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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편
“2014년 11월 9일 새벽 5시 경 국회의원 김 석희를 살해한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일어난 총 11건의 살인사건의 피해자들 모두 지금 정부를 세운 1등 공신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모든 사건들은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며 피해자의 피가 모조리 없어진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
“상처는 목에 난 두 개의 이빨 자국이 전부고, 범인에 대한 흔적은 아직 발견된 것이 없습니다만, 이번 국방부 장관 이 승우 살인사건에서 처음으로 범인이 남긴 쪽지가 발견되었습니다.”
“….”
“범인은 자신을 ‘J’라고 지칭하고 있으며, 범인의 목표는 현 정부를 구성하는데 도움을 준 모든 인물과 현 정부의 수장인 대통령 각하까지 몰살하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사건 브리핑이 모두 끝났지만, 어느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11월 9일, 국회의원 김 석희를 살해한 것을 시작으로 벌써 11명의 사람이 죽었다. 해를 넘겨 3월인 현재까지 일어난 11건의 살인은 모두 현 정부를 세우는데 공을 세운 인물을 타깃으로 삼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감히 자신들의 자리와 목숨을 위협하는 존재에 대해 분노했지만, 11명이나 죽었음에도 범인의 머리카락, 발자국 하나 제대로 찾아내지 못하자, 그들은 공포에 떨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들의 공포를 증명하듯,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거의 잠을 못 잔 사람들처럼 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그래서, 그 쪽지 외에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나?”
겨우 침묵을 깨고 입을 연 사람은 현재 여당의 대표직을 맡고 있는 성 관우 의원이었다. 최대한 침착한 척 자신을 포장하고 있었지만, 그 역시 언제 자신이 타깃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공포에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될 정도로 망가진 상태였다. 사람을 11명이나 죽였는데, 그 흔한 머리카락, 족적, 하다못해 침 한 방울조차 찾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엄청난 인력과 예산을 들이부었음에도 그 괴물 같은 놈에 대한 윤곽조차 잡지 못했다. 뭐, 목표야 워낙에 명확하니 뒤로 제쳐두더라도 그렇게 많은 사람을, 전부 똑같은 방법으로 죽였음에도 그 살인마가 대체 어떤 방법으로 단 시간에 인간의 몸에 있는 피를 모조리 없앴는지조차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노력이 물거품이나 마찬가지란 얘기였다.
“… 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면 단가? 우린 지금 언제 죽을지 몰라 벌벌 떨고 있는데, 그런 말로 상황이 해결될 거라고 보는 거야?!”
“….”
“그만큼 인력과 돈을 쏟아 부었으면 거기에 걸맞은 성과를 가져오란 말이야!!!!”
그들이 J를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마치 인간이 아닌 어떤 특별한 존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어떠한 증거도 남기지 않고 시체에 난 상처라곤 이빨 자국 두개뿐이라니. 몸속에 흐르는 피가 모조리 빨려 죽은 사람들은, 마치 흡혈귀에게라도 당한 것 같았다. 그런 탓에 이 사건은 암암리에 ‘뱀파이어 살인 사건’이라고 불렸다.
언론에는 그저 흡혈귀인 척 행세를 하여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해 이런 짓을 꾸몄다는 내용의 해명 자료를 돌리고 있었고 국민들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도저히 인간이 행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고 철저한 J의 살인은 진짜 그가 흡혈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지 않다면,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11명이나 죽인 이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11월부터 3월까지 11명. 5달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벌써 11명이나 죽었다. 그 정도로 많은 피를 뽑아내려면 그만큼 시간이 필요할 텐데, 대부분의 피해자가 아주 잠깐 밖에 나간 사이 납치를 당해 1시간 이내에 시체가 되어 나타나곤 했다. 그 뿐이던가? 수많은 경호원이 지키고 있는 집안으로 침입해 속수무책으로 당한 사람도 절반이 넘었다.
“이제 6명 남았네.”
“….”
“다음 살인이 일어나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범인을 잡아야 해.”
“….”
“함정 수사를 하든, 과학 수사를 하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괴물 같은 놈을 내 눈 앞에 끌고 와!!”
“네, 대표님.”
사건을 담당한 형사는 일단 고개를 숙이며 성 관우 대표의 명령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대체 뭘 어떻게 해야 그 괴물 같은 놈을 잡을 수 있을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주사를 사용하여 피를 뽑아냈다고 보기에는 짐승에게라도 물어뜯긴 것 같은 이빨 자국이 설명이 되지 않았고, 그가 진짜 흡혈을 했다면 침 한 방울이라도 목에서 묻어 나와야 하는데 피해자에게서 침은커녕 땀 한 방울도 찾을 수 없었으니 이처럼 괴이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살인마의 쪽지 마지막에는 ‘괴물 살인마, J로부터’라는 글귀가 남겨져 있었다. 괴물 살인마라, 무서울 정도로 잘 어울리는 닉네임이 아닌가. 스스로를 괴물이라 칭하는 이 살인마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이곳에 있는 모두가 몰살당할 때까지 J의 정체를 알아낼 수나 있을까?
그 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지금의 상황이 참을 수 없게 두려웠고, 그저 어떻게든 이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는 단 한 번도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는 가련한 인간에겐 너무나도 큰 고통이었다.
“… 꼭, 그 괴물을 잡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만큼은 빈말이 아닌 진심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괴물을 잡아야 했다. 만약에라도 J의 목표대로 정부를 구성하는 주요 인물들이 모조리 몰살당할 경우, 이 나라가 어찌 돌아갈 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대체 그 괴물은 무슨 이유로 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마음먹은 걸까?
가장 먼저 그 이유를 아는 것이 순서인 것 같았지만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무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11명이나 죽은 이 시점에서도 입을 다물 만큼 무조건 감춰야 하는 그 이유가 무엇일까. 분명 현 정부를 구성한 주요 인물들이라는 것 외에 이들을 엮는 다른 이유가 존재할 것이다. 형사는, 그 이유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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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새도록 TV만 본 거야?”
“아, 일어났어?”
잠에서 깨자마자 인아의 집으로 넘어 온 연후는 반쯤 잠긴 눈을 비비며 인아가 앉아 있는 소파로 걸어갔다. 생기가 넘치는 인아의 얼굴을 바라보던 연후는 인아의 머리 위에 팔을 얹었다. ‘연후야, 무거워ㅡ.’ 인아의 투정을 가볍게 무시한 연후는 인아가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는 건지 확인했다.
뭐야. 또 저 연예인이야? 1년 전부터 어떤 배우에 푹 빠진 인아는 1년 사이에 똑같은 사람이 나오는 드라마와 영화를 전부 다 섭렵했다. 연후는 비현실적으로 생긴 외모의 남자가 사랑이 넘치는 대사를 읊어대는 꼴을 보고 있으면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데, 인아는 그런 오글거리는 대사와 느끼한 얼굴이 진심으로 좋은 건지 매일 저 얼굴을 보느라 정신 줄을 놓고 있었다. 연후는 한숨을 내쉬며 인아의 손에 들린 리모컨을 빼앗아 TV를 꺼버렸다.
“… 에? 왜 꺼?”
“너 어제 한숨도 안 잤잖아. 제발 좀 자라. 응?”
“적어도 12시간은 못 잘 거야. 너야말로 지금은 출입 금지 아니야? 은성이가 알면 엄청 화낼 걸.”
인아는 평소엔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게 행동했지만, 일단은 흡혈귀이기 때문에 흡혈을 한 다음엔 거의 24시간 이상을 힘을 주체하지 못해 고생했다. 이성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잠을 못 잔다거나, 심할 경우 성욕이 넘친다던지 하는 방향으로 힘이 표출되곤 했기에 어떤 사고를 칠 지 몰라 평소보다 조금 더 조심해야했다.
그런 탓에 연후와 은성은 인아가 사람을 죽이고 온 날로부터 하루 정도가 지나기 전까진 인아의 집에 발을 들이지 않기로 인아와 약속했다. 인아가 연후와 은성에게 해를 가하진 않겠지만, 스스로가 어떻게 변할 지는 인아도 장담하지 못했기에 특별히 부탁한 일이었다.
“TV든 인터넷이든 전부 네 얘기로 떠들썩하더라.”
“… 말 돌리기는ㅡ. 뭐, 내가 워낙 인기인이잖아. 이번엔 쪽지까지 남겼으니까 더 난리가 났겠지.”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이고도 경찰에선 흔적 하나 발견 못 했잖아.”
“… 사람이 아니잖아. 흔적이 남는 게 더 이상한거야.”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인아는 몇 번이고 같은 질문에 이해할 수 없는 대답만 들려줬다. 이런 짓을 시킨 장본인이지만, 연후와 은성은 인아가 어떻게 사람을 죽이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인아가 알려주기를 거부했다.
인아는 괴물인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이것도 그 연장선이겠지. 하지만 연후는 아주 조금이라도 인아의 모습을 더 많이 알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들어오지 말라는 집에 들어오고, 알려주기 싫어하는 것들에 대해 물었다. 인아는 싫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연후에게 마음을 열지도 않았다.
“… 자, 이제 집에 돌아가. 여기 있으면 위험해.”
“….”
“응?”
“… 알겠어. 돌아갈게.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 연락해.”
‘위험해.’ 이건 인아의 말버릇이다. 진짜 위험하니 도망치라는 의미라기 보단, 더 이상 다가오지 말아달라고 선을 긋는 의미에 가까웠다. 인아가 이 말을 꺼낼 때면, 연후는 정말 진심으로 인아가 연후와 은성을 ‘구원자’라고 생각하는지 의심이 되었다.
세 사람이 함께 산 지 몇 년이나 지났지만, 아직까지 인아는 연후와 은성을 자신이 그은 선 안으로 들이려 하지 않았다. 연후는 오늘도 인아가 이 말을 꺼낸다면 화를 낼 생각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었지만, 상냥한 인아의 미소를 보고 있자니 그대로 말문이 막혔다. 역시 난 이 미소에 약하다니까.
연후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래, 오늘은 내가 봐줬다. 대체 몇 번이나 인아를 봐준 건지 셀 수도 없지만, 연후는 오늘도 마지막으로 인아를 봐주는 거라고 생각하며 인아의 집을 빠져나왔다. 집 밖으로 나와 새벽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하늘을 바라보던 연후는 깊게 심호흡을 하여 맑은 산 속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인아의 구원자가 된 지 벌써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3년이면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싶지만, 변한 것은 별로 없었다. 변한 것이라면 세 사람이 모두 깊은 산속에 숨어 사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 정도였다. 그래, 벌써 3년이구나. 이렇게 완전히 세상과 동 떨어진 곳에서 생활하다 보면 시간 감각이 무뎌지기 마련이다. 특히나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받지 않는 흡혈귀와 함께 생활을 하다보면, 이곳에서만큼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했다.
“… 날씨 한 번 더럽게 좋네.”
연후는 3년 전, 은성과 연후가 처음으로 인아를 만난 그 날을 떠올렸다. 인아는 두 사람의 팔을 붙들고 연후와 은성을 구원자라고 불렀다.
‘나를 구원하러 온 거죠… ? 드디어…, 나도…, 나도…, 구원을 받는 거야….’
마치 신을 대하듯 두 사람을 바라보는 인아의 눈빛을 연후는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었다. 우린 너를 이용하러 온 거야. 우린 구원자 같은 것이 아니야.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더 끔찍한 지옥이 펼쳐질지 모르는데, 어째서 우리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거야? 연후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들을 차마 내뱉지 못했다. 그 순수한 눈빛이, 실망과 고통으로 변질되어 버릴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연후와는 다르게 은성은 그 순수한 눈을 앞에 두고도 태연하게 사람을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 그 부탁을 듣고 인아의 눈빛이 흐려질까 두려웠지만, 연후의 걱정과는 다르게 인아의 눈빛은 달라지지 않았다. 인아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맹목적인 믿음. 인아의 눈빛에서 그런 믿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 눈빛은 은성과 연후의 예상과는 조금 다른 눈빛이었다. 처음 인아를 빼내오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만 해도 두 사람은 인아의 복수심을 자극할 생각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장난감 취급을 당하며 끔찍한 실험을 반복했으니, 당연히 그 마음엔 분노와 복수심이 가득하리라 생각했다.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할 게요…. 당신들을 위해서라면 수 백, 수천 명이라도 죽일 수 있어요….’
하지만 두 사람의 예상과는 다르게 인아의 마음속엔 인간을 향한 복수심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 마음속에 대체 무엇이 들었는지는, 3년이 지난 지금도 알 길이 없었다. 인아는, 우리를 구원자라고 부르면서 자신에 대한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알려준 적이 없었으니까ㅡ.
대체 어떤 생각으로 우리의 뜻에 따르기로 한 것인지, 정말 이 일을 좋아서 하는 것인지, 단 한 번도 입 밖에 꺼낸 적이 없었다. 인아는 그렇게 모든 감정을 자신의 마음속에 숨기고 입을 다물었다. 연후는 그런 인아가 답답하면서도 미치도록 안쓰러웠다.
한참 동안 사색에 잠겨있던 연후는 바로 옆에 마련된 연후와 은성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것은 TV를 켜 놓은 채로 연구에 몰두하고 있던 은성이었다. 쯧, 이럴 줄 알았다. 연후가 차려 놓고 간 아침 식사는 손도 대지 않고 컴퓨터만 들여다보는 은성을 한심스럽게 바라보던 연후는 은성 근처에 굴러다니던 리모컨으로 TV를 껐다.
“TV를 보든지 연구를 하든지 둘 중 하나만 해라.”
“… 거긴 지금 출입 금지잖아. 뭐 하러 갔다 온 거야?”
“출입 금지는 무슨. 위험은커녕 밤새 그 기생오라비 나오는 드라마만 주구장창 본 모양이더라.”
“그래도 인아가 싫어하잖아. 싫어하는 짓 좀 하지 마.”
“너야말로 이러는 거 인아가 알면 기겁을 하고 도망칠 걸?”
“… 인아가 모르겠어? 모른 척 하는 것뿐이겠지. 그건 암묵적으로 내 실험을 인정하는 거고.”
“실험 좋아하네. 안 되는 일 붙잡고 3년 동안 개고생 하는 게 무슨 실험이냐? 뻘 짓이지.”
“….”
“에휴, 됐다. 네가 언제는 내 말 들었냐. 그래도 밥은 좀 처먹고 해라.”
연후는 은성 앞에 음식이 담긴 쟁반을 내려놓으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은성은 밥을 먹을 생각은 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컴퓨터 화면만 바라 볼 뿐이었다.
“그래, 밥을 처먹든 컴퓨터 화면만 보다가 뒤지든 너 알아서 해라!”
“….”
“난 더 잘 거니까 깨우지 마. 또 지난번처럼 배고프다고 깨우면 죽여 버린다.”
“… 연후야.”
“… ?”
“이제…, 얼마 안 남았어.”
“….”
“설득으로 될 일이 아니라는 건 너도 알고 있잖아.”
“….”
“… 나는, 나는…, 우리 꿈을 이뤄주고 있는 그 아이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어.”
은성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 날 이후 감정이 죽어버린 사람마냥 딱딱한 얼굴로 딱딱한 말만 내뱉던 새끼가 꼭 이럴 때만 약한 척, 착한 척을 하더라. 너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고, 은성에게 한 마디 쯤 해주려던 연후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긁더니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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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K, 이 은성과 강 연후의 이야기>
** 3년 전 **
“… 이 근처 맞아?”
“그렇다니까! 분명 이 방에서 소리가 났다고 했단 말이야.”
“… 조용히 해, 걸리면 책임질 거야?”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3년 전 인아를 만났던 그 날보다 몇 달 전으로 돌아가야 했다. 은성의 아버지는 거물급 정치인이었고, 연후의 아버지는 은성 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정치적 파트너였다. 은성의 아버지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고, 그의 올바른 삶과 정치적 수완으로 인해 국민의 절반이 넘는 지지를 얻어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연후의 아버지는 은성의 아버지가 당선이 된다면 당연히 최측근으로써 일할 예정이었다.
은성과 연후의 가족들은 티끌 하나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고 올바른 삶을 살아왔다. 그렇기에 만약 은성의 아버지가 대통령의 꿈을 품지 않았다면, 두 가족의 삶이 통째로 뒤집힐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사건은 선거를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 터졌다. 큰 일이 있기 전 심기일전의 의미로 낚시를 하러 간 연후와 은성의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연후와 은성 역시 그 자리에 있었지만, 하늘이 도운 것인지 기적적으로 두 사람만 살아났다.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의 죽음으로 매스컴은 떠들썩했지만, 정작 이 사건의 생존자이자 목격자인 은성과 연후는 사고로 인해 거의 한달 정도를 혼수상태로 지내야 했다.
“근데 우리까지 공격하면 어떡하지?”
“… 이렇게 사는 것보다는 괴물 손에 죽는 게 훨씬 나아.”
사고가 일어나고 한 달 뒤, 은성과 연후는 어느 시골의 작은 병원에서 눈을 떴다. 그 근방을 지나던 한 목사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차 안에서 사람이 있는 것을 발견했고, 은성과 연후만 겨우 구해서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고 했다. 은성과 연후가 깨어난 것은 그 사건이 있고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기 때문에 대선은 이미 끝나 있었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은 은성과 연후의 아버지와 함께 삼총사로써 굉장히 친하게 지냈다가 대선 때문에 사이가 틀어졌던 한 정치인이었다.
인지도가 거의 없던 그 정치인의 지지율은 몇 명의 대선후보들 가운데에서도 꼴찌에 가까웠다. 그런데 갑자기 은성의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했고, 은성 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은성 아버지의 못 다한 꿈을 이루겠다며 여론 몰이를 한 그 정치인은 몇 주밖에 안 되는 기간 안에 은성 아버지의 표를 대부분 흡수했다. 그것뿐이던가. 상대편 진영에 계속된 의혹이 제기되면서 결국 상대편 진영의 표까지 얻은 그 정치인은 엄청난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겨우 한 달 사이에 완전히 뒤집혀 버린 세상에서 눈을 뜬 은성과 연후는, TV에서 연설을 하는 새로운 대통령의 얼굴이 아닌 대통령의 최측근 자리에 서 있던 한 남자의 얼굴을 보고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그 남자는, 커다란 트럭으로 두 가족의 차를 한꺼번에 들이받고, 혹여 라도 죽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확인을 하다가 움직임을 보이던 은성의 여동생을 총으로 쏴 죽인 그 남자였다.
“후우… 난 그래도 죽는 것보단 사는 게 더 좋은데.”
“… 속 편한 소리하고 있네.”
그래, 이 모든 것은 저 남자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일어난 살인이었다. 모든 사실을 안 연후와 은성은 미친 사람처럼 분노했다. 하지만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이미 대통령직에 오른 남자를 짓밟을 방법이 없었다. 물론 온 힘을 다하면 그를 법정에 세우고 법의 심판을 받게 할 순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을 몰살시킨 대통령을, 그냥 단순히 법정에 세우는 것으로는 연후와 은성의 분노가 풀릴 리 없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연후와 은성은 결국 대통령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아니, 대통령뿐만 아니라 저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사람들까지 몰살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연후와 은성은 방법을 찾아야했다. 하지만 찾고, 찾고, 또 찾아봐도 그들을 죽일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가족들이 남긴 재산을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은밀히 가져왔지만, 부모님이 남긴 많은 재산도 대통령을 죽일 수 있는 무기가 될 수는 없었다. 정말 폭탄이라도 품고 청와대로 뛰어들어야 하나, 고민하던 두 사람에게 그들을 돌봐주던 목사가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이 근처에 건물이 하나 있는데, 소문에 의하면 그곳에서 짐승인지 괴물인지 모를 것을 키우고 있단다. 매일 밤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도 들리고, 그곳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아줌마도 발버둥 치는 무언가를 억지로 붙잡아두고 이상한 약을 주입하는 걸 봤다고 했단다. 동네 사람들이 무서워서 밖에도 못 돌아다닐 지경인데, 혹시 모르니 너희들도 밖에 나가는 걸 당분간 삼가라는 말이었다.
“… 은성아.”
“… 찾았다.”
그 소문이 계기가 되었다. 은성과 연후는 소문 속 괴물이 자신들이 찾던 방법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건물 근처를 매일같이 서성였고, 그러다 건물로 들어가는 그 남자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두 사람의 가족을 몰살 시킨 장본인, 정 시문. 시문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 은성과 연후는 당장이라도 그를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완벽한 복수를 위해선 속 안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아야했다.
건물 안의 괴물과 시문이 무언가 연관이 있을 거라고 확신한 두 사람은 은밀하게 사람을 사서 시문의 뒷조사를 시작했다. 그러다 시문의 딸이 실종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딸이 실종이 됐음에도 시문이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탓에 사람들 사이에선 시문이 전 부인 사이에서 낳은 딸이 미워 외국으로 보내버린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돌고 있었다.
은성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 딸이 저 건물에 갇혀 있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연후는 그것을 어찌 확신 하냐며 회의적인 입장이었지만, 은성은 그 사실을 직접 확인해야겠다며 건물에 몰래 잠입하자고 말했다. 연후는 지나치게 의욕적인 은성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미 정 시문의 딸이 이 건물에 감금당했으리라 확신하고 있는 은성을 말릴 방법은 없었다.
“… 떨리냐?”
“응, 조금….”
결국 두 사람은 지금까지 세운 가설을 직접 확인해보기로 마음먹고 건물에 잠입했다. 어차피 사람이 많이 없는 동네인데다가 사람이 있어도 거의 다 노인네들뿐이라 그런지 건물의 경비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고, 그 덕분에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건물에 침입하는 것이 쉬웠다. 손쉽게 건물로 들어간 두 사람은 곧장 경비실로 가 경비를 기절시키고 마스터키를 훔친 뒤, 건물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종이가 가득 쌓여 있고 컴퓨터가 몇 대 씩 있는 방을 발견한 두 사람은, 홀리듯 그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종이를 집어 들어 읽어 내려가던 은성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이 건물에 있는 것이 짐승 따위가 아닌 흡혈귀라는 사실이었다.
흡혈귀라니. 피를 마시는… 괴물을 말하는 건가? 놀랍게도 그 안에 있던 종이 자료부터 시작해 컴퓨터에 저장된 자료까지 모두 흡혈귀에 대한 잔혹한 실험의 결과물을 적어 놓은 것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모든 자료를 읽을 수 없던 두 사람은, 일단 그 방을 빠져나왔다.
흡혈귀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지만, 이 연구소 사람들이 단체로 망상증에 걸린 것이 아니고서야 없는 흡혈귀를 잡아다가 이렇게 방대한 양의 자료를 뽑아낼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흡혈귀의 프로필이 결정적인 증거였다.
컴퓨터 파일들 중 맨 앞에 저장되어 있던 흡혈귀의 프로필에는, 정 시문의 딸로 알려진 정 인아의 개인정보가 담겨 있었다. 그렇다면, 그 수많은 자료 사진들 속에 있는 멍투성이에 미라처럼 뼈가 다 드러나 있는 사람이 정 인아라는 건가?
프로필 사진 속 아름다운 외모의 여자와는 사뭇 다른 끔찍한 몰골을 떠올린 은성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냈다. 어쨌든, 모든 일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이젠 당사자를 찾아가서 직접 확인을 해야겠지. 은성과 연후는 곧장 청소부 아주머니께서 인아를 봤다는 방으로 향했다.
“… 이제 문 연다.”
“ㅃ…, 빨리 열어.”
그리고 지금, 방문 앞에 도착한 은성과 연후는 방 안에 있을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에 떨면서 문고리를 붙잡고 있었다. 은성은 정말 이 방 안에 있는 것이 흡혈귀라면 그들을 죽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죽을 수도 있다는 연후의 경고가 갑자기 떠올랐다. 하지만 이 방 안에 있는 괴물이 우리들의 복수를 이뤄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봤는데 어떻게 이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뺄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은성은 마음을 굳게 먹고 조심스럽게 괴물이 있는 방문을 열었다.
“… ?”
“… !!”
방 안에는 겨우 한 사람 누워 있을 정도의 침대와, 그 침대 위에서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는 한 여자밖에 없었다. 그 여자는 짐승도 아니었고, 괴물은 더 더욱 아니었다. 해골처럼 마른 몸에선 생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땐 두 사람 다 이 방에 시체가 누워 있는 줄 알았다.
사진 속 여자의 모습보다 훨씬 더 처참한 여자의 몰골은 이 여자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시체처럼 누워있던 여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제야 은성과 연후는 이 여자가 살아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조심스럽게 여자에게 다가간 은성은 더욱 더 조심스러운 손길로 여자에게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순간, 여자의 손이 은성의 팔을 붙잡았다. 깜짝 놀란 은성은 여자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힘이 어찌나 센 지, 아무리 뿌리치려 해도 도저히 여자의 팔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덩달아 놀란 연후까지 합세해 여자의 손을 은성의 팔에서 떼어 내려는데, 그 순간 여자의 입이 열리며 개미 소리보다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ㅍ….”
“… ?”
“… ㅁ, 뭐야?”
“… ㅍ…, 피….”
피? 피를 어쩌라고? 연후는 영문 모를 여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다시 여자의 손을 떼어내려는 데 집중했다. 그런데 연후와는 다르게 은성은 그런 여자의 알 수 없는 말에 무언가 떠올랐는지 연후에게 잠시만 멈춰보라고 말한 뒤 여자에게 붙잡히지 않은 반대 쪽 손을 물어서 작은 상처를 냈다.
피가 한 방울, 두 방울 씩 떨어지기 시작하자 생기라곤 찾을 수 없던 여자의 눈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 여자의 눈빛을 보고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진 은성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 피를 여자의 입에 떨어뜨렸다.
“ㅇ, 야! 뭐 하는 거야!?”
“… 조용히 있어 봐. 이 여자가 지금 피를 달라잖아.”
연후는 그제야 상황이 파악됐다. 흡혈귀니까 피를 달라고 한 거구나. 근데 진짜 이 미라 같은 여자가 흡혈귀가 맞긴 한 거야? 혼란스러움에 인상을 찌푸리던 연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에서 펼쳐지는 믿을 수 없는 장면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 방울, 두 방울, 은성의 피가 여자의 입술을 타고 흘러가 입 속으로 들어가자, 시체나 다름없던 여자의 몸에서 점점 생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은 몸은 금세 살이 차올랐고, 푸석거리던 머리카락에서 윤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이게,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연후는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두 손으로 입을 막고 고개를 돌려버리려는데, 은성의 손이 연후의 팔을 붙잡았다.
“진짜… 였어.”
“… ㅇ…, 은성아….”
“하…, 이런 엄청난 걸 숨겨두고 있었을 줄이야….”
“감사…, 합니다.”
한창 놀라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있던 두 사람 사이를 낯선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여자의 입에서 방금 전의 엉망으로 갈라진 목소리가 아닌 사람의 목소리라곤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청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이다. 놀라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여자의 생김새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던 연후는 그제야 여자의 달라진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흡혈귀? 뱀파이어? 그러니까, 이 여자가…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수군거리던 괴물… ? 연후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대체 이 여자의 어디를 봐야 그런 괴물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흡혈귀라고 불리는 여자의 외모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나 여신을 떠오르게 만들었지, 괴물의 모습으로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이 여자는 피 몇 방울에 시체에서 여신으로 바뀌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물이라고 생각할 만하지 않은가. 연후는 머리를 굴리면 굴릴 수록 이 모든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 나를 구원하러 온 거죠… ?”
“… 뭐?”
“… 드디어…, 나도…, 나도…, 구원을 받는 거야….”
구슬처럼 맑고 영롱한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신을 대하듯 연후와 은성을 바라보는 여자의 눈빛에 연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매일 밤을 짐승처럼 울부짖고, 끔찍한 실험을 당해 온 괴물이 겨우 이런 일로 눈물을 흘리다니.
그 능력이나 외모를 봐선 여자 쪽이 훨씬 더 신에 가까운데, 피 몇 방울 마시게 해준 우리를 ‘구원자’ 취급 하다니. 연후는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한 가지 만큼은 확실했다. 이 괴물은 우리만큼, 아니, 어쩌면 우리보다 훨씬 더 가여운 존재가 분명했다. 그래서 연후는 차마 여자에게 우리의 복수를 도와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분명 여기 오기 전, 이 안에 있는 생물이 지능을 가진 생물이라면 분명 자신을 이렇게 만든 인간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들끓을 테니 그 복수심을 자극하자고 얘기한 것은 연후였다. 하지만 연후는 이 가엾고 순수한 여자에게 우리가 그런 짓을 해도 되는 것인지 망설여졌다. 하지만 은성은 연후와는 생각이 달랐다. 여자의 아름다운 외모도, 순수한 눈빛도, 은성의 복수심을 상쇄시키진 못했다.
“그래, 우린 널 구원하러 왔어.”
“… 이 은성!”
갑작스러운 은성의 발언에 연후가 은성을 말리려 했지만, 은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너를… 누가 이렇게 만든 지 기억해?”
“….”
“… 화나지 않아? 이렇게 너를 감금하고, 너에게 말 못할 끔찍한 짓을 했잖아.”
“… 그게… 당신들이 원하는 일인가요?”
“… 뭐?”
“… 제가… 화를 내길 원하고 있잖아요.”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여자의 눈빛에 은성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그런 은성을 바라보다가 힘없이 웃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눈빛… 증오로 가득하네요. 그 증오 때문에 절 찾아오신 건가요… ?”
“….”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아요.”
“… 그래, 난 네가 우리 안의 증오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 그런가요?”
“너를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 줄게. 그 대신, 우리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을 죽여줘.”
“… 그래요.”
“… ?”
“…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할 게요…. 당신들을 위해서라면 수 백, 수천 명이라도 죽일 수 있어요….”
여자는 처음과는 다르게 조금씩 현실감각이 돌아오는 듯 보였다. 물론, 은성과 연후를 위해 수천 명이라도 죽일 수 있다는 말을 꺼내는 것으로 보아 완전히 정상은 아닌 것 같아 보였지만, 구원이니 어쩌니 할 때 보단 훨씬 상태가 좋아 보였다. 멍한 눈으로 연후와 은성을 훑어보던 여자는 엉망으로 흐트러진 옷을 대충 정돈한 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 가죠, 곧 사람들이 몰려들 거예요.”
“… 경비는 이미….”
“겨우 경비 한 명으로 괴물을 감시할 수 있겠어요? 이 방에 들어오기 전까진 CCTV가 없지만, 이 방엔 절 감시하기 위한 CCTV가 있어요.”
“… 뭐? ㄱ, 그렇다면… !”
“… 곧 여기로 들이닥치겠죠.”
“… !!!”
“걱정 말고 먼저 빠져 나가요. 지금 상태에선 여기 사람들은 제 상대가 되지 못해요.”
“넌… 안 가?”
“1년 동안 저에 대해 연구한 자료가 있어요. 그걸 먼저 찾아야 해요.”
겨우 피 몇 방울에 저렇게까지 사람이 변해도 되나 싶었지만, 연후와 은성은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여자의 말에 다급히 건물을 빠져나갔다. 여자의 말처럼 연후와 은성이 건물을 빠져 나가 주변 숲에 몸을 숨기자마자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건물로 들이닥쳤다. 놀란 연후는 여자를 구해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고, 은성은 그런 연후를 붙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저것도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 복수는 꿈도 못 꿔.”
“… 야, 지금 사람 목숨 가지고 시험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조용히 해. 겨우 이런 곳에서 죽고 싶은 거야?”
“… 이 은성!!”
“분명 걱정 말라고 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 많네요.”
“… !!”
“… !?”
그대로 건물을 빠져 나왔어도 여기까지 오는 데 10분은 족히 걸렸을 텐데, 그 때는 연후와 은성이 밖으로 나와 몸을 숨긴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런데, 여자는 그 짧은 시간 안에 무슨 짓을 한 건지 입가에 피를 잔뜩 묻힌 채로 손에 USB 하나를 들고 은성과 연후 앞에 서 있었다.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인아의 능력에 연후와 은성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건물과 여자를 번갈아 바라봤고, 여자는 그런 두 사람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어때요? 이 정도면… 마음에 드나요?”
“… 하…, 하하…, 대단해…, 믿을 수가 없어….”
“아, 그리고 이건 제 정보가 담긴 자료예요. 가지고 있으면 쓸모가 있을 거예요.”
“네가 직접 가지는 게 낫지 않아…?”
“흡혈귀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건 당신이지, 제가 아니잖아요.”
“….”
“자, 그럼 가 볼까요?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을 완전히 죽인 게 아니라서 이제 곧 이 근방이 엄청 시끄러워질 거예요.”
연후와 은성은 여자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많았지만, 단 한 마디도 물어 볼 수 없었다. 이토록 강한 힘이 있으면서, 어째서 지금까지 그 모든 실험을 얌전히 당하기만 한 거야? 우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째서 선뜻 우리를 도와주겠다는 거야? 하지만 두 사람은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은, 이 여자가 지금까지 안개 속에 갇혀버린 것 같았던 두 사람의 복수의 실마리가 되어 줄 수 있을 거라는 사실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