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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군, 우리 족속이로군…. 그대를 알고 난 후 진저리치는 공감으로 중얼거린 나의 목소리는 분명 동족을 만난 기쁨의 신음이었을 것이지만, 그 신음이 경쾌하지 못하고 말 그대로 신음처럼 가슴이 먹먹해진 것은 동족 따위 몇 명이나 만나든 우리는 결국 혼자라는 것을 내가 또한 알기 때문이었지. 그대가 그 점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지. 콜린 윌슨은 그의 독특한 명저 ‘아웃사이더’에서 우리 시대의 아웃사이더를 고찰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텍스트로 그대의 이야기를 꼽고 있더군. 내가 보기에 그 이유는 그대가 결코 비범한 일탈자는 되지 못하기 때문이지. 자기 안의 혼란스러운 이중성에 고통받고 있는, 끝내 완벽한 시민도 완벽한 예술가도 못 되는 고독한 이리이기 때문이지. 토마스 만식으로 표현하면 ‘길을 잘못 든 세속인’일 터. 예컨대 보들레르나 랭보 같은 이들은 가장 극적인 아웃사이더이기는 하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단순한 면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누구보다 절망하고 피 흘리기는 하나 갈등은 없지 않았을까? 저주받은 운명으로서의 자기 존재성에 대한 분명한 자각이 있기 때문이지. 이들의 신념은 말하자면 혁명가의 신념과도 같아서 자기 열정에 흔들림이 없다. 그에 비하면 정결한 거실과 따뜻한 침대를 그리워하는 세속 시민의 욕망을 한편에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매순간 일상의 지루함을 넘어서는 법열적인 감흥을 꿈꾸는 자들이야말로 슬프고도 허술한 국외자가 되어 사회가 무어라 하기 전에 이 세계로부터 스스로 먼저 소외되는 법이다. 할리, 이 한심하고 모진 남자여! 토마스 만의 주인공 토니오는 그대와 비슷한 갈등을 겪으면서도 끝내는 시민적 교양과 건강성에 마음을 열어두고 있건만, 토니오보다 더 수줍음 많은 그대는 오히려 이리의 발걸음에 수시로 현혹되고 있더군. 그대의 이론적 종착지는 토니오와 같은 ‘유머’였지만, 적어도 소설 ‘황야의 이리’에서 좀더 중요한 초점은 시민사회와의 조화가 아니라 방황 그 자체로 보이더군. 끊임없이 세속의 거실을 기웃거리고 그리워하면서 분열적으로 겪어내는 정신의 인고 혹은 오기. 그리하여 그대의 숨소리는 토니오보다 거칠고, 그대의 자긍심은 토니오보다 강렬하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는 이렇게까지도 말하고 있구나. “시민사회가 몰락하지 않는 건 전적으로 황야의 이리들 덕분이다!” 하지만 그대여, 어차피 제대로 된 이리가 되지 못하여 내내 속울음이나 삼키고 있으면서 그 잘나빠진 자긍심은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대는 기꺼이 이 통속적인 세상의 속죄양을 자임하는 것인가?
임영태 소설가 |
2004.10.15 (금) 15:4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