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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편
“….”
깜빡, 깜빡. 꽤 오래 전에 잠에서 깼지만 딱히 일어날 이유가 없었던 서혁은 몇 시간 째 몸을 일으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계속 눈만 깜빡이며 하늘색 천장을 바라보던 서혁은 한숨을 내쉬며 손바닥으로 시야를 가렸다. 진짜 더럽게 여유롭구나. 이런 식의 여유는 연예인 일을 하기 전에도 별로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병원에 있어도 딱히 여유롭다곤 할 수 없는 생활이었으니 이렇게 아무도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 생활은 살면서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 짜증나….”
버릇처럼 6시에 일어나긴 했지만, 일찍 일어난다고 뭔가 할 일이 있던 것도 아니었던 서혁은 3시간 째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난 뭘 해야 하지? 병원에 있었을 때도 이것을 한 다음엔 뭘 해야 하고, 그 다음엔 또 뭘 해야 하는지 모두 정해져 있었다. 다리가 부러졌어도 연예인은 연예인이니까. 그렇게 바쁘게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살아오던 서혁의 삶에서 오늘은 뭘 해야 할지가 불분명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살아왔던 서혁이었건만, 지금은 앞으로 뭘 해야 할지를 전혀 모르겠다. 이곳에 갇혀 있으면서 난 뭘 해야 하지? 이대로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처음 가지는 여유로움 마저도 이런 쓸데없는 고민에 허비하는 자신이 짜증났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이런 고민을 거듭하다보니 이젠 이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함이 몰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얼굴을 쓸어내리며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쉰 서혁은 일단 몸을 일으켰다. 그래, 제일 먼저 할 것은 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겠지. 그래야 그 다음 할 일도 정해지는 법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서혁은 자신의 다리에 묶인 사슬을 먼저 확인했다. 길이는 어떤지, 얼마나 튼튼한지 확인을 하던 서혁은 끝이 없는 사슬의 길이에 당황하고 멈칫했다.
“… 뭐가 이렇게 길어?”
“이 집에서만큼은 자유롭게 움직이게 하고 싶어서 최대한 긴 사슬로 준비했어요.”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서혁은 문 쪽에서 들리는 인아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ㅁ, 뭐야? 저 인간은 또 언제 들어온 거야? 서혁은 토끼 눈이 되어선 목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옮겼고, 서혁과 시선이 마주치자 식사를 든 채로 방문에 기대있던 인아가 싱긋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벌써 9시에요. 밥 먹어야죠.”
“… 전에도 말했지만, 나한테는 하루에 2끼도 많이 먹는 거야. 이렇게 아침부터 식사를 가져 올 필요는 없어.”
“9시가 아침은 아닌데…. 뭐, 어쨌든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라야죠. 전 하루 세 끼는 먹어야 하니까 같이 식사해요.”
같이 식사하자는 인아의 말에 서혁은 그제야 평소보다 밥그릇 수가 하나 더 많은 쟁반을 확인하곤 인상을 찌푸렸다.
“… 너도 같이 먹게?”
“원래는 K랑 L이랑 같이 먹지만 그쪽 때문에 화가 났는지 L이 당분간은 자기 집에 출입 금지라네요.”
“… K? L? 어제 그 남자들이야?”
“네. L은 어제 총 쏜 사람이고, K는….”
“매일 거실에서 나 죽이라고 떠들던 남자 아니야?”
“들었어요? 그 사람이 K예요.”
서혁이 지금껏 밖에서 하던 이야기를 전부 들었다는데도 인아는 전혀 놀란 기색 없이 태연한 얼굴로 웃으며 하던 얘기를 마저 했다. 그런 인아의 태도에 서혁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계속 식사를 하는데 집중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대화 한 마디 없이 식사만 하던 서혁은 문득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정확히 파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여기서 혼자 사는 거야?”
“… 네?”
“그 남자들 말이야. 왜 안 보이는 거야?”
“….”
“… ㅇ, 왜 그렇게 쳐다봐?”
“드디어 나에 대해 궁금해 하는구나, 싶어서요.”
“…ㅈ… 징그러운 소리 좀 하지 말지? 여기서 3개월을 살아야 하는데 너랑 이 집에 대해 알아야 하는 건 당연하잖아!”
“흐음, 그럼 뭐부터 알려드릴까요? 궁금한 건 전부 알려드릴게요.”
“… 너 은근히 기뻐하는 것 같다?”
“팬 이랬잖아요.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나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는 건 엄청 기쁜 일이죠. 안 그래요?”
“… 진짜 징그러운 소리만 골라서 하네.”
아, 또 저렇게 웃는다. 짜증날 정도로 해맑게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이 녀석이 사람의 피를 마시는 흡혈귀라는 사실을 잊을 것 같았다. 물론 이 녀석이 하는 징그러운 소리도 거북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 징그러운 말은 항상 들어왔고 스스로도 드라마를 찍을 때마다 종류 별로 내뱉던 것이기에 별로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 해맑고 친절하기 짝이 없는 미소는 자꾸만 이 녀석이 괴물이 아니라 사람이 아닐까, 하는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서혁은 그게 참을 수 없이 짜증났다. 괴물이면 괴물답게 나쁜 짓만 하라고. 왜 그렇게 해맑게 웃어대서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거야?
조금만 더 생각하면 불만이 입 밖으로 튀어날 것 같았던 서혁은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불만은 목숨 줄만 짧아지는 거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건 그렇고 뭐든 다 물어보라고 했지… ? 일단 내가 있는 곳과 이 녀석에 대해 파악하는 게 중요하니까 물어 볼 수 있는 건 다 물어봐야지. 흠, 흠, 헛기침을 한 서혁은 인아에게 궁금했던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이 집엔 너 혼자 살아? 그 남자들은 어디서 사는데?”
“여긴 저 혼자 사는 집이에요. K와 L은 바로 옆집에 살아요.”
“괴물이긴 해도 일단은 여자라 이건가? 그래서 따로 사는 거야?”
“… 그런 단순한 이유는 아닌데.”
“… ?”
“저의 존재가 그 두 사람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 위협?”
“전 정신력이 강한 편이라 그들에게 위협을 가할 정도로 정신을 놓을 일은 없지만, 혹시 모르잖아요.”
“….”
“유사시에는 이 집을 완전히 감옥처럼 만들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뒀어요.”
“네가 그렇게 위험한 존재인데 날 여기다 가둬놓겠다는 거야? 이거 완전 미쳤네! 무고한 사람은 안 죽인다며!!”
“… 유사시라고 했잖아요. 이 집에서 산 지 3년이 넘었지만, 그런 상황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ㄱ, 그래도!”
“서혁 씨를 여기다 가둬놓지 않으면 어디에 가둬놓아요? K와 L의 집으로 가고 싶은 거예요?”
“… ㅎ, 하지만!! 너 내 팬이라고 했잖아! 내가 다칠 게 겁나지도 않냐!?”
“걱정 말아요. 이 방은 피난처니까.”
“… 피난처?”
“혹시라도 이 집에 두 사람이 있는 상황에서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그럴 때를 대비해서 이 방은 출입문을 철문으로 만들었고, 거기다 자물쇠는 안팎으로 5개나 만들었어요. 벽도 다른 방보다 두껍고요. 만약에 제가 폭주를 할 경우엔 문을 잠가버리세요. 그럼 이 안까지는 들어오지 못할 거예요.”
걱정 말라는 인아의 말에 더 이상 불만을 터뜨릴 거리가 없던 서혁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밥을 먹는데 집중했다. 근데 이 녀석은 스스로를 무슨 위험한 폭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취급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나? 마치 다른 사람에 대해 얘기하는 것 마냥 태연한 인아를 보고 있으니 방금 전 괜히 오버를 떨었나 싶었다.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찝찝해졌지만, 그렇다고 사과를 하자니 그것도 이상한 것 같아 꾸역꾸역 밥을 입에 쑤셔 넣는 것에 집중했다. 좀 더 질문하려고 했었는데, 분위기가 이러니까 더 이상 묻지도 못하겠네. 그런 서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인아는 서혁이 왜 저러나 싶어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별 말없이 계속 식사를 이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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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옆집에 갔다 올게요.”
“그런 거 일일이 설명하지 마.”
“… 금방 갔다 올 테니까 괜히 움직이지 마세요.”
인아는 까칠한 서혁의 반응에 잠시 멈칫하긴 했지만 꿋꿋이 제 할 말만 하고 집을 나섰다. 서혁은 인아가 나간 자리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인아가 구해준 목발을 짚고 거실로 나왔다. 인아가 이 집에 있을 때는 이 방을 나서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기에 계속 방 안에서만 있었지만, 한 번 쯤은 이곳의 구조를 확인하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방 밖으로 나온 서혁은 한껏 경계를 하며 인아의 집을 둘러봤다. 생각… 보다 특별한 건 없네… ? 평범하기 짝이 없는 집 안 풍경에 어쩐지 기운이 빠진 서혁은 5분 정도 집 안을 둘러보다가 목발을 쓰는 게 불편해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살짝 숨을 몰아쉬었다.
“목발로 걷는 건 역시 힘들다니까….”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던 서혁은 다시 한 번 거실을 둘러봤다. 역시 보통 집이야. 물론 냉장고에 헌혈 팩이 있는 것을 보면 완벽하게 정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피를 마시는 것을 제외하고는 보통 사람과 다를 것이 없는 것만큼은 확실해졌다. 근데 원래 흡혈귀가 아침 7시에 일어나고 사람이 먹는 밥도 막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도 있나?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인아는 처음 만난 그 날을 제외하곤 자신이 지금껏 알고 있던 흡혈귀와는 전혀 다른 모습만 보여줬다. 사람처럼 밥을 먹고, 잠을 잤으며 심지어는 먹잇감 정도로 취급해야 마땅한 서혁을 팬이라는 이유로 이렇게 살려두지 않았는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흡혈귀와는 전혀 닮은 점이 없는 인아의 모습을 떠올리던 서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뭐 하나 이해가 가지를 않는다니까. 사람의 피를 마시는 흡혈귀가 사람처럼 밥을 먹고 낮에도 돌아다닐 수 있다니. 그게 말이나 될 법한 얘기야? 지금껏 내가 알고 있던 뱀파이어와는 매치하는 부분이 하나도 없잖아. 서혁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이제 더 이상 답도 나오지 않을 문제로 골머리를 썩지 말자고 생각했다.
물어보고 싶어도 흡혈귀에 관한 질문이라 대답해줄지 모르는 일이고, 괜히 그 심기를 거슬렀다간 3개월 뒤 내보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을 지도 모르니까. 그래, 어쨌든 3개월만 이 곳에 있으면 날 풀어주겠다고 약속했으니, 모든 게 이해가 안 되고 답답해서 미쳐버릴 지경이라도 꾹 참고 3개월 동안 버티자. 결국 괜한 호기심을 가라앉히고 tv를 켠 서혁은 세상 돌아가는 소식이라도 확인해볼 겸 채널을 바꿔서 뉴스가 나오도록 했다.
‘다음 뉴스입니다. 배우 은 서혁씨의 소속사인 ‘YJ엔터테이먼트’ 측에서 은 서혁씨의 행방불명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최근 영화 ‘달빛 유혹’ 촬영 중 낙마 사고로 인해 입원했던 은 서혁씨의 병실이 일주일 전부터 비어 있었다는
기자들의 주장과 일부 팬들의 증언이 속출했지만,
소속사는 타이트한 스케줄과 이번 낙마 사고로 인해 심신이 많이 지쳐 있던 은 서혁씨에게
요양 차 휴가를 준 것 뿐이라며 모든 의혹을 부인했습니다.
YJ엔터테이먼트 측은 더 이상의 억측과 논란에 대한 자제를 부탁했으며,
지속적으로 가십성 보도를 하고 있는 신문사에 대해서도 법적인 절차를 밟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뉴스 채널을 틀자마자 가장 먼저 tv를 통해 나온 뉴스는 서혁에 관한 소식이었다. 혹시라도 자신의 납치 소식이 전해졌을까 싶었지만, 소속사에선 열심히 자신의 납치 사실을 부인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내가 도망을 쳤는지 납치를 당했는지 정확히 모르는 상황인데 함부로 입을 털긴 힘들겠지. 그건 그렇고, 이곳에 갇힌 지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나? 거의 며칠을 넋 나간 사람처럼 지낸 탓에 시간이 이렇게나 많이 흐른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일주일이나 지났으니 소속사가 뒤집어졌겠군. 안 그래도 가장 비싼 상품을 한 동안 사용할 수 없게 되어 버려서 거기에 따른 손해를 계산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이젠 그 상품이 없어지기까지 했으니 답이 전혀 안 나올 만도 하겠지. 그런데 정 우주는 괜찮으려나. 다른 인간들은 엿을 먹든 물을 먹든 상관없고, 솔직히 그렇게 되어 준다면 기쁘기까지 하지만, 우주까지 고생할 걸 생각하면 좀 찝찝한 마음이 들기는 했다.
정 우주는 서혁의 소속사 기획팀 팀장이었고, 서혁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표면적인 관계는 많이 쌓았지만, 진심으로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없다시피 했는데, 그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진짜 친구 중 한 명이 우주였다. 우주는 이 거지같은 연예계에서 만난 가장 솔직하고, 편안하고, 따뜻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성별을 떠나 서혁은 우주가 인간적으로 좋았다.
오죽하면 서혁이 그 거지같은 회사와 계속 일을 하는 두 가지 이유 중 하나가 그녀일까. 하나는 서혁을 이 연예계로 데려온 삼촌이 그 곳에서 이사직을 맡고 있기 때문이었고, 하나는 정 우주가 그 회사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로 친한 우주가 자신 때문에 엄청나게 곤란해 할 것을 생각하니 나중에 다시 돌아가게 된다면 비싼 과자라도 한 박스 사다 바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하긴, 내가 지금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알아서 뭐하겠냐. 그냥 끄… 어?”
‘다음 뉴스입니다. 괴물 살인마 J에게 살해당한 최정래 의원의 부검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이번 최정래 의원 살인 사건 역시 지난 번 살인과 같이 몸에서 모든 피를 뽑아내 살해하였으며….’
세상 돌아가는 소식 한 번 보려다가 안 그래도 복잡한 마음이 더 찝찝해진 탓에 그냥 그대로 tv를 끄려던 서혁은, tv에 나오는 살인마 J에 관한 소식을 보고 손을 멈췄다. 괴물 살인마 J… ? 작년부터 수도 없이 뉴스에서 봤던 인물이었지만, 서혁은 단 한 번도 J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적이 없었다.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왔고, 저런 놈에게 신경을 쓸 만큼 심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뉴스를 끄려던 손이 멈춘 것은 명백히 괴물 살인마J 때문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관심을 가져 본 적 없던 존재에 대해 갑자기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번에 그 살인마가 죽였다는 국회의원의 얼굴 때문이었다. 서혁이 옥상에서 떨어지던 그 날 밤. 정신이 없던 와중에도 인아의 모습을 확인했던 것처럼, 서혁은 그녀의 손에 피가 빨리던 남자의 얼굴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뭐야…. 대체 왜….”
아니, 사실 지금까진 제대로 머릿속에 떠올려 본 적도 없었다. 서혁은 TV에 나오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그날 밤 인아에게 목덜미를 물어 뜯겨 죽은 그 남자의 얼굴을 기억해냈고, 그 남자가 TV 속의 국회의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 그래도 이해 못 할 것들 투성이인 상황에서 또 다시 이해하지 못할 일이 터지자, 제대로 상황을 인지할 만큼의 여유가 없었던 서혁은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눈으로 TV 화면만 바라봤다. 이게… 뭐야? 왜 저 남자가 TV에 나오는 거야? 저 남자가 국회의원이야? 이 남자를 살인마 J가 죽였다고? 심지어 내가 납치되던 그 날 밤에? 수많은 물음표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결국 모든 상황을 이해한 서혁은 새하얗게 얼굴이 질려버렸다.
“괴물… 살인마… J… ?”
“… 은 서혁씨?”
“… !!!!”
서혁이 모든 진실을 파악한 그 순간, 은성과 이야기를 마친 인아가 서혁의 이름을 부르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왜 거실에 나왔….”
인아는 서혁에게 다가서며 왜 거실에 나왔느냐고 물으려다가, 새하얗게 질린 서혁의 얼굴과 그녀가 죽인 남자의 얼굴이 나오는 TV를 확인하곤 입을 꾹 다물었다.
“… ㅈ… 저 사람… 뭐야… ?”
새하얗게 질린 서혁의 얼굴을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보던 인아는 한숨을 내쉬며 TV를 껐다.
“… 뭐긴요. 그때 당신이 봤던 사람이죠.”
“ㄱ… 그럼….”
“… 네. 저기 TV에서 열심히 떠드는 살인마 J가, 바로 저예요.”
이건 사실이 아니라고, 모든 게 오해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고 올라왔지만, 인아는 결국 그 어떤 거짓말도 내뱉지 못했다. 그렇게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스스로가 괴물임이 변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가 이 이상의 진실은 모르길 바랐지만, 사실 인아도 그것이 힘들 것을 알고 있었다.
차라리 그가 이렇게 빨리 모든 사실을 알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알았으니, 이제 그는 어떻게 변할까? 지금보다 훨씬 더 나를 징그럽게 여길까? 그것도 아니면, 지금 당장이라도 쇠사슬을 끊고 도망치려고 노력하려나? 물론 그를 놓아줄 생각은 없지만, 그가 어떤 식으로 나오든 도망치는 것만 아니라면 인아는 그의 선택을 존중해주고 싶었다. 그것이, 이곳에 그를 가둬놓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ㄱ, 그럼 단순히 사람을 죽인 게 아니잖아!!”
“…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네요. 내가 연쇄 살인마든, 그냥 흡혈귀든, 사람을 죽이는 건 똑같지 않나요?”
“저 사람들이 누군 지 몰라? 국회의원이야! 네가 죽은 사람들 모두 우리나라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라고!!”
“그 사람들이 없어진다고 이 나라가 망할 것 같아요? 사회의 쓰레기를 처단하는 게 진짜 이 나라를 위한 게 아닐까요?”
“세상에… 죽어 마땅한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제일 먼저 네가 죽어야 되는 거 아니야? 내 눈엔 네가 저 사람보다 훨씬 더 쓰레기처럼 보이는데!?”
“….”
“하ㅡ, 진짜 대단하네. 내 눈앞에서 괴물 살인마님을 직접 뵙게 되다니. 나보다 더 한 스타였네?”
“난 사회의 쓰레기를 처단… 아니, 잡아먹는 것뿐이에요. 저 사람들의 진실을 알고 난 뒤에도, 날 비난할 수 있을까요?”
“그럼 나도 죽여!”
“….”
“착한 척, 인간적인 척 온갖 가증을 다 떨기에 난 그때 그 일도 먹고 살기 위해서 한 어쩔 수 없는 살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피가 네 주식이니까! 너한테 살인은 피할 수 없는 일 일 테니까! 그런데 뭐? 괴물 살인마? 그건 결국 네가 사람 죽이는 걸 즐기는 사이코패스라는 소리잖아!”
“… 사이코패스….”
“저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죽었든 네가 사람 죽이는 일을 즐기는 연쇄 살인마란 사실은 달라지지 않아! 그리고 난 너 같은 사이코패스랑 단 한 순간도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고!”
할 말이 다 끝난 서혁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렸고, 인아는 닫힌 문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사이코패스라. 그런 말은 처음인데 꽤 신선하네. 서혁의 방문 앞으로 걸어간 인아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방문을 쓸어내렸다.
“어쩔 수 없는 살인이었다고 말하면… 용서 받을 수 있을까요?”
아니요, 그럴 수 없을 거예요. 난 태어난 것 자체가 용서 받을 수 없는 괴물이니까요. 이 살인을 계속해나가는 이유는…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조차도 짓밟아버리기 위해서예요. 신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기 위해서,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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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우….”
그날 밤. 결국 저녁도 먹지 않고 문까지 잠가버린 서혁 때문에 인아는 서혁의 방문 앞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 역시, 충격을 많이 받았나보네. 이런 상황을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당하니 단순히 예상만 했을 때보다 훨씬 더 우울하고 짜증이 밀려들어왔다.
인아는 자꾸만 꼬여가는 상황이 답답한지 소파에 앉아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밥이라도 좀 먹지…. 지난번처럼 밥도 안 먹고 반항을 할까봐 걱정을 하던 인아는 갑자기 문이 열리고 거실로 나온 서혁 때문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 ㅇ, 은 서혁씨?”
“….”
“아… ㅁ, 뭐 필요한 거라도….”
“신경 안 쓰기로 했어.”
“… 네?”
“네가, 살인마든 괴물이든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게 무슨….”
내가 살인마든 괴물이든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
“대신, 나랑 약속 하나만 하자.”
“약속이요… ?”
“… 최대한 나랑 거리를 둬 줬으면 좋겠어.”
“… !”
“난 살기 위해, 넌 날 죽이지 않기 위해 이런 상황을 만든 거잖아?”
“….”
“그러니까, 우리 서로 그 목적만 생각하자고. 웬만하면 필요한 얘기 빼곤 말도 걸지 말고, 괜히 다가오지도 마.”
“….”
“대답해.”
“… 알겠어요.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뭐.”
“… 그럼 들어간다.”
할 말이 다 끝났는지, 서혁은 그대로 방에 들어가 버렸다. 인아는 서혁이 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방문이 닫히자마자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리를… 둬 달라고? 뭐, 목적은 서혁을 털 끝 하나 다치지 않게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니 그가 자신과 거리를 둔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오히려, 인아의 입장에선 서혁과 너무 가까워지면 곤란했기에 오히려 이러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 한 구석이 답답한 걸까? 저렇게…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는 사람을 3년 만에 처음 봤기 때문일까… ?
“… 정말 짜증나게 귀찮은 사람이야.”
닫힌 서혁의 방문을 바라보던 인아는 마른세수를 하며 서혁의 방문에서 시선을 돌려버렸다. 아, 이젠 나도 모르겠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이젠 나도 신경 끌 거야. 짜증이 가득 담긴 눈으로 다시 한 번 서역의 방문을 바라본 인아는 자신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