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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트 트릭 1
- Mysterious Girl -
눈이 내리던 그 날이었다.
높이 솟아 오른 어느 건물 안으로 한 남자가 들어간다. 등에 기타 케이스를 매고 있는 그 남자는 그 고층 건물이 낯선 곳이 아닌지 술술 자기가 가야할 곳으로 가고 있다. 남자는 무표정으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정말이지. 언제라도 다시 있고 싶지 않은 곳이야."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그는 서둘러 발걸음을 뗐다. 그가 도착한 곳. 문에는 대표실이라 쓰여 있었다. 문을 박차듯이 열고나니, 그 곳에는 검은 의자에 앉아 그를 맹렬하게 바라보는 눈빛을 가진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얼핏 보면 두 사람은 서로 닮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왔느냐?? 거기 앉아라."
남자와 마찬가지로 중년의 남자는 그를 보고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둘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음을 이 상황을 보는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가출을 하든, 출가를 하든 어쨌든 내 자식이지만 오랜만에 들리는 소식이 이거일 줄이야."
"......."
"보아하니 넌 아무 사고도 안 쳤는데, 왜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냐고 말하고 싶은가 보구나.
"....... 역시 제 아버지라 잘 알고 계시는군요."
“시끄럽다. 아무튼 내가 왜 네 소식을 다른 사람이 아닌 자취집 주인에게 먼저 들어야 하지??? 반 년 전에 자취방 뺐다면서????”
두리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당신이 이제 와서 그런 얘기를 해봤자 어떻게 하겠냐는 표정이었다. 준구는 그런 두리의 표정이 당황스럽고 어처구니없었다. 며칠 뒤에 학교 입학해야 하는 녀석이 벌써부터 자신의 마음에 안 드는 짓을 하고 있다.
“또 장재억의 집에서 쭉 눌러앉을 생각이냐???”
“고려는 해보고 있어요. 거기가 제일 편하긴 편하거든요. 우리 집보다 더.”
“세미한테 쪽팔리지도 않냐?? 나이 다 먹고 아버지랑 싸우는 네가???”
“원인 제공자는 늘 아버지였다는 걸 생각하셔야죠. 이곳을 출근하듯 들리던 기억이 아직도 악몽처럼 남아있어요.
여기서 보낸 헛된 시간들을 베이스 연습하는데 보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두리의 말에 준구는 어이없어 했다. 그리고 참으로 자신을 따르려고 하지 않는 이 녀석이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때,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대놓고 큰 소리로 대표실 안에 전화벨 소리가 울려 퍼진다. 정체 모를 밴드의 음악이 울려 퍼진다. 그 음악의 주인공인 휴대폰을 두리가 꺼내들어 전화를 받는다.
“응, 나야.”
<얘기 들었냐??? 나인이 블러디 화이트데이에 가입했대.>
“그래....... 결국 라, 나, 인이 거기로 갔구나. 좋은 정보 감사.”
준구의 앞에서 대놓고 다른 사람과 전화를 한 두리. 당연히 준구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아마도 라나인이라는 이름을 들어서 더 그런 것일 지도 모른다. 두리는 일부러 라나인이란 이름을 더 강조해서 말했다. 그런 그의 표정을 알고도 두리는 일부러 준구를 더 괴롭히듯 그에게 말한다.
“뭐, 일단은 집으로 돌아가죠. 그 아줌마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세미가 저를 보고 욕하는 건 참을 수가 없을 거 같아서요.”
“확실하게 불러라. 아줌마가 아니라 네 엄마다.”
“누나가 인정해도 저는 인정 못 해요. 더 할 말 없으면 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두리는 대표실을 나갔다. 준구는 두리가 나간 문을 그저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늘 봐도 변함이 없을 정도로 마음에 안 드는 모습이었다. 준구는 여전히 그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리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조용한 공동묘지. 그 중 한 묘 앞에 두리가 발걸음을 멈췄다. 두리가 천천히 그 앞에 앉는다. 굳게 닫고 있던 입을 천천히 열기 시작한다. 묘비에는 ‘노나나’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여긴 많이 춥다.......”
그의 입술이 떨고 있었다. 냉정한 아버지 앞에서도 전혀 떨지 않던 그의 몸이 떨고 있었다. 노나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기에 그가 이리도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일까??
“거기도 꽤 춥겠지?? 그래도 다행이야. 넌 추운 건 참아도 더운 건 잘 못 참잖아. 그래서 내가 너한테 핫팬츠 입지 말라고 말 하지도 못 했었지. 이제는 그런 말 하고 싶어도 못 하네.
지연이 누나는 여전히 만국이 형이랑 잘 지내고 있어. 무영이 그 놈은 늘 변한 게 없지. 유화는.......
아, 미안. 걔는 모르겠구나. 네가 떠나고 나서 밴드에 들어온 녀석이니까.......”
두리는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올라오는 벅찬 감정들을 겨우 억누르며 구름 위로 자신의 말을 듣고 있을 그 사람에게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었다. 몇 분 동안 이야기를 마치고 힘겹게 일어서는 두리. 돌아가는 길에 그는 어떤 두 명의 여자를 보았다.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들이었다. 자매인지 묘하게 분위기가 비슷했다. 그 중에 한 여자는 유독 머리카락 색깔이 붉었다. 저렇게 튀는 머리를 하고 이런 곳에 온 것이 두리는 신기했다. 그는 문득 1주일 전 일이 생각났다.
두리는 편의점에 들어가 늘 그랬듯이 컵라면을 하나 꺼내들었다. 편의점 주인은 오늘도 컵라면을 꺼내 먹는 두리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편의점 앞에는 얼마 전까지 그가 머무르던 자취방이 있었다. 자취방을 떠날 때, 주인은 두리에게 의문을 품었다. 그가 갑자기 자취방을 나갈 이유가 없었다. 그가 남들에게 민폐를 끼친 것도 아니고, 자신에게도 깍듯이 잘 해줬으니까. 두리는 그저 아무 말 없이 그런 일이 있다며 너무 많은 것을 알지는 않았으면 한다고 주인에게 말했다.
“역시 올 줄 알았어.”
한참 생각을 하며 라면을 먹고 있는 두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 젊은 여자. 편의점 주인조차 그녀에 대해 눈길이 갈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그녀의 외모는 눈이 부셨다. 화려한 금발에 누가 봐도 주목할 수밖에 없는 뚜렷한 이목구비. 그러나 두리는 남자가 아닌 것인지,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라면만 후루룩 입에 넣고 있었다.
“오빠는 컵라면이 주식이니까. 게다가 여기는 오빠가 자주 들리는 편의점. 안 올 리가 없지.”
“.......”
“내가 불러서 온 거잖아. 나 좀 봐봐.”
여자는 다시 한 번 두리에게 말을 걸었지만, 두리는 변하지 않았다. 여자도 슬슬 그에게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의 오른손에 들고 있던 나무젓가락을 뺐었다. 두리는 그제야 그녀의 얼굴을 보기 시작했다.
“왔냐. 라나인.”
“이제 와서 본 척 하지 마. 처음부터 내가 온 거 다 알고 있었잖아.”
“알바 때문에 시간 없으니까 용건만 말해. 날 왜 부른 거야???”
“정말 몰라서 물어????”
왜 나랑 헤어지자고 말한 거야????
설마 했던 그 질문이 나오자 두리는 무표정을 풀어내고 웃음을 지어냈다. 정말 뻔하디 뻔한 말을 한다는 의미의 그 웃음. 그 웃음을 보자 나인이 그에게 점차 화를 내기 시작한다. 그런 그녀를 무시하듯 두리는 그저 라면국물을 들이키고 있었다.
“왜 웃어??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만만하게라. 그렇게 본 건 너 아니야???”
“뭐????”
나인은 두리의 말에 당황했다. 반면, 두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 먹은 컵라면 용기를 버리고는 이야기한다.
“늘 그랬잖아. 만국이 형, 성무영, 천유화. 그리고 나, 하두리까지. 이 중에 네가 안 무시하고 다니던 사람이 있어????”
“왜 이래?? 그렇다고 그게 우리 사이를 끊어버리는 게 말이 돼????”
“말이 돼. 네가 우리 밴드를 나간 순간부터 이미 우리 관계도 정해져 있었어.
아니, 더 정확히는 네가 나머지 멤버들을 무시한 순간부터였지. 그 때부터 나는 더 이상 너에 대한 그 어떠한 애정도 남아있지 않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실력을 오빠들이랑 유화 언니가 못 따라 가니까.......”
“그래??? 하준구의 밑에서 키워진 연습생 출신은 우리들의 실력이 고깝게 보이나 보지???
귀한 곳에서 연습하고 자란 너에게 우리는 그저 한낱 무대 하나 제대로 서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하찮은 존재겠지???”
“오빠!!!!!! 그건 오빠도.......”
“더 이상은 우리라고 엮을 생각하지 마. 너 때문에 난 아직도 마음이 허전하거든.
그 때 너의 마음을 받아들인 게 아직도 엄청 후회된다. 처음부터 너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거든. 괜히 너를 배려해서 널 받아준 것이 지금도 후회돼.”
“.......”
“<블러디 화이트데이>의 손지용이 널 원하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 거기가 너한텐 나을 거야.
그러니까 제발 좀 가라. 더 이상 내 옆에서 질척거리지 말고.”
두리가 그렇게 말하며 나인의 곁을 떠났다. 나인은 차마 할 말이 없었다. 사귈 때도 이해가 안 가는 면이 있었지만, 이 정도로 구제가 안 되는 사람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 나인의 마음을 두리는 전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나인에게 실망한 것은 두리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오토바이를 타고 계속 달리던 두리는 한강 둔치에 있는 어느 평평한 공터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 두리는 자신이 등에 계속 메고 있던 기타를 연주했다. 들어줄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있다면 오로지 자신 하나뿐. 기타를 치는 것만큼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없었으니까.
“돌아가는 기가???”
짐을 싸고 있는 두리를 보며 재억이 얘기한다. 여기는 서울이건만 아직도 입에서 떼지 못한 경상도 사투리를 내뱉으며 재억이 두리에게 이야기한다. 전 날, 준구에게 보여준 표정과는 전혀 다른 편안한 웃음으로 두리가 재억에게 이야기한다.
“1주일이면 오래 신세진 거잖아요. 고등학생 때 가출한 저 재워준 것도 아저씨구요. 그러면서 마땅히 보답한 것도 없는데.”
“마, 그래도 네가 해준 밥이라도 먹은 기 어디고. 과외 알바한 기 굳이 필요 없대두 하숙비로 낸 것까지 있는디. 그기 생각하면 아직도 느그 공연 지대루 못 잡힌 기 미안한디.”
“그 정도로 미안해하면 어떡해요. 저희가 아직 실력이 없는 걸요. 그나저나 형은요???”
“헬스 갔데이. 니 가는 기 보구 가라니께 밴드하면서 늘 보는 자슥 모하러 또 보냐꼬 그르드라.”
“그럼 또 카페에서 봐야겠네요. 나중에 봬요, 아저씨.”
그렇게 말하며 두리는 재억의 집을 떠났다. 얼마 전부터 신세를 지고 있던 재억의 집. 사실상 가출하여 정착을 했던 곳이 재억의 집이었던 것이다. 준구가 재억의 집에서 자신이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준구의 말을 거절하고 돌아가지 않은 것은 차라리 알고 지낸 지 2년 남짓한 재억이 10년을 넘게 같이 산 준구보다 더 편했기 때문이다. 한동안은 또 준구와 마주치면서 살게 될 생각을 하니, 두리는 마음이 갑갑해졌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더 이상 가출해도 되는 그런 나이는 아니니까. 어차피 알아서 또 새로운 자취방을 구하면 되니까. 새 자취방을 구하기 위해 그는 그 자취방을 떠났다.
“누구세요????”
집에 돌아온 건 거의 1년만이었다. 정말로 이 집에 있는 것이 싫어 잠깐 나가 있자고 한 것이 어느새 1년이 지난 것이었다. 문득 초인종을 누르니 예상을 깬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두리는 조금 당황했다. 집에 젊은 여자가 있었나? 누나인 나희의 목소리라 하기에는 20대 후반에 돌아온 싱글인 나희의 목소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동생인 세미의 목소리라 하기에는 10대인 세미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이 목소리는 분명 두리가 처음 듣던 목소리였다. 여기가 내 집, 아니 하준구의 집이 아닌가?? 그러나 두리는 바로 마음을 가다듬고는 상대의 물음에 대답했다.
“나야, 나.”
“그러니까 누구시냐구요??”
“어휴. 진짜 이 인간은 대체 이 집에서 뭘 하고 지낸 거야. 설마 그 여편네로 부족해서 이젠 20대 여자까지 건드리고 사나.”
“당신........ 도둑이에요??? 빨리 말하지 않으면 신고하겠어요.”
“도둑이 제 정체 밝히고 들어오겠냐??? 나, 이 집 주인의 자식이다. 빨리 문 열어.”
“아, 아 네!!!!”
방금 전까지 자신에게 강하게 말하던 태도는 어디 갔는지, 급하게 말투를 바꾼 여자는 두리가 보고 있는 문을 열어주었다. 문을 열고 정원을 걸어가 현관문을 열었다.
“어, 어서 오세요. 도, 도련님!!!”
두리는 여전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이 젊은 20대로 보이는 여자는 누구지??? 이 집 안에 젊은 여자가 있다는 것도 수상하지만, 정말 수상한 것은 이 여자의 외모였다. 두리가 밴드 생활을 해보면서 이렇게까지 자연스러운 빨간 머리 염색은 처음이었다. 자세히 보니 눈썹도 빨간 편이었고, 눈매부터 전체적인 느낌이 왠지 모르게 우리나라 사람과는 조금 다르다 느껴졌다. 그리고 두리는 생각했다. 방금 나에게 이상한 소리를 한 그 여자, 이 외국인이 아니구나. 그럼 아까 그 건방진 여자는 어디 갔지???
“Uh, excuse me. Where is Korean woman???”
“........”
"Are you not American??"
"네????”
“아, 미국인이 아니냐고!!!!!!”
“저 한국인인데요.”
뭐???? 전혀 예상치 못 한 여자의 말에 두리가 놀라 자빠질 뻔 했다. 앞에 있던 여자가 겨우 그를 잡아줘서 망신살 당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믿기 힘든 일이긴 했다. 보면 볼수록 외국인 같은 이 여자는 정말 알다가도 모를 그런 여자였다.
“아!!!!!!!!!”
그러다 두리가 뭔가 생각이 났는지 그녀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어제 공동묘지에서 본 여자와 똑같은 붉은 머리의 여자였다. 스쳐가면서 본 것이라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 했지만, 꽤 괜찮은 외모를 가진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 여자가 그 여자였나??? 그러다 다시 정신 차리고 두리가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럼 아까 나에게 시비 건 여자가 너야???”
“시비 건 거라뇨? 전 그냥 말을 한 것일 뿐......”
“그게 그거야, 나한테는. 그나저나 다들 어디 갔어??”
“나희 아가씨는 곧 돌아오신다고 하셨구요. 세미 아가씨는 지금 친구 집에 놀러가셨어요.
대표님은 아직 일터에 계시고, 사모님은 잠시 친구 분 만나러 나가셨어요.”
“아, 그래????”
“그런데 정말 도련님이 맞으세요???”
“어. 내 이름 하두리. 내 이름은 가족들에게 들었지??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성은 하, 이름은 두리. 합쳐서 하두리 맞으니까.”
“아, 알겠습니다. 두리 도련님.”
“왠 도련님?? 넌 정체가 뭐냐??”
“저는 한 달 전에 여기 새로 들어온 가정부에요. 제 이름은.......”
“아, 이름은 됐고 그럼 내 짐 좀 내 방에 갖다 놔. 가정부면 내 방 어디 있는지 알지?? 난 신경 안 쓸 테니까 대충 네가 꼴릴 때 올려놔. 알았지???”
그렇게 말하며 두리는 짐 가방을 그녀 맡에 두고, 자신은 기타 케이스만을 가진 채 방으로 올라갔다. 두리는 새롭게 시작할 해가 영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라는 인간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그 여자를 엄마로 맞이한 걸로 모자라 또 집 안에 새로운 가정부를 불러들이다니. 정말 답이 없는 인간이라고 느껴졌다.
“오빠 왔어?????”
가정부라는 여자가 짐을 넣든 말든 그저 두리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방이 정리가 되어 있다는 것도 알지 못 한 채, 베이스를 치던 두리는 세미의 목소리를 듣지는 못 했지만 그녀가 왔다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야, 하세. 너 목소리 아직 쓸 만하지???”
“당연하지.”
“밤에 시간 나면 내 방으로 와. 가이드 좀 뜨려고 하니까.”
“알았어. 그런데 오빠 이제 완전히 집에 온 거야? 드디어 아빠랑 화해했어???”
“아니.”
“사과 좀 해! 아빠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잖아.”
“됐어. 이미 누나도 더 이상 아버지한테 개기지 못 하는 상황에 내가 있어서 뭐하냐?”
“대체 오빠는 뭐가 그렇게 아빠에게 불만인 거야???”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말하며 두리는 세미의 이마를 툭툭 치고는 나가라고 이야기 한다. 준구와는 참으로 사이가 좋지 않은 두리. 그러나 두리가 모든 가족과 등지고 사는 것은 아니었다. 누나인 나희와 동생인 세미와는 그럭저럭 좋은 사이였다. 그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가족은 아버지 하나. 그리고........
“참 볼만하네요. 여전히 우리 가족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앉아 있는 게.”
저녁 식사 중 반대편에 앉아 있는 중년의 여자를 보며 두리가 혀를 끌끌 찬다. 상석에 앉아 있는 준구가 그를 째려봤다. 두리는 전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옆에 있던 세미가 왜 그러냐면서 두리를 툭툭 친다.
“대체 왜 그래, 오빠. 엄마한테 왜 그러는데???”
“엄마라........ 하긴 맞을 지도........”
두리야, 그만. 반대편에 앉아있던 나희가 한 마디 한다. 그제야 두리가 겨우 입을 다문다. 하고 싶은 말이야 잔뜩 있지만 나희마저 참고 있다면 두리가 할 말은 없게 된다. 나희의 옆에 있던 엄마라는 사람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참으로 두리에게는 껄끄러운 존재이지만 문제는 준구가 그녀를 정말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녀를 무시하고 밥을 먹으려던 두리. 그 때 식탁에 밑반찬을 올리는 사람이 보인다.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채로 식탁에 반찬을 올리고 있는 그 여자. 두리는 궁금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저 가정부 년은 대체 뭐죠???”
“저 년이라니!!! 슬이 언니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아까부터 되게 시끄럽네. 아직도 사춘기냐, 하세????”
“시끄러!!!”
“그나저나 외자라니. 얼굴만 특이한 줄 알았더니 이름도 겁나 특이하네.”
“‘슬’이 아니라 ‘슬이’ 언니야. 오빠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무지 착한 가정부거든!!!! 우리 집에 온 지는 한 달 됐어.
그런데 오빠가 그건 왜 궁금해 해???”
“아니. 이런 지옥 같은 곳에 스스로 찾아올 그런 멍청한 여자가 누군가 궁금했거든.”
정확히는 그 지옥의 90%를 차지하는 준구의 마음에 든 두 번째 여자가 궁금할 뿐이었다. 준구의 옆에 있는 여자도 그랬다. 그렇게 생각하는 두리를 준구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와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나는 이 중년의 여성이야 그렇다 치고 자신이랑 나이차이도 별로 안 나 보이는 이 여자는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얼마나 돈이 필요하면. 아니면 하준구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이런 짓까지 하는 것일까?? 그러면서도 두리는 자신의 눈에도 꽤나 들어올 정도로 이렇게까지 열심히 일하는 여자가 왠지 모르게 자꾸 걸렸다. 그러다가도 그저 하준구의 다른 여자라 생각하니 기분이 영 좋지 않아 두리는 다시 그녀에 대한 관심을 끊으려 했다.
****
한 달 전.
“여보세요. 네, 거기 구직한다는 곳 맞으시죠? 얼마 전에 연락드렸던 나슬이라고 하는데요.”
고등학교를 곧 졸업할 예정이지만, 다른 친구들과 달리 성적이 좋지 않아 마땅히 들어갈 대학교가 없던 슬이.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소꿉친구들은 다들 좋은 학교에 들어간 것을 생각하면 슬이는 자신이 공부를 못 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쉬웠다. 그 당시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친구들은 위로해 주지만.
상대의 전화를 받은 뒤, 그녀가 말한 그 집에 도착한 슬이는 자신과 동생이 살고 있는 집과는 수준이 다른 집에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에서나 볼 듯한 집에서 자신이 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한 편으로는 드라마에서나 볼 듯 한 자신의 힘든 직장 생활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하리. 가장인 자신이 동생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을.
초인종을 눌러야할까 말까 생각 중에 그녀의 뒤에 꽤 고급의 차량이 그녀의 옆에 섰다. 어색한 기운이 남도는 가운데, 운전석에서 20대 후반의 여성이 내렸다. 그 뒤에는 뒷좌석에 앉아 있던 중년의 남자가 내렸다. 그를 보자 슬이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이토록 강한 압박을 주는 남자는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녀를 이토록 두렵게 만드는 사람이라니. 슬이는 뭔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누구세요??”
그 때, 전화를 통해 들렸던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자 슬이는 그제야 운전석에서 내린 여자가 자신과 통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슬이는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고 여자가 이제 알았다는 듯, 바로 그녀를 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바깥만큼이나 으리으리한 집을 보자 슬이가 더욱 주눅이 들었다. 아직 온전치 않은 정신 상태임에도 동생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지만, 이 사람들처럼 살려면 얼마나 더 열심히 살아야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그녀는 문득 들었다.
“학교는요??”
“다음 주에 고등학교를 졸업해요. 대학 진학은 포기했구요.”
“포기???”
“동생을 먹여 살리느라 제가 대학 다닐 시간이 없거든요. 성적도 잘....... 안 나왔고.......”
“흠.......”
“동생을 먹여 살리려고 일한다라. 부모님이 맞벌이 하세요???”
“아뇨.”
두 분 다 몇 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녀가 소녀 가장이 된 것도 어느덧 상당한 햇수가 지났다. 엄마인 산드라가 중학생 때 먼저 사망하고, 몇 년 뒤에는 그녀의 아버지마저 사망하고 말았다. 이미 엄마가 죽었을 때부터 집안에서 엄마 역할을 자처하면서 주부 생활이 익숙해진 슬이였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으로 인해 현재 친구라고는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낸 소꿉친구 재혁과 혜성 뿐. 남들은 다들 평범하게 다니는 고등학교마저 야간 자율학습을 포기하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나 다른 아르바이트를 뛰어가며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그런 슬이를 보고 그녀가 준 이력서를 보며 여자가 이야기한다.
“사실 경력 이런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일을 잘 할 수 있는가 이거거든요.
그리고 또 하나 이 집안사람들과 아무 탈 없이 잘 지낼 수 있는가 이기도 하구요.
그 점에서는 슬이 씨는 합격점이네요. 집안일도 혼자서 가정을 먹여 살릴 정도면 괜찮겠네요.”
“네.......”
“그럼 내일부터 나오세요.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일하러 오세요.”
그렇게 여러 이야기를 한 끝에 슬이는 이곳에서 가정부로 일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기본적인 일하는 시간은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할 일은 많겠지만 집에서 늘 해오던 일이라 슬이는 크게 위축되지 않았다.
그녀가 이 집에서 일한지 한 달째 다 되어가면서 슬이는 여러 가지를 알아가고 있었다. 먼저 주인인 준구는 매우 엄격하고 권위적이었다. 집에서 그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막내인 세미가 저도 모르게 틈새를 공략하면 그 때는 준구가 받아들이지만, 왠만해서 준구는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슬이에게도 상당히 엄격했고, 꾸중도 많이 가했다. 슬이가 이전에 힘든 일들을 잔뜩 겪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준구 때문에 일을 바로 그만뒀을 지도 모를 정도다. 슬이가 처음 대화를 나눈 사람이자 맏딸인 나희는 작년에 이혼을 한 뒤, 이 집에 다시 살고 있다고 한다. 그녀의 직장인 하준구의 기획사는 물론이고 사실상 그녀의 동생인 세미의 보호자 역할까지 그녀가 맡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하는 일이 꽤 많았다. 준구의 밑에서 힘들 것 같은데 힘든 티 전혀 내지 않고 나희는 그저 묵묵히 일을 한다. 슬이에게는 초반에 비하면 태도가 많이 누그러들었기에 슬이도 그녀가 점점 편해지려 한다.
집안의 막내인 세미는 이 집안에서 슬이를 가장 편하게 대해주는 아이다. 부잣집 딸내미라는 상상이 전혀 안 들 정도로 세미는 전혀 격식을 차리지 않고, 슬이를 친한 언니처럼 대해준다. 주인과 가정부의 관계는 그들 사이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세미는 이 집안에서 엔돌핀 같은 존재이다. 그로 인해 슬이도 그녀가 있으면 일을 할 기분이 올라온다.
의문점이 있었다. 자취를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방학 철이라는데도 이 집에 단 한 번도 발길을 놓지 않는 나희의 남동생이자 세미의 오빠. 이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 하지만 그 어느 가족도 그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꺼려한다. 그나마 세미가 오빠, 하두리라는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이야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은 전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그 사람이 집에 들어왔다. 꽤 무서운 눈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참으로 준구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집에 오자마자 준구를 욕하는 두리를 보아하니 그의 앞에서는 준구와 마찬가지로 최대한 조용히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웬만한 일들을 거의 다 끝내고, 두리의 방을 청소하려 슬이가 다시 두리의 방에 들어갔다. 여전히 두리는 슬이를 엄청 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가 슬이에게 이야기를 건다.
“몇 살???”
“네????”
“나이 말이야, 나이. Your old........ 아 참, 한국 사람이랬지. 몇 살 먹었냐고??”
“저........ 스무 살이요.”
“그러면 나보다 한 살 어리네. 막 불러도 되지????”
“네, 괜찮습니다. 도련님.”
도련님이라. 이런 어색한 호칭으로 불리기는 싫은데. 두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무시하고 슬이에게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너 뭘 노리고 이 집에 들어온 거냐??”
“네??? 그게 무슨 소리에요???”
“하준구가 무슨 말로 널 꼬셨냐는 거지.”
“그, 그런 적 없어요. 전 그저 벽보에 이곳에서 가정부를 구한다는 얘기를 보고 여기에서 일하게 된 거에요.”
“진짜냐??? 하준구, 아니 아버지와는 전혀 아무 관계가 없어???”
“네. 그런데 저희 대표님 유명하신 분인가요??? 대표님이라고 부르라하셔서 대표님이라 부르긴 하는데....”
슬이의 말을 들은 두리는 조금 황당했다. 스무 살 밖에 안 된 녀석이 하하 엔터테인먼트 대표를 전혀 모르고 있다니. 그것도 일한지 한 달 째라는 녀석이 말이다. 대체 뭐하는 년인가 궁금하기도 했고 또 한 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집안에 또 다른 하준구의 흔적이 새로 추가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두리야.”
두리의 방으로 가까이 울려퍼지는 나희의 목소리. 나희가 들어오자 두리가 무슨 일이냐며 그녀에게 물어본다.
“너 이따가 슬이 씨 집에 데려다줘.”
“뭐??? 내가 왜???”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할 거 같아.”
“어휴. 누나가 얘 집까지 데려다줬어??”
“시끄럽고 데려다 줄 거야 말거야?? 안 할 거면 내가 대신한.......”
“아니. 내가 할게. 계속 내가 한다고.”
“뭐, 정말???”
“그래. 내가 앞으로 이 년 집에 데려다 주는 일 할 거라고.”
해트 트릭 2.
- Red Hair Girl -
“네가 웬일이냐?? 너 이 집에서 조만간 나가는 거 아냐???”
두리의 말을 이해한 나희가 놀라서 그에게 되물었다. 확실히 이 집에 들어오고 난 직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그녀가 아니더라도 두리의 슬이를 데려다 주겠다는 그 말을 들었다면 나희, 세미, 그리고 준구까지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두리의 생각은 어느 한 순간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한 달 만. 그 때까진 걸리쉬 활동 때문에 매니저인 누나가 바쁘잖아.”
“너 어디 아픈 거 아니지, 두리야??”
나희가 걱정이 되었는지 두리의 이마를 손으로 만져본다. 두리가 괜찮다는 듯 나희의 손을 쓱 치운다.
“동생이 호의를 보이면 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빨리 가. 지금 가면 늦겠다.”
그렇게 말하며 두리는 나희를 어서 보내려고 했다. 두리가 슬이를 보낼 준비를 했다. 슬이는 차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나희의 차를 타고 갔었으니까. 그런데 그녀 앞에 보인 것은 웬 오토바이였다. 당황해서 멍하니 있는 그녀에게 두리가 오토바이 헬멧을 그녀의 머리에 씌워주며 이야기한다.
“뭘 그렇게 멍 때리고 있냐??”
“정말 이거 타고 가는 거예요??”
“응. 면허증도 있고 차도 있지만, 지금은 차 타기는 귀찮거든. 어서 타. 내 허리 꽉 잡아. 주소도 알려주고.”
슬이가 말한 주소를 두리는 오토바이 내비게이션에 등록하고는 그것이 알려주는 대로 방향을 따라간다. 슬이는 오토바이가 내는 속도가 무서워 그의 허리를 더 세게 잡았다.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두리가 기침이 나올 정도였다.
“아파!”
“죄, 죄송해요, 도련님.”
“으, 음....... 너 마른 거 치고는 힘이 좋구나. 뭐 씨름 선수했냐???”
“안 했거든요!!! 다른 운동은 했지만요.”
“하긴 그러니까 가정부 생활도 잘 하는 것이겠지.”
“그,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이제 거의 다 온 거 같거든. 조금만 더 참아.”
가다 보니 왠지 오르막이 나왔다. 왠지 두리에게 익숙한 동네가 나왔다. 왜 익숙한 지 두리는 기억하지 못 했다. 가파른 오르막을 두리의 오토바이는 힘이 좋아서 어렵지 않게 올라갔다. 그렇게 오르막을 올라가다 슬이가 다 왔다고 말한다. 두리는 그 집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집이 결코 못 사는 집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로 극히 평범한, 아니 결코 평범하지 않은 다른 집보다 더 못 사는 게 뻔히 보이는 작은 집에서 살 것이라고는 상상을 하지 못 했다.
“이제 그만 들어가세요.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야.”
“네???”
“너 그러니까....... 이름이 뭐라고???”
“나, 나슬이에요.”
“아........ 원 투 쓰리!!”
“나슬이라구요.”
“너 그 집에서 계속 일할 생각은 하지 마. 아무리 쉽게 많은 돈을 벌 수 있어도 그 곳은 정말 아니야.”
“하지만.......”
“라고 말은 했지만 이 집을 보니 그것도 네 마음대로는 안 되겠구나. 나중에 보자.”
슬이가 집 안으로 들어가고 두리는 생각했다. 나는 왜 저 이상한 여자 애한테 이러고 있는 것일까?? 그저 신기하게 생겼다는 것 외에는 딱히 주목할 거리는 없어 보이는데.......
“언니 왔어??”
슬이가 집으로 들어오고 시간이 흘러 그녀의 현재 유일한 가족인 동생, 이브가 그녀를 맞이했다. 일하고 오느라 피곤할 터인데 슬이는 이브를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이브가 맛있게 먹는 모습에 슬이가 절로 웃음이 나온다.
“이브야, 맛있어???”
“응, 역시 언니가 해주는 밥이 최고야. 언니 짱!!!”
너도 참. 그렇게 말하면서도 슬이의 표정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슬이가 아끼는 것만큼 이브 역시 슬이를 매우 잘 따랐다. 자신 때문에 언니인 슬이가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이브였기에 그녀는 슬이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잘 따랐다. 그녀는 슬이의 화려한 외모와는 전혀 다르게 생겼다. 누가 봐도 이 색깔은 빨간색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슬이의 머리카락과 달리 이브의 머리는 반대로 누가 봐도 검은 머리였다. 게다가 전체적인 외모도 평범한 한국인과는 다른 서양인의 모습도 보이는 슬이와 달리 이브는 완전한 한국 사람처럼 보인다. 자세히 보면 그녀도 혼혈인다운 모습이 없지는 않지만 슬이만큼 대놓고 눈에 띄지는 않을 정도였다.
밤늦은 시간이 되어 이브를 재운 슬이는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 있는 벽에 두 개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왼쪽 사진에는 네 명의 사람이 찍혀 있었다. 지금보다 한참 어렸을 때의 자매의 모습이 보인다. 그들의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의 부모로 추정되는 사람이 있었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은 슬이와 같은 빨간 머리의 미국인이었다. 오른쪽 사진에는 축구 유니폼을 입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슬이는 이브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의 자신과 달리 적극적인 성격에 인간관계도 좋고 외모도 이뻐서 인기가 많은 이브에게 이런 고단한 삶은 끝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더욱 열심히 일을 해서 이브를 힘들게 하지 않는 삶을 살게 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음 날. 슬이는 마지막으로 입학하게 될 고등학교에 도착했다. 어렸을 때부터 슬이의 가장 친한 절친인 혜성은 이미 일찍 와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의 내용은 이제 어떻게 연락하고 살지 이런 정도였다. 혜성이 슬이를 보고 인사를 한다. 슬이가 혜성의 옆에 앉는다. 그녀를 본 다른 친구들이 그녀에게 대화를 건다.
“슬이 넌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난 이제 일하면서 살려고. 한 달 전부터 일하고는 있는데 나름 괜찮은 거 같아.
돈도 적당히 잘 주고. 대학교 입학은 무리일 거 같고 지금 나에겐 이브가 제일 중요하니까.”
“그렇구나.......”
“그나저나 슬이는 좋겠다. 원래 빨간 머리니까 염색할 걱정은 안 해도 되잖아.”
한 친구의 그 말에 슬이는 잠시 흠칫했다. 소꿉친구인 혜성이 서둘러 친구에게 눈치를 줬다. 슬이가 얼마나 머리 때문에 힘들어했는지 알고 있으니까. 그녀가 고등학교를 다니면서까지 그녀를 괴롭힌 그것. 불량한 짓 한 적도 없는 자신을 아무 이유 없이 불량아 취급하게 만들었던 빨간 머리. 태어날 때부터 근본적으로 빨간 머리였던 그녀에게는 아무리 검은색으로 염색해도 빨간 머리가 사라지지 않았고, 그녀의 어머니도 왜 굳이 빨간 머리를 가리고 살아야 하냐며 오히려 더 자신감 있게 살라고 얘기했었다. 그렇게 살려고 슬이는 노력했지만 현실은 그녀의 머리만을 보고 그녀를 오해하는 사람들 투성이었다. 학생도 선생도 주변의 어른도 그 빨간 머리 때문에 그녀에 대해 아주 질이 나쁜 아이라는 오해를 하고는 그 오해를 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나마 지금에 와서야 머리 색깔이 예쁘니 염색 안 해도 되겠다는 소리나 들을 뿐.
“그나저나 육개장 이 놈은 왜 이렇게 안 와???”
“아직도 안 왔어???”
“이 시간쯤이면 슬슬 우리에게 올 때가 됐잖아. 이제는 우리랑 같이 학교 못 다닐지도 모르는데.”
“체육학과에 조기 소집 뭐 이런 거라도 있었나???”
“슬, 네가 나한테 물어보는 거냐??? 난 너희랑 다르게 그 쪽에 몸을 담아본 적이 전혀 없다구. 그리고 너희들.......”
아, 늦었다. 미안 미안.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재혁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혼자 늦게 온 것이 많이 민망한 듯, 실실 웃으면서 재혁이 두 사람에게 다가간다. 매력 있게 생긴 얼굴이라 다른 여자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있던 재혁이었고, 그런 재혁에게 대시하는 아이들이 꽤 있었다. 그러나 재혁은 그런 아이들의 대시를 거절하곤 했었다.
“야, 육재혁. 너 대학 다니고 나면 우리랑 영영 헤어질 지도 모르는데 너무 퍼진 거 아냐?? 그렇게 우리랑 헤어지는 게 좋아??”
“아냐, 아냐. 졸업하는 게 긴장되어서 늦잠을 잤거든.”
“어쨌든 방심하지 마. 오늘이든 축구부를 들어가든. 네가 아무리 축구를 잘 한다 한들 체대는 체대야.
내가 슬이까지 체대에 보내고 싶지 않았던 게, 거기는 선배들 텃세가 다른 학교보다 너무 세서였다고.
뭐, 그 전에 슬이는 거기에 갈 성적이 되지 못 했지만.......”
“아무튼 너희들 미리 내 사인 받아 놔. 내가 나중에 잘 나가는 선수 되면 너희들 나한테 사인 받는 것도 힘들 테니까. 물론 슬이는 예외.”
생색내기는. 혜성이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또 다른 절친인 재혁에게 혀를 찬다. 재혁이 누구 덕에 축구를 시작했는지 잊지 않았다면 두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지는 않을 터이다. 물론 재혁도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겠지만.
“졸업 축하한다, 슬이야.”
“감사해요. 이게 더 선생님이 저를 잘 돌봐주신 덕분이에요.”
“돌보기는. 난 그저 너의 담임선생을 한 것 말고는 없는 걸.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묻는데....... 지금은 몸 괜찮니???”
담임선생의 물음에 슬이는 괜찮다고 말했다. 온전히 괜찮다고 장담은 할 수 없지만, 그 뒤에는 재혁과 혜성의 도움으로 별 다른 일도 없었으니까. 그 일 이후의 1년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던 것에 비해 요 근래 1년 동안 물 흐르듯이 하루하루가 잘 지나간 것은 슬이에게 가장 큰 행복이었다. 더 이상 재혁에게 자신의 존재가 발목을 잡히는 것이 싫어서 처음으로 그녀답지 않은 선택을 했던 것은 힘든 일이긴 했지만.
“드디어 졸업했네.”
졸업식이 끝이 났다. 다른 사람들은 가족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버지가 있는 재혁과 가족이 다 온 혜성도 그러고 있었다. 이브는 개인적인 일 때문에 슬이의 졸업식에 참여하지 못 했다. 혜성이 그런 슬이를 불렀다. 부모님이 없지만 가족과 같은 혜성의 가족과 함께 슬이가 기념사진을 찍었다.
“정말 힘들었다구, 고딩 생활. 대학 생활은 좀 편했으면 좋겠어.”
“야, 슬이도 있는데 대학 얘기는 좀.......”
“난 괜찮아. 너희 둘이라도 같은 학교에 입학한 게 어디야. 그건 그렇고 나 슬슬 배고파.”
“역시나. 그 말이 왜 안 나오나 했어. 우리 슬이가 배가 안 고플 리가 없지. 오늘은 내가 쏠 차례지, 육재혁??? 떡볶이 먹으러 고고!!!!”
뭐든지 잘 먹는 슬이의 식성을 이용해 혜성이 은근슬쩍 자신의 취향을 밝히며 점심 식사를 해결하려 한다. 재혁은 혜성이 고른 메뉴가 결코 평범한 떡볶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치를 떨었지만, 선택권이 없었다. 하필이면 지난번에 자신이 밥을 산 게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으아!!!! 진짜 매워!!!!”
“여기 우유 있어, 재혁아.”
어느 틈에 우유를 가지고 있었는지 슬이가 매운 떡볶이를 먹고 매워하는 재혁에게 건네주었다. 재혁이 우유를 벌컥벌컥 마시자, 혜성이 그 모습을 우스워한다. 재혁은 혜성에게 복수를 하겠다며 다짐했다. 그 때, 그런 와중에 슬이가 두 사람에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니들 정말이야??”
“응???” “뭐가??”
“너희들 대학 다니면....... 앞으로 보기 힘들어져??? 이렇게 셋이서 같이 놀 수 있는 것도 .......이게 끝인 거야???”
슬이는 저도 모르게 감정이 울컥해져 살짝 눈물이 고여 있었다. 혜성이 옆에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유일하게 세 사람 중 같은 대학교, 심지어 그 어느 대학교도 입학하지 못한 슬이. 부모님의 빈자리를 메꾸느라 어렸을 때부터 일하고 다니다 보니 공부는 뒷전이었다. 일하고 남는 시간을 통해 그나마 조금이라도 더 공부를 하고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머리가 똑똑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 이유가 슬이의 안 좋은 성적을 위로할 수 있는 건 아니고, 결국 본인이 공부를 안 한 것도 있었지만. 그래도 고등학교 때까지 늘 같이 다니다가 갑자기 이렇게 따로 떨어질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졸업이라는 것이 그렇게까지 기분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야, 슬아. 꼭 그렇지 않아. 나 얼마 전에 면허 땄잖아. 차만 있으면 얼마든지 너랑 나랑 잘 볼 수 있어.”
“맞아 맞아. 나도 기숙사에 살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밖에 절대 못 나가고 그런 건 아니야. 내가 거기서 선배님들, 감독님에게 무지 잘 보이면 자주 볼 수 있을 걸.”
“그런가???”
“그리고 슬, 우리 이제는 어린 애가 아니잖아. 비록 대학은 아니지만, 너도 뭔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좋겠어.
우리가 너를 뒷바라지 하든, 네가 우리를 뒷바라지 하든 그건 이미 할 만큼 했잖아. 너도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아야지.
네가 동생 바보, 우리 바보라는 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너 잊지 마. 너 아직 결혼도 안 한 처녀라는 걸. 네 꿈을 갖지 않기에는 너무 아까운 나이라는 걸.”
혜성은 고3이 되고나서부터 슬이도 하고 싶은 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늘 말하고는 했었다. 혜성이 바라보는 슬이는 오로지 남들에 대해 생각할 뿐,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고 살지 않았다. 어렸을 때 그렇게 좋아하던 축구 선수도 모종의 일로 완전히 접었고, 부모님을 잃어버린 뒤에는 오로지 친구인 재혁과 혜성, 그리고 동생인 이브와 그들의 가족만을 챙기고는 했다. 그런 점이 혜성은 고맙기도 하면서 자신의 꿈은 늘 없다고 말하는 슬이가 안쓰러웠다. 가끔은 슬이도 멋진 남자친구와 사랑을 하고, 재밌게 놀면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혜성은 있었다. 아, 남친이라면 한 명 있기는 했었다.
“그러고 보니 너희 이제 고등학교 졸업했는데 다시 안 사겨???”
“뭐???” “야, 갑자기 그건 왜.......”
“왜?? 나 모르게 사귀다가 헤어져놓고는 내 눈치 보여서 안 사귀는 거야??”
“그,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내가 친구로 남자고 한 거야.”
“그래??? 어째서????”
“싸운 건 아니야. 그저 우리 사이가 사귀는 사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친구 사이 같아서 다시 친구로 지내자고 한 거야.
재혁이에게는 나보다 더 좋은 여자와 만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랬구나. 그래도 너희들 대단하다. 그 뒤로도 계속 친분을 쌓고 있다니. 보통 다른 연인들은 헤어지고 나면 어색해지잖아.”
“아무래도 원래 친구여서 그런 걸까??? 아무튼 뭔가 자연스럽더라. 다시 친구로 돌아간다는 게.”
그 뒤로 재혁과 슬이는 다시 친구로 돌아갔다. 재혁이 슬이에게 특별히 안 좋은 짓을 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지금 슬이에게 재혁은 다시 편한 친구로 돌아가 있다. 재혁은 아마도.......
“마지막 교복인데 우리 사진이라도 찍자.”
“사진???? 이미 찍을 만큼 찍었잖아.”
“바보야. 당연 셋이서 찍을 사진 찍어야지. 스티커 사진기가....... 아, 저기 있다.”
시내를 돌아다니던 그들은 오락실 근처에 있는 스티커 사진기를 발견하고는 그 곳에서 그들만의 사진을 찍었다. 이제는 더 이상 입지 못할 교복. 그리고 잊지 못 할 교복 속에 담겨 있는 추억들. 성인이 되어 새로운 추억을 쌓아갈 것을 세 사람은 기대하고 있었다.
“야, 우리 노래방 갈래??”
“노래방?? 오랜만이네. 콜!!! 슬, 너도 갈 거지??”
“응?? 난 노래 잘 못 하는.......”
“에이, 또 내뺀다. 어서 가자, 육재혁!!!”
그렇게 세 사람은 노래방으로 향했다. 여기에 고등학교 입학 예정이라 지금 당장은 할 일이 없던 혜성의 동생인 아단과 슬이의 동생인 이브까지 합세하여 다섯 명이 함께 노래방으로 향했다.
노래방에서의 모습은 제각각이었다. 어떻게든 멋있는 노래를 부르려고 애쓰지만 결국엔 음이 올라가지 않아 쇳소리가 나오는 재혁과 그를 비웃는 아단. 오랜만에 둘이서 제대로 콤비를 맞추자면서 남녀 혼성 듀오의 노래를 선곡하고 있는 혜성과 이브.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반응을 즉각 해주는 슬이까지. 꽤 긴 시간 동안 슬이를 제외한 네 사람이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슬이는 탬버린을 쳐 주면서 반응을 할 뿐, 노래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잠시 쉬고 있던 혜성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역시 주인공은 마지막에 나오는 법이지???”
“아, 아냐, 혜성아. 내가 어떻게 그래?”
“여기서도 내빼는 건 아니지, 슬아. 내가 네 노래 실력을 아는데.”
“너도 참. 그런 소리 하지 마.”
“진심으로 한 말이야. 그럼 어디 나슬이의 노래를 선곡해 볼까??”
그 때, 마침 이브의 노래가 끝이 나고 대기 중인 노래가 없었다. 혜성이 예약한 노래가 바로 흘러나왔다. 아단과 이브는 처음 듣는 노래라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었다. 재혁은 뭔가 아는 눈치가 있는 듯, 슬이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두 친구의 압박으로 슬이는 결국 마이크를 들고 조심스럽게 노래를 불러야 했다.
****
기타 연습을 마친 뒤, 어디론가 걸어가는 두리. 오토바이를 주차하고 그는 지하 입구로 들어간다.
“7번 방이야.”
“또 7번 방이야??? 노래도 못 하는 사람들이 쓸데없이 방 핑계를 대.”
“노래 못 하는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만국이랑 엄청 기다리고 있겠다. 빨리 가.”
계산대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는 젊은 여자와 매우 친한 관계인지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고 두리는 그녀가 말한 7번 방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는 벌써 몇 명의 두리 또래의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늦게 온 그에게 사람들이 핀잔을 준다.
“리더라는 놈이 모범을 보여야지. 오히려 더 지각하고 있냐???”
“적어도 성무영, 평소에 기타 대신 닌텐도 DS를 들고 있는 너한테는 듣고 싶지 않아.”
에휴. 오늘도 투닥거리는 두리와 무영을 보며 그들보다 형인 만국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가 두리가 어제 전화한 정예인에 대해 물었다. 두리의 질문에 만국이 고개를 저었다. 또 실패인가. 만국은 그만 포기하자 말했지만 두리가 고개를 저었다. 이럴 때는 이런 완벽주의자 하두리가 조금은 귀찮을 뿐이다. 만국은 어제 이야기를 떠올렸다.
일본의 밴드 인구 수는 드럼은 1, 베이스는 10, 기타는 200, 보컬은 500이라는 말이 있다. 그 정도로 보컬의 수요는 상당히 많고 그만큼 구하기 쉬운 자원이다. 하지만 밴드 <나인 테일 폭스>는 리더인 두리가 철저히 여성 보컬만을 구하는데다 그마저도 그들과 잘 어우러질 수 있는 보컬을 찾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원하는 보컬의 숫자는 500이 아니라 10. 아니, 5 정도로 볼 수 있다.
<블러디 화이트데이>의 1대 보컬인 유세빈을 두리가 꼭 원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들에게 어울릴 만한 보컬을 유세빈 말고는 딱히 알아내지 못 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명성이 다른 밴드에 비해 떨어지다 보니 실력 있는 보컬들이 굳이 이 밴드에 지원을 하지는 않는다. 그나마 한 명이 지원한 적이 있으나 그게 하필이면 밴드 가입 후, 여러 멤버들과 싸우던 라나인이었으니.......
두리가 말한 시간이 되어 정예인이 드디어 도착했다. 예인에게 간단한 설명을 하고는 그들이 노래를 연습할 준비를 했다. 기타를 들고 있는 무영, 드럼 앞에 앉는 만국, 키보드에 손을 대는 유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베이스를 든 두리까지. 임시로나마 보컬이 들어옴으로서 그들은 밴드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서로 그들, 정확히는 두리가 만든 노래를 연주하고 불러보았다.
“수고했어. 나중에 연락하면 와.”
두리가 예인에게 말한다. 두리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으로 멤버들은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있었다. 두리의 표정을 읽은 무영이 얘기한다.
“야, 뭘 그렇게 대체 망설이는데??? 우리가 지금 보컬을 골라잡고 그럴 때가 아니잖아. 우리가 앨범을 내기라도 했냐, 무대에 서면 인기가 많기라도 하.......”
“그러니까 더욱 골라잡아야지. 뭐, 예상은 했지만 유세빈에게도 아쉬운 점이 있던 것처럼 정예인도 아쉬운 게 있는데 그걸 무시할 수가 없잖아.”
“이번엔 또 뭐야?? 유세빈은 기복이 아쉽다며?? 정예인은 또 뭔데??”
“애초에 음색 자체가 내가 원하는 스타일이 아냐. 기복은 없지만. 그리고 유세빈보다 음역대도 좁아.
그런 식으로는 우리의 음악을 오랫동안 할 수 없어. 애초에 <블러디 화이트데이> 놈들의 취향에 맞게 고른 보컬이니 우리에게 맞을 리가 없지.”
“........”
“그래도 정 안 되면 그런 녀석이라도 데리고 와야 하는 게 우리의 실상이지만 말이야.”
두리의 말을 멤버들이 열심히 듣고 있었다. 제대로 된 인디 밴드를 하려면 결코 아무 실력 없는 녀석을 밴드 멤버로 둘 수 없다는 두리의 생각 때문에 보컬 하나 제대로 구하지도 못 하던 시절이 보컬이 있는 시절보다 더 길었다. 사실 이 점은 만국도 어느 정도 동의는 하지만 너무 시간을 오래 잡아먹는 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은 키보드를 맡던 천유화도 밴드에 들어올 당시에는 보컬이 없어서 잠시 동안 보컬을 맡았던 적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들과 함께 한 보컬 중에 두리의 마음에 딱히 드는 보컬은 없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역시 노나나 말고는 안 되는 걸까???”
“여기 없는 사람 이야기는 하지 말지??? 아무리 형이라도 그런 건 좋지 않아.”
“노나나가 대체 어떤 보컬이었기에 다들 이렇게 언급하는 거야??”
“나중에 얘기해 줄게, 유화야. 야, 우리 할 일도 없는데 노래방이나 갈래???”
노래방??? 만국의 제안에 멤버들이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만국이 왜 모르는 척 하냐며 말을 꺼냈다.
“지연이 그 가시나가 좀 놀러오랜다. 돈 싸게 해 줄 테니까 좀 오라카네.”
“요새 그 노래방 잘 안 되나???”
“꼭 그런 기는 아닌디. 아무튼 가자. 스트레스 쌓이는 거 풀자 좀.”
“여친 하나 겁나 챙기기는. 정말 아직도 사귀고 있는 게 대단하다.”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가자. 두리가 힘겹게 말한다. 두리도 한 동안 이 건에 대해 지친 모양이다. 그와 멤버들이 노래방으로 향한다. 멤버들의 표정도 그리 좋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노래방 주인의 딸인 지연의 도움으로 반값에 노래방을 이용하는 그들. 유화는 아버지가 목사로 있는 교회 일을 도와주러 가면서 남자 멤버인 두리, 무영, 만국만이 노래방을 이용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무영이 뭔가를 제안했다.
“야, 하둘. 오랜만에 노래 내기 하자.”
“갑자기 왜???”
“그냥 부르면 재미가 없어. 자, 음료수 내기다. 만국이 형 것까지 함께.”
두리는 하기 싫어했지만, 무영의 고집을 이겨 낼 수 없어 결국 내기를 하기로 했다. 자신의 노래 실력에 확신이 있는 두리는 아니지만, 무영보다는 잘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무영에게는 지기 싫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정도 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두리의 재력이라면 음료수 세 캔 정도는 얼마든지 살 수는 있었지만.......
“이겼다!!!!! 하두리 82점, 나는 93점!!!!!!”
“말도 안 돼!!! 내가 그깟 성무영 따위에게 지다니.”
“축하한다, 두리야. 나는 레드불.”
“그건 여기에 없잖아.”
“요 앞에 편의점 있잖아. 나도 같은 걸로 부탁해.”
막상 지고 나니 기분이 좋지 않은 두리. 그러나 결과에 승복하기로 하고 두리는 편의점에 갔다. 레드불 세 캔을 사고 그들의 방에 가려고 할 때 쯤이었다.
“훨훨 날아 내 아픈 기억을 다신 널 찾지 않도록~ 흩날리는 네 하얀 미소가 자꾸만 눈앞을 가려~ Oh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야 해 내 마음을~”
문득 두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 고운 목소리가 자신의 귀를 스쳐 지나갔다. 두리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춰 그 목소리가 들리던 그 곳으로 눈을 향했다. 두리의 시선에 들어온 여자. 가느다란 체구에 고운 목소리, 그리고 익숙한 빨간 머리와 빨간 눈썹. 아무리 생각해도 저 여자는.......
“야, 뭐해???”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 보니 만국이 두리를 불러냈다. 두리가 한참을 들어오지 않아 찾으러 가다가 멍하니 서 있던 두리를 발견했다고. 그 여자가 정말로 나슬이가 맞는지 확인하지 못 한 채, 두리는 만국을 따라 방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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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실수로 해트 트릭을 지웠어요 ㅠㅠㅠㅠ 그래서 이렇게 급하게 다시 올립니다 나머지 편은 나중에 다시 올릴 게요
첫댓글 재밌어요
괜찮은거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