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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꾸물꾸물 올라오는 정체 모를 감정 때문에 불쾌지수가 이빠이 올라서 닥치고 잤습니다. 밖으로 나갔더니 내게 살랑살랑 부채질을 하는 바람이 고맙네요. '삼선 볶음밥'을 테이크 아웃 하려는데 뚱뚱한 카운터 이모가 두 번이나 '파른'을 말합니다. "복음 바-압!" 장내가 싸해졌는데 이모가 "알았습니다" 로 부드럽게 마무리해 줘서 겨우 상황을 종료했습니다. 딱 '밥' 한 글자 어텐션 했을 뿐이라고. 6시 경에도 재혁이가 누룽지를 만들어서 왔는데 설렁탕 값 내고 바로 집에 가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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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 디스는 내가 했는데 6남매가 아무도 내게 연락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염병할! 학교-군대-교도소-사회-아내가 내놓은 나는 이제 집에서마저 내놓은 자식으로 가로를 닫을 모양입니다. 나는 독고다이다! 헤겔은 욕구가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장조차도 개인의 성장을 다듬는 역할을 하며 누차에 걸친 다듬기의 산물임을 지적했습니다. 시장은 이기주의로 움직이지만 타인의 이익을 배려하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 아닙니까?
2.
<빌둥>
사람은 어떻게 사람이 되어가는가? 교양이란 많이 아는 것일까, 아니면 깨지고 수정되면서 더 넓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일까? 꾸물꾸물 올라오는 정체 모를 감정 때문에 불쾌지수가 이빠이 올라 닥치고 잤습니다. 밖에 나가니 살랑살랑 부채질하는 바람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삼선 볶음밥을 테이크아웃하려다 카운터 이모의 “파른”을 두 번 듣고 결국 "볶음밥-압!" 하고 ‘밥’ 한 글자에 어텐션을 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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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내가 순간 싸해졌지만 이모가 “알았습니다” 하고 부드럽게 받아줘 사건은 종결됐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런 사소한 마찰도 빌 둥(Bildung)의 한 장면인지 모릅니다. 헤겔에게 빌둥은 흔히 ‘교양’이라고 번역되지만 단순히 책을 많이 읽고 지식을 많이 쌓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원래 의미에 더 가까운 표현은 형성, 자기 형성, 되어감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완성된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사회, 노동과 갈등, 실패와 부정을 통과하면서 비로소 자신을 만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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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빌둥의 핵심은 나를 벗어나는 경험입니다. 내 욕구만 따르면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떡볶이를 먹고 싶어도 친구는 야구장에 가고 싶어 하고, 내가 “볶음밥”을 정확하게 알아듣기를 기대해도 상대방은 “파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타인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바로 그 불편함이 나를 형성합니다. 헤겔은 시장조차 이러한 자기 형성의 공간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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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은 얼핏 보면 각자가 자기 욕망과 이익을 추구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내 이익만 고집해서는 시장 자체가 돌아가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다른 사람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나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회란 개인의 자유를 단순히 억압하는 곳만은 아닙니다. 개인의 욕망을 다듬어 보편적인 인간으로 만드는 학교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빌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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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정신현상학>도 거대한 의미에서는 정신의 빌둥을 다룬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신은 처음부터 진리를 알고 출발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고 나아갔다가 현실과 충돌하고, 모순을 발견하고, 실패합니다. 그러나 실패는 낭비가 아닙니다. 헤겔에게 실패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계기입니다. 이전의 생각이 부정되지만 완전히 폐기되지는 않습니다. 그 경험은 다음 단계 안에 보존됩니다. 이것이 Aufheben, 지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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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사람은 이렇게 성장합니다. <확신 → 충돌 → 부정 → 성찰 → 더 넓어진 자기> 그래서 빌둥은 변증법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인간은 편안한 상태에서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이 깨지는 경험을 통해 성장합니다.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을 만나고,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전의 나를 넘어설 때 비로소 정신이 형성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양 있는 사람’은 자기 확신을 수정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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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배웠지만 자기 생각밖에 모른다면 헤겔적 의미에서는 오히려 교양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살아가면서 수없이 깨지고도 그 경험을 생각으로 바꾸고, 타인의 관점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욕망을 다듬어온 사람이라면 이미 훌륭한 빌둥의 길을 걷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인간관계도 빌둥입니다. 가족에게 연락이 오지 않는 서운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독고다이다!"이라고 외치고 싶은 순간에도 타인의 부재는 나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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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관계에서 무엇을 기대했는가? 가족이라는 이름만으로 서로를 당연히 생각하지 않았는가? 외로움을 분노로만 소비할 것인가, 아니면 나 자신과 관계를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로 만들 것인가? 헤겔식으로 말하면 타자는 나를 방해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나를 나 자신으로 만들어주는 존재입니다. 혼자서는 내가 누구인지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타인의 인정과 거절, 충돌과 화해를 통과하면서 나는 나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빌둥은 ‘완성’보다 과정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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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한 번 만들어지고 끝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에게 부정될 수 있고, 어제의 실패가 몇 년 뒤 새로운 의미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버렸다고 생각했던 경험이 훗날 다른 형태로 돌아와 나를 살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기서 헤겔과 포스트모더니즘이 묘하게 만납니다. 헤겔은 정신이 모순을 통과하며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간다고 보았습니다. 포스트모던 철학은 거기에 한 가지 질문을 덧붙입니다.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간다면서 무엇을 버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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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라면 더욱 집요하게 묻습니다. 상처와 실패와 타자의 목소리를 너무 쉽게 ‘성장 과정’으로 포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고통이 나를 성장시켰다고 아름답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상처는 여전히 상처로 남습니다. 그래서 21세기의 빌둥은 헤겔을 조금 수정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장이란 모든 모순을 깨끗하게 해결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해결되지 않는 것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넓어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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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부활도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부활은 십자가를 지워버리지 않습니다. 부활한 예수의 몸에는 여전히 못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고 해서 이전의 상처가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상처까지 포함하여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그것이 어쩌면 가장 깊은 빌둥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둥은 인생을 매끈하게 만드는 기술이 아닙니다. 삐걱거림을 의미로 바꾸는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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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잘못 전달된 순간도, 가족 때문에 서운한 밤도, 내가 옳다고 믿었던 생각이 깨지는 경험도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생각하고, 견디고, 수정하고, 다시 살아낼 때 경험은 교양이 됩니다. 결국 헤겔이 말하는 인간은 ‘이미 된 사람’이 아니라 <되어가는 사람>입니다. 진리도 단숨에 얻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도 한 번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3. <변증법><아우프헤벤:지양>
진리도 움직이는가? 진리가 완성된 답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는 과정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진리라고 부를 수 있을까? 21세기의 대안을 고민하며 포스트모더니즘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난데없이 슈퍼 히어로 <헤겔>이 핵심 인물로 등장합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현대철학은 헤겔을 계승했든 거부했든 끊임없이 헤겔과 씨름하면서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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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도, 니체 이후의 철학도, 아도르노도, 들뢰즈도, 데리다도 어떤 의미에서는 ‘헤겔 이후’의 철학자들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헤겔은 칸트 이후 독일관념론을 집대성하면서 인간 정신이 Bildung(빌둥, 교양·형성)을 통해 자신을 형성해가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헤겔 철학은 칸트가 멈춰 선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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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인간이 사물을 인식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알 수 있지만, 인식 조건을 떠난 ‘물 자체(Ding an sich)’를 그대로 알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 이성의 권한에 한계선을 그어놓은 셈입니다. 그런데 헤겔은 그 경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만약 ‘물 자체’를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둔다면 그것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모순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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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 저편에 숨어 있는 어떤 신비한 실체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정신이 자기모순을 통과하면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과정입니다. 그 운동을 이해하는 핵심이 바로 <변증법>입니다. 흔히 변증법 하면 ‘정-반-합’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헤겔 자신은 자신의 변증법을 단순한 ‘정-반-합’ 공식으로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이를 단순히 피히테가 만든 공식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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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히테에게 자아와 비아의 대립 구조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날 교과서적으로 사용하는 thesis-antithesis-synthesis라는 삼단 도식은 후대에 헤겔 철학을 설명하면서 굳어진 표현에 가깝습니다. 이 점은 꽤 중요합니다. 헤겔의 변증법은 세 칸짜리 공식이 아니라 사태 자체가 자기 안의 모순 때문에 움직이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떡볶이를 먹고 싶은데 친구는 야구장에 가고 싶어 한다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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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정’은 떡볶이, ‘반’은 야구장, ‘합’은 ‘야구장에서 떡볶이를 먹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헤겔의 변증법과 별 관계가 없습니다. 둘은 단순히 서로 다른 욕망이지, 하나가 자기 내부에서 필연적으로 자신의 부정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변증법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반대가 아니라 내적 모순입니다. 밀알의 비유로 생각하면 조금 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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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밀알은 그대로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잃어버림으로써 싹을 틔우고 줄기와 잎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줄기와 잎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다시 사라지면서 새로운 밀알을 만들어냅니다. 처음의 밀알은 없어졌지만 완전히 없어진 것도 아닙니다. 새로운 밀알 안에서 다른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헤겔의 유명한 개념 Aufheben(아우프헤벤)이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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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어가 재미있는 까닭은 서로 반대되는 뜻을 동시에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없애다·폐기하다’라는 뜻과 ‘보존하다·간직하다’, 나아가 ‘들어 올리다’라는 의미가 겹쳐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어에서는 흔히 지양(止揚)이라고 번역합니다. 즉 변증법적 변화란 단순한 파괴가 아닙니다. 부정하면서 보존하고, 보존하면서 넘어서는 운동입니다. 이 점에서 변증법은 아리스토텔레스적 형식논리와 다른 관심을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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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논리에서 동일률과 모순율은 사고의 일관성을 지키는 기본 원리입니다. A는 A이며, 동일한 조건에서 A와 비-A가 동시에 참일 수 없습니다. 헤겔도 이러한 논리 자체를 단순히 폐기하지 않습니다. 다만 현실의 존재와 역사를 이해하려면 고정된 동일성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봅니다.현실의 사물은 자신 안에 긴장과 부정을 품고 있으며 바로 그것 때문에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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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헤겔에게 모순은 단순한 사고의 실수가 아닙니다. 운동의 계기입니다. 존재는 완성된 돌덩어리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부정을 통과하면서 다른 것이 됩니다. 여기서 <정신현상학>이 중요해집니다. 인간 정신은 처음부터 절대적 진리를 손에 쥐고 출발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을 진리라고 생각했다가 그 진리 안에서 모순을 발견하고, 그 모순 때문에 이전의 인식을 넘어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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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식 역시 다시 자신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정신은 그렇게 실패하고 부정당하면서도 그 실패를 버리지 않고 다음 단계 속에 보존합니다. 그러므로 헤겔에게 오류는 진리의 단순한 반대가 아닙니다. 오류를 통과하는 과정 자체가 진리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것이 Bildung, 곧 정신의 형성이라는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교양이란 정보를 머릿속에 쌓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던 확신이 타자와 현실을 만나 깨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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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정을 견디면서 이전의 나보다 넓은 정신으로 형성되는 과정입니다. 소크라테스식 문답과 ‘디스커션’ 역시 이런 의미에서 흥미롭게 연결할 수 있습니다. 대화는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정답을 상대방에게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의 모순을 발견하게 만드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헤겔의 후예들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특히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은 헤겔적 화해를 의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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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부정과 고통이 더 높은 단계의 전체성 안에서 결국 의미를 획득한다면, 역사에서 실제로 희생된 타자들의 고통마저 ‘역사 발전을 위한 과정’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닐까? 아우슈비츠의 죽음도, 전쟁도, 학살도, 억압도 결국 절대정신의 발전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도르노는 바로 여기서 멈춥니다.
2026.8.22.sat.악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