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동은 남아 있는지라
십이월이 한복판인 셋째 주말을 맞았다. 이번 주는 수요일을 뺀 월화와 목금은 비가 왔는데 겨울비치고는 강수량이 제법 되었다. 엄동설한이라는 말이 무색하리만치 봄날처럼 포근하고 비마저 넉넉하게 내려 삼동을 건너뛰고 봄으로 직행하는가 싶기도 했다. 계절의 이정표에는 엿새 뒤 동지가 다가오고 해가 바뀌면 소한 대한이 대기하고 있어 앞으로 닥칠 추위는 가늠할 수가 없다.
어제와 그제는 비가 와 도서관에 머물다 토요일 아침은 산행 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의림사 방면 농어촌버스를 타려고 마산역으로 향했다. 광장으로 오르는 노변은 바람이 일며 성근 빗방울이 듣는 데도 주말 아침이면 서는 노점이 펼쳐졌다. 정한 시각 출발한 74번 버스를 타서 어시장과 댓거리를 거쳐 밤밭고개를 넘었다. 진동 환승장에 들린 후 예곡을 지나 의림사 산문에 내렸다.
일주문에서 차피안교 건너 절집으로 드니 종무소 추녀 끝 매달린 풍경이 법당 뜰 석탑과 염불당이 구도 안에 들어와 피사체로 삼았다. 이른 아침임에도 범종각과 공양간을 비롯한 경내 건물을 중수하는 인부와 장비의 소음이 들려오고 스님이나 보살의 인기척은 없었다. 남국의 파초는 월동에 들었고 고목에 달린 모과 열매를 치올려보고 절집을 나와 인성산 비탈 임도를 따라 올랐다.
우거진 활엽수림이 나목으로 겨울을 나는 골짜기는 이번에 내린 비로 불어난 계곡물이 하얀 포말로 부서져 소리를 내면서 흘러갔다. 올겨울 들어 된서리가 내렸을 법도 했지만 그간 따뜻한 날씨로 가을을 수놓았던 쑥부쟁이는 아직 꽃잎을 달고 있는 송이가 몇 보였다. 절집에서 인성산 북향 비탈로 뚫린 임도를 따라 해발고도를 점차 올려 가면서 서북산이 뻗쳐온 산마루로 향했다.
가을 이후 모처럼 서북산이 품은 산기슭을 걸었다. 임도에서 바라다보인 건너편 수리봉은 의림사를 감싼 지맥으로 인성산과 나란히 바다로 향해 뻗어 나갔다. 그동안 낙동강 강가로 나간 산책이나 창원천과 도심 주변 공원에서 맴돌다 교외 산자락으로 들어 숲길을 걸으니 맑은 공기가 주는 청량감이 한층 더했다. 인적 없는 산에서 멧돼지가 나타날까 봐 사주 경계는 소홀할 수 없었다.
수리봉이 인성산과 맞닿는 산마루에 이르니 광암 바다가 드러났다. 날이 개는 하늘가에 점점이 뜬 거제의 섬이 바다를 에워싸 산정 호수를 보는 듯했다. 산마루로 오르면서 길섶에는 아까 본 쑥부쟁이에 이어 꽃잎이 하얀 구절초도 한 송이 발견해 한겨울 보기 드문 자연 현상이었다. 수리봉 이정표가 선 바윗돌에서 배낭에 넣어간 고구마를 꺼내 먹었더니 장갑을 벗은 손이 시렸다.
인성산 산마루에서 부재고개로 향해 서북동과 부재골 갈림길에서 후자를 택해 비탈로 내려섰다. 부재골은 낙남정맥 서북산이 여항산으로 뻗쳐간 깊숙한 산골이다. 임도를 벗어날 즈음 바위에는 계곡물이 포말을 일으키며 소리 내어 흘렀다. 부재골에는 외지인이 지은 전원주택이 몇 채 나왔는데 그 가운데는 내가 예전 근무지에서 연이 닿는 동료가 텃밭을 일구며 주말이면 찾아갔다.
신농씨처럼 농사를 잘 짓는 옛 근무지 퇴직 선배를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재작년 겨울 들머리 부재골을 내려가다 애써 가꾼 무를 뽑아준 사례로 여름에 말려 챙겨간 영지버섯을 몇 조각 건네주었다. 선배는 이번에도 아직 얼지 않은 청이 달린 무를 한 무더기 안겨주어 무겁게 들었다. 선배와 절친한 사이이기도 한 다른 한 분이 와병 중이라는 소식을 접해 마음이 무거웠다.
예전 근무지 퇴직 선배와 헤어져 미천마을로 내려가 기미 만세 운동 때 희생된 조계승 의사 사당 앞에서 시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무에 달린 청을 잘라 배낭을 정리하고 냇가로 내려가 손을 씻으려니 가지를 드리운 개나리는 노란 꽃잎을 활활 펼쳐 봄날로 착각하게 했다. 냇물에 손을 담가도 손은 시리지 않았지만, 천변에서 올라와 버스를 기다릴 때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23.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