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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례
교회는 해마다 1월 1일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성모 마리아께 ‘하느님의 어머니’를 뜻하는 ‘천주의 성모’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부여한 것은 에페소 공의회(431년)이다. 지역마다 서로 다른 날짜에 기념해 오던 이 축일은 에페소 공의회 1500주년인 1931년부터 보편 교회의 축일이 되었고, 1970년부터 모든 교회에서 해마다 1월 1일에 지내고 있다. 또한 바오로 6세 교황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1968년부터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세계 평화의 날’로 정하였다.
▦ 오늘은 새해 첫날입니다. 우리는 해마다 새해 첫날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냅니다. 올해도 한결같이 우리 신앙의 모범이신 성모 마리아를 본받아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로 다짐하고, 세계 평화를 기원하며 성모님의 전구를 청합시다.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당신께서 축복을 주시는 분이심을 계시하신다(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제2독서). 목자들이 아기에 관하여 들은 이야기를 알려 주자, 마리아께서는 이 이야기를 곰곰이 되새기신다(복음).
제1독서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 민수기의 말씀입니다.6,22-27
22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24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25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26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27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제2독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셨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4,4-7
형제 여러분, 4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5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6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7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복음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찾아냈다. 여드레 뒤 그 아기는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6-21
그때에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16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17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18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19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20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21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모 마리아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나라다.
오늘은 새해 첫날이기도 하며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새해 첫날 우리나라의 수호자이신 성모님이 하느님의 어머니이심을 고백하며 공경하는 대축일로 시작하는 것은 정말 좋고 큰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모님을 공경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만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목자들이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왔습니다. 목자들을 부른 천사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교회나 세례자 요한을 의미합니다. 목자들이 그 부르심으로 마구간에 들어왔을 때 아기 예수님을 먼저 경배했을까요, 아니면 성모 마리아의 허락을 받아야 했을까요? 성모님은 구세주의 어머니이십니다. 예수님이 아드님으로서 어찌 당신 어머니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주시고 싶으시겠습니까?
언어를 배우지 않고는 외국인과 소통할 수 없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소통하시기 위해 마련하신 언어와 같습니다. 어떤 언어든 사용하실 수 있으셨다면 굳이 성모님을 선택할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언어는 길과 같아서 그분이 우리에게 오시기 위해 내어놓으신 길을 그대로 걷지 않으면 그분께 갈 수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두 번째 길이고 하느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위해 마련하신 당신과 가장 밀접한 길은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모 마리아를 통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다면 우리도 당신께 다가오기 위해 성모 마리아를 통해 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힘들게 내신 길을 따르지 않고 각자가 원하는 길로 오려고 한다면 인격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저도 지금의 제가 있게 된 것이, ‘하.사.시.’(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책이름)나 ‘십일조’, 그리고 ‘7기도’나 ‘성체조배’ 등이 큰 역할을 했음을 언제나 강조합니다. 하지만 만약 저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이런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저는 어떤 마음이 들까요? 물론 그런 사람을 물리치는 일은 없겠지만, 저를 만든 이런 것을 무시한다면 아무래도 저도 그 사람에게 심리적 거리를 둘 것입니다. 저를 사제나 스승으로 여기지 않고 다른 목적으로 다가오려는 사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에겐 이런 것들이 하나의 언어입니다. 하.사.시.를 읽은 사람과 말이 잘 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영화 ‘기생충’에서 그 집에 몰래 숨어 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주인이 원하는 길과 문으로 그 집에 들어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이 있음을 발견한다면 주인은 바로 경찰에 신고할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께 다다르는 가장 합법적인 길, 혹은 문은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공경할 때 성모님은 우리가 당신 아드님을 경배할 수 있도록 당신 아드님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EBS 스페셜 프로젝트 ‘아빠 찾아 3만리’에서 아빠를 찾아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까지 단둘이 날아온 자매의 이야기가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아직 어린 자매는 공책에 필요한 말들을 적어왔지만, 한국인에게 길을 묻는 것이 두려워 계속 길을 헤매다 결국엔 울어버리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용기를 내어 공책에 적힌 것을 보여주며 인천 공항에서 아빠가 일하는 대구의 공장까지 찾아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다가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성모 마리아를 거쳐야 합니다. 그 길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실 수 있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면 물어보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언어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나라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더 깊이 소통하기 위해 그 소통의 방법인 언어를 더 열심히 배우려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과 소통하시기 위해 사용하셨던 첫 번째 언어가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오신 통로가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우리가 다시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 배워야 하는 언어가 있다면 성모 마리아입니다. 성모 마리아를 배우려 하지 않는다면 감히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여러분 마음속에 떠오르는 걸 그려보세요.”
반 아이들은 가족, 동물, 자연 등 각자가 원하는 것을 도화지에 그렸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아이는 도화지를 온통 검게 칠했습니다. 선생님들도 부모들도 아이가 무엇을 그리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수십 장의 도화지를 그저 빈틈없이 검게 칠했던 것입니다. 아이는 의사들에게도 무엇을 그리는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릴 뿐이었습니다.
아이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계속 도화지를 검게 칠했습니다. 이제 수백 장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은 아이의 책상에서 커다란 고래의 그림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아이가 그린 그림을 다 맞춰보니 커다란 고래의 모양이 나왔습니다. 아이는 그저 고래를 고래의 크기에 맞춰 그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이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은 온전한 크기의 고래 그림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을 받아들이지 않고 무시한다면 그 사람이 아이에게 다가가는 것은 아이를 정신병자 취급하며 다가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은 성모 마리아를 통해서였습니다. 성모 마리아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리스도께 간다는 말도 역시 그리스도를 어쩌면 “왜, 굳이 마리아에게 태어나셨어요?”라고 이해 못 하며 다가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계명 판이라면 성모님은 그 판을 담고 있는 계약의 궤입니다. 먼저 계약의 궤를 만나지 않으면 그 속의 십계명 판을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모든 자녀의 나라는 어머니인 것처럼, 성모님도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그리스도를 온전히 만나고 싶다면 그분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선택한 성모 마리아와 먼저 소통해야 합니다.
성모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성모님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향해 사용하시는 언어와 같기 때문이고, 당신께 오는 길과 같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면 그분께서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이끄시고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행복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22년 임인년(壬寅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하시고자 하는 모든 일에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새해에 가족과 함께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족은 나와 가까운 사람들일까요? 먼 사람들일까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편할까요? 불편할까요? 당연히 가족은 가까운 사람들이며 편한 존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가족을 많이 봅니다.
코로나19로 인해서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났고 따라서 가족과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같이 지내면서 불편함을 느끼고, 점점 너무 먼 사람들처럼 여겨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나 이혼이라는 신조어가 생겼고, 가정 폭력이나 아동학대도 많이 증가했습니다.
많은 이가 가족을 나와 동일시합니다. 그러나 가족 역시 엄연히 타인입니다. 내 생각과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타인이라는 것입니다. 타인임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의와 격식입니다. 나와 가장 가깝고 편한 가족이라도 예의와 격식을 지키지 않는다면, 편함은 없어지고 거리가 더 멀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의와 격식을 지키지도 않으면 “가족이면서 이것도 이해 못 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예의와 격식을 지켜나갈 때, 진짜 가족이 됩니다. 예의와 격식의 시작은 ‘감사’입니다. 감사의 마음만 갖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감사를 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오늘, 우리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봉헌합니다. 한결같이 우리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신 천주의 성모 마리아를 본받아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로 다짐하고, 세계 평화를 기원하며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는 날인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 잉태의 순간부터 하느님의 놀라운 이끄심을 체험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을 오늘 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셨습니다. ‘곰곰이 되새겼다’라는 복음사가의 말은 성모님께서 자신이 본 일을 성경에서 장차 이루어지리라고 했던 이야기들과 연결해 생각해 보았다는 뜻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자기 뜻대로 또 자기를 드러내는 모습으로 살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을 함부로 판단해서 세상에 말하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자기 안에서 곰곰이 되새기셨을 뿐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시지만 예의와 격식을 잃지 않으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가족 안에서 또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 예의와 격식을 갖춰야 합니다. 감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얼굴을 들어 태양을 보라. 그리하면 그림자는 뒤로 물러날 것이다(지그 지글러).
천주의 성모 마리아
일상 삶 안에서의 또 다른 삶을 찾기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게 되었다면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대부분 별다른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사과가 떨어지는구나’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런데 뉴턴은 고향 집 울즈소프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일반적인 사물과 사건 속에서 특별한 무엇인가를 보는 사람이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됩니다. 뉴턴의 사과만이 아닙니다. 제임스 와트는 물이 끓는 주전자를 통해 증기기관차를 만들었고, 프랭클린은 번개를 보고서는 어둠을 밝힐 전기를 만듭니다. 라이트 형제는 하늘을 나는 새를 보고서 비행기를 만들지요.
일상 삶 자체가 또 다른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세히 바라보려고 하지 않고, 항상 똑같은 일상이라면서 지겹다고 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일상 같지만, 100% 똑같은 일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어떤 시각을 갖느냐에 따라 매번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이 삶을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