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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르트 도굴사건(1868년)-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南延君墳墓盜掘事件)
1868년(고종 5), 유대계 독일의 상인이자 자칭 인류학자인 에른스트 야코프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 1832~1903)가 충청도 덕산(德山)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생부 남연군 구(球)의 묘를 도굴하려다가 실패한 굴총(掘塚)사건이다. 덕산 굴총사건이라고도 한다.
오페르트는 자신을 영국군이라고 속여서 두 차례나 조선을 방문한 적이 있었고, 세 번째 방문 이후의 경험담까지 합쳐서 뒤에 언급된 회고록을 썼다.
2. 사건의 배경
도굴의 계기는 1866년 2차에 걸친 조선과의 통상요구에 실패하고 돌아갔던 것. 이후 오페르트는 1868년 4월 제3차 한반도 답사를 계획, 한때 상하이 미국영사관에 근무한 미국인 모험가 프레더릭 헨리 배리 젠킨스(Frederick Henry Barry Jenkins)를 자본주로 하고, 프랑스인 선교사 스타니슬라스 페롱(Stanislas Féron,1827~1903) 신부를 통역관 겸 보좌관으로 대동하여차이나호(號)에 백인 8명, 말레이시아인 20명, 조선 천주교도 몇 명, 청국인 승무원 약 100여 명을 태우고 상하이를 출항하였다.
한국에 도착한 그들은 북독일 연방 국기를 게양하고 충청도 홍주목(洪州牧) 행담도(行擔島)에 와서 정박하였다가, 구만포(九萬浦)에 상륙하여 러시아 군병이라 자칭하면서 함부로 총칼을 휘둘러 지방관헌조차도 접근하지 못하게 한 다음, 어둠을 타서 덕산 가동(伽洞)에 있는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덕산군수 이종신(李鍾信)과 묘지기 및 몇몇 주민이 이를 제지하려 하였으나 무장한 서양인을 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날이 밝아 주민들이 몰려오며 내하(內河)의 퇴조(退潮) 시간이 임박해지자 이들은 관곽(棺槨)까지 파낸 것을 그대로 버려두고 구만포로 퇴각하였다. 이 부분에서 오페르트 본인의 회고와 이종신이 상부에 올린 보고가 엇갈리는데, 오페르트는 "이종신이 나를 막아서자 나는 스스로를 러시아 군병이라 일컬으며 위협했고, 겁을 먹은 이종신이 남연군 무덤으로 가는 지름길까지 가르쳐 주었다."고 했다.(...) 반면 이종신은 "한밤중에 오페르트와 그의 부하들이 관아에 쳐들어와서 파괴행각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오페르트가 그렇게 분탕질을 할 시간이 없었다. 따라서 벌받기 싫었던 이종신의 조작일 가능성이 있다.
땅을 파는 과정에 대해서도 "조선인들의 도구를 빌렸고(!) 이종신을 비롯한 조선 관헌들은 얼씬도 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저항도 받지 않았다"고 오페르트는 회고했으나, 이종신은 "내가 군병을 이끌고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지만 총기를 겨눠서 위협하는 통에 물러섰다"고 주장했다. 어쨌거나 확실한 것은, 5시간 동안의 굴총 끝에 석회를 만난 오페르트 일당은 도굴을 단념했다는 것이다.
2일간에 걸친 이 사건이 관찰사 민치상(閔致庠)에게 알려지자 즉시 군관 100여 명을 출동시켜 추적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또 경기도 영종진(永宗鎭)에 이르러 대원군에게 올리는 글을 제시하면서 영종진을 습격하다가 실패하고 돌아가 버렸다.
오페르트가 보낸 글은 다음과 같다.
대원군 좌하(座下)께.
삼가 말하건대 남의 무덤을 파는 것은 예의가 없는 행동에 가깝지만 무력을 동원하여 백성들을 도탄 속에 빠뜨리는 것보다 낫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본래는 여기까지 관을 가져오려고 하였으나 과도한 것 같아서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예의를 중하게 여기는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군사와 백성들이 어찌 석회(石灰)를 부술 기계가 없었겠습니까? 절대로 먼 데 사람의 힘이 모자라서 그만두었으리라고 의아하게 생각하지 말 것입니다.
귀국의 안위(安危)가 오히려 귀하의 처리에 달려 있으니 만약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있거든 대관(大官) 1원(員)을 차송(差送)하여 좋은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일 미혹에 빠져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나흘이 지나면 먼 데 사람들은 돌아갈 것이니, 지체하지 말 것입니다. 몇 달이 되지 않아서 반드시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우환을 당할 것이니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수군 제독 오페르트.
이 소식이 중앙에 전해지자 분노한 대원군은 양이(洋夷)의 추적을 명하는 동시에, 이러한 궤변은 필시 천주교도의 내응(內應) 향도(嚮導)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국내에 남아 있는 천주교도를 더욱 엄중히 단속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편지에 대한 답장은 영종 첨사 심효철이 "어디다 대고 우리 신성한 대원군 합하께 망발질이야? 어디 맞설 테면 맞서 보자. 진짜 화포 맛이 어떤지 똑똑히 보여주겠다! 그리고 우리는 이 따위 망령된 글을 받을 수 없어!!"라면서 큰소리를 치며 편지와 함께 돌려보내버렸다.
“우리나라 대원군(大院君) 합하께서는 지극히 공경스럽고 존엄한 위치에 계신다. 이런 글을 어떻게 전달하겠는가? 그래서 도로 돌려보낸다. 귀국과 우리나라의 사이에는 애당초 소통이 없었고 또 서로 은혜를 입었거나 원수진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 덕산(德山) 묘소에서 저지른 변고야말로 어찌 인간의 도리상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또 방비가 없는 것을 엿보고서 몰래 침입하여 소동을 일으키고 무기를 약탈하며 백성들의 재물을 강탈한 것도, 어찌 사리상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우리나라 신하와 백성들은 단지 힘을 다하여 한마음으로 귀국과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것을 다짐할 따름이다.
보내온 편지에서 좋은 대책을 도모하라고 한 것은 바로 사류(邪類)를 위하여 그들을 대신해서 좋은 말로 용서를 구하려는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는 바로 단군(檀君)과 기자(箕子)로부터 몇 천 년 동안 이어온 예의의 나라인데, 어찌 이단에 유혹되어 그것을 없애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위정척사(衛正斥邪)를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이것으로써 보면 우리나라의 비적 무리 가운데 법의 그물에서 빠져나간 자들이 당신네 배로 도망가서 백방으로 부추겨서 그렇게 된 것이다. 남의 부추김을 받아서 이유 없이 소동을 피우는 것은 귀국을 위하여 매우 좋지 못한 일이다.
몇 달 뒤에 설사 전선(戰船)이 온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도 방비할 대책이 있다. 대원군 합하께서 국정을 확고하게 잡고 계신 데 대해서는 내가 잘 알고 있다. 이제부터 표류해 오는 서양 각국의 배에 대해서는 먼 곳의 사람을 회유하는 도리로 대우하지 않을 것이니, 다른 말을 하지 말라. 이렇게 알라.”
뭐 일단 말이 못 받는다는 퍼포먼스지, 그 내용이 실록에 남은 것으로 볼 때, 편지의 내용은 조정에 전해졌고, 대원군도 이 내용을 피꺼솟하며 읽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도굴에 가담한 천주교인들은 3년 후에 체포되어 모두 능지되었다.
이들의 항해목적은 뒷날 젠킨스가 이 사건으로 법정에서 진술한 바에 의하면 -
① 조선왕국과 통상조약의 체결을 교섭하는 것,
② 조선의 사신 1명을 배에 태워 세계일주여행을 시키자는 것,
③ 이와 같이 하여 은둔국인 조선을 세계에 소개하자는 것
- 등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들은 조선인이 시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관을 미끼로 조약을 체결하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젠킨스가 법정에서 진술한 것과는 달리 오페르트와 페롱은 남연군묘의 도굴 자체에 목적을 두고 방문했다는 의견 또한 존재한다. 페롱 신부는 상해로 도망친 조선인 천주교도 7명(최선인, 심순녀 등)에게 조선인들은 선친의 분묘가 도굴당하는 것을 가장 수치스러워한다며, 이를 이용해 천주교도들이 당한 박해를 복수하자고 제안한 것을 받아들여 애초에 조선 방문을 남연군묘 도굴에 목적을 두었었다는 주장이 있으며, 오페르트는 2차 조선 방문 때에 통상요구가 거절된 것의 원인을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생각했고, 쇄국정책은 대원군 및 몇몇 정치인들만 지지하고 타 정치인들과 일반 민중들은 개항에 호의적이기 때문에 대원군의 권위만 손상된다면 통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도굴을 감행했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이게 말도 안 되는 것이, 적어도 왕조국가의 국민들은 비록 어느정도의 불만은 있을지언정 그 질서에 대부분 순응하는 사람들이다. 사회 대다수가 현 정권에 순응하지 않는다면 혁명이나 쿠데타, 반란 등의 정권전복시도가 일어나니 말이다. 즉 자신들이 인정한 국가 수반이 같은 국가의 사람도 아니고 외국인에 의해 권위에 손상을 입는다면 일반적인 사람들의 반응은 "저런 예의도 모르는 쌍것들"이라는 게 일반적이다. 한 국가의 수반이 이유도 없이 모욕을 당한다면 일반적인 국가의 백성/국민으로써는 정권전복을 시도하고 있지 않는 한 아무리 그 수반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나라 자체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는게 상식이다. 이것은 국가 권력의 기반이 왕에게서 나옴을 천명하는 왕정국가나 사실상 국가 수반이 그 나라 자체인 독재정은 물론, 딱히 국가 수반=국가의 공식이 성립되지 않는 공화정 국가에서도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사실이다.
또한 오페르트의 예상이 맞다고 쳐도, 권위의 손상도 방법이 있는 것이다. 조선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인류 문명권에선 시신에 대한 훼손, 도굴, 장례 방해는 그 대상이 어지간히 천인공노할 인간쓰레기가 아닌 한 고인모독으로 여겨지고, 천인공노할 범죄로 여겨진다. 괜히 동탁이 장안 천도 때 황릉을 도굴한 것으로 욕을 먹은 것이 아니며 괜히 오운(오자서)가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원수를 굴묘편시했다가 한소리 들은게 아니며 괜히 도굴꾼이 사회를 막론하고 욕을 먹는 것이 아니다. 오죽하면 바로 이 오페르트도, 그 본국의 법정에서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을 정도니까 말이다. 반대급부로 동탁이 도굴했던 황릉을 복구한 손견이 괜히 후한 최고의 충의지사라는 칭송을 받는 게 아니다.
그런데 수교를 원한다며 어느 문명권에나 금기시 되는 도굴을 그것도 현 국왕의 할아버지 무덤을 도굴하려 했으니 '양놈들은 시체 파서 장사하는 놈들' 식의 의식이 퍼진 게 당연하다.
4. 처벌
한편 오페르트 일당은 이후 영사관으로 소환당해 조사를 받았다. 이후 미국 주도하에 이루어진 영사재판에서 오페르트와 젠킨스가 모두 기소당하였으나, 혐의 및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즉 무죄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오페르트는 프러시아 본국으로 소환되어 다시 재판을 받고 실형을 언도 받아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오페르트는 본국의 사자가 아니라 사사로이 개인적으로 국가 공무원 사칭을하여 외교적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조선 정부는 오페르트(Ernesr Jacob Oppert) 일행의 만행에 대해 청나라 禮部에 資文을 보내 이 사건을 알리면서 (중략) 이 사건에 관계된 인물들의 국가의 영사들에게 통고하는 동시에 사건 해명을 요청했다. 청국 정부의 요청을 받은 上海駐在 프러시아 영사는 사건의 주모자 3인, 즉 오페르트, 페롱(Stanislas Feron) 신부, 젠킨스(Frederick Jenkins)등은 프러시아 사람이 아니며 선주 묄러(Moeller)와 선원들은 전연 음모 사실을 몰랐다는 등의 해명을 했다.
한편 상해 주재 함부르크 영사는 오페르트의 혐의 사실을 시인하면서 그를 조사해서 본국 정부에 조회하여 응분의 처분을 하겠다고 해명했다.88) 이후 오페르트는 본국에서 실형을 받아 감옥살이를 했다.89)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호 사건 이후 조난선 구제 문제를 놓고 교섭함으로써 조선과 실질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미국측의 총영사 슈워드(George F. Seward)는 北京駐在 미국 대리공사 윌리엄즈(Samuel W. Williams)와 상의한 후 젠킨스를 불법적이고 수치스러운 원정을 준비했다는 등 8개의 범죄 조항을 들어 駐上海 미국영사재판에 기소했다.90)
88) 盧啓鉉, <오페르트의 南延君墳墓 盜掘蠻行과 韓國의 措置>, 《年岩 梁俊模博士回甲記念論文集》1982(《韓國外交史論》, 大旺社, 1984, 148쪽).
89) 박일근, <젠킨스에 대한 駐上海美領事 載判 - 南延君 墳墓盜掘 事件에 關하여>,《釜山大學敎 論文論》11, 1970, 272쪽의 註 39.
90) 젠킨스에 대한 駐上海美領事載判 과정 및 그 의의에 대해서는 박일근, 위의 논문, 261~272쪽을 보라.
91) 오페르트 일당의 도굴사건에서 페롱 신부의 역할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에른스트 오페르트 著, 韓沰劤 譯, 《朝鮮紀行》, 一潮閣, 1974, 225~235쪽; 盧啓鉉, 앞의 논문, 139~142쪽.
출처 : 연갑수, <대원군 집권기 부국강병정책 연구>, 서울대출판부, 2003, pp.109-110
5. 기타
도굴사건을 일으키기 전에는 오페르트와 근처 주민들과의 사이는 좋은 편이었다. 폭풍이 온다고 조선인들이 미리 알려주어 같이 비를 피하거나 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의 마닐라인 부하 중 하나가 소를 훔치는 바람에 주민들이 분격한 일이 있었는데 배상을 통해 원만하게 해결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사건이 터지면서 그는 1903년 71살로 죽을 때까지 조선에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악랄한 이름이 되어버려 다시는 조선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대원군이 축출된 다음에도 할아버지 무덤을 도굴하려 든 자를 고종이 좋게 볼 리가 없다.
당시 관련된 이야기를 보면 묘에는 대략 석회가 1m(!) 정도의 두께로 다져져 있어 드릴을 동원해도 뚫기 어려웠다 하며, 풍수지리와 관련된 설화에서는 불을 붙이려 하자 바람이 불어나와 불을 꺼 버려 결국 똥을 들이부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 당시 묏자리에 물이 차는 것은 좋지 않게 여겼기 때문에 물이 들어가지 못하게 석회로 두껍게 다지는게 일반적이었다. 간혹 발견되는 조선시대 미라도 석회로 두껍게 다졌기 때문에 물의 침투를 막아서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데도 오페르트는 편지에서 '뚫으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뚫을 수 있다' 는 식으로 똥허세를 부렸으나, 애초에 그들은 처음 석회층에 도달했을 때 석회가 아니라 강철이 묘를 막고 있다고 착각했다(...). 애초에 수군 제독을 참칭한 것만 봐도 허언증 기질이 있었던 듯.
정작 풍수지리적 명당은 이 무덤에서 백여 보 위에 있으며, 이 자리는 그다지 좋은 자리가 아니라고 한다. 도굴당하고 나중에 대도 끊겼으며 나라도 망한 자손을 두었으니 결과적으로 좋지는 않았다. 원래 남연군 묘가 그 곳에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흥선대원군도 명당자리에 몸을 눕히게 되었으나, 1906년 일제에 의해 이장되었다. 이후 1966년에 한 번 더 이장.
북한에서는 이 사건을 미제의 만행으로 대대적으로 소개하고 있다(물주가 "미국인 젠킨스"니까). 월북 화가이자 고구려 고분벽화 재현의 대가 정현웅 화백의 작품 중 "미제의 남연군묘 도굴"이라는 작품이 있다.
오페르트는 이후 조선에서 있었던 일을 회고록으로 출판했다.우리나라에선 <금단의 나라 조선 기행(Ein verschlossenes Land, Reisen nach Corea)>이란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이 회고록의 내용을 보면 오페르트가 의외로 지적 능력이 높은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역사와 정치, 군사제도까지 제법 자세하게 정리해 놨다. 조선의 건국년도를 1397년으로 오기하거나, 조선시대 3포의 개항을 마치 일본이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킬 권리를 얻은 것(...) 처럼 오해하는 등 오류도 많지만 서양인이라는 신분과 시대적 한계를 감안하면 대단한 수준이다. 또한 조선의 군사제도가 겉보기에만 그럴싸할 뿐 형편없다며 매우 깠는데, 당대 상황을 생각해보면 그럴 법도 하다.(...)
조선민중이 사람이 좋다느니 야만인이 아니라는 등 의외로 조선을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심지어 "조선인은 일본인이나 중국인보다 키가 크고 피부가 흰 것이, 백인이나 유대인의 잃어버린 10지파의 후예일 수도 있다"(...)는 주장까지 실려있다. 조선인이 일본인이나 중국인보다도 잘생기거나 키가 크다는 표현은 이사벨라 버드 비숍과 몇몇 선교사들의 여행기 또는 서신에서도 종종 나오므로 오페르트만의 입발림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명문가의 조상묘를 파헤쳐서 조상 유골을 인질로 몸값(?)을 요구하는 유사 범죄행위가 자주 일어나긴 했는데, 오페르트의 도굴을 흉내낸 유사범죄는 아니다. 조상묘 도굴을 통한 몸값 요구는 훨씬 이전부터 있었던, 매우 유서 깊은 범죄다. 구한말에는 화적떼가 몰려들어 6대조 할아버지 유골을 훔쳐내어 돈내고 찾아가라고 산 위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는 목격담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얌전히 관을 통째로 퍼가면 그나마 다행인데 관뚜껑을 열고 썩은 해골의 목만 베어가서 찾아가라고 소리질러대는, 후손 입장에선 어그로 팍팍 오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 인간말종들이 벌인 범죄는 현대에도 이어져 롯데그룹, 한화그룹, 태광그룹의 선영이 도굴되어 시신이 훼손되고 유골을 인질로 돈을 요구하는 범죄가 발생했다.
오페르트는 이 사건 이후 자신의 모국인 독일 언론으로부터 나라망신이라고 큰 비난을 받았다. 그가 유대계였기 떄문에 유대인 전체를향한 비난으로 이어졌다. 당시 독일은 물론이고 유럽 전체에 팽배한 반유대사상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리 제국주의, 인종주의, 사회다윈주의가판치던 시절이라 하더라도 왕실에 대한 도굴과 시체 훼손은 당시 독일인들이 느끼기에도 문명인답지 않은 지나치게 과격한 스턴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