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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27일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제1독서 : 2열왕 22,8-13; 23,1-3
복 음 : 마태 7,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16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19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20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월요일은 사제관에서 식사를 준비해주시는 식복사 자매님께서 쉬는 날입니다.
그래서 이날에는 알아서 식사를 해야 합니다. 월요일 저녁, 식사를 위해서 냉장고 문을 열었습니다.
우선 무엇이 있는지를 봐야 하니까요. 그런데 정면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이 계란이었습니다.
이 계란으로 요리를 해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2개 꺼냈습니다. 저는 과연 어떤 요리를 했을까요?
계란으로 할 수 있는 요리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간단하게 계란 프라이도 할 수 있고, 오믈렛을 할 수도 있습니다.
계란말이도 가능하고, 계란찜도 할 수 있습니다. 계란 하나가지고도 선택의 폭이 넓다는 것입니다.
물론 갈등을 하다가 제일 간단한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냉면을 만들고 그 위에 삶은 계란을 얹혀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계란 하나로도 다양한 요리를 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서, 내 자신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 역시 다양한 임무를 수행할 수가 있습니다.
학생은 무조건 공부만 해야 할까요? 직장인은 직장 안에서의 일만 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어떤 것이든 다양한 것들을 할 수 있도록 태어난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작가 김훈 선생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기자를 보면 기자답고, 형사를 보면 형사 같고, 검사를 보면 검사 같은 자들은 노동 때문에 망가진 것이다.
뭘 해먹고 사는지 감이 안 와야 그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다.”
맞습니다. 온전한 인간이란 다양한 것들을 행할 수 있기에 뭘 해먹고 사는지 감이 안 와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다양한 것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것을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할 수도 있고 반대로 나쁜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일을 할 수 있고, 희생과 봉사의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다양한 것을 해야 한다면 내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참된 기쁨과 행복의 길로 이끌 수 있는 것들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기에 결국 잘려서 불에 던져질 수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이 당연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 역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즉,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악은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선택의 순간에서 나쁜 열매를 맺는 길로 가도록 계속해서 유혹합니다.
세상의 편하고 쉬운 길을 보여주면서 이를 차지하기 위한 욕심을 갖도록 만듭니다.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죄로 나아가는 것을 별 것 아닌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남을 판단하고 단죄해도 되는 것처럼 유혹하면서 주님이 사랑을 따르지 못하게 합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과연 지금의 선택이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인지, 나쁜 열매를 맺는 것인지를 따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가 될 수 있습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스마트 폰을 새롭게 바꾸었습니다.
보통은 새롭게 바꾸면서 지난번 스마트 폰의 정보를 옮기곤 했습니다.
이번에는 정보를 옮길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가장 아쉬운 점은 전화번호 목록과 일정표였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유심칩이 있어서 전화번호 목록은 옮길 수 있었습니다.
일정표도 구글과 연동이 되어서 옮길 수 있었습니다.
제게 중요한 것들을 복구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문득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걸어온 길을 하느님께서는 모두 알고 계시겠구나! 하느님께서는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고백성사를 통해서 용서를 청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잘못을 깨끗하게 지워주십니다.
우리의 선행과 희생은 하나도 빠짐없이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요즘 ‘세 종교 이야기’ 이야기를 읽고 있습니다.
같은 하느님을 모시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이야기입니다.
종교라는 울타리를 넘어섰을 때는 인류와 역사에 많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종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을 때는 다른 문명과 다른 종교를 박해하기도 했고, 심판하기도 했습니다.
종교는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표징과 같습니다.
나무는 가지치기를 해 주어야지만 잘 자랄 수 있다고 합니다.
가지치기하지 않으면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햇빛을 잘 받지 못하기 때문에 나이테도 선명하지 않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행동과 생각도 가지치기를 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분심, 욕심, 질투, 시기, 교만’을 가지치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 희망, 사랑’의 줄기가 잘 자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가지치기하는 것은 나무에는 큰 고통입니다. 생가지를 잘라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꼭 필요하기에 가지치기하는 것입니다.
‘분심, 욕심, 질투, 시기, 교만’의 가지를 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내 마음 안에 이미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서는 꼭 그런 가지들을 쳐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무와 열매’를 말씀하십니다.
좋은 나무에서는 좋은 열매가 열리고, 나쁜 나무에서는 나쁜 열매가 열린다고 하십니다.
좋았던 나무도 거름을 주지 않고, 관리를 소홀히 하면 나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나빴던 나무도 정성을 다하고, 거름도 주고, 잡초를 뽑아주면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밀과 가라지’는 밀은 계속 밀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라지는 늘 가라지가 아닙니다.
밀처럼 자란 사람이 가라지와 같이 변할 수도 있고, 가라지같이 자란 사람이 밀처럼 변할 수도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가라지와 같았습니다. 나쁜 나무와 같았습니다. 박해가 있었습니다. 순교가 있었습니다.
배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밀처럼 성장하였고, 좋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외형적으로 보면 분명 커다란 성장을 하였습니다.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른 가톨릭 국가에서도 부러워할 정도로 뜨거운 열정과 발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784년도에 시작된 한국 가톨릭교회는 100여 년의 박해가 있었고, 시련과 고통을 받았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주어진 이후에 서서히 발전한 한국교회는 1970년도에 100만 명 신자가 되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한국을 방문하신 1980년도에는 200만 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요란하지 않지만, 가톨릭 신자들은 충실하게 복음을 전하였고, 90년도에는 300만 명 신자가 되었습니다.
2000년도에는 400만 드디어 500만 명의 신자로 증가하였습니다.
성당의 숫자, 사제, 수도자의 수도 많이 증가하였습니다.
그러나 내면을 바라보면 한국가톨릭 교회는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냉담자의 증가입니다.
1970년도에만 해도 주일미사 참례는 전 신자의 70%가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가 되었습니다.
주일미사 참례는 전 신자의 19%가 하고 있습니다.
30%는 성당에 나오다가, 쉬다가 하고 있으며, 30%는 세례는 받았지만, 성당에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냉담자의 증가는 물고기를 그물에 넣었지만, 그물이 터져서 도로 나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물을 고치지 않는 한 냉담자는 계속 증가할 것입니다.
둘째는 신자들이 왜 성당에 다니는지, 왜 신앙생활을 하는지 잘 모른다는 점입니다.
가톨릭 신자, 개신교 신자, 불교 신자에게 질문하였다고 합니다.
‘왜 신앙생활을 합니까?’
가톨릭교회 신자들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응답을 많이 하였다고 합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라고 응답을 많이 하였다고 합니다.
불교 신자들은 어떻게 응답을 했는지 모르지만,
불교와 가톨릭교회는 신앙의 체계가 매우 달라서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가톨릭교회의 신자들은 신앙을 가지면서 구원에 대한 확신이 별로 없다는 뜻입니다.
신앙을 그저 지금 이곳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는 정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곳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으면 쉽게 신앙을 잊어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지속적인 교육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6개월 정도 간단하게 교리를 들으면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 후에는 구역이나 반에서 관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새 영세자들은 스스로 알아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대부모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그나마 도움이 되지만
때로는 대부모님과 껄끄러운 관계 때문에 신앙생활을 멀리하는 일도 있습니다.
단체 활동이라도 하나 하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곧 냉담자의 대열에 합류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았으면 이제 예수님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가 물을 마시면 시원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그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것 역시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알면,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이제 그분의 삶을 증거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물을 마시면 시원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물을 마시지 않으면 나의 갈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구원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분의 가르침과 삶을 증거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의 기쁨을 느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재복음화 되고, 주님을 제대로 알고, 믿고, 그분의 삶을 증거하고 실천한다면
한국 가톨릭교회는 외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견실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복음화를 통해서 우리는 내 신앙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는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무의 열매를 통해
나무를 알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란
결코 자신의 욕심으로
자신의 열매를
소유하지 않습니다.
좋은 나무는 끝내
소중한 꽃까지
소중한 열매까지
기쁘게 내려놓습니다.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드립니다.
좋은 나무는
이와 같이
맺어야 할 때와
내려놓아야 할 때를
제대로 압니다.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분명 하느님이십니다.
좋은 열매에게선
복음의
참된 맛이 느껴집니다.
참된 맛이란
믿음의 향기로운 맛입니다.
좋은 나무처럼
하느님의 뜻에
맞서지 않고
순명하길 기도드립니다.
좋은 나무처럼
자신의 소임에
충실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나무의 열매는
사랑이며 봉사입니다.
우리 모두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말씀의 열매를
주렁주렁 많이
맺으시길 기도드립니다.
좋은 나무의 시간은
기도의 시간이며
마음의 진실된 시간을
살아갑니다.
너무도 많은
아픈 나무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좋은 나무는
한결같이
믿음의 열매를 맺습니다.
예언의 영이 있고 없고의 차이
전삼용 요셉 신부
현재 러시아에서 월드컵이 한창인데 우리나라는 예년과 비교해 약한 전력 때문에
좋은 성적은 내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죽기 살기로 뛰는 선수들의 모습은 안타깝기까지 합니다.
그러면서 이전에 이영표 선수가 했던 말들이 생각납니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나라 선수 중 가장 뛰어난 윙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그렇게 축구를 잘 했던 것은 아닙니다. 피나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작은 키와 왜소한 체구 때문에 남들보다 두 배는 더 노력을 해야만 했습니다.
어렸을 땐 몸싸움에 져서 볼을 빼앗기는 것을 막기 위해 매일 밤늦게까지 드리블 연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이 볼을 잡았을 때 남에게 빼앗기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조금 더 커서는 체격 때문에 몸싸움에서 져서 리바운드 볼을 거의 따낼 수 없는 것을 알고는
매일 저녁 줄넘기 두 번 뛰기를 천 번씩 하고 잤습니다.
그랬더니 몇 년 뒤 그라운드에 떨어지는 모든 볼은 자신의 것이 되었다고 합니다.
대학에 가니 체력이 떨어져서 후반에는 힘에 붙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운동시간을 늘릴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매일 산을 뛰었습니다.
그 이후로 국가대표가 되고 자신의 자리를 남에게 내어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아’는 ‘그만하면 됐어. 지금도 잘 하고 있잖아.’라는 말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자아는 힘들어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의 영’이 들어오면 ‘이번엔 이렇게 바꿔보자.’라고 변화를 촉구합니다.
예언의 영은 그래서 자신을 참으로 괴롭힙니다.
하지만 이 예언의 영이 없으면 한 사람이건, 한 단체건, 본당이건, 교회건, 나라건 발전이 없습니다.
죽은 것만 자라지 않습니다. 살아있다면 끊임없이 변하고 자라야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처럼 완전해지라고 하셨는데 이 세상에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변해야하는 것이 맞습니다.
교회도 오랜 기간 이 예언의 영을 잊고 살았습니다.
각 나라말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을 허락하지도 않았고 미사는 오직 라틴어로만 드려야한다고 믿었습니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맺지 못하는 전례가 수백 년간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 예언의 영이 발동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렸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시대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자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것들이 바뀌었고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숫자로 성직자와 신자수가 증가했습니다.
처음엔 왜 잘 살고 있는데 공의회를 하느냐는 불만이 많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공의회를 하느냐는 질문에 요한 23세 교황도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변화할 필요만을 느꼈고 의견을 모은 결과 변할 것이 너무도 많았는데 잊고 살았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요시야 왕은 성전에서 발견된 성경 두루마리를 읽게 됩니다.
요시야 왕은 참으로 나라를 잘 다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두루마리를 읽고는 옷을 찢었습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기는 산당을 다 부수었습니다.
이것이 예언의 영입니다. 예언의 영은 제 자리에 안주하는 모습을 그대로 두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그들 안에는 ‘게걸든 이리’가 들어있습니다. 겉은 양처럼 순하지만 실제로는 이리들입니다.
이리는 양을 먹습니다. 이것이 거짓 예언자가 맺는 열매입니다.
겉은 그만하면 됐다는 온화한 마음으로 다가오지만 실제로는 변화를 통한 괴로움을 겪고 싶지 않고
그냥 지금의 상태를 이용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마음만 있습니다.
자신이 배불러지고 다른 이들이 배고파지면 그 사람은 거짓 예언을 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예언자들을 알아보는 방법은 그들이 맺는 열매를 통해서라고 합니다.
예언의 열매는 하느님과 같아지는 변화입니다.
자신의 옷을 찢고 앞으로 정진하게 만드는 힘이 예언의 영입니다.
교회도 변화해야하고 단체도, 우리 자신도 그 영을 입는다면 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제 어떤 사람이 게임을 너무 많이 하는데 그것을 끊기 위해 컴퓨터를 다른 사람을 줘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 안에 예언의 영이 있는 것입니다.
이 영이 활동하지 않으면 현재를 살아갈 힘을 잃게 됩니다.
하지만 이 영이 발동하면 하루를 ‘살아서’ 살게 합니다.
“너희는 거짓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마태 7, 15)
공동체의 분란을 일으키는 이들 중에는 항상 거짓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경계하십니다.
사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느님 백성들이 세상의 유혹에 빠져 하느님을 배반했을 때,
그들의 잘못을 질책하고 하느님을 의식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회개하여 하느님 앞에 바로 서도록 자극해 왔습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예보나 윤리 생활에 대한 교훈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렸고,
진리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니, 예언자란 단순히 미래를 예측하는 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받아 전하는 이요, 하느님의 뜻을 알리는 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받은 말씀과 진리를 전하는지, 자신의 말을 전하는지,
그리고 그 열매가 어디로서 오는지를 보면, 그가 참 예언자인지 거짓 예언자인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양’과 ‘이리’의 표상으로 대비시키십니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양 떼로 묘사되었고, 공동체에 피해를 주는 이들은 이리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니 겉의 옷차림을 보지 말고, 속마음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나무로, 그리고 거짓 예언자를 알아보는 기준을
행실로 맺는 열매의 은유를 통해 설명하십니다. 곧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 15)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마태 7, 17)
그러니 그들의 말이나 표정이 아니라, 그들의 말이 맺는 열매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거짓 예언자는 거짓에 뿌리를 박고 있어 헛열매를 맺고,
참 예언자는 참에 뿌리를 박고 있어 참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것은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일 수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두어들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혹 우리의 삶이 열매를 맺기보다, 풍성한 잎이나 아름다운 꽃으로 치장되고만 있지는 않은지,
혹은 헛열매를 맺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사실, 열매는 자신을 버릴 때 맺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버림은 자신의 열매를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열매로 여길 때 가능해집니다.
곧 열매마저도 버릴 때라야, 자신이 비워지게 됩니다. 그러니 타인의 평가마저 비워야, 진정 비워지게 됩니다.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버릴 때라야,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것은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참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이기에 맺을 수 있는 좋은 열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열매를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자신이 따 먹으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실은 바로 그래서 때문에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데도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삶이 당신 진리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때깔만 그럴싸한 열매가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으로 속이 꽉 찬, 좋은 열매 되게 하소서!
첫댓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처음 한국을 방문한 해는 1980년이 아니고 1984년입니다.
이 해가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 기념 신앙대회가 있었지요.
이승훈 베드로님이 1784년에 북경에서 세례를 받으신지 200년이 되는 해랍니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