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같은 겨울비
동지를 일주 앞둔 십이월 중순이다. 이번 주는 엊그제 수요일만 빼고 월화에 이어 목금까지 4일이나 비가 온다. 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에 강수량이 제법 되는 비가 내리니 봄날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오늘 저녁 비가 그치면 주말부터 북극발 시베리아 한파가 엄습해 동장군이 위세를 떨칠 거란다. 넉넉하게 내린 겨울비로 한동안 가뭄이나 산불은 걱정하지 않을 듯하다.
새벽녘 잠을 깨 음용할 약차를 끓이며 냉장고에 넣어둔 데친 시래기를 녹여 껍질을 벗겨 부드럽게 해 놓았다. 시골에서 보내져 온 마늘이나 야산에서 주워 온 밤톨을 까는 일은 언제나 내 몫이다. 무청을 삶은 시래기도 마찬가지다. 스무날 전 교직에서 은퇴 후 귀촌해 농사를 짓는 대학 동기가 무와 함께 보내온 무청 시래기를 말려 삶아 양이 많아 일부는 냉장고 보관해 두었더랬다.
내가 텃밭 농사를 짓지 않음에도 가을이면 친환경 채소들을 밥상 위에 올리고 있다. 퇴직 후 귀촌해 전업 농부가 되다시피 한 대학 동기가 손수 농사지은 고구마와 무청을 보내왔던 그 무렵 고향에서도 형님이 지은 농산물도 닿았더랬다. 그와 함께 올겨울 들어 여태 날씨가 영하권으로 얼어붙지 않아 남강 하류 거름강 둔치에서 냉이를 두 차례나 캐와 찬거리로 삼아 잘 먹는 중이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강수가 예보된 금요일 아침 식후 행선지는 교육단지 도서관으로 정해졌다. 도서관에서 업무가 시작되는 시각과 같이 동사무소 주민자치센터도 문을 열었다. 보름 전 베트남 여행 중 나는 휴대폰이 헤킹 당해 난감하고 곤혹스러웠는데 겨우 수습해서 이제 안정되어 간다. 신용카드를 갱신하려니 주민등록증을 재발급해야 한다고 해서 절차를 밟아 신청해 놓았다.
어제 주민자치센터 담당자로부터 재발급된 주민등록증을 수령해 가십사는 전화가 와 업무가 시작될 시각에 맞춰 새것을 찾으러 갔다. 오른손 엄지 지문 인식으로 주민등록증을 찾아 원이대로를 건너 폴리텍대학 캠퍼스를 거쳐 교육단지 보도를 걸으니 벚나무 가로수는 나목인 체 겨울비를 맞았다. 동지를 일주 앞두었고 소한 대한 절기가 남아 삼동 추위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창원도서관 별관 책담 2층 내 지정석이 되다시피 한 창가 열람석을 차지했다. 대출 도서로 집으로 가져갔던 비키스 샤의 ‘생각을 바꾸는 생각들’을 마저 읽고 정도상이 쓴 ‘정치의 품격’을 펼쳤다. ‘세종에게 길을 문다’로 부제를 붙인 그 책은 성군 세종 왕업에 대해 풀어 쓴 이야기였다. 아침나절엔 어제 집으로 대출받아 가 못다 읽고 도서관으로 되가져 간 책은 독파하고 반납했다.
점심때 휴게실로 건너가 집에서 가져간 삶은 고구마와 자판기 커피를 내려 한 끼 때웠다. 도서관 바깥은 흐린 하늘 성근 빗방울 들었다. 다시 열람실로 돌아와 환경과 관련된 책을 몇 권 골라냈다. 20년 가까이 라디오 방송 피디를 했던 노광준이 쓴 ‘오늘의 기후 렌즈를 끼고 바라본 지구촌 풍경’ 책장을 넘겼다. 꿀벌 실종사건을 비롯해 탈원전과 학교 급식의 채식이 눈길을 끌었다.
황경택이 쓰고 사진을 찍어 엮은 ‘숲의 인문학을 위한 나무 문답’에서는 부제가 ‘우리가 몰랐던 나무 이야기 100가지’였으나 나에게는 난도가 낮아 복습으로 받아들였다. 경북대에서 교수를 지낸 박상진의 ‘우리 나무 이름 사전’도 나에게는 쉽게 와 닿았다. 대출 불가 장서였던 녹색연합에서 지은 ‘모두를 살리는 농사를 생각하다’는 기후 위기 시대 17인 농민의 절박한 목소리였다.
도서관을 나서 곧장 귀가하지 못하고 우산을 받쳐 쓴 채 충혼탑 교차로로 나가 댓거리로 가는 버스를 탔다. 보름 전 베트남 여행을 다녀온 초등 친구들과 약속된 저녁 자리로 나갔다. 달랏과 나트랑에서 짧은 일정을 보내고 온 얼굴들을 다시 만나니 반가웠다. 여정을 함께 했던 친구들과 쇠고기를 구워 먹으며 후일담을 나누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니 어둠 속에 겨울비는 여전히 내렸다. 23.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