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리 괴목을 찾아
괴목(槐木). 콩과식물로 분류되는 우리말로 회화나무라 부른다. 같은 콩과의 아까시나무를 닮았기는 하나 높이가 더 높고 수령이 수백 년 이를 정도로 노거수가 있음이 다르다. 옛적부터 향교나 서원에 흔히 심어 은행나무와 함께 대표적인 학자수(學者樹)로 불린다. ‘괴(槐)’ 자를 파자하면 귀신나무가 되기에 궁궐에서는 귀신을 쫓아낼 신목으로나 정승을 뜻한 나무로도 심었다고 한다.
봄비 같던 겨울비가 넉넉히 내린 이후 강추위가 찾아온 십이월 셋째 일요일 아침이다. 창원과 인접한 함안 칠북 영동리 노거수 회화나무를 찾아 길을 나섰다. 영동리 회화나무는 1980년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보호수다. 동마산병원 앞에서 칠원 운곡을 거쳐 검단으로 가는 농어촌버스를 탔다. 버스는 서마산 중리삼거리에서 칠원 읍내를 둘러 학동과 운곡을 거쳐 영동을 지날 때 내렸다.
마을 어귀를 들어서니 20여 년 전 트레킹 도중 해가 질 무렵이라 서둘러 지나친 희미한 기억이 떠올랐다. 500여 년 전 무오사화 화를 피해 남쪽으로 피신한 광주 안씨 일족이 터를 잡아 산 영동이었다. 성균관 교관을 역임한 안여거를 입향조로 해서 누대에 걸쳐 살아오면서 그가 심은 회화나무이니 수령도 500년으로 헤아려졌다. 후손 종창이 괴정기를 남겨 사료 문헌 가치도 높았다.
아홉 개 지지대가 가지를 떠받들어 속리산 정이품송을 보는 듯했다. 노거수 주변은 천연기념물답게 공원처럼 정비를 잘해두었다. 동녘에 제단으로 삼는 좌대가 놓였고 둥치에 색이 바래지 않은 왼새끼가 둘러쳐져 있었다. 주민들이 해마다 음력 시월 초하루 회화나무에 고사를 겸한 동신제를 지낸 흔적이었다. 현지 주민을 만나 뵐 수 없어 나무의 자세한 내력은 더 알아내지 못했다.
마을 안길을 지나자 동구보다 수령이 낮아 보이는 회화나무가 한 그루 더 서 있었고 입향조 선대를 향사하는 재실이 나왔다. 재실과 함께 한옥 한 채는 의학서당(義學書堂)이었다. 조선 후기 향교의 공교육 기능과 별도로 향리 문중에서 학문 도덕을 강론했던 사교육 시설이었다. 내 고향 운곡마을에도 구한말 개화기에 세워진 주자 사당 도동사와 함께 운곡강당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의학서당에서 마을 안길을 되돌아 나오다 평화로운 닭장 안에 여러 마리 암탉을 거느린 한 마리 수탉이 행복해 보였다. 그물망으로 둘러쳐진 닭장에 횃대보다 높은 알을 놓는 자리엔 암탉 한 마리가 웅크려 있고 그 아래는 연방 알을 놓으려는 녀석이 자리를 비켜 주길 대기 중이었다. 볏이 붉고 덩치 큰 얼룩 수탉 곁에 모여든 암탉은 모이보다 사랑을 먼저 차지하러 경쟁하는 듯했다.
아까 지나친 천연기념물 회화나무가 선 동구 밖은 공용 주차장이기도 했다. 남녘으로 내려갔어야 할 여름 철새 후투티 한 쌍이 잔디밭으로 날아와 먹이를 찾고 있었다. 암수가 구분되지 않는 후투티는 머리를 장식한 깃이 특이한데 오디를 좋아해 오디새로도 불린다. 후투티가 인디언 부족이 쓸 외래어로 여길 듯해도 순우리말이다. 울음소리가 ‘훗! 훗!’하고 들려 후투티로 부른다.
영동리 회화나무를 찾아간 날은 날씨가 제법 추운 아침이었다. 거기서 사연 산업단지를 돌아 사연마을에서 차량도 인적도 드문 골짜기로 드니 근래 축조된 저수지가 두 개 나왔다. 농업용수 공급이 아닌 공장으로 보낼 산업용수 댐이었다. 저수지 수면에는 종을 알 수 없는 오리들이 날아와 헤엄쳐 다녔다. 골짜기를 깊숙이 드니 젖소와 염소와 사슴과 꿀벌을 사육하는 농장이 나왔다.
엊그제 내린 비로 바위틈 낙숫물은 고드름으로 얼어붙는 곳이 있었다. 외딴 농가를 둘러친 볕이 바른 신우대 대숲 앞에서 배낭을 벗어 챙겨간 삶은 고구마를 꺼내 점심으로 대신했다. 무릉산을 비킨 산마루는 숲속 자연 유치원이었고 비탈을 내려선 신음마을은 ‘도랑 살리기 발상지’라는 표석이 눈길을 끌었다. 시내로 들어와 휴일이지만 동네 카페에서 꽃대감을 만나 종례를 가졌다. 23.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