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다니던 교인들과 몇번 다녀왔고 개인적으로도 이곳을 지날때는 들어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옛 믿음의 선조들의 실천의 신앙을 본받기 위해 자주 찾았던 곳을 몇일전 가까운 지인들과 다시 찾았다
이곳에 조덕삼이라는 부자가 살고있었다 그는 논 농사도 많았고 과수원도 하며 마차도 많이 운영하였다
이때 경상남도 남해 섬에서 살던 열일곱살 소년이 찾아왔다 그는 여섯살때 부모를 잃고 고아로 지내다 배부르게 먹는것이 소원이 되어 전라도에 가면 농사를 많이 짓기에 배부르게 먹는다는 말을 듣고 남윈을 지나 전주를 거쳐 금산에 이르러서 제일 부자집인 조덕심씨 대문을 두드려 밥만 먹여주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해서 소년은 조 덕삼씨 집에서 마부로 일하게 되었다 이 소년이 장차 장로교에서 전무 후무하게 총회장을 3번이나 지낸 이 자익 목사다
이곳을 지나던 선교사의 전도를 받은 조덕삼씨는 자기집 사랑채에서 예배를 시작하였고 그 동네 사람들과 몇 십리 밖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 멀리서 오는 사람들은 새벽에 집을 나와서 몌배하고 조덕삼씨 집에서 밥도 얻어먹고 때로는 그 집에서 잠도 자고 집에 돌아갈 때는 주먹밥도 싸가고 삶은 감자도 가지고 가다 먹고 하였다. 교인들이 많아지니 조덕삼씨와 이 자익은 영수가 되어 교회를 섬겼고 얼마 후에는 장로 투표가 있었는데 조덕삼씨는 떨어지고 이자익씨가 장로에 당선된것이다 당시 선교사는 조덕삼씨가 당선되기를 바랐는데 이렇게 되었으니 걱정이 컸다 그때 조덕삼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 여러분 장로 참 잘 뽑으셨습니다 이자익씨는 나보다 신앙이 더 깊으며 훌륭합니다 우리 이자익 장로를 따라 교회를 잘 섬깁시다" 라고 했다 당시 서울에 연동교회와 승동교회에서는 갖바치와 백정이 장로가 되자 양반들 교인들이 받아드릴수 없다고 교회를 나가 자기들끼리 새로운 교회를 만들었는데 금산교회 양반 지주 조자익은 자신의 머슴 이자익을 장로로 섬겼다 주일과 수요일에 이자익 장로는 강단에서 설교를 하였고 아래에서 조덕삼씨는 설교를 듣고 낮에는 조덕삼씨가 시키는 일을 이자익 장로는 했다 교회는 더욱 부흥하여 교회를 짓기로 했다 조덕삼씨가 과수원 땅을 내놓아 그 자리에 교회를 짓는데 ㄱ자로 지었다 남여가 유별한 유교 사회에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함이었다
조덕삼씨는 이자익 장로를 평양에 있는 신학교에 보내어 목사가 되게 하였다 학비와 숙박 식비 모두 조덕삼씨가 충당했다 뒤에 조덕삼씨도 장로가 되었다 이자익씨는 목사가 된후에 다시 금산교회로 돌아와 목회를 하였다
조덕삼 장로는 독립운동에도 많은 힘을 썼고 그 아들도 독립운동으로 만주에 가 있는 사이 조덕삼 장로는 세상을 뜨면서 "내가 죽거든 울지마라 제사도 지네지 마라 " 말을 하고서 숨을 거두었지만 가장 슬프게 운 사람은 이 자익 목사였으며 교인들 또한 몹시 슬퍼하였다 한다
몇년전 이자익 목사가 세운 대전 신학교에서 기념회가 열렸다 이자익 목사의 손자 되는 분이 단에 서서 인사 말을 하기전에 내빈석에 앉아있는 조덕삼 장로의 손자 조세형 전의원(주일대사, 민주당대표권한대행)을 향하여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것 그리고 우리 할아버지가 있었던 것은 오직 조덕삼 장로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금산교회는 전라북도 문화제로 등록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연간4,000여명의 탐방객이 다녀간다한다 조덕삼 장로의 아들이 금산교회에 장로로 섬겼고 손자 조세형 장로가 금산교회를 섬기다 몇 년전 소천을 했다
첫댓글 이런 감명깊은 신앙스토리가 있었군요~
전주 바로 옆에 있습니다
지금도 ㄱ자 교회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2개 밖에 안 남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