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원문보기 글쓴이: 정중규
축일:2월27일
성 가브리엘 포센티
St. Gabriel Possenti
St. GABRIEL of Our Lady of Sorrows
San Gabriele dell’Addolorata Religioso
1 March 1838 at Assisi, Italy -
27 February 1862 at Abruzzi, Italy of tuberculosis
Canonized:1920 by Pope Benedict XV
산떼 뽀센티 집안의 13남매 중에서 11번째로 태어난 그는 프란치스꼬로 세례를 받았고,
부친이 스뽈레또의 사정관이었기에 고난회에 입회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4살 때에 어머니를 잃고 큰누나 밑에서 자랐으나, 그 누나가 콜레라로 사망하자 그는 큰 충격을 받았고,
그곳의 예수회 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매우 지성적이며 능력이 뛰어났고, 문학과 예술에도 놀라운 재능을 보였으나,
그 이면에는 깊은 신앙심과 성모님에 대한 신심,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높은 애정이 있었다.
1856년 9월, 그는 모로발레에서 고난회의 수련자가 되었다.
이때 그에게는 "통고의 모후의 가브리엘" 수사라는 이름이 내렸다.
그는 이때부터 사소한 일에서는 완덕을 얻으려는 특별한 노력으로 일생을 살았다.
그의 밝은 성품, 기도 정신, 다른 이들에 대한 배려, 규칙 엄수,
육체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닮으려는 열망은 그의 모든 생활에서 빛을 발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불과 4년 동안의 수도생활로 높은 완덕을 닦았던 것이다.
그는 1862년 2월 27일 이른 아침에 이솔라디 그란 사쏘에서 운명하고, 1920년에 시성되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아시시가 전세계에 유명해진 이유는 말할 필요조차 없이
13세기에 청빈(淸貧)의 사도, 수도회의 창립자로서 유명한 성 프란치스코가 그 읍내에서 출생했기 때문이지만,
19세기에 와서 아시시 시(市)는 다시 종교적인 한 위인을 냄으로써 더욱 유명해졌다.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게시판676번,1403번.
*성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상흔 축일:9월17일.게시판644번,1369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그는 통고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성 가브리엘인데 많은 점, 특히 쾌활한 성격, 완덕에의 열심,
돌연한 회개 등으로 그가 그 고향의 선배 프란치스코와 흡사하다는 것을 대단해 흥미 있는 점이라 할 수 있다.
통고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성 가브리엘은 1838년 3월 1일 전술한 바와 같이
아시시에서 출생하여 속명을 프란치스코라고 했다.
그는 열세 아들 중 열한째로 아버지는 아시시의 시장이었고,
어머니도 경건하고 교양 있는 사람이라 아이들의 교육에 부족한 점이 없었지만
불행이라고 할 것은 프란치스코가 아직 4세밖에 안 되었을 때 훌륭한 어머니를 여읜 일이다.
어렸을 때의 프란치스코는 극히 활발하면서 성격이 드세고 거칠어 화를 잘 내는 점이 있고
해서 나중에 그가 성인이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교육을 맡아 본 어느 한 교사의 지도로
그는 점차 자기의 결점을 고치고 장점을 발휘하여 예수회의 학교에 들어간 후부터는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다.
본래 수재였던 그는 학교 성적도 대단히 좋아 가끔 수석을 차지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망이 두터웠으므로 자연히 이 세상의 명예나 교제의 오락에 애착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음악에 대한 재주나 광대한 지식 등이 상류 사교계(社交界)에도 출입하는 기회를 주었으므로
점점 사치함과 관극(觀劇)기타 쾌락에 취미를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이 세속적인 사물에 몰두하면서도 타락의 길에는 떨어지지 않고
그의 영혼을 정결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는 종교상의 책임에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하느님께서 그를 깨우쳐 주실 때가 다가왔다.
그가 세속적 쾌락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병에 걸려 중태에 빠진 일이다.
그는 그때 비로소 이 세상의 허무함과 현세 사물의 허망함을 깨달아 만일 자기 병이 낫는 다면
반드시 수도원에 들어가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하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기적과도 같이 그의 중병은 낫게 되어 전과 같은 건강한 상태로 돌아갔다.
그러나 인간은 연약하여 전과같이 건강하게 되니 전에 누리던 쾌락에 다시 마음이 기울어져 약속한 것도
잊어버린 듯 돌보지 않았다.
이것도 하느님의 섭리였다. 그는 오래지 않아 다시 병을 얻어 이번에는 생명이 대단히 위험했다.
목이 부어 올라 숨이 막혔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 고통이 아주 심해 견딜 수 없었을 때 그는 예수회의 순교자
성 안드레아 보볼라의 상본을 들어
자기 목에 대고 그분의 전구로 이 병이 낫기만 하면 이번에는 틀림없이 수도원에 들어갈 것이라고 약속했다.
*[IHS]성 안드레아 보볼라 순교자 축일:5월16일.게시판1766번.
다행히 그의 원의는 허락되어 이번에도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
프란치스코는 다음날 즉시 예수외 수도원장을 방문하고 입회 허락을 청했지만,
지금까지 너무 세속적인 생활을 했기에 원장도 그의 진의(眞意)를 의심하여 고려해 보겠다고
약속하고 일단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동안 프란치스코도 생각을 달리해 예수회보다 더 엄격한 십자가의 성 바오로가 창립한
예수 고난회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성모 승천 대축일에 있었던 일이다.
과거 스보레도에 한창 유행했던 콜레라가 성모님의 전구로 소멸되었다는 이유로 이날 많은 시민들의
사은 행렬(謝恩行列)이 대대적으로 거행될 때 프란치스코는 행룔중 대주교께서 모셔들고 있는
성모상을 쳐다보니 그의 입이 움직이며 동시에
"프란치스코야, 어찌하여 세속을 버리기를 주저하고 있느냐?" 하는 말씀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극히 감동되어 즉시 아버지께 자기의 결심을 말했다.
아버지는 장차 자기 직업의 후계자로 삼을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의외의 아들의 말을 듣고 매우 놀랐지만
하루종일 열심히 기도하며 생각한 결과 그것이 하느님의 성의라는 것을 깨닫고 마침내 허락했다.
2, 3주간후 프란치스코는 예수회 학교를 졸업했다.
여느 때와 같이 좋은 성적을 올린 그는 졸업생을 대표해 재주 있는 웅변으로 영광된 답사를 하여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지만 이튿날 즉시 스보레도를 떠나 모로발레에 가서 거기에 있는 예수 고난회에 들어갔다.
그때까지 아무에게도 수도회 입회 사실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놀라며
"일시적인 마음으로 수도원에 들어간 것 같으니 오래가지 못하리라.
곧 염증이 나서 도망쳐 나올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 예상은 맞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참된 열심을 가졌으므로 입회 11일째 되는 날 수련자가 되는 허락을 받아 미사중에
예수 고난회 수도복을 입고 수도명으로 통고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The Seven Sorrows of the Virgin-DURER, Albrecht.
c.1496. Oil on panel,Alte Pinakothek,Munchen and Gemaldegalerie, Dresden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9월15일.게시판642번,1365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그는 자기 자신을 수사들 중에서 제일 낮은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형제들에게 봉사하고,
어려운 일이라도 자진해 맡아서 하고,
종종 있는 엄한 질책, 주의, 훈계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들으며 수도 생활에 최선을 다했다.
이런 일들은 지금까지 세속에 있으면서 늘 남보다 나았던 안락한 생활과
모든 칭찬과 명예와 인망을 한몸에 지니고 있던 그에게는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일단 수도 생활을 겸심한 이상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완덕에까지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굳은 의지를 갖고 있었다.
예수 고난회의 목적은 주님의 수난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갖고 주님께 대한 사랑과 존경을 드린것은 물론
통고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대한 신심도 뛰어났다.
그가 성모 마리아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는
"성모 마리아는 내 마음의 마음, 내 혼의 혼, 이 세상에서의 내 천국"이라고 한 말로써도 가히 할 수 있다.
실제로 그가 덕행의 길을 꾸준히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은 성모님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을 하느님과 함께, 회칙을 세밀한 점에까지 충실히 지키며 6년의 세월을 보낸다.
그때 신학, 철학 공부도 거의 마치고 다음해 성탄절에 성품 성사의 하품인 4품까지 받기로 되어 있었지만
주님의 섭리로 폐렴에 걸려 병고를 잘 참아내다가 1862년 2월 27일 마침내 영원한 행복의 나라로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는 24세였고,
세상을 떠난 후 많은 기적이 그의 전구로 일어났으므로 1908년에는 복자품에,1920년에는 성인품에 올랐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예수고난회 상징 해설
’하얀 색의 십자가’는 이 표지를 착용한 수도자의 마음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봉헌되었으며,
항상 그 십자가의 발치에 머무를 것임을 고백하는 의미이다.
’흰 심장’은 예수님의 고난을 항상 간직할 수도자의 순결한 마음을 상징한다.
’못 세 개’는 예수님의 고통과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모든 이의 고통을 상징한다.
"IESU XPI PASSIO" 이란 문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의미이다.
전통적인 표어 : "예수 고난의 신비가 우리 마음에"
예수고난회 영성
모든 영성의 핵심은 하느님과의 일치이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에게도 고난회원 생활의 전체적 수덕적 의미,
기도와 가난의 목적,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 찬 봉헌의 의미는
’하느님과의 신비적 일치’에로 향하는 길이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는 그 일치의 ’문’(the godly door)이시다.
하느님이시요 인간이신 그리스도는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므로,
그분을 통해서 또 그분의 인성에 일치할 때만 하느님과의 만남은 가능해진다.
이런 바탕 위에서, 십자가의 성 바오로에게 하느님과의 일치, 그분과의 인격적 관계의 두 축은
"하느님의 현존"과 하느님의 사랑의 기억으로서의 "고난의 기억"(memoria Passionis)이다.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살아 간다는 것은 곧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 성령께 대한 온유함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성령은 교회의 ’기억’이시다. 때문에 우리는 성령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살아간다.
또한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예수님의 고난의 기억을 살아간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영혼은 결국 자기를 모두 버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품으로 가게 된다.
이런 맥락 안에서, 창립자는 수도회의 목적이,
하느님과 사랑으로 일치되는 기도의 사람이며, 이를 따른 이들에게도 가르치는
기도의 교사가 되는 것임을 확고히 하셨다.
또한 이러한 하느님과의 사랑의 일치는, 예수 고난에 대한 "은혜로운 기억"을 통해서 보다 쉽게 얻어지며,
예수 고난이야말로 하느님 사랑의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사업이며 영혼의 회개와 완덕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가르치신다.
우리를 하느님과의 사랑의 일치에로 이끄는 "은혜로운 기억"은,
사물과 사람, 특히 자기 평가와 편의(편리)에 대한 심리적 의존으로부터 자유로울 때만,
그리고 그리스도의 운명에 동참하고자 열망하면서 그분의 인격에 참여할 때만 가능해진다.
바오로는 이러한 모든 것으로부터의 이탈을,
’예수 안에 자신이 전 존재를 기쁘게 투신하면서 자신과 세상에 죽고,
하느님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을 위해서만 사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첨예한 내적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낮추시고 치욕을 당하시고 종이 되시고 죽기까지 순명하신(필립 2,5-11)
예수와 그것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 가난하게 되시고, 비천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을 끊임없이 관상하고 묵상 할 때 첨예한 내적 자유는 가능해진다.
한편 이러한 내적 자유로 행동하는 사람은 하느님과의 "끊임없는 내적 친교"를 이루게 된다.
이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가능해진다.
ㄱ) 예수 고난 안에 표명된 하느님 사랑의 순수하고 "은혜로운 기억"을 가지며,
ㄴ) 깊은 내적 회상 안에, 그리고 하느님 사랑에 내적으로 깊이 온전히 침잠되어 거주하는
계속적인 기도와 고독, 그리고 관상 안에서:
그리고 영혼을 위해 행동하면서, 항상 참된 사도적 삶을 살며.
ㄷ) 하느님 구원 사랑의 계시로서의 예수 고난 안에 자신을 집중시키고 일치시킬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사람은 예수 고난에로 항상 되돌아가고, 거기에 머물러 생활하므로
예수의 고난과 사랑에 대한 "살아있는 기억"이요
"살아있는 초상(표지)"이 되어, 타인들 안에서도 이러한 ’기억’을 효과적으로 증진 할 수 있게 된다.
십자가의 성바오로 사제
St.Paul of the Cross
축일:10월19일.게시판705번,1426번
이와 같이 십자가의 성바오로의 영성은 또한 "십자가에 못박히신 사랑"(The Crucified Love)이신
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다.
그는 자주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십자가에 못박히신 사랑"이라 불렀다.
이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를 의미할 뿐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에 깨어있는 현실,
즉 자신의 외아들을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감사하는 애정으로 묵상함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고난회원들은 정결, 청빈, 순명의 3대 서원 외에
네 번째 서원, 곧 ’예수 고난에 대한 헌신’의 서원을 한다.
예수의 고난에 대한 "은혜로운 기억"을 증진하도록 위임된 이 ’특별 서원’은
고난회원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의 살아있는 기억이 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 서원은 고난회원의 모든 영성과 사도직 활동의 단일화되고 역동적인 원리가 되는 것이다(회헌 5항).
이러한 원리로부터 고난회 영성의 긴박한 특성들이 태동되었다(회헌 6항):
고독 - 기도, 가난 - 참회 - 겸손, 신속하고 단순하며 고결한 순명.
이러한 영성적 특성들은 고난회원을 ’사도적 사람’이요 ’복음적 일꾼’이 되게 하는 것들이다.
바오로는 고난회원들을, 모든 영광과 권리를 비우시고
죽기까지 순명하여 종이 되신 그리스도께로 집중시키는 특은에 대한 이해로부터
이러한 특징들을 도출해 내었다.
따라서 이러한 영성들의 해석 열쇠는 케노시스(필립 2, 5-11)와
예수의 파견 설교(루가 9, 1-6 : 10, 5-12, 16)이며,
이러한 영성의 특성들이 십자가의 성 바오로 영성의 준거틀인 것이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예수님의 고난 안에서 사랑의 정점을 발견하였다.
고난을 통해서 드러난 사랑은 흔히 일반적으로 느끼듯이 우리 마음을 어둡게 하고, 가라앉게 만들며,
우리 스스로도 그렇게 슬프고 고통스럽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이 심정적으로 강요받는
그런 종류의 체험이 아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치유하고 살리고 자유롭게 하는 바다처럼 우리를 젖어들게 하는 생명의 샘물이다.
그것은 삶의 체험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현존 안에 깊이 맛들임으로써 예수님처럼 하느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체험한 사람,
또 체험하고자 열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은총이요 선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신비가 항상 우리 가운데...."
(예수고난회홈에서)
지연
어떤 가난한 사람이 구두쇠 농부의 집에 품팔이를 갔다.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한 그는 일을 마친 후 품삯을 받으러 농부의 집으로 갔다.
그가 품삯을 요구하자 구두쇠는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주겠노라고 하였다
. 가난한 사람은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그가 다시 품삯을 요구하자 구두쇠 농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내일 준다고 했을 때 자네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나?
지금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일세. 그러니 내일 다시 오게나.”
내일은 결코 오지 않는다. 우리도 구두쇠 농부처럼 해야 할 일을 미루는 경향이 있다.
성 가브리엘 포센티는 미룬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수사로 부름 받고 있음을 느꼈지만 입회를 계속 미루었다.
그 후 심한 병을 앓게 되자 병이 나으면 수도원에 들어가겠다고 하느님과 약속했으나
병이 나은 다음에는 마음이 바뀌고 말았다.
한두 해 뒤에 그는 또다시 심한 질병에 걸렸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약속을 했지만
위기가 지나자 이번에도 역시 지키지 않았다.
가브리엘이 자신의 약속을 지킨 것은 누이가 콜레라로 죽고 나서였다.
수도원에 들어간 그는 ‘성모 통고의 가브리엘 수사’로 불렸는데,
애석하게도 4년 만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성 가브리엘 포센티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므로
너무 늦기 전에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 준다.
내가 일을 미루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루지 않고 선행을 실천하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psalmus-gregorian chant
첫댓글 감사히 잘 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