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시어 다듬기
여러분들은 눈웃음을 샐샐 치는 말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만일 그런 말들을 내 말로 만들고 싶다면 말은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라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말을 지배하려는 생각을 버리는 순간, 그 말들은 눈웃음을 치면서 옆자리의 말을 쿡쿡 찌르고, 장난기와 때로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쌜쭉거리거나 좋아서 희부죽이 웃으며 옆의 말과 협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이 장에서는 시어들이 살아 움직이도록 만들기 위해, 우리의 시어관을 어떻게 바꿔야 하며, 어떤 시어들을 골라 쓰고, 그들로 이뤄진 문장을 어떻게 다듬어야 하는가 알아보기로 합시다.
1. 시어관 검토하기
☺ 우리는 언어로 생각하고, 언어로 기억하며, 언어로 세상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을 의사 전달의 도구라고만 생각하면서 …
시는 언어 예술의 꽃이라고 합니다. 시 속에 쓰인 말들은 시인의 뜻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물의 모습을 되살려내고, 그들끼리 어울려 음악이나 회화 상태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사 전달의 도구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시어가 탄생된 배경, 의미차 등을 무시한 채 사전적(辭典的) 의미로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시어관의 변천과정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어떤 관점에서 언어를 사용하며, 그와 같은 관점에서 사용할 경우,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를 따져봐야 합니다.
시의 탄생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인들을 지배해온 관점은 아어적(雅語的) 관점입니다. 그러니까, 시에 쓰이는 말은 우아(優雅)하고, 장식적(裝飾的)이며, 대용적(代用的)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영국의 시인 스펜서(E. Spencer, 1552-1599)가 선녀 여왕(The Faerie Queen)을 당대 언어 대신에 고어(古語)로 쓰고, 밀턴(J. Milton)이 실낙원(Paradise Lost)을 라틴어 문투(文套)로 쓴 것이라던가, 우리나라 조선시대 한시 작가들이 먼저 시상(詩想)을 잡은 다음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운(韻)을 맞춘 것이 이런 예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이런 시인들은 현대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꽃’, ‘사랑’, ‘이별’ 같이 감상적이고 아름다운 제재를 골라 되도록 멋진 말로 표현하려는 시인들이 그런 사람입니다. 아름다운 제재를 선택하면 아름다운 시어를 골라 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아어를 골라 쓰면 작품이 곱다란 음악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진지한 주제들은 제외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지한 것들 속에는 선과 악, 미와 추 같은 상반된 가치관이 담겨 있기 마련인데, 곱다란 말로 표현하려면 부정적인 생각들을 배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낭만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영국의 워즈워드(W. Wordsworth)는 『서정민요집(Lyrical Ballad)』 재판(再版, 1800)을 통해, 시상이 넘쳐 흐르던(over-flow) 그 순간의 언어로 써야 한다면서, 일상어로 쓸 것을 주장합니다. 아름다운 시어를 골라 쓰려면 그에 맞추어 시상을 수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주제 역시 아름다운 ‘자연’과 ‘이상’과 ‘정열’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어느 정도 일상어로 확장하는 데그쳤을 뿐, 여전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시어들을 골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어를 완전히 일상어로 바꿔야 한다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사람은 그와 함께 <서정 민요집>을 펴낸 콜리지(S. Coleridge)입니다. 그는 <문학평전(Biographia Literaria, 1816)>에서 시와 산문에서 쓰이는 말은 모두 일상어지만, 문맥의 차이에서 결정된다면서 어법을 주목합니다.
이런 주장은 자유시가 정착되어 감에 이미지스트들에 의해 언어와 의미의 관계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미지스트들은 일상어를 사용하되, 모호하거나 장식적(裝飾的)인 말 대신 정확한 말을 사용하고, 운율 대신 이미지화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언어로서 시적 대상을 그려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시적 대상을 이미지화하면 시인의 생각을 담기 어렵습니다. 그리하여 이 운동에 동참했던 파운드(E. Pound)는 시인의 생각을 반영할 수 있는 비유물을 이미지화해야 한다면서, ‘은유하는 그림(metaphoric picture)’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엘리엇(T. S. Eliot)과 리차즈(I. A. Richards)가 이런 관점을 이론화함으로서 어법의 문제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주장은 다시 미국의 신비평 그룹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논리화됩니다. 워렌(A. Warren)은 시와 산문의 차이를 내포(connotation)와 외연(denotation)으로 구분하면서 이미지를 내세웁니다. 그러니까, 산문은 기호(언어)와 지시물(대상물)을 <1 : 1>의 관계로 연결하하면서 외연적(外延的)이며, 자의적(恣意的)으로 사용하여 다른 언어로 교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시적인 언어는 기호와 지시물의 관계가 <1 : N>의 관계로 연결하면서 내포적(內包的)이고, 자율적으로 사용하여 다른 언어로 교체(交替)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내포(內包)’와 ‘외연(外延)’의 뜻이 뭐냐구요? ‘꽃’이란 말을 <여인>이나 <절정>이란 뜻으로 사용하면 내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의미가 안으로 숨는 경우를 말합니다. 또, 그냥<꽃>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면서 외부의 어떤 사실을 지시하는 경우는 외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어법 차원에서 보던 시어 문제를 또 다른 관점에서 논의한 사람은 리차즈의 제자인 앰프슨(W. Empson)입니다. 그는 리차즈의 감독 하에 쓴 일곱 가지 유형의 다의성(Seven types of Ambiguity)에서 명백한 시가 좋은 시라는 종래의 관점을 부정하고, 애매하고 다의적(多義的)일수록 시적 효과가 크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다의성은 무엇을 말할까 결정하지 못할 경우, 여러 가지를 동시에 말하려고 할 경우, 하나의 진술이 몇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경우에 발생하며, 리듬이 애매한 의미를 통일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애매한 시가 좋다는 주장은 얼른 납득이 가지 않는다구요? 예, 저도 처음에는 그리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자주 인용한 「진달래꽃」에서 님이 떠나겠다면 꽃을 뿌리겠다는 구절을 10가지 이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독자들이 이 작품을 사랑하는 것은 이런 다의성 때문입니다.
기존의 해석과 제가 해석한 것을 소개할 테니, 나머지는 여러분들이 추가해 보실래요? ⑴ 난 당신이 떠난다면 꽃까지 뿌릴 정도로 사랑하는데 그런 나를 두고 떠날 수 있느냐는 고도의 만류(挽留) 수법. ⑵‘ 진달래꽃’이 화자를 상징물이라고 할 때, 나를 밟고 가라는 뜻으로서, 절대로 못 보내겠다는 반어적(反語的) 표현. ⑶ 내가 싫어 떠난다면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죽어도 안 붙잡겠다는 오기(傲氣). ⑷ 화자가 님이 없는 사람이라면, 나는 님이 떠날 때 꽃을 뿌려 줄 정도로 착한 사람인데 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느냐는 자기 선전. ⑸ 떠날 때는 막지 않을 테니, 함께 있는 동안만은 날 사랑해 달라는 현실적 책략. ⑹ 꽃을 뿌리면서 떠나 보냄으로써, 님이 잊지 못해 되돌아오게 만들려는 「가시리」식 계산. ⑺ 남녀간의 사랑은 한번 깨지면 아무리 매달려도 소용없으니 차라리 멋있게 보내자는 체념. ⑻ 현재에는 이별할 염려가 없으나, 미래에 있을지도 모르는 이별을 가정하고 그냥 해보는 말. ⑼ 만발한 진달래꽃을 보는 순간, 난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하므로 이별마저도 순순히 받아들이겠다는 사랑의 맹세 ⑽ 여성의 무의식 속에 숨겨진 피학적(被虐的) 욕구.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생각을 담고 있으면, 듣는 사람은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망설이게 됩니다. 그로 인해 화자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화자도 분명하게 말하고 싶어합니다. 모호하게 말하면 상대가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의적으로 말해야 하는 것은, 이별하는 순간의 감정은 보내고도 싶고, 보내기도 싫고, 미래를 축복해주고도 싶고, 원망하고도 싶은 다중적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어느 하나로 말하면 다른 생각을 배제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오히려 다중적 방법으로 말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이와 같이 어법 중심으로 따지던 시어의 문제는 실존주의(實存主義) 철학에 이르면 언어철학(言語哲學) 쪽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사르트르(J. P. Sartre)는 어법의 유형을 '있음(be)'과 '뜻함(signify)'으로 나눕니다. 그리고 산문은 ‘뜻함’을 이용하여 사회에 참여(engage)하는 기능을 지니고, 시는 ‘있음’을 이용하여 그 자체로 존재하도록(to be) 만든다면서, 그리고 시인은 언어를 사물로 간주하고, ‘사용’하는 대신에 ‘봉사’하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그의 시어관은 언어를 또 다른 실재체(實在體)로 보는 <즉자적(卽自的)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독일의 하이데거(M. Heidegger)는 언어의 기능을 ''언어가 말한다', '언어가 존재를 말한다'', ' 언어는 세계와 사물로서 존재한다''로 나눕니다. 그리고 시인은 존재의 수용자이며, 시인이 언어를 부리는 게 아니라 언어가 시인을 부리고, 언어는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론적 통로(方法論的通路)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시어는 수단이나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서, 존재와 접촉하는 순간에 탄생되며, 존재를 현실로 만드는 ‘존재의 집’이라는 겁니다.
동양의 시어관은 근대 이전까지 대체로 실재론(實在論)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물이나 이데아가 먼저 존재하고, 그에 따라 언어적 명칭이 뒤따른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도(道)나 실상(實相)은 언어로는 파악하기 어렵다면서 언어에서 떠나야 한다고 '이언(離言)'을 권유합니다. 그리고 노자(老子)는, 사물의 이름인 ‘유명(有名)은 만물의 어머니(有名萬物之母)’지만 ‘무명이 하늘의 으뜸(無名天地始)’이라고 주장하며, 유교에서는 ‘하늘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 (上天之載 無聲無臭)’면서 형이상학적 사실은 언어나 감성을 초월한다고 주장합니다.
자아, 그럼 시를 쓰는 우리는 어떤 언어관을 가져야 할까요? 언어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라서 바르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시는 자기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 말고 새로운 세계와 우주를 건설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언어 자체를 실재체(實在體)로 보고, 그들의 육체와 에너지를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언어로 생각하고, 언어나 논리나 사물을 구별하고, 그 결과 역시 언어로 존재하며, 또한 모든 사물과 관념은 언어 속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실재(實在)'와 '존재(存在)'와 '부재(不在)'라는 관념만 해도 그렇습니다. ‘실재’란 실제로 있는 걸 말합니다. ‘존재’는 실재로는 없지만 관념상으로는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부재’라는 개념만 해도 그렇습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관념적으로는 존재하며, 그 부재를 실재로 바꾸기 위해 우리는 행동합니다. 따라서 곧 언어는 곧 우주이자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면 ‘사랑’이란 말을 가지고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그게 사랑인 줄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언어를 통해 무수한 관념들과 비교하면서 ‘아, 내가 지금 사랑하고 있구나’하고 깨닫고, 그래서 고백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고, 상대와 나의 육체와 정신이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사랑한다고 믿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어는 우리의 생각을 결정하고, 구속하며, 행동을 요구하고, 동일성을 유지하는 장치인 동시에 에너지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언어는 어떤 구체적 사물에 붙인 개별적 명칭만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우리의 구념(構念, die sprachliche Konzeption), 다시 말해 생각을 은유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야스퍼스(K. Jaspers)가 언어는 은유며, 사람들은 은유의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결과인 명칭만 믿는다고 지적한 것이나, 니체(F. W. Nietzsche)가 언어를 ‘꿈틀거리는 은유의 무리들(ein bewegliches Heer von Metaphern)’이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의자’ 라는 명칭을 가지고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우리는 걸터 앉을 수 있는 도구를 의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걸터앉을 수 있는 것은 의자만이 아닙니다. 책상 위에도 돌 위에도 걸터 앉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의자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의자란 특정한 사물에 붙인 이름이라기보다 우리가 살아가며 부딪힌 상황 속에서 만들어낸 구념을 그렇게 명명했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이렇게 구념의 표시이기 때문에 그 말을 사용하거나 받아들이는 사람의 가치관과 정서를 담을 수 있습니다. 언어철학에서는 이를 <언어적 가공(加工)>이라고 합니다. 무지개는 모든 색깔의 연속이지만, 일곱 가지 색깔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곱이 완전수이기 때문입니다. 또 ‘잡초’는 분류학적 명칭이 아니라, 쓸모 없는 풀이라는 생각을 반영하여 가공한 단어입니다.
시를 쓸 때 이와 같이 공허한 개념으로 이뤄진 언어의 틀을 깨뜨리면, 우리는 허허 들판에 말로 집을 지을 수도 있고, 애인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파도처럼 밀려오는 달빛 속에서 그녀와 입맞춤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시인이 되려면 가공된 언어들의 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 우리가 할 일 】 ○ 시어관의 변천 과정을 시작 노트에 정리해 두시오. ○ 이제까지 자기가 쓴 시를 어떤 관점에서 썼는가 살펴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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