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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넬의 도주와 승리
삼하 2:24-32
24 요압과 아비새가 아브넬의 뒤를 쫓아 기브온 거친 땅의 길 가 기아 맞은쪽 암마 산에 이를 때에 해가 졌고
25 베냐민 족속은 함께 모여 아브넬을 따라 한 무리를 이루고 작은 산 꼭대기에 섰더라
26 아브넬이 요압에게 외쳐 이르되 칼이 영원히 사람을 상하겠느냐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언제 무리에게 그의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령하겠느냐
27 요압이 이르되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무리가 아침에 각각 다 돌아갔을 것이요 그의 형제를 쫓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28 요압이 나팔을 불매 온 무리가 머물러 서고 다시는 이스라엘을 쫓아가지 아니하고 다시는 싸우지도 아니하니라
29 아브넬과 그의 부하들이 밤새도록 걸어서 아라바를 지나 요단을 건너 비드론 온 땅을 지나 마하나임에 이르니라
30 요압이 아브넬 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무리를 다 모으니 다윗의 신복 중에 열아홉 명과 아사헬이 없어졌으나
31 다윗의 신복들이 베냐민과 아브넬에게 속한 자들을 쳐서 삼백육십 명을 죽였더라
32 무리가 아사헬을 들어올려 베들레헴에 있는 그의 조상 묘에 장사하고 요압과 그의 부하들이 밤새도록 걸어서 헤브론에 이른 때에 날이 밝았더라
삼하 2:24-32 / 아사헬이 그렇게 죽자, 이를 분하게 여긴 그의 형들이 계속 아브넬을 뒤쫓았다. 요압과 아비새가 해질 때까지 추격하여서 암마 언덕에 이르렀는데, 그 건너편에는 기아 샘이 있고, 거기서부터는 기브온 초원이 시작되는 황막한 지역이었다. 25) 이때에 베냐민 지파의 군인들은 아브넬 주위에 집결하여 암마 언덕의 꼭대기에 진을 치고 있었다. 26) 거기서 아브넬이 요압에게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끝없는 칼부림을 해야 되겠느냐? 그 결과가 어떻게 될는지 너는 짐작도 못하느냐? 너는 어서 네 부하들에게 더 이상 동족을 추격하지 말라고 명령하여라.' 27) 요압도 이제는 아우에 대한 보복을 뒷날로 미루고 이렇게 대답하였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살아 계심을 걸고 맹세하지만 네가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내 부하들이 내일 아침까지는 충분히 너를 따라 잡았을 것이다.' 28) 그러고 나서 요압이 그 자리에서 나팔을 불자, 다윗의 군인들은 더 이상 이스라엘 군인들을 추격하지도 않고 그들과 싸우지도 않았다. 29) 그래서 아브넬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그날 밤새도록 걸어서 요단강을 지나, 그 다음날에야 얍복강 줄기를 따라 마하나임으로 돌아갔다. 30) 요압도 아브넬을 추격하던 길에서 돌아와 군인들을 점검해 보니 다윗의 부하 19명과 아사헬이 없었다. 31) 그런데 그들이 쳐죽인 사람은 아브넬의 부하 중에서 베냐민 사람만 360명이었다. 32) 그들은 아사헬의 시체를 메어다가 베들레헴에 있는 그의 조상들 묘에 장사하였다. 요압은 부하들과 밤새도록 행군하여 이튿날 동틀 무렵에 헤브론으로 돌아왔다.
아브넬과 요압의 양 진영이 휴전하였으나 전쟁의 결과는 참혹하였습니다.
휴전(24-28) 형제 간의 피 흘리는 싸움은 해 질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요압과 아비새 두 형제와 그의 군사들이 아브넬과 그 군대를 추격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진영 모두 형제의 피를 흘리는데 회의를 느꼈습니다. 도망하던 아브넬은 작은 산 꼭대기에 서서 쫓아오는 요압에게 “형제 쫓기를 그치라”고 외칩니다. 먼저 전투를 제안한 아브넬이 이제 와서 ‘형제’라고 말하는 것이 모순되기는 하지만, 그리고 이미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뒤이기는 하였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에 요압이 아브넬의 제안을 받아들여 퇴각나팔을 불었고, 이후 다시는 양 진영 간에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지도자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느낄 수 있습니다. 지도자의 잘못된 판단 하나가 많은 손실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중요한 일을 앞두고 어김없이 하나님의 뜻을 물어본 다윗의 자세야말로 훌륭한 리더십입니다.
전쟁의 결과(29-32) 아브넬의 군대와 요압의 군대는 각각 자기 진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아브넬의 진영에서는 무려 삼백육십 명의 군사들이 전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압의 진영에서는 열아홉 명의 군사들이 전사하였으나 유능한 군장 아사헬이 전사하였기 때문에 승리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형제 간의 다툼에서는 승자가 없고 모두 패자일 뿐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 간혹 일어나는 다툼이나 경쟁은 그 어느 편에도 유익을 주지 못하며, 오직 사탄을 춤추게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나 굳이 말하자면, 이 전쟁으로 인해 얻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양 진영 모두 자기들이 한 분 하나님을 모시는 형제관계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비록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얻은 수확이었지만, 이는 큰 소득이었습니다. 이러한 공감대의 형성은 앞으로 다윗 왕을 중심으로 남과 북이 하나 되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입니다. 한 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적 용 :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요소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세요.
숫자적으로 싸움에서 승리하였으나 동생을 잃은 요압은 성공적인 승리일 수는 없습니다. ‘친구를 얻고 싶거든 당신이 먼저 친구가 되라’이것은 인관관계의 성공비결의 시작입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남을 섬기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내가 섬겨야 할 대상을 생각하기보다는 나를 섬겨줄 사람을 찾고 계산하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자기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일 수도 있는 나를 버리고 너를 살리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실천으로 훈훈함이 넘치는 사회와 삶의 현장을 만들기를 바랍니다.
호크마 주석
=====2:24
기아 맞은편 암마 산 - '기아'(Giah)의 뜻은 '폭포'또는 '솟는 샘'이다.그러나 그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고 있지 않다.다만 베냐민 땅,기브온 광야의 어느 한 지점인 것으로 추측되는데 사람들이 쉬면서 목을 축일 수 있는 샘이나 개울이 있었던 것 같다.그리고 '암마 산'(the hill of Ammah)역시 기브온 광야에서 요단 강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만 추정될 뿐 더 이상 알려진 점이 없다.
=====2:25
베냐민 족속 - 당시 기브온에 정착하고 있던 베냐민 지파로서 이스보셋을 추종하던 세력이다(9절).이들은 마침 기브온 못을 확보하기 위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아왔던 아브넬과 합세하였을 것이다(12,15절).그런데 이처럼 이들이 그 어느 지파보다도 적극적으로 이스보셋과 아브넬을 추종하였던 까닭은 아마 사울 가문이 자신과 같은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삼상 10:17-24).
=====2:26
칼이 영영히 사람을 상하겠느냐 - 이 말은 '계속해서 칼로 죽여야만 하겠느냐'는 뜻이다.즉 아브넬은 '이제 피흘리는 싸움을 그만 두자'고 휴전 제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 '참혹한 일'에 해당하는 '마라'(* )는 '괴로움','불미스러움','쓴맛'등의 뜻으로서 여기서는 양측 모두 전멸하고 마는 '비극'을 의미한다.때문에 벧겟역(Vulgate)은 이를 '목숨걸고 싸우는 일이 얼마나 절망적인 것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로 번역하고 있다(Lange,Pulpit Commentary).
형제 쫓기를...명하겠느냐 - 지금 대진해 있는 군사들이 형제들,곧 같은 민족임을 강조하는 말이다.여기서 우리는 아브넬의 간교성(奸巧性)과 다급함을 엿볼 수 있다.즉 먼저 동족간의 싸움을 제의하고 피흘리기를 좋아하였던 그가(14절)이제 전세(戰勢)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동족애에 호소하여 휴전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어쨌든 이로서 휴전이 성립되게 된 것은 지극히 다행스러운 일이다.이는 곧 장차 다윗을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려 계획하고 계신 하나님(5:1-5)의 간섭하심의 결과가 분명하다.
=====2:27
흔단의 말을 내지 아니하였더면 - 여기서 '흔단'이란 '틈이 생기는 실마리'또는 '달라지는 시초'를 의미한다. 따라서 '흔단의 말'이란 '서로 틈이 벌어지게 한 말'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그러나 원문에는 '루레디바르타'(* )곧,'네가 말하지 아니하였더면'이라고 되어 있다.따라서 원문에는 '흔단'이란 말은 없다.그러면 아브넬이 과연 무슨 말을 했기에 요압의 책망을 받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14절에서 발견된다. 즉 요압은 기브온 전투의 참혹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아브넬의 전쟁 제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Keil & Delitzsch,Lange,Matthew Henry,Pulpit commentary).
아침에 다 돌아갔을 것이요 - 즉 아브넬의 전쟁 제의만 없었더라면 기브온 못가로 나아왔던 양측의 군사들(13절)이 서로 화해하는 가운데 당일 아침에 각기 처소로 돌아갔었을 수도 있었다는 의미이다(Lange).
=====2:28
나팔을 불매...싸우지도 아니하니라 - 이처럼 요압이 아브넬의 휴전 제의를 받아들여 퇴각(退却)나팔을 불고 싸움을 중지시킨 것은 아마 다윗을 생각해서였을 것이다.즉 동족간의 무모한 피흘림을 계속하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한을 초래하는 것은 분명 장차 온 이스라엘을 통치하여야 할 다윗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칠 것이었다.그러므로 비록 성질 급한 요압이었기는 하지만 이를 고려, 일단 싸움을 중지시켰을 것이다(Matthew Henry,Pulpit commentary).
=====2:29
아라바 - 본래는 요단 강 상류의 헤르몬 산으로부터 갈릴리 호수,요단 계곡,사해를 통하여 아카바 만에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침식지(浸蝕地)를 가리킨다.그러나 여기서는 얍복 강이 흘러들어 오는 요단 강 일대의 계곡 지대를 가리킨다.
비드론 온 땅 - '비드론'(bithron)의 뜻은 '협곡'또는 '갈라진 틈'이다.이로 보아'비드론 온 땅이란 요단 강 동편의 한 골짜기 일대를 가리키는 듯하다.
=====2:30
궐이 났으나 - 이에 해당하는 '파카드'(* )는 '빠뜨리다','빠지다'는 뜻이다.여기서는 전사(戰死)하여 생존자의 수에서 빠진 것을 의미한다.
=====2:31
삼백 육십 명을 죽였더라 - 다윗측의 전사자 수가 이십 명인 것에 비교하면 엄청난 수이다.물론 이러한 결과는 요압의 뛰어난 전술과 그 휘하 용사들의 용맹성에서 기인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그러나 아브넬 휘하의 베냐민인들 역시 호전적(好戰的)이고 싸움에 능한 자들이었던 점(창 49:27)에 비추어 볼 때 이 역시 이스보셋 왕가(8-10절)를 쇠퇴하게 하고 대신 다윗 왕조를 굳건케 하시려 한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임에 분명하다.
=====2:32
베들레헴에...장사하고 - 베들레헴은 기브온에서 남쪽으로 약 20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그러므로 요압은 헤브론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사헬의 시신(屍身)을 거두어 장사지내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12-32절 지도 참조.
그 아비 묘 – 요압, 아비새, 아사헬의 아비 곧 스루야의 남편이 젊은 나이에 죽었음을 증거해 주는 구절이다.18절 주석 참조.그런데 그 이름이 언급되지 않고 있음은 별다른 명성을 얻지 못한 채 젊은 나이에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 설 교 >
성도끼리 싸우면 모두 패배자가 됩니다
건조한 날씨 속에서는 아무리 작은 불씨라 하더라도, 그것이 산 전체를 태우고 잿더미로 만들만큼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불씨를 처음에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불씨가 작을 때는 사람이 얼마든지 다스리고 조정이 가능하지만, 일단 커져버리면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불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군중심리도 일단 한번 커지면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모습이 본문과 본문 앞부분에서 벌어졌습니다. 사울 왕이 죽은 뒤에 사회가 아직 불안정한 상태에서, 다윗 측의 사람들과 사울의 계보를 잇는 사람들 사이에 불꽃 튀기는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기브온 못 가에서 만난 두 진영의 사람들은 그들 마음속에 품고 있던 미움의 작은 불씨를 다스리지 못하고 떨어트려, 결국 작은 다툼이모두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는 큰 싸움으로 번지고 말았습니다.
맹렬히 타오르던 두 진영 간의 싸움은 아사헬의 죽음으로 인해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 측 장수 요압과 이스보셋 측 장수 아브넬 간에 휴전이 성립되므로 쌍방 간에 큰 손실을 가져온 유혈극이 중단되는 장면입니다. 이스보셋 측의 아브넬은 자신들이 궁지에 몰리고 불리해지자 자신들과 다윗 측의 병사들이 한 민족임을 내세워 요압에게 휴전을 제의합니다.
“아브넬이 요압에게 외쳐 이르되 칼이 영원히 사람을 상하겠느냐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언제 무리에게 그의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령하겠느냐”(26절)아브넬의 말은 쉽게 말해서 ‘그만 싸우자. 언제까지 우리를 쫓아올거냐?’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요압은 ‘이게 다 너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며 아브넬을 질책합니다. “요압이 이르되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무리가 아침에 각각 다 돌아갔을 것이요, 그의 형제를 쫓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27절) 사실 요압의 말대로 이 싸움의 발단을 제공한 사람은 아브넬이었습니다. 14절 말씀입니다. “아브넬이 요압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청년들에게 일어나서 우리 앞에서 겨루게 하자 요압이 이르되 일어나게 하자 하매”
하지만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아브넬의 제안에 요압도 동의했기 때문에 일어난 싸움이었습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줄까요? 이처럼 서로의 자존심과 감정의 불씨를 죽이지 못하고 앞세우면 결국 큰 싸움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요압은 아브넬의 휴전 제안이 못마땅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번 일로 인해 자신의 동생 아사헬이 아브넬에게 죽임을 당했지 않습니까? 아마 요압은 피가 거구로 솟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피 흘리기를 싫어하는 자기 주군인 다윗 왕의 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브넬의 휴전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휴전을 하고 피해상황을 종합해보니, 다윗 측 유다 지파의 전사자는 19명 병사들과 들노루 같이 발이 빠른 아사헬이었습니다. 또한 이스보셋과 아브넬 측 전사자는 360명이나 되었습니다. 가시적인 결과만 놓고 보자면 이번 싸움은 다윗 측의 승리가 분명합니다. 이쪽은 20명의 전사자가 났지만 저쪽은 360명이나 전사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본문의 이 사건에서 두 가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 이 전투에서는 승자나 패자 없이 모두 다 피해를 입고 슬픔을 맛보았습니다. 모두 다 패배자인 것입니다. 아브넬이 다급히 휴전을 제의할 때 했던 말처럼 그들은 같은 민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나님의 같은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왜 이제서야 그걸 깨달은 것일까요? 하나님의 백성들 간에는 전쟁과 다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을 왜 몰랐을까요?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성도는 다른 성도를 향하여 미움이나 증오의 불씨가 마음속에 일어날 때 그것을 다스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맡기며 마음을 정결하고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산불처럼 번져 본문에서처럼 결국 큰일을 내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면 꼭 나중에는 후회하게 되지만 이미 피해가 막심하고 난 뒤입니다. 같은 성도들끼리 분쟁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또 분쟁하면 함께 파멸하게 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2:25)
같은 믿음의 백성들 간의 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이편도 저편도 아니라, 오직 바깥 세상의 원수들뿐입니다. 집안싸움으로 인해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꼴이 되고 맙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쓸데없는 분쟁을 일삼을 때 득을 얻는 자는 오직 사단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이 전투는 비록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지만 유다와 이스라엘이 결국 한 형제이며 결코 싸울 수 없는 관계임을 깨닫는 값진 기회가 되었습니다. 본문 28절을 보십시오. “요압이 나팔을 불매 온 무리가 머물러 서고 다시는 이스라엘을 쫓아가지 아니하고 다시는 싸우지도 아니하니라.” 뒤에 사무엘하 3장에 가면 아브넬의 마음이 서서히 이스보셋으로부터 다윗에게로 돌아서게 되는데, 이것 역시 오늘 본문의 이 싸움을 통해 깨닫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물론 교회는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양보할 수 없는 거룩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거짓된 자들과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의 경우도 이스라엘의 다음 왕을 삼는 데 있어서 다윗의 진영과 사울의 진영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데 차이를 보임으로써 분열을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분열과 싸움이 진리 수호 때문이 아니라, 겉으로는 진리를 위한 것처럼 포장되어 있다 할지라도 속내는 집단의 이익이나 욕심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면, 결국 그 싸움은 모두에게 피해를 입히고 교회는 사단과 세상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맙니다. 이런 일들이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지 기억하며 우리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잘못과 죄인들을 벌하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연단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두 집안의 싸움을 통해 악한 자들의 생각과 죄악 된 행위는 벌하시고, 자기 백성의 부패함은 고쳐서 온전함에 이르도록 만들어 가십니다. 본문 29절을 보십시오.. “아브넬과 그의 부하들이 밤새도록 걸어서 아라바를 지나 요단을 건너 비드론 온 땅을 지나 마하나님에 이르니라” 또 32절도 보십시오. “무리가 아사헬을 들어올려 베들레헴이 있는 그의 조상 묘에 장사하고 요압과 그의 부하들이 밤새도록 걸어서 헤브론에 이른 때에 날이 밝았더라.” 두 진영의 사람들이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고 밤새도록 걸어 자기 진영으로 되돌아가는 동안 무슨 생각과 무슨 마음을 가졌을까요? 각자의 행위와 생각과 믿음을 돌아보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는 본문의 사건에서 자신의 온전한 뜻을 위하여 한 순간도 쉬지 아니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성실하고도 은밀한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 안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진리를 굳게 믿을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끼리 분쟁과 싸움으로 어리석은 패배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하나 되기를 힘쓰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어가는 승리자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흥망의 갈림길
삼하 2:24~3:2 / 고흥식목사
성공적인 사람은 자기 앞의 장애물관리를 잘한 사람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지만 키가 작았습니다. 키가 작은 것이 그의 생애 장애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중풍병자를 데려온 네 명의 친구들에게는 가로막힌 수많은 사람들이 장애물이었습니다. 목적성취를 가로막는 것이 장애물입니다. 문제는 장애물이 아니라, 장애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장애물시선에서 하나님을 향한 시선으로 바꿔야 합니다.(시 119:165) 장애물만 보면 장애물이 크게 보입니다. 장애물을 만날 때 하나님이 우리 시야에서 안 보일 때가 문제이지 하나님이 보이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막11:23)
우리 앞에 수많은 장애물이 있어도 뛰어 넘으시기 바랍니다.(시18:29, 슥4:6) 요셉은 노예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말더듬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열등아였고,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있었고, 실낙원을 쓴 밀턴은 시각장애였으며, 송명희는 뇌성마비 환자였지만 수많은 장애인들에게 소망이 되었고 정상인들에게는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일본인 미우라아야꼬는 평생 질병이 있었지만 그의 영향은 대단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보면 흥망의 갈림길이 무엇인가가 나와 있습니다. 다윗의 집은 점점 강하여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갔다고 했습니다.(삼하3:1) 다윗은 약한데서 점점 강하여가고, 결국 승자가 됩니다. 반면에 사울은 강한데서 점점 약하여 갔습니다. 나중에 패자가 됩니다. 세 가지로 그 요인을 알 수 있습니다.
1. 신앙의 여부로 갈라진다.
신앙으로 행하는 사람은 흥하고, 불신앙으로 사는 사람은 점점 쇠합니다. 블레셋의 골리앗을 대할 때 두 사람의 태도가 다릅니다.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삼상17:11)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17:47)
한 사람은 믿음 없는 행동 즉, 불신앙의 모습을 보이고, 또 한 사람은 뛰어난 믿음으로 대처하는 신앙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윗과 사울을 비교할 때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사울은 강한 사람이었고 훈련된 군사를 가지고 있었으며 권세 층의 사람들이 사울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약하고 오합지졸입니다.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은 가난한자, 쫒기는 자, 약하고 빈약한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윗이 승리자가 됐습니까? 하나님이 다윗의 무기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용기가 있었고, 영적인 싸움에서 이겼고 믿음의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성경을 보면 믿음의 사람과 불신의 사람을 대조시켜서 투사합니다. 믿음의 사람인 아벨과 불신의 사람인 가인, 믿음의 사람인 아브라함과 그렇지 않은 롯, 믿음의 사람인 야곱과 불신자인 에서, 믿음의 사람 모세와 바로, 믿음의 사람인 엘리야와 불신자인 아합왕, 믿음의 사람인 엘리사와 불신자인 게하시, 믿음의 사람인 바울과 불신자인 알렉산더 등등. 분명한 사실은 믿음의 사람은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망할 때가 된 사람은 자꾸 영적인 일로 대립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축복을 거두어 가실 때는 먼저 신앙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불신행동은 사탄이 주는 것이고, 결국 저주를 받게 됩니다.
여러분! 영적인 신앙이 되십시다. 뜨거운 태양빛이 있어야 가을에 열매가 영글어가듯이 뜨거운 신앙으로 모두 승리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사랑여부로 갈라진다.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고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삼상18:7-9)
영어성경을 보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Saul kept a jealous eye on David" 마음이 병든 사람의 특징은 계속 미움이 쌓여갑니다. 한번 미워지면 아무리 예쁜 짓을 해도 계속 밉습니다. 며느리가 미운 사람은 예쁜 뒷 발꿈치를 봐도 깨지기 쉽다고 생각하듯이 사울이 다윗을 볼 때 미움이 가득한 눈으로만 보았습니다. 사랑이 없어진 마음엔 행복이 없습니다. 미움(hate)은 남을 죽이기 전에 먼저 자신을 죽이게 만듭니다. 남을 저주하고 타인이 잘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승자가 될 수 없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의 결백을 인정받길 원했고, 사울이 자기를 쫒아오다가 지쳐서 포기할 것만을 기대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끝까지 충성했고 끝까지 사랑으로 대했습니다. 원수가 눈앞에 있어도 미움보다 사랑이 앞섰습니다.(삼상24:1-7)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만약, 다윗을 사랑했다면 그의 왕권은 무궁했을 것이고, 비참한 일생은 안됐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점점 강해지고, 시기와 미움의 사람은 점점 약해져 갑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그를 위해서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은 참으로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랑이 우리 심령위에 가득 차길 축원합니다.
3. 하나님 경외여부로 갈라진다.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고 사울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었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기름 부은 종이라는 것 때문에 죽이지 못했습니다. 옷자락을 벤 것조차도 회개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제사장 80명을 한자리에서 칼로 죽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도전합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지금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감사 찬양했습니다. 찬송과 시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모든 영광을 자기 것으로 취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사울은 성경 어디어서도 찬송하거나 찬송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다윗은 영영히 흥했고,(행13:22) 자기 영광을 구한 사울은 영원히 쇠했습니다.(삼상15:11)
옛날에 한 왕이 음식을 맛있게 먹고 요리사를 칭찬하고 상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요리사는 겸손히 야채를 제공한 사람의 공이 크니 야채장수에게 상을 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야채장수를 불렀습니다. 그러자 그 야채장수도 정작 상 받을 사람은 야채를 재배한 농부이니 농부에게 상을 주라고 겸손히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그 농부를 불렀습니다. 그 농부가 왕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다만 씨를 뿌린 것뿐입니다. 때를 따라 비를 주시고 때를 따라 햇빛을 주시고 잘 자라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이 말을 듣고 왕이 감동을 받아 모든 사람들을 불러서 다 상을 줬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상을 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뒷맛이 쓰지 않겠느냐
삼하 2장 24~28절 / 백구영목사
어느 원로 목사님의 "나의 목회윤리 10계"라는 글을 읽고 신선한 자극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잃은 양을 열심히 찾을 것이나 남의 양을 도적질 하지 말 것. 둘째, 새 교회를 위해 힘쓸 것이나 기존 교회를 분열시키지는 말 것. 셋째, 개척교회를 세울 것이나 남의 교회 처마밑에 세우지는 말 것. 넷째, 어떤 목장이든 충성할 것이나 남의 목장을 넘보지는 말 것. 다섯째, 교인 심방은 열심히 할 것이나 이웃돌이는 하지 말 것. 여섯째, 교인들의 말은 귀 기우려 들을 것이나 남의 말은 하지 말 것. 일곱째, 교인들에게 돈을 꾸어 줄지라도 교인들에게 돈을 꾸어 쓰지 말 것. 여덟째, 남녀를 차별은 말되 관계는 공명정대하게 가질 것. 아홉째, 반대하는 곳에 억지로 머물지 말고 환영하는 곳을 억지로 뿌리치지 말 것. 열째, 교역자간에 선의의 경쟁을 하되 시기하지는 말 것.
이 글을 읽고 이 목사님이 우리 목회 현장에 목회윤리의 부재를 절감하면서 얼마나 나름대로 깨끗한 목회를 하려고 애를 쓰신 분인가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목표도 중히 여기지만 과정을 더 중히 여기는 종교입니다. 흔히,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있느냐? 않느냐? 하는 논란을 합니다.
그러나 매사에 목표, 결과 그리고 실적만을 추구하게 되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도 관계없다는 풍토가 되고 탈법, 변칙, 술수가 난무하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 겠습니까? 인간의 신뢰관계는 깨어지고 사회는 불법이 성행하고 양심은 표류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구상에 아직도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집단이 있다면 공산주의 집단밖에는 없습니다.
언제나 목표가 잘못되서 뒷맛이 쓰기 보다는 방법이 잘못되서 뒷맛이 쓴 경우가 더 허다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뒤가 쓰지 않은 행동을 권고하는 말씀입니다.
사무엘하 2:24-28의 말씀은 동족간의 전쟁기록입니다. 사울왕이 죽은 후, 이스라엘은 사울왕조 계승파와 다윗왕 옹위파가 대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장수였든 넬의 아들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이스브셋을 보호하고 피신하는 것을 다윗의 삼총사 요압과 아비새와 이사헬이 추척을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사울왕 밑에서 용맹을 떨쳤던 용장들이었습니다.
암마산 작은 봉우리에 몰린 아브넬은 요압을 향해 외쳤습니다.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줄 알지 못하느냐?"(삼하 2:26) 이 말의 본래의 뜻은 영어성경에 더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표준영어성경인 RSV에 보면, "Do you not know that the end will be bitter" 즉, "뒷맛이 쓸 줄을 알지 못하느냐?"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듣고 요압은 나팔을 불어 추적을 멈추고 퇴군하고 있습니다.
또한, 히브리서 12:14-17의 말씀은 쓴뿌리를 경계하신 말씀입니다. 화평과 거룩함을 쫓을 것을 권고하고 한 그릇 식물을 위해 장자권을 판 에서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권하면서 후에 저는 눈물을 흘리고 축복의 기업을 되찾고자 하였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고 경계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뒷맛이 쓰지 않겠느냐?", "쓴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하신 말씀은 우리 자신을 향해 물어오시는 도전이고 특히, 마지막 주일을 맞으면서 자신을 향해 질문해 보아야할 질문입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뒷맛이 쓰지 않겠느냐?"하신 말씀의 뜻을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불법적 승리는 승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삼하 2:26에 보면 "아브넬이 요압에게 외쳐 가로되 칼이 영영히 사람을 상하겠느냐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줄 알지 못하느냐?" 하였고
히브리 12:15 하반절에 보면 "또, 쓴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두 본문 말씀은 모두 불법적 승리는 온전한 승리가 아니라는 말씀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작은 산위에 몰린 아브넬과 그 군사들은 독안에 든 쥐였습니다. 최후의 일격으로 그의 목을 자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넬의 외침은 요압을 멈짓하게 했습니다. 어제의 전우요 친구요 형제인 아브넬의 목을 치는 것이 승리일 수 있을까? 오늘의 승리가 자신의 일생에 명예가 될 수 있을까? 과연 잘하는 일일까?를 생각한 것입니다.
요압은, 당장의 승리, 순간의 쾌감, 오늘의 영웅이 되기 보다는 동족상잔의 상처없는 내일의 승리와 명예를 택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잘 살기보다 바르게 살기를 택해야 합니다. 언제나 삶의 과정이 원칙적이고 합법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적인 삶입니다.
많은 경우, 신앙적이란 말을 맹목적이란 뜻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신앙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한다는 뜻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어떤 원칙보다 원칙적이시고 인간의 어떤 합법보다 합법적이시고 인간의 어떤 합리보다 합리적이신 것입니다.
흔히, 성공을 논하고 승리를 논하지만, 참다운 성공과 승리는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순간 순간에 있습니다.
스위스 알프스에서 조난당한 한 등산가를 눈속에서 발견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바위를 껴안고 산봉우리를 바라보고 눈을 뜬채 얼어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가슴이 찡해오는 얘기입니다.
만일 우리가 현실이라는 바위를 껴안고 배고픔이라는 눈보라속에 발이 묶여 있더라도 장자의 명분이란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흔들림이 없다면 결과와는 관계없이 우리는 승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자의 명분이라는 산봉우리를 바라보면서도 현실이라는 팥죽 한 그릇을 위해 부당한 해결의 길을 택하는 사람은 뒷맛이 쓴 일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오노" 하면 스포츠맨답지 않은 얕은 꾀로 한국의 김동성선수의 메달을 가로챈 부끄러운 인물로 기억합니다. 순간의 반칙으로 땀흘려 쌓은 업적을 세계의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린 인물입니다.
현실과 타협지 않고 원칙과 정도를 지켜 뒷맛이 쓰지 않은 인생을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부분적인 승리는 승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삼하 2:28에 보면 "나팔을 불매 온 무리가 머물러서고 다시는 이스라엘을 쫓지 아니하고 다시는 싸우지 아니하니라"하였습니다. 요압이 아브넬의 목을 가지고 오면 새유다 왕국의 영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요압은 아브넬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순간, 그들을 패주하는 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한 민족, 한 형제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도 "다시는 이스라엘을 쫓지 아니하고 다시는 싸우지 아니하니라"하신 것입니다. 더 이상 패주하는 무리가 아니라 이스라엘로 보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 "이스라엘을 쫓지 아니하고"하신 대목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 그들을 좇을 때는 베냐민 족속이 었으나 아브넬의 말을 듣고서는 이스라엘 쫓기를 그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생동안 겪은 수많은 성취감이나 승리감앞에서 수없이 물어야 할 것은 "뒷맛이 쓰지 않겠느냐?"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에 두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실 때 어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귀뜸을 해드렸습니다.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가서 여우에게 이르되……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모래도 내 갈 길을 갈 것이라고"(눅 13:33)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지금은 입맛이 쓰지만 영원히 쓰지 않을 길인 것입니다. 어디 좀더 유리한 곳이 없나? 어디 좀더 안정한 곳이 없나? 어디 좀더 쉬운 곳이 없나? 기웃거리지 말고 온전한 승리를 위해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모래도 앞을 보고 가야 합니다.
캐나다에 뉴티(뉴 파운드랜드 사람을 경멸하는 "촌놈"이란 뜻)에게 하는 이런 유모가 있습니다.
고속도로에서 두 차가 무서운 속력으로 서로 교차했는데 운전사는 모두 즉사했는데 차는 모두 멀쩡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운전사가 서로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구경하다가 머리끼리 부딛혔기 때문입니다. 뉴티를 빈정대는 우수운 얘기지만 이 얘기속에는 심오한 교훈이 있습니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이란 말이 있습니다. 적은 이익을 기웃거리다 큰 이익을 잃는다는 말입니다. 우리 인생에 흔히 있는 일인 것입니다.
아브넬의 외침을 듣고 요압은 개인적인 승리보다는 민족의 승리를 생각했고 부분적인 승리보다는 온전한 승리를 생각했으며 순간적인 영웅주의보다는 영구한 애국애족을 택한 것입니다. 개인의 이익보다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여서 뒷맛이 쓰지 않은 인생을 사시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섯째, 현재를 잃으면 영원도 잃는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 12:17에 보면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하였습니다. 에서의 한번의 실수가 자손만대에 불행이 되고 불명예가 되었습니다. 요압은 아브넬의 외침을 듣고 곧 그 자리에게 퇴군하였습니다. 성공과 실패, 승리와 패배가 결정되는 것은 언제나 오늘이요, 현재입니다.
톨스토이의 유명한 단편가운데 "세 가지의 의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삶의 의미를 깨우쳐 주는 물음입니다. 우리의 일생중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인가? 바로 현재입니다. 우리의 일생중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앞에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일생중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바로 앞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부끄러움이 없고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고 자신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 선입니다.
어느 문필가도, "인생에 있어서 뒷맛이 좋은 일은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은 현재의 연속입니다. 그러므로 현재를 잃으면 영원도 잃게 됩니다.
그러기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법적 승리는 승리가 아닙니다. 부분적 승리는 승리가 아닙니다. 현재를 잃으면 영원을 잃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내 앞사람에게, 최선을 다해 뒷맛이 쓰지 않은 삶을 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진짜 승리다
(매일큐티,2/7) /삼하 2:24~32
1. 아브넬과 요압은 전쟁 중인 이스라엘과 유다의 관계를 어떻게 표현합니까?(26~27절)
2. 전쟁의 결과는 결국 어떻게 정리됩니까?(30~31절)
3. 다윗의 진영이 더 큰 승리를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승리했음을 성경이 명확히 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은 갈등과 경쟁은 결국 모두에게 상처만을 남긴다는 사실에서 무엇을 느낍니까?
5. 최근 다른 이와의 갈등으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후회했던 적은 언제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관계를 아름답게 세워 가기 위해 무엇을 실천하겠습니까?
칼이 영원히 사람을 상하겠느냐(26절) 참혹한 살육을 언제까지 계속할 것이냐는 아브넬의 경고
형제(26절) 전쟁 중인 자신들이 본래는 한 형제인 이스라엘 민족임을 강조하는 표현
아브넬은 자신을 추격하던 요압에게 “이 전쟁이 언제까지 계속돼야 하느냐”며 강하게 항의합니다(26절). 요압은 오히려 아브넬이 처음에 결투를 제안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 대답합니다(27절).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던 두 진영의 지휘관들은, 결국 전투를 멈추고 철수합니다(28~29절). 전투의 결과만 보면 다윗의 진영이 이스보셋 진영에 더 큰 피해를 입힌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 역시 아사헬을 포함해 20명의 전사를 잃었습니다(30~32절).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백성끼리 싸우는 것은 누구도 ‘진짜 승자’라 할 수 없는 아픈 결과를 남깁니다. 자기편의 승리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본질적인 신앙의 승리입니다. 성경은 이 전투를 통해, 다윗이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길은 군사적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방법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경쟁 논리를 따르지 않고, 하나 됨과 화해를 추구해야 합니다. 오늘도 갈등 속에서 내 마음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주신 관계를 사랑으로 회복하는 성숙한 성도가 됩시다.
골방기도 : 갈등보다 화해를 선택하고, 모든 관계를 사랑과 섬김으로 아름답게 세워가게 하소서.
제발 양보 좀 해라
삼하 2:24~32 / 기독신문-오주환 목사(익산 예안교회)
요절말씀: “요압이 나팔을 불매 온 무리가 머물러서고 다시는 이스라엘을 쫓아가지 아니하고 다시는 싸우지도 아니하니라” (삼하2:28)
죄와 악에 관한 것이 아닌 이상 양보하고, 타협할 줄도 알아야 한다. 또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평화가 온다. 요압은 극도의 분노로 들끓고 아브넬을 완전히 작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양보할 줄 안다. 이 본문이 주는 교훈이 무엇일까?
1. 요압의 추적(24절)
동생 아사헬의 죽음으로 요압과 아비새는 아브넬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서 열심히 싸웠다. 그 결과 아사헬의 죽음으로 수세에 몰렸던 전쟁은 반전되어 요압과 아비새가 승리를 한다. 이처럼 한때의 실패는 사람으로 하여금 악착같은 승부근성을 만들어서 최선을 다하게 한다. 하나님께서 어느 한 사람을 당신의 종으로 사용하고자 하실 때는 고난이나 역경으로 그 사람을 연단시켜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만들고, 무슨 일이든지 최선을 다하도록 만든다.
우리도 때로는 다른 사람의 실수나, 실패를 거울삼아서 새롭게 결심을 하고 열심을 내야 한다. ‘저 사람은 넘어졌지만 나는 오히려 새롭게 일어서리라.’
2. 아브넬의 이중성(26절)
열을 받아서 공격하는 요압의 군대에게 아브넬은 전쟁을 그만두자는 제안을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입으로 두말을 하는 치사한 인간을 보게 된다. 분명히 전쟁장난을 하자면서 시비를 걸었던 인간이 아브넬이었다.
그러다 이제 그 전쟁의 해악이 자기에게 미칠 듯하자 전쟁의 폐해를 강조하면서 평화제안을 하는 것이다. 너무나도 이중적이고, 간사한 모습이다. 그러자 요압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27절을 보자. 정확하게 전쟁의 원인 제공자가 바로 ‘너’(아브넬)였음을 알려준다.
3. 평화주의자의 승리.31-32절
그리고 요압은 밀어붙이질 않는다. 그는 평화주의자였다. 비록 자기의 친동생이 무참하게 살해되고, 또 자기가 승리를 이끌어가고 있었지만 한발자국 물러서서 화해에 응한다. 개인의 원수를 갚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교회 안에서나 바깥에서나 항상 평화를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권모술수를 사용한 아브넬에게는 이기는 것 같았지만 결국에 진 전쟁이었고, 양보하고 정당한 전쟁을 치른 요압에게는 진 것 같았지만 이긴 전쟁이 되었다. 그 결과를 31절에서 보여준다. 성도는 잠깐의 승리를 위해서 영원한 승리를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아사헬의 죽음이 가져온 것
삼하 2:24-31 / jocw0104
1) 다윗의 군사들은 아브넬의 군대를 추격하다가 아사헬이 죽은 곳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23절하) 이스라엘은 군인들은 이렇게 나이 어린 소년이 죽은 것을 보고 전쟁에 대해 깊은 회를 느꼈다. 즉 좀 더 자라서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할 아이가 제대로 꽃도 피워 보지 못하고 한번 싸우러 나가서 단번에 죽어 버리니까 너무나도 허무한 생각이 들었다.
2) 요압은 아주 노련한 사람이었다. 요압은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동생이 죽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여전히 아브넬을 추격해서 작은 산 위로 밀어 올렸다. 아브넬은 해가 지고 상황도 불리하자 동족인 것을 주장하면서 휴전을 제의했다. 그는 자기가 유리할 때에는 ‘적’이라고 하면서 자기가 불리하면 ‘형제’라고 했다.
24-26절 ‘요압과 아비새가 아브넬의 뒤를 쫓아 기브온 거친 땅의 길 가 기아 맞은쪽 암마 산에 이를 때에 해가 졌고 베냐민 족속은 함께 모여 아브넬을 따라 한 무리를 이루고 작은 산 꼭대기에 섰더라 아브넬이 요압에게 외쳐 이르되 칼이 영원히 사람을 상하겠느냐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언제 무리에게 그의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령하겠느냐’
3) 요압은 아브넬의 실력을 알기 때문에 끝까지 밀어 붙이지 않고 나팔을 불어서 군사들을 불러 모아서 아브넬이 시비 거리를 제공하지 않았다면 싸울 필요도 없었고 아침에 다 집에 돌아가서 쉬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압의 잘못은 받지 말아야 할 시비 거리에 상대한 것이다.
27-28절 ‘요압이 이르되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무리가 아침에 각각 다 돌아갔을 것이요 그의 형제를 쫓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요압이 나팔을 불매 온 무리가 머물러서고 다시는 이스라엘을 쫓아가지 아니하고 다시는 싸우지도 아니하니라’
적용 ) 우리는 누가 시비를 걸어오더라도 상대하지 말아야 한다. 괜히 상대를 하니까 결국 상대로 피해를 보고 자기 쪽에서도 소중한 것을 잃게 되는 것이다.
4) 나중에 결산을 해보니까 죽은 사람은 아브넬 쪽이 더 많았다. 그러나 요압은 동생을 잃었다. 요압은 승리를 했지만 아무 유익이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적을 잘 분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다윗의 적은 아브넬이나 베냐민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 사람들과의 싸움에서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30-31절 ‘요압이 아브넬 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무리를 다 모으니 다윗의 신복 중에 열아홉 명과 아사헬이 없어졌으나 다윗의 신복들이 베냐민과 아브넬에게 속한 자들을 쳐서 삼백육십 명을 죽였더라’
적용 ) 부부 싸움에서는 이기는 것이 지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도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기려는 사람은 적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다.
5) 요압의 군대와 아브넬의 군대는 그들 나름대로 밤새 걸어서 다윗이 있는 헤브론으로 가고, 또 이스보셋이 있는 마하나임으로 갔다. (29) 그 이유는 물론 대낮에는 날씨가 덥기 때문일 수 있지만, 원래 이 전쟁 자체가 정식 허락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벌인 사적인 전쟁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정리 1) 우리는 요압과 아브넬의 전쟁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첫 번째로, 우리는 작은 실수가 큰 사고가 되지 않도록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 특히 청소년 시기에는 자칫 잘못하면 ‘욱’하는 성질에 일을 저지를 수 있는데, 그때 하나님이 막아 주시기 때문에 신앙이 중요하다.
정리 2) 두 번째로, 누군가가 시비 거리를 가지고 올 때 상대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아예 처음부터 미안하다고 하면서 그 자리를 피해 버려야 한다. 자존심이 좀 상하고 비겁한 느낌이 들지 몰라도 도망치는 전법은 사실 가장 좋은 방법이다.
정리 3) 세 번째로, 청소년이나 어린이는 어른이 하는 말을 모두 그대로 믿어 버리기 때문에 절대로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부모가 억울한 일이 있으면 어린 자식에게 복수를 부탁하는 바람에 자식이 한평생을 복수할 마음으로 허비했던 일들이 많았다. 그래서 어른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고 용서를 가르쳐 줘야 한다. 그래야 젊은이들이 평생을 허비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정리 4) 예수님은 오른 편 뺨을 치는 자에 왼편 뺨마저 돌려 대라고 말씀하셨다. (마 5:39) 이것은 절대로 악한 자를 상대로 해서 싸우지 말라는 뜻이다. 악한 자와 억지로 싸워서 이기고 나면 결국 우리가 악한 자로 변해 있게 된다. 악한 자는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고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선한 일꾼과 축복의 사자로 사용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적용을 위한 질문)
3. 우리는 다른 사람과 싸워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우리의 적은 사람이 아니라 죄요 마귀이기 때문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해서는 안 된다. 우리 이웃이며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부부는 한 몸이기 때문에 싸워서 이기려고 해서는 안 된다.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가 싸워서는 안 되는 이유가 적이 아니라 같은 편이기 때문이다. 먼저 사과하고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회복시켜주신다.
기도 ) 우리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임을 알고, 상대방에게 져서 그 사람의 마음을 얻고 하나님의 은혜를 되찾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