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몬츄라 레드와 성조기 팬츠로 멋을 내고 우중 산책을 나갔습니다. 세상이 물-불-공기-흙으로 이루어진 것이 맞는다면, 나는 때맞춰 제대로 마실을 나간 셈입니다. 치킨집 어닝 컬러-우산-몬츄라가 커플룩입니다. 메마른 땅에서는 작은 물소리도 크게 들리는 법입니다. 오래 가물었던 계절 끝에 비가 내리면 갈라진 흙이 먼저 반응하고, 바람뿐이던 광야에 생명의 기운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거대한 숲은 생명의 물로부터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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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둥>을 공부하면서 그 모진 비를 맞고 산 세월이 반세기인데 아직도 교양 머리 없는 나를 대면하면서 반성 많이 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밖으로 나가라!"는 말은 단순히 세상과 싸워 이기라는 뜻만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누구인지 미리 완성해놓고 세상으로 나가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타인을 만나고, 거절당하고, 실패하고, 인정받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노동하고, 창조하면서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 조금씩 알게 된다는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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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는 완성된 나를 방해하는 존재만이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를 현실로 불러내는 존재다" 오늘은 헤겔의 <지양>인지 지향인지 하는 아우프헤벤(Aufheben)을 기필코 잡들이 하고야 말 것입니다. 헤겔은 칸트와 더불어 근대 독일 관념 철학을 대표합니다. 헤겔은 자기보다 앞선 칸트의 철학을 이어받았지만 칸트와는 다른 모습으로 '이성을 통한 현실의 조화' 내지 개척을 그려냈다고 봅니다. 특히 법철학에서 칸트가 순수한 내적 '도덕 감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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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논리' 보다 앞선다는 견해를 가지고 그것이 법의 근원이 된다고 본 것과는 달리, 헤겔은 현실의 인간과 사회 공동체 속에서 움직이는 이성이 자체 발전을 이루어 실정화 됨으로써 법적인 존재 형식을 가지고 효력을 발휘한다고 본 것 같습니다. 나는 이것을 "율법의 완성과 폐지"로 풀어볼까 합니다. 결론적으로 율법이 자연법을 지향한다는 차원에서 둘은 동일합니다. 야고보서의 '행함'과 '믿음'이 따로따로가 아니라 같은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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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지양>은 한자로 止揚인데 止는 ‘멈추다’ 揚은 ‘오르다’의 뜻으로, 옳고 그름 시비처럼 ‘하지 말자’는 止와 ‘하자’는 揚의 서로 어긋나는 속뜻 단어가 함께 붙어있어요. 정반합으로 기억되는 헤겔 변증법에서 아우프헤벤(Aufheben)은 '폐기함'과 동시에 '보존하는' 것입니다. 헤겔은 이 단어의 이중적인 의미를 활용해, 낡은 질이 부정되고, 새로운 질로 옮겨 갈 때, 낡은 질에 있던 것이 모두 부정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고, 그 안의 적극적인 것은 새로운 질의 내부에 보존된다는 식의 논리를 구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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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폐지가 아닌 율법의 완성) 독일어 단어 ‘아우프헤벤’을 헤겔은 이러저러한 의미의 변증법 용어로 채택했고, 일본이 이를 止揚이라 번역한 것을 우리가 그대로 쓰면서 '지양'이 알쏭달쏭 해지지 않았을까요? 결국 법이란 인간 사회에서 불가피한 것이고, 또한 자연법에서 비롯된 자연권이 실정화 됨으로써 비로소 인간이 사회에서 자유와 권리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 있어요. 헤겔은 법이 권리-도덕-사회윤리의 과정으로 발전된다고 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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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사회 윤리는 국가로써 완성되기 때문에 헤겔에 있어서는 국가야말로 인간 이성이 절대화된 상태이고 '절대정신'이 획득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성은 국가를 통하여 현실과 화해하여, 고 조화되어 보편화되고 '절대정신'을 얻게 된다는 겁니다. 예컨대 헤겔의 법철학은 추상 법(자연법)이 실정화를 통하여 비로소 법률화되는 철학적 사유입니다. 아마도 성경 속 성령의 통치 같은 것이 아닐까.
2.
율법은 폐기되는가, 성령 안에서 지양되는가? 몬츄라 레드와 성조기 팬츠로 멋을 내고 우중 산책을 나갔습니다. 물·불·공기·흙이 세상의 기본 원소라면 때맞춰 제대로 마실을 나간 셈입니다. 치킨집 어닝과 우산, 몬츄라까지 얼추 커플룩이 되었어요. 메마른 땅에서는 작은 물소리도 크게 들립니다. 오래 가문 계절 끝에 비가 내리면 갈라진 흙이 먼저 반응하고, 바람뿐이던 광야에 생명의 기운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거대한 숲도 결국 작은 물줄기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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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둥>을 공부하면서 반세기 모진 비를 맞으며 살아왔는데도 아직 교양머리 없는 나를 대면하고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헤겔의 빌둥은 완성된 인간에게 붙여주는 훈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깨지고, 부정당하고, 타인을 만나면서 이전의 나를 넘어서는 과정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밖으로 나가라.” 이 말은 세상을 정복하라는 뜻보다 세상을 만나면서 자신을 형성하라는 요청에 가깝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미리 완성해놓고 타자를 만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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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당하고, 인정받고, 노동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창조하면서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타자는 완성된 나를 방해하는 존재가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를 현실로 불러내는 존재다" 여기에서 헤겔의 Aufheben, 지양이 등장합니다. 지양은 단순한 폐기가 아닙니다. 없애면서 동시에 보존하고, 보존한 것을 더 높은 관계 속으로 옮겨놓는 운동입니다. 이전 단계는 그대로 남아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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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단계 안에서 의미가 변형되어 살아남습니다. 이 개념을 기독교 신학의 <율법과 성령>에 가져오면 상당히 흥미로운 그림이 만들어집니다. 예수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헤겔적인 지양과 닮은 구조가 있습니다. 율법은 없어지지 않지만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율법의 외적 규정이 지향하던 하나님의 뜻이 그리스도 안에서 더 깊은 차원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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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산상수훈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은 단순히 살인을 금지하는 외적 규정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예수는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까지 파고듭니다. “간음하지 말라” 역시 육체적 행위의 금지를 넘어 욕망의 내면까지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완성은 규정의 강화가 아닙니다. 외적인 계명이 인간 존재의 내면으로 들어오는 사건입니다. 바울에게서 그 일을 수행하는 분이 바로 성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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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린다”는 바울의 말을 율법 자체가 악하다는 뜻으로 읽으면 곤란합니다. 바울은 율법을 거룩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합니다. 문제는 죄 아래 있는 인간이 율법을 생명으로 살아낼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사랑하라”고 명령할 수 있지만 사랑할 능력을 만들어주지는 못합니다. 율법은 “탐내지 말라”고 말하지만 탐욕을 제거하지 못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성령이 등장합니다. 성령은 새로운 율법책을 하나 더 주는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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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이 명령하던 삶이 인간 안에서 가능하도록 새로운 존재를 창조합니다. 따라서 율법과 성령의 관계를 지양이라는 언어로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율법을 폐기하지 않고 율법의 목적을 인간의 삶 안에서 실현함으로써 율법을 넘어선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말한 새 언약과도 통합니다. 돌판에 새겨진 법이 마음에 기록됩니다. 외부에서 “하라, 하지 말라”고 명령하던 율법이 이제 인간 안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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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말합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 무법적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율법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던 사랑을 성취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율법 → 성령은 법에서 무법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 강제 → 내적 자유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하지 마!”라는 규칙이 필요하다면 성숙한 인간은 왜 그것을 해서는 안 되는지를 이해하고 스스로 행위를 선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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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의 인격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이 헤겔의 빌둥과도 묘하게 통합니다. 참된 자유는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의 보편성과 타인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다만 여기에서 헤겔의 국가철학과 기독교의 성령론을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헤겔에게 국가는 단순히 절대정신 그 자체라기보다 객관정신이 제도화되는 최고 단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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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정신은 오히려 예술·종교·철학의 영역에서 자신을 완전히 인식하는 정신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국가=절대정신=성령의 통치”라고 연결하면 헤겔도 신학도 지나치게 단순화됩니다. 더 중요한 차이도 있습니다. 헤겔의 국가는 제도 속에서 자유를 실현하려 하지만, 성령은 국가라는 한 제도에 갇히지 않습니다. 성령은 오히려 국가와 교회와 시장을 모두 하나님의 정의 앞에 세웁니다. 국가가 불의를 행하면 성령은 국가를 정당화하지 않고 예언자처럼 심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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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권력을 탐하면 교회를 비판하고, 시장이 인간을 상품으로 만들면 시장도 심판합니다. 따라서 성령은 현실과 무조건 화해시키는 정신이 아니라 때로는 현실과 우리를 불화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여기에서 기독교적 지양은 헤겔보다 한층 급진적으로 변합니다.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인간의 죄와 폭력을 “역사 발전에 필요했던 과정”이라며 쉽게 종합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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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서 그 죄를 폭로하고 심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부활을 통해 죽음의 마지막 말도 거부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은 놀라운 의미에서 지양의 구조를 가집니다. 죽음은 부정되지만 삭제되지 않습니다. 성령은 율법을 없애는가, 아니면 율법이 바라보던 목적을 더 깊은 차원에서 완성하는가?
2026.8.23.su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