의 판단기준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다. 다윗은 무죄한 자를 피를 흘린 그들을 헤브론 못가에서 처형한다.
이스라엘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도 죽었고 왕인 이스보셋도 죽었다. 북쪽 지파의 장로들은 더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들은 결국 다윗을 찾아와 그를 온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붓는다.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이 된지 7년 6개월 만에 이제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그가 처음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그 기름부음은 사울을 대신하는 왕이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비전은 유다 족속의 왕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스라엘 전체를 마음속에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유다지파 외 다른 이스라엘 지파를 적으로 여기지 않았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장로들은 다윗의 중심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한다.
삼하 5:1-2,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전에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하신 분은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그들은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הִנְנ֛וּ עַצְמְךָ֥וּֽ בְשָׂרְךָ֖ אֲנָֽחְנוּ׃)”라고 고백한다. ‘에쩸’은 뼈, ‘바살’은 살이다. 우리가 한 피로 맺여진 형제라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게 하실 것을 알고 있었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에게 심어놓으신 언약과 비전을 충성스럽게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비전에 따라 상황을 판단했고 행동으로 옮겼다. 처음 기름부음을 받고 이제 37세가 된 다윗은 20년이 넘는 시간을 이 비전을 따라 살았고 마침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된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인도하신 헤브론에서 하나님의 비전에 충성되었기에 그는 결국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는 축복을 받게 되었다. 그는 자기를 대적하는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지 않았고 결국은 다시 하나로 결속된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점점더 파편화되고 개인화되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유익이 기준이기에 공동체 안에서도 헌신되고 오래된 충성된 관계를 찾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성된 사람들을 통해 이 땅에 세워진다. 많은 현대인들이 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모르기에 힘을 규합하고 자기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통해 안전감을 누리려 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자신에게 해를 끼친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다른 사람들을 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지금 여러분이 있는 곳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헤브론이 되길 바란다. 하나님은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서로가 연결되는 중심에 우리가 있기를 원하신다. 그렇기에 나를 힘들게하는 사람이 나타나도 우리의 기준은 보다 높은 곳에 있길 바란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은 뼈와 살이 만나는 인간관계를 통해 이 땅에서 확장된다. 그리고 장차 우리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쉬운 관계, 유익이 되는 만남만을 추구하려는 이 세대에도 변함없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사람들과 그 가치에 충성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두 가지 싸움
전승문 목사 / 사무엘하 2:8~11
신앙생활은 참 귀하고 복된 일입니다. 우리 인생에 이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이 쉬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때로는 너무너무 힘들고 어려운 것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이 왜 그렇게 힘드냐면 마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마귀 때문에 힘든 겁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영적전쟁이라고 하는 겁니다. 영적인 존재인 마귀와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적전쟁에는 두 가지 싸움이 있습니다.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싸움과 절대로 이겨서는 안 되는 싸움입니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싸움과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싸움이 있는 겁니다. 성도는 이 두 가지를 잘 구분해야 합니다.
오래 전에 철원에 있는 대한수도원에 얼마간 머물렀던 적이 있습니다. 처음 목회를 시작하기 전에 아내와 함께 기도원에서 기도하며 목회를 준비한 겁니다. 그때가 1993년 1월이었습니다. 어느 새 30년이 지났습니다. 제가 머물던 남자숙소에는 이런저런 분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저마다 사연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하는 분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나이가 한 40 정도 되었을 남자집사님입니다. 참 열심히 기도하는 분이었습니다. 성경도 많이 보고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리는 분이었습니다. 같은 숙소를 쓰다 보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분이 기도원에 들어와 있는 이유는 형님과 불화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형님이 장가를 들더니 형수에게 빠져서 집안의 재산을 다 자기 앞으로 돌려놓으려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어쩌면 좋겠냐고 물었습니다. 같이 기도하다가 제가 조심스럽게 말씀드렸습니다. “집사님! 집사님은 보니까 기도도 참 많이 하시고 성경도 열심히 보시는 분인데 하나님을 믿고 재산 그거 그냥 다 양보해 주시면 안 됩니까? 형님이 그렇게까지 가지고 싶어 한다면 다 가지라고 주시면 될 거 아닙니까? 그러는 게 주님이 보시기에 더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다 해결될 거 같은데요. 집사님이 그렇게 말씀에 순종하시면 틀림없이 하나님이 책임져주실 겁니다!” 그러자 그 집사님이 눈을 크게 뜨고는 펄쩍뛰며 말했습니다. “전도사님! 그게 얼만데, 그게 얼만데 그렇게 합니까?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양보합니까?” 그 다음부터 저는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심 그 형제가 왜 그렇게 싸우고 있는지 왜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바란다면, 하나님이 응답해주시기를 바란다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 싸움은 이겨서는 안 되는 싸움입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싸움인 겁니다. 져야 이기는 건데, 져야 끝나는 건데, 지는 사람이 없으니 끝나지 않는 거였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교인들 간에 서로를 고소하며 싸울 때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고전 6:7)” 베드로 사도 역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3:9)” 그렇습니다. 성도가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않고 도리어 축복해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야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불의를 당해주어야 차라리 속아주어야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모든 싸움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져야 하는 싸움도 있지만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싸움도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건 그걸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져야 하는 싸움인지, 이겨야 하는 싸움인지, 영적으로 분별할 줄을 알아야 하는 겁니다.
다윗은 그것을 참 잘하는 분이었습니다. 이겨야 하는 싸움과 이겨서는 안 되는 싸움을 구분할 줄 아는 분이었습니다. 다윗은 이겨야 하는 싸움은 반드시 이겼습니다. 이겨야하는 싸움에서는 진 적이 없습니다. 블레셋이 아무리 강해도, 골리앗 같이 대단한 장수가 나와도,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삼상 17:45)” 그랬습니다. 다윗은 단 한 번도 전쟁에서는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그 전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겨서는 안 되는 싸움은 절대로 이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사울과의 싸움입니다. 사울이 아무리 싸움을 걸어와도 다윗은 절대로 맞서지 않았습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도망을 칠지언정 싸우지 않은 겁니다. 사울만이 아니었습니다. 나발에게 그토록 심한 모욕을 당했어도 다윗은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아비가일이 성령의 음성으로 다윗에게 충고하자 그 말씀에 순종하고 물러선 겁니다. 이것이 다윗입니다. 이겨야 하는 싸움과 이겨서는 안 되는 싸움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해야 하는 싸움과 하면 안 되는 싸움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된 겁니다.
사울이 죽고 이스라엘이 패하자 다윗은 이스라엘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더 이상 블레셋 영토인 시글락에 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건 그래서 하나님께 물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로 돌아갈지 말지 그것을 하나님께 물은 겁니다 :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1절)”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하나님께 묻고 순종하는 삶입니다. 사실 사울이 죽었기 때문에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냥 돌아가면 되는데 그런데도 하나님께 물은 겁니다.
지난 번 블레셋에 망명을 올 때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고 자기 생각대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끔찍한 일들을 겪어야 했습니다. 아말렉 부족들을 약탈해야만 했고 또한 그들의 입을 막기 위해 다 죽여야만 했습니다. 블레셋 가드의 왕 아기스에게 조공을 바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기스를 위해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만 했던 겁니다. 그것도 다 거짓말로 했습니다.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빼앗아 온 거라고 거짓말을 해야 했던 겁니다. 그 거짓말이 탄로날까봐 아말렉 부족을 다 죽인 겁니다. 얼마나 싫었을까요? 그렇게 사는 것이 정말 얼마나 싫었을까요? 뿐만 아니라 그것이 빌미가 되어 시글락이 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다윗이 없는 동안 아말렉이 쳐들어와서 여자와 아이들을 다 잡아간 겁니다. 바로 그 이유로 인해 다윗이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겁니다. 그 결과 수많은 동족이 죽임을 당했고 사울과 요나단도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 모두가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생각대로 다윗이 이스라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윗이 그 때 이스라엘에 있었다면 전쟁의 양상은 달라졌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했더라면 지금 무리 없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참혹하게 패배할 때 그곳에 없었던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에게 쉽사리 마음을 열 수 없는 겁니다. 사실은 그래서 다윗이 왕이 되기까지 7년 6개월이나 걸린 겁니다. 그때 그 자리에 없어서 그토록 오랜 세월이 걸린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후회했을까요? 블레셋에 망명 온 것을 다윗이 얼마나 후회했겠습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마음대로 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돌아갈지 말지 하나님께 물은 겁니다. 이런 점이 다른 겁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겁니다. 그게 다윗입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헤브론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헤브론은 유다지파의 땅 중에서 제일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헤브론은 기럇 아르바라 불리던 곳입니다. 아르바라는 아낙 자손의 거인이 살던 곳입니다. 그래서 갈렙이 달라고 했던 성읍입니다. 비록 거인들이 살고 있어도 담대하게 요구했던 그 성읍입니다. 85세나 된 갈렙이 담대하게 요구했던 바로 그 성읍인 겁니다 :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수 14:10~12)” 그곳이 헤브론입니다. 일찍이 유다지파의 수장인 갈렙이 믿음으로 싸워 얻은 위대한 성읍입니다. 또한 헤브론은 제사장들의 성읍이며 도피성이었습니다.그 중요한 성읍에 유다지파의 땅 중에서 제일 중요한 지역에 다윗이 올라간 겁니다. 말씀에 순종해서 그곳으로 올라간 겁니다.
그러자 유다지파 사람들이 다윗을 자신들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았더라.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을 장사한 사람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니이다 하매 (4절)” 그랬습니다. 마침내 다윗이 왕이 된 겁니다. 그러나 아직은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아니라 유다지파만의 왕이었습니다. 아직은 다른 지파들이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블레셋과 전쟁할 때, 사울과 요나단이 죽임을 당할 때, 그곳에 다윗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다윗에게는 힘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유다지파까지 함께하니 충분히 이스라엘 전체를 힘으로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블레셋에게 패배해서 다 무너진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다윗이 힘으로 밀고 나가면 아무도 저항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힘으로 동족을 압박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건 해서는 안 되는 싸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이 허락해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대신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위로하고 끌어안았습니다. 사울을 기억하고 사울을 추모하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끌어안은 겁니다. 그게 5년이었습니다. 다윗이 5년 동안이나 기다리고 기다린 겁니다. 다른 지파사람들이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주기를 5년이나 기다린 겁니다. 하지만 다른 지파는 끝내 다 다윗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기다리며 끌어안으려고 애를 썼건만 끝내 등을 돌린 겁니다. 이스라엘은 12개의 지파로 이루어진 지파 연합국입니다. 그런데 유다지파 한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지파가 다 다윗에게 등을 돌린 겁니다. 그들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중심으로 다시 나라를 세웠습니다 : “사울의 군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이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더라 (8절~9절)” 사울의 군사령관이었던 아브넬이 이스보셋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운 겁니다. 이미 다윗의 나라가 있는데도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겁니다. 그러니 다윗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야속한 일이었을까요?
더구나 그 일에 길르앗이 가장 앞장을 섰습니다. 길르앗은 다윗이 특별히 신경 쓰던 성읍이었습니다. 사울의 시신을 되찾아온 성읍이라 다윗이 각별히 마음을 쓰며 위로하던 성읍이었던 겁니다. 그러니 다윗이 얼마나 섭섭했겠습니까? 정말이지 마음대로 하자면 전쟁이라도 벌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실제로 다윗은 마음만 먹으면 이스라엘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들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따로 나라를 세웠어도 가만히 있었습니다. 너무너무 섭섭했지만 꾹 눌러 참으며 끝까지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다윗입니다. 싸워야 하는 싸움과 싸워서는 안 되는 싸움을 구분할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보다 앞서가지 않으려고 끝까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다윗의 신하 중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윗과 달리 아주 호전적인 사람이 있었던 겁니다. 바로 요압입니다. 다윗의 장수 중 가장 유력한 장수인 요압이 그런 겁니다. 사실 요압은 다윗의 신하이면서 조카였습니다. 다윗에게는 누나가 둘 있었습니다. 스루야와 아비갈입니다. 요압은 스루야의 아들입니다. 큰누나의 아들 곧 조카인 겁니다. 요압은 동생이 둘 있었는데 모두 다윗의 신하였습니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 이렇게 3형제가 모두 다윗의 신하로 대단한 장수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나치게 호전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싸움은 정말 잘했는데, 문제는 아무 하고나 싸우고 다녔다는 겁니다. 결국 그들이 다른 지파 사람들과 문제를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섬기는 다른 지파 사람들과 싸움을 일으킨 겁니다. 이건 해서는 안 되는 싸움입니다. 이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싸움이 아닙니다. 이건 다윗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어리석은 싸움인 겁니다.
싸움의 발단은 기브온에 있는 저수지에서 시작됐습니다. 기브온에는 직경이 10미터 깊이가 20여 미터나 되는 큰 저수지가 있었습니다. 물이 귀한 이스라엘에서는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지점인 겁니다. 요압과 아브넬이 그 저수지를 두고 마주 앉았습니다. 그러다 끝내 싸움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동족끼리 서로 싸우고 죽이는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겁니다. 그 싸움으로 다윗의 군사 20명과 아브넬의 군사 360명이 죽었습니다 : “요압이 아브넬 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무리를 다 모으니 다윗의 신복 중에 열아홉 명과 아사헬이 없어졌으나 다윗의 신복들이 베냐민과 아브넬에게 속한 자들을 쳐서 삼백육십 명을 죽였더라 (30~31절)” 드러난 수치상으로는 다윗이 승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다윗의 군사는 불과 20명이 죽었는데 아브넬은 360명이나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전쟁은 불필요한 전쟁이었습니다. 아니 사실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요압의 동생 아사헬도 죽었습니다. 굳이 아브넬을 추격하다 죽임을 당한 겁니다. 결국 이 일에 앙심을 품은 요압이 얼마 후에 아브넬을 죽이고 맙니다.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지만 그 일로 인해 다윗이 이렇게 탄식합니다 :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 (3:39)” 이런 사람이 요압이었습니다. 다윗이 너무너무 힘들어한 사람입니다. 앞으로 차근차근 살펴보겠지만 정말 다윗을 힘들게 한 사람입니다. 열심은 있는데, 그래서 공로도 있는데, 그러나 실상은 다윗을 가장 힘들게 한 사람인 겁니다. 왜냐면 요압은 해야 하는 싸움과 해서는 안 되는 싸움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저 무조건 다 이겨야하는 사람 그가 바로 요압이었던 겁니다.
신앙생활은 영적전쟁입니다. 사탄 마귀와 영적으로 끊임없이 싸워야하는 영적전쟁입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두 가지 싸움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해야 하는 싸움과 해서는 안 되는 싸움입니다. 이겨야 하는 싸움과 이겨서는 안 되는 싸움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잘 구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된 겁니다. 그러나 요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싸움만 일어나면 무조건 덤벼들어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이었습니다. 없는 싸움도 만들어서 싸우는 사람이 요압인 겁니다. 안 됩니다. 성도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물론 성도는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도는 언제나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잘 구분하십시오. 강하고 담대해야 할 때와 온유하고 겸손해야 할 때를 구분하십시오. 그래서 이겨야 하는 싸움과 이겨서는 안 되는 싸움을 분별하며 사십시오. 그래서 여러분도 다윗처럼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