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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1일 연중 제13주일 (교황 주일)
제1독서 : 지혜 1,13-15; 2,23-24
제2독서 : 2코린 8,7.9.13-15
복 음 : 마르 5,21-43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22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23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24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25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26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27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30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33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3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35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39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40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42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43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구피상피’와 ‘위입서궁’이라는 말
류해욱 요셉 신부
제가 저 자신을 위한 덕담으로 택한 것은 원효대사의 유명한 ‘발심수행장’에서 뽑은
‘구피상피’와 ‘위입서궁’이라는 말을 가지고 미국에서 강의를 했더니,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반응이 좋았습니다. 다시 한 번 더 새기는 의미에서 이 글을 올립니다.
원효대사의 ‘발심수행장’은 한국 불교사에서 출가수행과 발심수행을 직접적으로 권고하는 글로
현존문헌 가운데 최초의 글이라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 최고(最古)일 뿐만 아니라 최고(最高)의 글입니다.
불과 706자의 짧은 문장의 글이지만 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가히 명문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원효대사의 문학적 소양에 대해서도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비유를 잘 하지요?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원효대사는 불교신앙을 일반대중들에게 쉽게 알리고자 하여,
다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외치며 누구나 불교에 귀의할 수 있다고 가르친 분이지요.
저는 우리나라 불교에 원효대사가 있어, 중국의 혜능이나 마조 등
어느 스승에 비할 수 없는 위대한 스승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원효 대사 이전에는 신라에서 불교는 귀족들의 종교였거든요.
우선 일반 대중은 글을 읽을 수가 없잖아요.
원효 대사는 민중 속에 불교를 보급하려고 애썼지요. 그는
“인간은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마음의 근원을 회복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지요.
사실 그것이 부처님이 가르치신 바이고요.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말이 참 재미있어요.
‘아미타’ 부처는 대승불교에서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을 설한다는 부처이고,
‘나무’는 귀의(歸依)한다는 뜻의 산스크리스트어입니다.
그러니 나무아미타불은 ‘아미타 부처님께 돌아가겠습니다.’라는 뜻이 되니,
부처님께 돌아가 부처가 되겠다는 말입니다. 누구나 부처가 되는 겁니다.
당시 일반 민중은 당연히 글을 몰라 경전공부를 할 수 없었지만
이 한 마디로 누구나 불교신자, 나아가 부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일반대중과 달리 수행자는 단순히 ‘나무아미타불’만 외치는 것으로는 부족하지요.
원효대사는 민중이 불교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수행자의 수행이 중요하다고 보고,
올바른 수행을 위한 ‘발심수행장’을 쓴 것입니다.
‘발심수행장’에서 제가 올해의 경귀로 뽑은 것이 다음의 구절입니다.
行者羅網(행자라망)은 狗被象皮(구피상피)요.
道人戀懷(도인연회)는 蝟入鼠宮(위입서궁)이니라.
제가 불교의 전문가는 아니잖아요.
제가 이 글을 쓰면서 여러 글을 참고하였고,
가장 많이 참고하고 도움이 된 글은 일타 스님의 ‘발심수행장’에 대한 강의였음을 밝힙니다.
그래도 단순히 일타 스님이나 다른 분들의 글을 인용하기보다는 제 나름대로 해석하고 묵상하기도 한 것입니다.
우선 첫줄에 대한 해석입니다.
행자는 ‘수행자’을 말하고, 라망은 ‘비단을 그물처럼 걸쳤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구피상피는 말 그대로, ‘개가죽, 코끼리 가죽’이지요.
그러니 앞줄의 뜻은
“수행하는 사람이 비단 옷을 걸치는 것은 개가 코끼리 가죽 덮어쓴 것과 같다.”가 되겠지요.
개가 코끼리 가죽을 덮어 쓰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에게는 사자가 동물의 왕이지만 인도에서는 코끼리가 동물의 왕입니다.
코끼리 가죽이 뜻하는 바를 헤아리기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가죽만 입었다고 개에게서 코끼리의 권위가 나옵니까?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개가 사자의 가죽을 덮어 쓰고 나타나니, 뭇짐승들이 다 겁을 냅니다. 그런데 그만 개가 말을 합니다.
“내가 바로 동물의 왕, 사자다. 어흠.” 그런데 사자 소리가 안 나고 개 소리가 나는 겁니다. 멍멍.
처음에 소리를 듣지 못하고 사자의 모습만 보고, 겁을 내던 짐승들이 개 소리를 듣고 피식 웃는 겁니다.
“자슥, 말이나 하지 말지.” 하하.
‘행자라망은 구피상피’라는 말은 수행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 불교에서는 스님, 가톨릭에서는 수도자, 사제들은
비단 옷이 아닌 신분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옷도 단순히 의복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이고, 분수에 맞는 행동거지를 해야 하는 거지요.
제가 라망은 ‘비단을 그물처럼 걸쳤다.’라는 뜻이라고 했는데,
이 ‘라망’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까 재미있는 말이예요.
단순히 ‘비단 옷을 입는’다는 좁은 의미보다는 더 넓은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올바를 것 같아요.
‘라’자가 그물 ‘라’자거든요. 유명한 말,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이 떠오릅니다.
그렇습니다. ‘라망’은 비단옷이라는 그물에 걸리는 상황, 부자유를 말합니다.
사실 개가 코끼리 가죽을 뒤집어쓰면 얼마나 무겁고 부자유스럽겠습니까?
수행자가 무엇 때문에 수행합니까? 근본적으로 자유롭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물론 내적인 자유이지요.
일타 스님은 ‘라망’을 애욕의 망으로 보고, 수행자가 애욕 망에 걸리는 것은
바로 마치 새가 그물망에 걸리는 것으로 해설하시는데,
일부 공감하지만, 저는 단순히 ‘애욕의 그물’보다는 조금 더 넓은 의미의 ‘부자유’로 보고 싶은 것입니다.
원효대사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라망’의 의미를 되새기고 싶습니다.
여러분들, 잘 아시다시피 요석공주가 원효대사를 사랑하잖아요.
요석공주가 원효대사를 위해 비단 옷을 지어 드립니다.
정말 사랑의 마음, 기도하는 마음으로 실을 한 바늘 뜨고 한 번 절하고,
또 한 바늘 뜨고 다시 절하면서, 다시 말해, 온 마음의 정성을 다해 비단 옷을 지어 선물로 줍니다.
원효대사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직 높은 수행의 경지에 다다르지 못했다면, 당연
“저는 수행자이고 제가 비단 옷을 입는 것은 ‘구피상피’이니 받을 수 없습니다. 도로 가져가십시오.”라고 했겠지요.
그런데 원효대사가 누구입니까? 거의 부처님의 경지에 다다른 도인이잖아요. 그는 선뜻 받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공주님, 성불 하십시오. 대단히 감사합니다.”
수행자에게도 자기 수행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상대, 그 사람의 마음, 정성을 헤아리는 일입니다.
원효대사는 요석 공주가 보는 데서 그 비단옷을 직접 입어 보면서 아주 좋아하십니다.
공주가 기분이 짱해서 “스님, 거룩해 보이십니다.”하니까 스님이 “아, 정말 좋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요석 공주가 기쁨으로 가득 차서 부처님한테 절 한번 하고 떠납니다.
요석공주를 보내고 나서 그때서야, 원효대사는 비단 옷을 벗어서 자기 상좌인 ‘심상’이라는 스님에게 줍니다.
심상에게는 정말 비단옷이 ‘구피상피’이지요.
그런데 심상은 처음에 그것도 모르고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좋아하면서 으쓱거립니다.
그래도 심상은 나중에 깨달음에 이르게 되고, 나중에 일본의 화엄종 종주가 된 훌륭한 분이지요.
이어서 “道人戀懷(도인연회)는 蝟入鼠宮(위입서궁)이니라.”를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도인이란 수행자나 마찬가진데, 도인은 신참이 아닌 수행자,
다시 말해, 어느 정도는 수행을 하여, 도를 조금 닦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문학적으로 같은 말을 반복해서 다시 쓰지 않으니까 수행자의 다른 말로 봐도 무방할 겁니다.
‘연회’라는 말은 불교에서 보통 ‘분별심’을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가톨릭, 특히 이냐시오 영성에서는 ‘분별심’이 아주 꼭 필요한 좋은 말이고 중요한데,
불교에서는 ‘분별심’을 경계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같은 용어를 쓰지만 그 의미가 조금 다른 것이지요.
‘연’은 사모한다는 말이고, ‘회’는 품는다는 말이니까,
언뜻 “사모하는 마음, 그리워하는 마음’을 품는다.”로 읽히지만,
단순히 수행자가 ‘연모하는 마음을 지닌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제가 자료를 찾아보니까 실제로 많은 분들이 그렇게 잘못 읽고 해석하고 있는데,
한문 문법으로 맞지 않는 해석이지요.
일타 스님의 해설이 단연 돋보이고, 올바른 해석입니다.
일타 스님의 해석에 의하면, ‘연회’란 편안한 것을 생각하고 재물을 생각하고,
권세를 생각하고 명예를 생각하는 등이 모두 다 ‘연회’라고 합니다.
‘연회’는 한문에서의 문법으로 ‘연’을 ‘회’하는 것이 아니라, ‘회’를 ‘연’한다고 읽어야 하지요.
‘연’은 단순히 ‘사모하고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뜻보다는 ‘생각’이라는 뜻으로 보아야 하고,
‘회’는 ‘품을 회’ 자이니까 ‘연회’는 “다른 마음을 지니는 것을 생각하고, 연연해하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연회’란 수행자, 나아가 도인이 수행이 아닌, 다른 생각을 품는 것을 말합니다.
“위입서궁이니라.”
‘위’는 고슴도치‘를 말하고, ‘서’는 쥐이고, ‘궁’은 구멍이니까, 고슴도치가 쥐구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뜻이지요.
고슴도치가 쥐구멍에 들어갈 때는 온몸에 돋아 있는 가시를 눕히고 쉽게 들어가지만,
뒤로 나오려면 다시 세우진 가시에 걸려서 못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 번 ‘도’가 아닌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거기서 빠져 나오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말입니다.
‘위입서궁’, 정말 기가 막힌 비유 아닙니까?
“도인연회는 위입서궁이니라.”
도 닦는 사람은 도 닦는 일에 정진해야지, 다른 일에 빠지면, 그 근본을 잃고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연회’도 ‘라망’처럼 바로 부자유를 말합니다.
부자유, 그것이 바로 ‘라망’이고 '연회‘입니다.
유명한 탄허 스님은 ‘연회’를 “客懷(객회)”로 해석하는데, 좋은 해석이라는 느낌이 왔습니다.
‘객회’라는 것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니, 바로 그런 뜻입니다.
수행자가 수행이 아닌, 다른 생각이나, 일에 빠지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자, 불교에서는 스님, 가톨릭에서는 수도자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고슴도치가 쥐구멍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아니, 거기서 빠져 나오지 못하니, 바로 죽음의 구렁텅이입니다.
저는 저에게 ‘라망’과 ‘연회’, 다시 말해, 부자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했습니다.
제가 만일, “나는 그래도 책을 여러 권 쓰고, 번역하고, 그런대로 열심히 산 괜찮은 신부야.”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저를 사로잡는 그물이겠지요.
그물에 거리지 않는 바람이고 싶습니다.
늘 그렇지만 바람처럼 자유롭고 싶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언젠가 이른 아침에 택시를 탈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택시 기사님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습니다.
단 둘만 있는 공간이라서 많이 신경 쓰여서
“아침부터 안 좋은 일이 있으신가 봐요?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라고 했지요.
그러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글쎄 첫 손님이 여자인 것입니다. 거기다가 안경까지 썼습니다.”
남아선호사상이 심했던 시절에나 있었던 말을 아직까지 믿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오늘 기사님 대박 나시겠는데요? 옛날에는 그랬다고 하지만,
요즘에는 시대가 거꾸로 되어서 오히려 안경 낀 여자 손님을 태우면 재수가 아주 좋다고 하잖아요.
모르셨어요?”
그제야 표정이 좋아지십니다. 그러면서 확인을 하려는 듯이 “정말로 그렇게 바뀌었어요?”라고 묻더군요.
저는 “정말이라니까요. 오늘 하루 보십시오. 분명히 좋은 일만 생길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기사님께서는 계속 싱글벙글 웃으면서 목적지까지 태워주셨습니다. 내리는데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정말로 맞나봅니다. 여기까지 이렇게 신호 잘 받으면서 온 것은 처음입니다.”
만약 제가 기사님의 말에
“어이구, 어떻게 합니까? 오늘 정말로 재수 없겠는데요?”라고 맞장구쳤다면 어떠했을까요?
계속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이고, 이러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서 안 좋은 일만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서 긍정적인 생각을 간직한다면 실제로 좋은 일만 계속됩니다.
생각하는 대로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부정적인 마음을 품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사랑의 주님께서 내게 안 좋은 것을 주실 리가 없다는 믿음, 내가 꼭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믿음.
그 믿음이 실제로 좋고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자신의 딸을 살려달라는 청을 간곡히 합니다(마르 5,22-23 참조).
그런데 딸에게 가던 중에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지요. 그때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
믿는 사람은 두려움이라는 부정적인 마음을 간직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쁨이라는 희망의 마음을 간직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열 두해 동안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지요.
그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믿음만으로 건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지혜 1,24)고 제1독서는 말합니다.
악마의 시기로 죽음이 들어왔지만, 주님의 사랑으로 이 죽음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생명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제2독서는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
우리를 위해 스스로 낮아지신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낮아지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큰 영광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이 희망을 굳게 믿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탈리타 쿰!”(마르 5,41)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소녀에게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을 살면서 좌절과 절망으로 쓰러져 있는 우리를 향해서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는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열두 해 동안 하혈병을 않은 여인 이야기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 것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는 단지 병을 고쳐주시는 분이 아니라, 죽은 이도 살리시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냅니다.
야이로는 회당장으로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자였지만, 죽어가는 어린 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 속수무책의 슬픔과 절망 속에서 그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간청을 드립니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 5, 23)
회당장은 그야말로 전적인 신뢰의 자세로 진지하고 간절하게 청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만물을 당신 말씀으로 창조하시되, 인간만은 당신 “손”으로 창조하셨듯이,
이제 당신 “손”을 얹으시어 딸을 치유하시어 다시 살게 해 달라고 간청입니다.
죽어가는 딸을 살리기 위한 아버지의 이 애틋한 사랑과 믿음에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라나섭니다.
그런데 도중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말합니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르 5, 35)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일인가! 모든 희망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깊은 절망과 슬픔에 빠져드는 순간입니다.
사람에게는 도저히 희망을 걸 수 없어서 하느님께 희망을 두었는데,
그 희망이 이루어지는가 싶더니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참담한 순간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때를 종종 마주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순간을 맞이하면, 우리는 어찌하는지요?
이 절망의 순간, 원망과 좌절이 밀어닥치는 이 순간, 하염없이 넘어지고 마는가요?
아니면 더 깊은 데서 물을 길어 올리는가요?
사실, 바로 이 순간이 우리가 진정으로 응답해야 할 순간입니다.
바로 이 순간이 더 깊은 곳으로부터 믿음을 퍼 올리는 기회의 순간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 36)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을 때에도 마르타에게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믿는다면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요한 11, 23-26 참조)
그렇습니다. 죽음의 이 순간이, 바로 더 깊은 곳으로부터 믿음을 길러 올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생명을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자 마르타가 예수님께 대답하였습니다.
“예, 주님! 저는 ~믿습니다.”(요한 11, 27).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야히로에게도 이 순간이, 병을 고쳐주실 분으로 믿었던 예수님을
이제는 나아가 이미 죽은 딸을 살려주실 분으로, 더 깊은 믿음을 끌어올리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사실,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의 시련의 순간이기도 하고, 기회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믿음은 우리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인가 봅니다.
우리가 끝났다고 여길 때, 바로 그때 하느님께서는 일을 시작하십니다.
우리가 절망적이라고 여길 때, 바로 그 때가 구원의 때요, 은총의 때가 됩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슬픔과 절망과 두려움이 밀려오는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 36)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는다는 것’, 그것은 내가 지배하고 있던 자리를 예수님께서 지배하시도록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눈에 보이는 희망이 가라진 현실상황에서, 바로 그 상황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단지 지적인 동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행위를 구체적으로
예수님 안에서 기다리는 인격적인 행위를 동반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보이는 것 너머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리는 일입니다.
이처럼, 회당장 야이로는 믿음으로 일어섰던 것입니다.
“야히로”라는 이름의 뜻대로, 곧 ‘주님께서 깨우치리라, 일으키리라’는 그 뜻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소녀의 나이는 열 두 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찾는 부모에게
“저는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 49) 하고 말했을 때도 열 두 살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하혈 병을 치유 받은 여인도 열 두 해를 앓았었습니다.
당시의 열두 살은 결혼할 수 있는 나이를 말한다고 합니다.
일어나 새로운 걸음을 걸을 수 있는 나이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맞이하여 새 생명으로 살아갈 나이입니다.
오늘 우리도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탈리다 쿰!”(마르 5,41), 이 말씀으로 일어나 걸어가는 사람,
예수님을 믿고 일어나 새 사람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믿음으로 걸어가는 사람 말입니다. 아멘.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7월의 첫째 날입니다. 2018년도 반이 지났습니다.
어떤 분들은 벌써 반이 지났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 생각은 아쉬움과 미련을 불러올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아직 반이 남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 생각은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불러올 것입니다.
생각은 우리들의 자유입니다. 어떤 생각으로 7월의 첫째 날을 시작하시겠는지요?
명동에서 산책할 때입니다.
옆에 젊은 연인이 걷고 있었는데 여자가 “자기야, 내 신발에 껌이 붙었나 봐.”라고 하자
남자는 무릎을 꿇고 여자의 신발을 벗겨서 신발에 붙은 껌을 깨끗이 떼 주었습니다.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는 여자의 모습도 예뻐 보였고,
기꺼이 무릎을 꿇고 신발에 붙은 껌을 떼어주는 남자도 듬직해 보였습니다.
사랑이란 참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희망을 품고, 오늘 세상을 떠날 것처럼 뜨겁게 살자!’ 참 좋은 글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천상에서의 영원한 삶을 꿈꾸며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 하느님을 만날 것 같은 마음으로 충실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긍정의 힘’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책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미래는 바로 여러분의 것입니다!”
졸업식과 신입사원 환영회, 결혼식장에서 자주 들리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열정적으로 인생을 쟁취하고 미래를 소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습니다.
꿈을 이루고 성공하고 행복을 쟁취하는 비결은 오늘을 온전히 사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 때 더 나은 내일이 찾아옵니다.
누구나 할 수 있으며, 어떤 상황에 있든 어떤 고난을 겪고 있든 상관없습니다.
누구라도 지금 당장 최선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춘 채,
자신을 약하고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자존감이 약하며, 자신이 행복할 수 없는 이유와 조건을 귀신같이 찾아냅니다.
이런저런 이유를 내세우면서 행복한 삶을 먼 미래로 미루는 사람도 있습니다.
언젠가 내 인생도 풀릴 거야. 언젠가 일이 좀 한가해지면 가족과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거야.
언젠가 건강을 회복할 거야. 언젠가 하느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하느님의 복을 더 많이 누리게 될 거야.
그러나 언젠가는 절대 찾아오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오늘뿐입니다.
과거는 바꿀 수 없고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은 바로 오늘뿐입니다.
긍정의 힘은 이런 이야기를 주로 합니다.
인생은 생각을 따라갑니다.
높은 곳에 마음을 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하느님의 생각을 품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지으실 때 성공하도록 지으셨습니다.
말은 씨앗입니다. 말을 바꾸면 세상이 바뀝니다. 말로 표현하기 전의 축복은 축복이 아닙니다.
말을 함으로 축복은 이루어집니다. 신중히 말하고, 하느님의 은혜를 선포하여야 합니다.
올바른 생각과 말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걸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도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제1 독서는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선하시고 사랑이 넘치시는 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충실하게 살 수 있도록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주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은 우리들의 질문에 좋은 답변을 해 주고 있습니다.
역경과 고통 중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 의지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은 오랫동안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았고,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려고 했습니다.
그런 여인의 믿음이, 희망을 잃지 않고 주님께 가까이 갔기 때문에 오랜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병중에 있는 딸을 위해서 주님을 찾았습니다.
나중에 하인들이 찾아와서 딸이 죽었다고 하였지만, 주님께서는 그 딸을 죽음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절망과 좌절은 주님께로 우리를 이끌어 주지 못합니다.
오늘 제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곧 믿음과 말과 지식과 온갖 열성에서,
또 우리의 사랑을 받는 일에서도 뛰어나므로, 이 은혜로운 일에서도 뛰어나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그들의 궁핍을 채워 주어
나중에는 그들의 풍요가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준다면,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다.”
레지오 전단원 교육이 있었습니다.
교육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두 분의 교우분이 제게 왔습니다.
한 분은 냉방병이 있다고 하셨고, 다른 한 분은 우울증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두 분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분들이 자신들의 고통을 이야기하였고, 함께 기도하였기 때문에 좋아졌으리라 믿습니다.
저는 몇 번 기도를 통해서 치유되는 체험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들의 간절함을 하느님께서는 저를 통해서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선하신 분이시고, 우리들의 아픔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살아가면 고통 중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