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최초의 직업 가수?
우리 나라 가수 제1호?
‘명사십리(鳴沙十里)'
북한(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강원도 원산시 갈마반도(葛麻半島) 명사십리( (鳴沙十里)
1935년 월간지 '삼천리'에서 가수 인기투표를 실시했다. 독자 투표로 남녀 각 5명을 뽑는 방식이었다.
전체 1위로 뽑힌 평양기생출신 왕수복은 이효석의 연인으로도 유명하였다.
남자가수 1위는 채규엽. 함흥출신으로 일본 중앙음악학교에서 공부한 유학파였다.
1930년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봄노래 부르자’를 취입한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가수 1호로 당대 스타였다.
채규엽 (蔡奎燁, 1907-1949) 은 함경남도 함흥 출생으로 원산에 있는 신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중앙음악학교에서 정식으로 음악수업을 받았다. 일본에서 사용한 그의 첫 예명은 하세가와 이치로(長谷川一郞)였다. 1930년 3월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봄노래 부르자」를 출반하여 직업가수 제1호가 되었다.
1932년 일본 유행가의 분수령을 이루게 한 고가 마사오(古賀政男) 작곡「술은 눈물일까 한숨이랄까」를 우리말로 취입 최고 인기가수가 되었다. 그 뒤 콜럼비아·포리도르·태평레코드사를 통하여 수많은 히트곡을 내놓았다.
1943년 이후 연예 활동을 잠시 중단했다가 8·15광복 후 다시 연예계로 돌아와 왕년의 히트송을 열창하기도 하였다. 1947년 흥행사로 변신 연예단체를 운영하다가 사업 부진 등으로 종적을 감추었는데...
1·4후퇴 당시 월남한 연예인들이 전하는 바로는 그가 월북하여 아오지탄광에서 중노동을 하였다는 소식만 전할 뿐 생사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이후 평양에서 출판된 〈민족수난기의 가요들을 더듬어〉라는 책에 채규엽이 1949년 고향 함흥에서 병사했다고 기록되어 월북 사실이 확인되었다.
히트곡으로는「명사십리」·「시들은 청춘」·「물새야 왜 우느냐」등이 있다.
*2013년 7월 평양과 원산, 금강산 지역을 방문한 박상권 평화자동차 사장이 촬영한 명사십리 해수욕장.
‘명사십리 (鳴沙十里) '
북한(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강원도 원산시 갈마반도(葛麻半島) 명사십리( (鳴沙十里)
[채규엽(蔡奎燁) 노래. 장재성(張在星) 작시(作詩)⦁竹岡信幸(타케오카노부유키) 작곡.
服部良一(핫토리 료이치) 편곡. 1937.7. 콜럼비아(Columbia Record)]
[가사(歌詞)]
장재성(張在星) 작시
< 1 >
봄도 짙은 鳴沙十里 다시 못올 옛 이야기
海棠花에 속삭이던 그 님이였건만
西山 너머 지는 해야 날아드는 갈매기야
浦口도 白沙場도 꿈이였더냐?
< 2 >
日沒蒼山 날 저문데 아득하다 저 水平線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 님이였건만
한번 가서 못 온다는 부질없는 靑春이라
울어서 이 한 밤을 새워나 보리.
< 3 >
다시 생각 말자 해도 차마 어이 잊을소냐?
百年 살자 盟誓하던 그 님이였건만
恨도 많은 우리 身勢 허물어진 因緣이야
海棠花 부여잡고 한숨 지누나.
* 원곡은 ‘思ひ出の江の島(오모이데노 에노시마; 추억의 에노시마)'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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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라디오도 없는데 무슨 티비요.
이 야그는 호랑이 흡연하던 시절
야급니다.
10대때에 자주 불렀던
노래
물새야 왜우느냐를
생돼지 배따는 소리로
친구들과 어울려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1957년 손인호의 물새야 왜 우느냐일테죠.
1936년 채규엽의 그것이 같은 노래인지는
]
제가 확인을 못하겠습니다.
같은 듯 다를 듯...
@별고을 그렇게 하시니 기억이 나네요~
손인호 노래가 맞습니다.
@단석
ㅎ 채규엽님은
조선 1호가수로 역사적 인물이군요.
그의 「물새야 왜 우느냐」는 아직 접하질 못했습니다.
그 당시는 대개 일본 작곡가의 노래가 많았더군요
우리 나라 이름도 일본국이었으니...
늘 건강한 삶
행복하서요.
6.25 사변 후 초창기는 북한이
남한보다 더 잘 살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월북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 중에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도 포함 돼
있다는군요.
박정희 대통령이 나타나면서 남한이
북한보다 더 잘 사는 나라로 탈바꿈한 것으로
국가 발전의 발판을 닦아 놓으신건 분명한 사실이고요.
새마을 운동 부터 국민들 정신부터 깨우쳐 주신
분이죠.
나중에 채규엽가수는 월북한 걸 후회 했겠죠.
북에서 음악으로 일 할 줄 알고 갔지만
탄광으로 일하다가 북에서 생을 마감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네요.
그는 함경도 함흥 사람이고
그 당시는 남북이 뚜렷하지도 않았으니
그를 월북했다고 하기엔 좀 그런 거 같네요.
자기 고향으로 갔을 텐데
북쪽에서 어이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요.
그 과정도 뚜렷이 밝혀진게 없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