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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되는 두 집안
삼하 3:1-11
1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2 다윗이 헤브론에서 아들들을 낳았으되 맏아들은 암논이라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이요
3 둘째는 길르압이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의 소생이요 셋째는 압살롬이라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요
4 넷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다섯째는 스바댜라 아비달의 아들이요
5 여섯째는 이드르암이라 다윗의 아내 에글라의 소생이니 이들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자들이더라
6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있는 동안에 아브넬이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으니라
7 사울에게 첩이 있었으니 이름은 리스바요 아야의 딸이더라 이스보셋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첩과 통간하였느냐 하니
8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을 매우 분하게 여겨 이르되 내가 유다의 개 머리냐 내가 오늘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의 형제와 그의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
9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내가 이루게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10 그 맹세는 곧 이 나라를 사울의 집에서 다윗에게 옮겨서 그의 왕위를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에 세우리라 하신 것이니라 하매
11 이스보셋이 아브넬을 두려워하여 감히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니라
삼하 3:1-11 / 그런데 사울의 추종자들과 다윗의 추종자들 사이에 오랜 전쟁이 계속되었다. 그럴수록 다윗은 점점 더 우세해지고, 사울 집안은 점점 더 권세와 위엄을 잃어 갔다. 2)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들]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들은 차례대로 다음과 같았다. 맏아들 암논은 이스르엘 여인 아비노암이 낳았고, 3) 둘째 아들 길르압은 나발의 아내였던 갈멜 여인 아비가일이 낳았고, 셋째 아들 압살롬은 길르앗 북쪽에 있던 아람 족속의 작은 나라 그술의 왕 달매의 딸 마아가가 낳았고, 4) 넷째 아들 아도니야는 학깃이 낳았고, 다섯째 아들 스바댜는 아비달이 낳았고, 5) 여섯째 아들 이드르암은 다윗이 가장 사랑하던 아내 에글라가 낳았다. 다윗은 이렇게 여섯 아내에게서 아들을 하나씩 낳은 뒤 헤브론에서 자녀들을 더 낳았다. 6) [왕과 군사령관의 충돌] 사울의 추종자들과 다윗의 추종자들 사이에 전쟁이 계속된 동안에 사울 왕기에서 실권을 행사한 사람은 아브넬이었다. 7) 그런데 군사령관 아브넬이 사울의 첩이었던 아야의 딸 리스바와 정을 통하는 데에까지 이르자 이스보셋은 이것이 바로 왕권을 노리는 아브넬의 야욕이라고 판단하였다. 이스보셋이 이러한 일을 아브넬에게 따지자 8) 아브넬이 즉석에서 노발대발하면서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나를 유다 나라에서 기어 들어온 한 마리 개로 여기시오? 나는 오늘날까지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안을 위하여 충성을 바쳐 왔고 그의 온 집안과 그의 친구들을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살아왔소. 또한 이제까지 당신을 보호하여 당신이 다윗의 손에 잡히지 않도록 하였는데, 이제 와서 당신이 하찮은 여자 문제로 나를 꾸짖겠다는 말이오? 9) 나는 이제 여호와께서 이미 다윗에게 맹세하면서 약속해 주신 일이나 실현되도록 노력해야겠소. 만일 내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무슨 벌을 받아도 좋소! 10) 여호와께서 이미 `사울의 집안에서 왕권을 빼앗아 다윗을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으로 삼아 북단의 단에서부터 남단의 브엘세바에 이르는 온 나라를 다스리도록 하겠다!' 라고 약속하신 줄이나 똑똑히 아시오!' 11) 이스보셋은 이 말을 듣고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하였다. 그는 펄펄 뛰는 아브넬 앞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본문은 다윗의 집안과 사울의 집안을 극명하게 대조합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여러 아들을 낳는 동안, 사울의 집에서는 아브넬과 리스바의 통간사건이 일어납니다. 두 집안의 이런 상반된 상황은 어떤 이유일까요?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1-5) 사울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은 오랜 기간 동안 진행됐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두 집안은 전혀 다른 상황으로 전개됩니다. 다윗은 점점 강해져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해져 갔습니다. 2-5절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여섯 명의 아들을 기술함으로 말미암아 그가 점점 더 강해져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윗이 강해져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같은 책 사무엘하 5장 10절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했던 다윗, 그 다윗과 하나님은 함께 하셨습니다. 성경은 다윗의 강성함의 이유를 ‘하나님을 의지함과 의지하는 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답변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6-11) 반면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해져 갔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더욱 강해지고 있는 다윗을 보면서도 이스보셋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채 아브넬의 힘을 의지하여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그는 명목상의 왕이었지 실권은 아브넬에게 있었습니다. 실권을 장악한 아브넬은 자신이 왕으로 섬기던 사울의 첩 리스바와 통간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선왕의 아내나 첩과 동침하는 것은 왕권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여겨졌습니다. 반역죄로 취급받아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보셋의 꾸지람에 오히려 반발하며 대듭니다. 이미 실권을 잃은 이스보셋은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브넬을 의지한 정권유지였기에 어떠한 징계도 행할 수 없던 겁니다. 두 집안의 상반된 흐름을 통해 본문은 우리가 누구를 의지하며 살 것인지에 대해 질문합니다. 오늘 내가 의지하고 있는 분이 하나님입니까? 권력과 성공과 부를 안겨다 준다는, 아침안개 같이 사라질 힘입니까?
적 용 : 오늘 내가 의지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까? 아침안개와 같이 사라질 힘입니까?
어리석은 개미는 자신의 몸이 작아 사슴처럼 빨리 달릴 수 없음을 한탄하고 똑똑한 개미는 몸이 작아 사슴의 몸에 붙어 달릴 수 있음을 자랑으로 생각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단점을 들여다보며 슬퍼하고, 똑똑한 사람은 자신의 장점을 찾아내어 자랑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정은 모든 일이 만사가 형통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은 그 힘이 결코 오래가지 못하여 혼자 설 힘조차 잃고 맙니다.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을 보면서 당신은 누구와 동행하겠습니까? “동행이란 같은 방향으로 가는게 아니라, 같은 마음으로 가는 것이랍니다.”
호크마 주석
=====3:1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 본 저자는 이스보셋의 권세가 쇠하고 다윗의 권세가 흥하는 중요한 시점에서 다윗과 이스보셋의 대립을 다윗 가와 사울 가의 대립으로 묘사하고 있다. 저자의 이와 같은 대조적 묘사는 이스보셋의 쇠퇴와 다윗의 흥왕이 보다 근원적인 데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리기 위한 의도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즉,본 저자는 점점 더해가는 이스보셋의 쇠퇴는 바로 사울 왕의 교만한 죄의 결과이며(삼상 13:8-14;15:10-31),다윗 왕의 점진적인 흥왕은 사울 왕의 핍박 속에서 인내한 다윗의 신앙의 결과(삼상 20:1-16)임을 보여 주기 위해 이 두 이름을 이곳에 대조시킨 것이다.
전쟁이 오래매 - 여기서 '전쟁'은 실제적인 전투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양측이 서로 적대 관계를 형성하고 대치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듯하다(Keil & Delitzsch Commentary,Vol.II, p.299). 이러한 적대 관계는 이스보셋이 자기 부하들에 의해 암살당하기까지 계속되었음이 분명하다(4:5-12).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점점 약하여 가니라 - 이스보셋을 추종하던 자들이 점차 다윗에게로 돌아와 그를 지지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Lange,Matthew Henry).대상 12:23-27에 의하면 이같은 현상은 이스라엘 12지파에 걸쳐 거족적(擧族的)으로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사울 집안과 다윗 집안의 이러한 대조적 현상은 이 땅에 존재하는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 간의 긴장 및 대립,확장과 퇴락을 예시해 주기에 충분하다.즉 이 두 세력은 항상 긴장,대립 관계에 놓일 수 밖에 없으나(벧전 5:8,9),최종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악의 세력을 누르고 이 땅에서 흥왕하게 되는 것이다(마 13:24-30,36-43).
=====3:2
다윗이...아들들을 낳았으되 - 본절 이하에 언급된 다윗의 아들들은 이후 다윗 가문에 피비린내 나는 비극을 연출하고 만다.이는 분명 다윗의 다처(多妻)행위에서 기인된 것으로,일부 일처(一夫 一妻)의 가정 질서가 파괴된 결과가 얼마나 끔직한 것인지를 경고해 주기에 충분하다.
암논 - 이복 누이 다말을 강간한 탓에 그 오라비 되는 압살롬에게 살해당하고 마는 패륜아(悖倫兒)이다(13장).
아히노암 - 다윗이 사울의 딸 미갈과 이별한 후 맞아들인 아내이다(삼상 25:43).다윗은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에게 피신할 때 그녀를 함께 데리고 갔었다(삼상 27:3).2:2 주석 참조.
=====3:3
길르압 - 길르압은 대상 3:1에서 '다니엘'(Daniel)로 언급되어 있다.그런데 암논과 압살롬이 죽은 후 네째 아들 아도니야가 다윗의 장남 행세를 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왕상 1:5-10)그도 일찍 죽은 것 같다(Pulpit Commentary).
아비가일 - 2:2 주석 참조.
압살롬 - 암논을 살해하고 다윗에게 반역을 일으켰다가 요압의 손에 죽고 만 비극적인 인물이다(13-18장).
그술왕 달매의 딸 마아가 - '그술'(Geshur)은 요단 강 상류의 동쪽 지경에 위치하고 있던 작은 독립국으로(수 13:13),당시 다윗 왕가와는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다.따라서 다윗은 이 나라의 공주 마아가(Maacah)와 정략 결혼을 한 셈인데,그 결과는 오히려 훗날 큰 반역을 일으킬 압살롬을 낳게 된 것이다.즉 어떤 이유에서든 아내를 많이 거느리는 것은 명백히 신정 국가의 왕에 대한 율법에 위배되는 행동으로서(신 7:3;17:17),그는 이 일로 인해 마침내 큰 곤욕을 치루게 된 것이다(15장).
=====3:4
아도니야 - 훗날 이복 동생 솔로몬과 왕위 쟁탈전을 벌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마는 비정한 인물이다(왕상 1:5-2:25). 스바댜 -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심판하셨다'이다.그러나 이드르암(5절)과 더불어 그 행적은 달리 알려진 것이 없다.
=====3:5
다윗의 아내 에글라 - 여기서 오직 에글라(Eglah)의 이름 앞에만 '다윗의 아내'(David's wife)란 칭호가 붙어있는 점에서 에글라가 다윗의 본처 미갈(Michal)의 다른 이름이라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Rabbins,Thenius).그러나 이 견해는 미갈이 죽을 때까지 자식을 낳지 못했다는 점에서 옳지 않다(6:23).다만 이 칭호는 아마도 다윗의 아내들에 대한 소개를 이제 마감한다는 의미에서 사용되었을 것이다(Keil,Lange).한편,삼상 25:42,43에서는 아히노암이나 아비가일을 모두 다윗의 아내로 호칭하고 있으며 12:24에서도 밧세바를 역시 다윗의 아내라고 부르고 있다.따라서 이 말을 다윗의 첩들과 본처를 구분하는 말로 보는 견해 역시 온당치 못하다.
=====3:7
첩 - 당시 첩(妾)은 그 주인의 합법적인 재산이었다.그리고 왕이 재위 중 첩을 거느리는 것은 하나의 특권이었다(Lange).물론 이스라엘의 왕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금지하고 계시지만(신 17:17),고대 동양에서 이는 보편적 현상이었다.
리스바 - 이름의 뜻은 '타는 숯'이다.훗날 그녀는 사울의 죄과(罪過)로 인하여 두 아들을 잃는데,시신을 극진히 돌본 그녀의 정성은 다윗을 감동시켰다(21:1-14).
네가 어찌하여...통간하였느냐 - 이스보셋이 아브넬에게 이같이 질문한 것은 단순히 도덕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이것은 오히려 정치적인 성격의 문제였다.왜냐하면 그 당시에 왕의 첩을 차지한다는 것은 곧 왕의 후계자가 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16:22;왕상 2:17).따라서 이스보셋의 이와 같은 질문은 아브넬의 정치적인 부상(浮上)을 염려한 나머지 나온 말이었다(Keil & Delitzsch Commentary,Vol.II,pp.301f).
=====3:8
이스보셋의 질문에 대한 아브넬의 분노에 찬 답변이다.
내가 유다의 개 대강이뇨 - '개 대강'이란 '개의 머리'(dog's head)를 의미한다.그러므로 NIV는 이를 '내가 유다 편에 선 개 대가리냐'(Am I a dog's head an Judah's side)로 번역하고 있다.한편 유대인들은 개를 경멸의 대상으로 보았다(출 22:31;삼상 17:43;24:14;왕하 8:13;시 22:16,20).왜냐하면 그들은 의식법(儀式法)상 사체(死體)에 닿기만 해도 부정하다고 생각하였는데, 개는 썩은 고기나 시체를 먹는 동물로 여겼기 때문이다(왕상 4:11;16:4;21:23;왕하 9:10). 따라서 '개의 대강'이란 '하찮은 사람','형편 없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그러므로 결국 본절은 '내가 유다 편에 선 반역자,곧 형편없는 사람이냐'는 뜻임을 알 수 있다. 내가 오늘날...
내어 주지 아니하였거늘 - 아브넬이 애초부터 이스보셋에게 반역할 의사가 없었다는 사실을 강하게 주장하는 내용이다.결국 아브넬의 이같은 주장은 사울왕의 첩 리스바를 취한 일에 대한 변명이다.즉,자신이 왕위에 대한 욕심이 있어서 리스바를 취했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애정 때문에 취했다는 말이다.따라서 이러한 일은 자기가 그동안 사울 가에게 보여 준 충성에 비하면 아무 문제도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 - 양심이 마비된 자의 소리이다.왜냐하면 이는 자신이 이스보셋 정권의 실질적 권력자로서 자신의 오떠한 행동도 정당하다는 패역한 생각을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3:9,10
아브넬이 이스보셋 앞에서 그를 배반하고 다윗을 따르겠다고 하는 충격적인 선언이다.즉 아브넬은 자신이 이스보셋에게 반역자로 간주될 바에야 차라리 전이스라엘을 다윗의 휘하에 들어가게 만들겠다고 호언(豪言)하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아브넬의 돌변하는 태도를 볼 때,우리는 그가 이스보셋을 옹립하여 정부를 수립한 것(2:8-10)은 사울 왕가에 대한 충성심이나 애국심에서가 아니라,단지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괴뢰 정부를 수립한 것에 불과했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아무튼 이제 이스보셋과 대립하게 된 아브넬은 다윗 휘하에 들어가 자신의 생명과 지위를 유지하려 꾀한다(Leon Wood,Smith).그러나 그의 계획은 요압에 의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27절).이상과 같은 사건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두어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첫째는,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시라는 점이다(잠 16:9).둘째는,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결국 패망이라는 점이다(시 1:6).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직접 맹세하신 것에 대한 성경적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아마 이는 하나님께서 사울 왕가의 패망과 관련하여 주신 말씀(삼상 15:28,29)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하나님의 약속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던 듯 하다. 왜냐하면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 (Abigail)과 같은 한 시골 여인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삼상 25:28)때문이다(Lange).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세우리라 - 여기서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란 말은 가나안 땅 전역(全域)을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다(24:2;삿 20:1;삼상 3:20;대상 21:2;대하 30:5).따라서 이는 다윗의 왕권을 온 이스라엘 위에 확립하겠다는 말임을 알 수 있다.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보셋 사후(死後),다윗이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왕으로 등극함으로써 실제로 성취되었다(5:1-5).
=====3:11
이스보셋이...감히 한 말도 대답지 못하니라 - 당시 이스보셋이 명색만 왕이었을 뿐 아무런 권력도 지니지 못한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음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는 구절이다. 만일 이스보셋에게 실제적 통수권(統帥權)이 있었다면 그는 자신에게 공식적으로 반역을 선포하고 나선 아브넬에게 대한 체포 명령을 그 즉시로 내렸을 것이다(Pulpit Commentary).
< 설 교 >
미련하게 순종하는 법을 배우라
삼하 3장 1-11절 / 참 좋은 군사
미련하게 순종하는 법을 배우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열 가지 주제를 놓고 살피려고 합니다. NOBLE FAITH 첫 번째가 N이었는데 N은 애국심이었고, 오늘은 O, Obedience, 순종에 대한 것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1. 철저한 순종
성경 전체 중에서 순종에 관한 가장 중요한 말씀을 들라고 하면 사무엘상 15장22절 하반절의 말씀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하나님의 말씀 앞에 철저히 순종하라’ 사울의 범죄를 통해서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신앙의 성숙이라는 것, 하나님 앞에서 믿음이 자라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미련하게 순종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고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을 대비하고 있는데 사울의 집은 대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불순종했고 다윗의 집은 대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정 전체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떠나지 않는 가정이 되고 싶습니까? 다윗의 집과 같이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잘 못합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해서 순종을 못하고 어떤 때는 다가오는 유혹이 너무 강렬해서 순종을 못하고 어떤 때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생각이 더 옳다고 생각해서 순종을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떠한 불순종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를 엄청난 재앙으로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보다 똑똑합니까? 우리의 판단이 하나님보다 더 낫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기 이전에 이제까지 내 판단대로 살아왔잖아요. 내 잘 도는 머리, 내 좋은 판단, 나의 종합적인 분석, 그래 가지고 이 정도로 파탄이 났으면 두 손 들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 내 이성이나 내 경험의 판단을 가지고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들 -사실 누구나 그런 생각이 드니까 순종안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들을 미련하게 믿고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18절을 보니까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를 증거할 때를 보십시오. 세상에서 제일 미련해 보이는 것이 설교하는 것, 십자가의 도를 증거하는 것 아닙니까? 세상의 똑똑한 사람들이 30~40분 증거하는 말씀에 인생이 변화될 것 같습니까? 이것 가지고는 안될 것 같습니다. 책자로 두툼하게 묶어 주는 것이 나을 것 같고, 차라리 이 정도 읽어보라고 하면서 쪽지로 나누어주는 것이 나을 것 같지 증거하는 것 가지고는 안될 것 같이 보입니다. 분명히 미련해 보입니다. 그런데 내 머리 써 가지고 접근하는 것 가지고는 사람들이 변화가 안되는데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하라는 그대로 증거하면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변화되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처음 할 때 목회가 참 힘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힘들기는 힘들지요. 머리를 많이 써야 되고…… 보통 신학생들이 그런 것 많이 말하잖아요. 사람과의 관계도 중요하고 행정의 전문가도 되어야 되고…… ‘목사는 팔방미인이 되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얘기해서 사람들의 기를 죽이곤 하는데 저는 진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뒤집어놓고 보니까 세상에 목회만큼 쉬운 것이 없더라고요. 속된 말로 하면 점점 생각이 없어집니다. 생각을 해봐야 그대로 되어 본 적이 없으니까요. 어찌 보면 목회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 증거하신 그대로 믿고 그 길로 한번 걸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뭐 다 알고 갑니까?
우리 인생 가운데 다 알고 가는 것이 얼마나 있습니까? 여러분 결혼생활이 뭔지 알고 갔습니까? 직장생활이 뭔지 알고 갔습니까? 초등학교 때 중학교가 뭔지 알고 갔습니까? 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대개 믿고 가는 것입니다. 믿고 가다 보니까 승리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가져야 될 가장 중요한 것은 미련하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다윗이라고 하면 여러 가지 삶의 고난 가운데서 굉장히 영리하고 판단을 잘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윗의 매순간의 시점으로 한번 들어가 봅시다. 다윗만큼 미련한 사람이 없습니다. 미련하게 믿은 사람입니다. 거인 골리앗이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판단을 하지요. ‘전력(戰力)적으로 상대가 되느냐’ 저 같으면 ‘뒤에 가서 기습공격을 하든지 해야 된다’ 이렇게 판단할 것 같은데 다윗은 거인 골리앗 앞에서 미련하게 하나님의 능력만을 믿고 나가잖아요.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그것이 작은 것입니까? 우리는 별것 아닌 것 같이 생각하지만 칼이 정말 별것 아닙니까? 어제 제가 식사하면서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가끔 난동을 부리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 교역자들이 실제로 싸움은 못해도 말은 잘하잖아요. 그런데 5cm 되는 칼을 들고 눈앞에 딱 나타나기만 해도 마비가 되어버린다고 합니다. 영화 같은 데를 보면 툭 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온몸에 힘이 빠져버리고 또 어떤 교역자의 표현에 의하면 심장 약한 사람은 너무 놀라서 그 자리에서 오줌을 누는 사람도 있답니다.
칼이 만만한 것입니까? 게다가 골리앗이 들고 있는 칼이 만만한 칼입니까? 무지 큰 칼이었겠지요? 그런 것을 들고 있을 때에 칼과 창과 단창 -얼마나 무장을 많이 했는지- 그것이 만만한 것입니까? 그 앞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미련하게 나가잖아요. 그것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고 그것을 통해서 승리를 주십니다. 자신의 대적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여러 번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정말 미련합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내가 죽일 수 없다’고 하고 놓아주잖아요. 미련하지요. 지내놓고 보면 어차피 죽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정말 미련하게 믿었지요. 미련하게……
그 후 사울이 죽어서 이스라엘 권력의 공백기 상태가 왔습니다. 그러면 올라가서 점령하면 되는데 헤브론 앞에서 올라갈지 안 올라갈지 만날 묻잖아요. 뻔한 답을 가지고 묻잖아요. 당연히 가야 될 것인데 그것을 또 하나님께 묻습니다.
저는 다윗의 삶의 강점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매순간마다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가를 생각했습니다. 당시의 상식과는 관계없이, 사람들의 판단과는 관계없이 말씀이라고 하면 무조건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다윗의 삶을 한마디로 묘사한다고 하면 순종의 삶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번 새생명기도회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 순종이 약화되고 판단이 강해져서 방황하는 인생이 있다고 하면 ‘우리도 다윗과 같이 미련하게 믿게 해 주십시오. 미련할 정도로 철저히 믿는 그런 하나님의 도구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구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철저한 충성
또 한 가지 우리가 살펴야 될 사람이 아브넬이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을 통해서 배울 것은 배신하는 인생을 살지 말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망령된 자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울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이라는 사람이지요. 아브넷은 원래 사울의 부하였습니다. 사울이 죽자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내세워서 모든 권세를 누린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배신을 밥 먹듯이 하고 충성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불한당 같은 기회주의자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결코 사람이나 하나님을 배신한 자를 사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도 보니까 바울을 배신했던 알렉산더, 후메네오 다 버렸습니다. 돈 때문에 나라를 배신한 발람 선지자를 버렸습니다. 심지어 악한 주인이라 할지라도 주인을 배신하는 자를 별로 사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브넬의 예를 보면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아브넬은 여러 번 하나님의 말씀을 버립니다. 9절을 보면 하나님이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음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이스보셋을 세웁니다. 말씀을 저버렸지요. 7절을 보니까 자신의 주인인 사울의 첩을 범하잖아요. 자기 주인을 배신한 것이지요. 8절을 보니까 이것을 책망하는 이스보셋에게 도전하면서 협박합니다. 또 한번 변절합니다. 변절, 변절, 배신…… 기회를 보면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양다리 인생이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셨습니다.
사도행전 5장을 보니까 땅 팔아서 헌금한다고 하면서 돈 숨겨놓았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나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를 죽였습니까? 모두가 다 이런 식으로 죽어야 될 것 같으면 우리는 벌써 다 죽었겠지요. 여기에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영적인 칭찬도 얻고 금전적인 유익도 얻으려고 하는 요즘 말로 얘기해서 양다리 걸치는 인생, 이것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충성스러운 인생, 그런 모습으로 서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워 주십니다. 우리 민족의 죄악을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데…… 우리 민족이 참 묘합니다 우리 민족은 의의 민족이라고 하지요. 조금만 기회가 주어지면 모든 국민이 의를 위해서 헌신합니다. 그런데 또 조금만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면 쉽게 비굴해지는 민족입니다. 너무 비굴해집니다. 지나칠 정도로 비굴해지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신앙인들이 신앙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러운 종이 될 뿐만 아니라 보통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충성스러운, 배신이 없는 그런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로 서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믿음의 종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➊ 다윗의 가문을 통해서 미련할 정도로 순종하는 법을 배우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말씀대로 미련하게 순종하는 종이 되게 해 주십시오. 또 하나님과 인간관계에 있어서 배신하는 인생이 아니라 충성스러운 종으로 우리 인간관계 가운데 증명될 수 있도록 우리를 지켜 달라고
➋ 하나님께 순종하는 성도, 순종하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지켜달라고 이 시간에 다같이 간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삼하 3장 01절 / 강문호목사
돌아가신 김 우영 목사님이 늘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잘 되는 사람은 잘 되는 이유가 있고, 안 되는 사람은 안 되는 이유가 있어. 잘 되는 교회는 잘 되는 이유가 있고, 안 되는 교회는 안 되는 이유가 있어.>
가정도 그렇습니다.
잘 되는 가정은 잘 되는 이유가 있고, 안 되는 가정은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울의 가정은 안 되는 가정이고, 다윗의 가정은 잘 되는 가정이라고 성경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가정은 정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가정에 대하여 두 가지 이야기를 드리고 시작하려고 합니다.
첫 이야기
1934년 세계 최초로 다섯 쌍둥이가 태어났습니다. 캐나다 온타리오의 디온(Dionne) 가정에서 생긴 분만이었습니다. 이미 다섯 쌍둥이 잉태된 것을 알았기에 분만할 때 수많은 구경꾼 그리고 신문, 라디오, 각종 잡지 매스컴 기자들이 현장을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학계에서는 즉각 연구에 들어 갔습니다. 그 집은 불행하게도 가난한 집이었습니다. 다섯 쌍둥이는 모두 의학자들이 연구 대상으로 각각 데려다 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은 한 인간이 아니라 연구 대상이 되었습니다. 태어났지만 가정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모두가 불행하여졌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정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
하버드대학팀들이 가정에 대하여 이런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영국 북쪽 스콕크홈이라는 섬이 있습니다. 이 섬에 Manx라고 불리는 새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 새들을 잡아 비행기에 실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하버드 대학으로 가지고 와서 놓아 주었습니다. 이 새들은 자기 가족들이 있는 스콕크홈 섬을 향하여 힘차게 나르기 시작하였습니다. 12일 걸렸습니다. 3, 050마일, 그러니까 약 5,000 km를 날랐습니다. 하루 평균 400 km를 나를 셈입니다. 이 새들은 목숨을 걸고 가정으로 돌아가려고 안간힘을 다 하였습니다. 그 노력도 돋보이지만 나침반도 없이 어떻게 그 멀리 가정을 찾았는 지 아직도 신비입니다. 가정이란 생명을 걸고 들어가야 하는 곳입니다.
가정이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삼하3;1)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에 전쟁이 오래 되었습니다. 두 가문 사이에 전쟁이 있었습니다. 두 집안 사이의 싸움이 전쟁이라고 표현한 것에 관심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구태여 전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어야 할가요? 두 집 사이에 싸움이 있었다고 하면 안 될 가요? 구태여 전쟁이라고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싸움은 이기고 지는 것입니다.
전쟁은 죽이고 살리는 것입니다.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죽이고 살리는 치열한 전쟁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살벌한 관계입니다.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을 대조시켜 주고 있습니다. 두 가문 사이에 전쟁이 오래도록 계속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를 수록 다윗의 집은 강하여졌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졌습니다.
시간이 흐를 수록 점점 좋아 지는 가문은 좋은 가문이고, 시간이 흐를 수록 점점 나빠지는 가문은 좋지 않은 가문입니다.
그러면 다윗의 집은 점점 강해지고 사울의 집은 점점 무너져 버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1. 시기와 사랑의 차이입니다.
사울의 마음은 시기로 가득 찼고, 다윗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하였습니다.
블레셋으로 인하여 나라가 바람앞에 등불처럼 꺼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17살 밖에 안된 다윗은 전보대만한 강한 장수 골리앗과 단독으로 대결하여 싸워 이겼습니다. 나라를 구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외쳤습니다.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다.”
이 말을 들은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작정하였습니다. 자기보다 인기가 좋다는 이유였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수차례 시도하였습니다. 그 때 사울은 이미 후계자를 길러야 할 때였습니다. 좋은 후계자가 생겼다고 넓은 마음을 가지고 기뻐하여야 할 때였습니다.
사울은 군사를 이끌고 다윗을 죽이려고 찾아 다녔습니다. 다윗은 쫓기다가 굴속에 숨었습니다. 사울은 피곤하였던지 다윗이 숨어 있는 지도 모르고 다윗이 숨어 있는 굴속으로 들어가 정신없이 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그 곳에서 다윗이 사울을 죽이기는 쉬웠습니다. 식은 죽먹기였습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쫓아 다니는 원수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만 잘랐습니다. 그리고는 옷자락만 자른 것도 마음에 걸려서 아파하였습니다. 이유는 기름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종의 옷을 잘랐다는 이유였습니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 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 니라>(삼상24;4-6)
사울의 시기를 다윗은 사랑으로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마음을 하늘에서 확실히 보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집은 강하게,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지게 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요셉을 형들이 시기하며 팔았지만 요셉은 형들의 자녀들을 잘 돌보고 기른 것과 똑같습니다. 시기하는 형들을 사랑을 감싸는 요셉의 종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런 말들이 있습니다.
<시기하지 않고 친구의 성공을 존경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는 거의 없다.>
<우리의 불행을 동정할 사람이 한 명쯤 된다면 우리의 성공을 미워할 사람은 천명쯤 된다.>
<시기는 다른 사람을 쏘지만 결국은 상처는 자기가 입는다.>
<자기 밑에 있는 사람을 돕기에 바쁜 사람은 자기 위에 있는 사람을 시기할 틈이 없다.>
다윗의 집이 강해진 이유가 분명합니다. 다윗의 집은 사랑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집은 시기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시기하는 사람을 이깁니다.
2. 회개 차이입니다.
사울은 회개에 더디었고, 다윗은 회개에 빨랐습니다.
하나님은 회개에 빠른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가 다 잘못도 하고 실수도 합니다. 그리고 누구나 죄를 짓게 됩니다.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울도 다윗도 죄를 지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후의 자세는 전혀 달랐습니다. 사울은 회개에 늦었고, 다윗은 회개에 빨랐습니다.
아멜렉과 전쟁할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 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 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삼상15;3)
그런데 사울은 이 명령을 어겼습니다.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삼상15;9)
이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15;11)
사무엘은 무슨 일이 사울에게 벌어졌는 지 궁금하여 사울을 찾아갔습니다. 그 때 양소의 울음소리가 났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물었습니다.
<내 귀에 들어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찜이니이까(15;14)
사울은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분명히 자기와 군사들이 같이 남긴 것인 데 백성들이 그렇게 한 것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15;15)
분명히 9절에서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도 자기만 쏙 빠진 비겁한 변명이었습니다. 사무엘은 구제불능이라 생각하고 말했습니다.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15;26)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못 하고 뻔뻔스럽게 변명하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사울은 더 이상 왕이 아니라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고 남편을 죽인 사건은 다윗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적인 실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나단 선지자가 와서 그 죄를 지적하였습니다. 다윗은 즉각적으로 회개하였습니다. 시편 51편은 이 때 회개하면서 지은 다윗의 유명한 시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 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19)
이같이 사울은 회개에 무디고 다윗은 회개에 빨랐기에 하나님은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게 하시고 다윗의 집은 점점 강하게 하셨습니다.
회개가 문제였습니다.
3. 옹졸함과 넓은 마음 차이입니다.
사울의 마음은 옹졸하였고, 다윗의 마음은 포용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사울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이는 죽이려는 옹졸한 이였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들 85명이 다윗에게 협조하였다고 그들 모두를 죽였습니다(삼상22;18)
사울은 잔인하였습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조건 죽이는 살인자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도 다 포용하고 끝까지 붙들고 있는 이였습니다. 두 가지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한 사건은 시므이 사건입니다.
압살롬이 다윗을 죽이려 하자 다윗은 도망하였습니다. 이 때 시므이가 따라오면서 다윗왕을 향하여 저주하였습니다.
<피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삼하16;7-8)
이 말을 들은 아비새 장군이 왕에게 물었습니다.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이 때 다윗왕은 화가 치밀때 범죄치 않았습니다.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 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내 몸에서 난 내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날 그 저주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삼하16;10-12)
그런데 그 다음이 더 은혜롭습니다. 그렇게 가만히 있으니까 시므이도 그만 둔 것이 아닙니다. 시므이는 <산비탈을 따라 가면서 저주하고 저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리더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 다윗의 자세를 보십시다.
<왕과 그 함께 있는 백성들이 다 곤비하여 한 곳에 이르러 거기서 쉬니라>(삼하16;14)
나중에 다윗은 압살롬으로부터 승리하고 시므이로부터 승리하였습니다. 이같이 다윗은 모든 것을 다 품을 수 있는 이였습니다.
또 한 사건이 있습니다
사울을 죽이려던 사울을 아멜렉 사람이 죽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와서 보고하면 상을 줄줄 알고 당당히 보고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사람을 죽이면서 말했습니다.
<다윗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 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소년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가까이 가서 저를 죽이라 하매 그 가 치매 곧 죽으니라. 다윗이 저에게 이르기를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 네 입이 네 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노라 함이니라 하였더라>(삼 하1;14-16)
이같이 다윗은 사울을 죽인 이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런 대조적인 두 마음을 보시며 하나 님은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게 하시고 다윗의 집은 점점 강하게 하셨습니다.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지고 다윗의 집은 점점 강하여진 것은 마음의 차이였습니다. 옹졸한 마음과 넓은 마음의 차이였습니다.
헨리 포드는 참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포드 자동차로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작은 집에서 살았습니다.
친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백만 장자의 집 치고 너무 초라하지 않습니까?>
포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건물이 문제가 아니지. 그 속에 사랑이 있으면 좋은 가정이고 사랑이 없다면 석조로 지은 대저택도 무너지는 가정일 수 밖에 없지.>
마음이 큰 사람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고등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버지가 어느 때 가장 불쌍하다고 느껴지는가?>
대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첫째는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야단 맞을 때입니다.
둘째는 아버지가 밤늦게 회사에서 돌아와 가방을 힘없이 내던지고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흐느껴 우실 때입니다.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이기지 못 한 때입니다.
셋째는 아버지가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보다가 말고 갑자기 나가셔서 혼자 복권을 맞추어 보실 때였답니다.>
우리는 좀 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4. 하나님 동행의 차이였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떠나셨고, 다윗은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지고 다윗의 집은 점점 강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세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것입니다.
사울의 집에서는 하나님이 떠나셨고 다윗에 집에는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삼상18;12)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삼상16;
14)
하나님이 떠난 가정이 잘 될 리가 없습니다. 물을 떠난 고기가 평안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집에는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여러 곳에서 이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삼하 5:10)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삼하 7:9)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 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삼하 8:6)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되 온 에돔에 수비대를 두니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 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삼하 8:14)
하나님이 함께 한 집은 강하여 가고 축복이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게 하시고 다윗의 집은 점점 강하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 가요?
1. 시기와 사람의 차이였습니다.
2. 회개 차이였습니다.
3. 옹졸한 마음과 넓은 마음의 차이였습니다.
4. 하나님 차이였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삼하3:1)
다윗의 집
이영훈목사 / 성동교회
나는 우리교회 성도들의 가정을 보면서 부럽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겨우 서너 식구가 비좁게 살아온 움막 같은 집입니다. 그렇지만 호화로운 수십 평 아파트에 사는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 거기에 있습니다. 이제는 자녀들을 다 결혼시켜서 주님을 경외하는 가정들을 이루게 하고 오누이처럼 된 부부는 밀레의 만종에서 보여 주는 것 같이 마주서서 하나님 앞에 머리 숙이기를 즐거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기도가 있고 찬양이 있으며 주의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직도 건강하여 일손을 놓지 않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땀의 열매를 손에 쥐는 만족이 있습니다.
내가 부러워하는 권사님의 가정이 있습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가정입니다. 자녀들의 신앙도 예쁘기만 합니다. 그는 홈 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것은....
정녕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떤 차를 모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태워 주느냐는 것이다.
정녕 중요한 것은 당신이 사는 집의 크기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하느냐는 것이다.
정녕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당신의 삶을 어떤 계층의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느냐는 것이다.
정녕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남에게 무엇을 베푸느냐는 것이다.
정녕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친구를 가졌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당신을 친구로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정녕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당신의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낸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는 것이다.
정녕 중요한 것은 당신이 좋은 동네에 사느냐가 아니라 당신이 이웃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것이다.
이글은 지금까지 내가 지켜본 바로는 그가 애써서 살고자하는 모습을 옮겨 논 것이어서 읽으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다윗을 주목해 보기를 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의 집은 흥하더라고 했습니다. 누구에게든지 부러움을 살만한 인물입니다. 다윗에게 무엇이 이처럼 축복의 사람이 되게 했습니까?
첫째, 다윗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IMF 이후에 우리 사회는 절대 빈곤층들이 늘어났고 어려워진 경제로 인한 가정 파탄도 늘어 결손 가정, 소년 소녀 가장도 많아졌습니다. 얼마 전 중 3 여학생이 자살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안계시고 어머니는 척추 암으로 몸져누워있는 그리고 아직도 어린 두 동생을 둔 소녀 가장이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도 모범생이었고 성적도 다른 아이들보다 뒤지지 않은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가난에 시달려왔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는 어디를 보아도 희망이 없다는 글을 남겨 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형편에 있는 청소년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나는 소년 요셉을 생각했습니다. 저는 형들에 의하여 팔려서 노예가 되었습니다. 노예는 짐승처럼 취급받습니다. 요셉은 한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남을 원망하거나 스스로를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누구 못지않은 절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는 하나님이 꿈이고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형통의 모습을 보여 주었고 후에 애굽의 총리까지 되었습니다. 본문의 다윗도 그렇습니다. 그는 이새의 아들입니다. 형 7명과 누이 2명인 가정의 막내였습니다. 집안에서도 괜찮은 것들은 모두 다른 형제의 몫이 되고 어린 나이에 다윗은 아비의 양을 치는 목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년 다윗은 거기에서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고 그를 의지하는 가운데 목자로서 어려운 일들을 해 내었습니다. 그가 골리앗 대장 앞에 나갈 때에도 너는 칼과 창을 가지고 나오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 이름을 가지고 나간다고 외쳤습니다. 그는 후에 이스라엘의 성군 다윗이 되고 세월이 가면 갈수록 흥하는 집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6)
둘째, 다윗은 권위 아래서 순종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목동 다윗은 양을 치며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에게 순종하는 축복을 배웠습니다. 양들은 어디에 푸른 초장이 있는지 물가가 있는지 모릅니다. 다만 목자를 따르기만 하면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를 받음을 알았습니다. 후에 다윗은 불후의 명작 시 23편의 말씀을 남겼습니다.
다윗은 목동으로 궁중 악사로 군대 장관으로 나아가 왕으로 살아오면서 그는 하나님께 순종과 그의 권위 아래서 순종하는 법을 익힌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선지자 사무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결국 영적 권위의 한계를 넘어서는 죄를 범했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향하여 후회하시고 다윗을 택하셨습니다. 이를 안 사울은 다윗을 미워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다윗이 눈에 띄면 창을 던져 죽이려 했습니다. 다윗은 쫓겨 다녀야했고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두 차례나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나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니”라고 말하면서 자기의 군사들에게 사울을 해치지 못하게 했습니다. 다윗의 집을 흥하게 하신 뚜렷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셋째, 다윗은 하나님을 사모한 사람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현장이요 기도하는 집입니다. 다윗이 성전을 사랑하고 사모한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싶다는 중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윗은 왕궁에서 호화롭고 편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편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선지자 나단과 상담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싶다는 내용입니다. 나단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라고 했고 다윗은 성전 건축을 시작하려 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을 건축하는 사역이 위임되자 다윗은 성전 건축하는 일을 위하여 일평생 그 일을 준비하는 사역으로 헌신을 했습니다. 다윗은 시편 122편1절에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노라.”고 했고 시편 23편 6절에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 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은 기도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골리앗과 싸울 때에도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맞섰고 불레셋과 르바임에서의 싸움에서도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싸워 승리를 했습니다(삼하5:22-25).
웨일즈에서 나이 많은 한 설교자가 조그만 읍에서 열린 전도 집회에 설교 초청을 받았습니다. 회중은 다 모였는데 설교자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곳 목사님과 교역자들이 그 설교자가 묵고 있는 집으로 한 하녀를 보내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며 모든 준비가 다 끝났다는 말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그 하녀가 갔다가 돌아와서 하는 말이 "그를 방해할 수 없었어요. 그분은 어떤 사람과 이야기하고 계셨어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그것 참 이상하군. 모든 사람은 다 여기에 와 있는데, 가서 시간이 이미 지났으니 곧 오셔야 한다고 전하여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녀는 다시 갔다가 돌아와서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분은 지금 누구와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 "제가 들으니 그 분은 함께 있는 어떤 사람에게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않는다면 나는 가서 설교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었어요." "그래, 그럼 이제는 기다리는게 낫겠군." 목사님들이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합니다.
넷째, 다윗은 회개할 줄 아는 그래서 하나님께 긍휼을 얻은 사람입니다.
잠언서에 어머니가 르무엘왕에게 훈계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할꼬 내 태에서 난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할꼬 서원대로 얻은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할꼬 네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며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행치 말지어다.”(잠31:2-3).
왕을 멸망시키는 것 가운데 하나가 육신의 정욕에 이끌려 이성에게 넘어가는 일입니다.
다윗은 엄청난 죄악의 함정에 빠졌습니다. 유부녀와 불의의 관계를 맺었고 그의 남편을 전쟁에 나가 전사하도록 했습니다. 간음죄, 살인죄 등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죄악을 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내서 저를 책망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뜻을 전 했습니다.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다윗은 즉시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다윗은 후에 증거 하기를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 하리이다.”(시32:1-6)라고 했습니다.
다섯째, 다윗은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보답하고 산 사람입니다.
다윗은 은혜를 은혜로 알고 산 사람입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다윗은 이새의 여덟 째 아들로 양을 치는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새의 여러 아들을 물리치시고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는 진실했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온유한자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길들여진 사람입니다. 대단히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국위를 크게 드높였습니다. 다윗은 이 모든 일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 것임을 믿었습니다(시 41:11). 그리고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시편 116편 1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라고 했습니다. 사무엘 상 20장을 보면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울은 끊임없이 다윗을 죽이려고 기운을 소진하고 있었지만 아들 요나단은 달랐습니다. 사울의 위협으로 다윗이 많은 위기를 격을 때에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아비를 속여가면서 다윗에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요나단이 죽은 후에 다윗은 약속한대로 요나단의 집을 지켜주고 그 아들들을 보살펴 주었습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고 보답하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성경은 다윗의 집을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흥하는 집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축복은 다윗이 모든일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뜻에 순종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모하였고 주님과 마음을 같이하여 사는 법을 익힌 자 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했고 성전을 사모하고 기도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죄를 회개하여 긍휼과 용서를 받은 자이며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은혜로 알고 보답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집은 더욱 강성해지고 흥하는 집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인간의 계략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뜻
삼하 3:1~21 / 이준원목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처칠 수상과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신뢰 관계를 보여주는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릴 때도 책에서 그런 내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루즈벨트와의 신뢰 관계를 세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처칠은, 당시 루즈벨트의 마음을 잡기가 여자의 마음을 잡기보다 더 어려웠다고 나중에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은 전쟁 중에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아주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도 나누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한번은 처칠이 목욕하고 있는 중에 모르고 들어가게 된 루즈벨트가 벌거벗은 처칠의 모습을 보고 당황하여 나가려고 하자 처칠은 도리어 팔을 활짝 벌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영국 수상은 미국 대통령에게 아무것도 숨기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한 유머를 발휘한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어서 두 사람이 정말 가깝고 신뢰하는 관계가 되어서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람 사이의 신뢰 관계는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정치계는 물론이고 교회 안에서도 의견이 하나 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치계를 보면 얼마나 서로 싸웁니까? 같은 당 안에서도 파가 갈라져서 정쟁을 하거나 심한 경우 분열하기도 합니다. 이전에도 보면 같은 당에서 분당을 하고 새 정당을 세운 적이 많았습니다.
하나 되기 힘든 것이 사람은 원래 다 자기가 가장 잘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금만 의견이 다르거나 이해관계가 맞지 않으면 갈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 저를 비롯해서 우리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가 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면 금방 듣습니까? 잘 듣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의식 속에 자기가 더 잘났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틈이 생기지 않으려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고, 신뢰가 세워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라이든 교회이든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멋진 말이나 화려한 구호가 아니라, 많은 희생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고 이스보셋은 사울의 아들로서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의 이스라엘 안에서 두 왕으로 갈라져 싸우니까 이스라엘은 제대로 설 수가 없었습니다. 나라가 둘로 나뉘어 있으니 얼마나 불안정했겠습니까? 같은 나라의 지도자들이 서로 갈라져 싸우면 그 나라는 바로 설 수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분쟁이 있으면 영혼 구원의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싸우는 교회에 누가 나와서 은혜받고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되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그런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지만, 대기의 경우 교회가 싸우면 ‘나는 잘 모르지만 분명히 예수가 사랑하라고 한 게 가장 큰 가르침인 것 같은데 사랑하라고 하는 사람들끼리 왜 싸우나?’ 하면서 외면하게 됩니다.
사울쪽 사람들은 정권을 넘겨주기 싫었고, 다윗의 보복도 두려웠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면 많은 변화가 일어날 텐데, 그것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대략 7년 정도 그런 상태가 지속되었는데, 다윗은 힘이 있어서 무력으로 할 수도 있었지만 무력으로 나라를 통일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랬더니 다윗을 대적하던 사울파 안에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였고, 그런 것이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의외의 방법으로 인도해주십니다.
1. 안정되어 가는 다윗의 왕권 (1~11절)
1) 다윗의 가족 (1-5)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1절)
1절은 3장 전체의 개요를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의 오랜 전쟁은 사울 집의 몰락과 다윗 집의 부흥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다음에 다윗의 가족에 대해 죽 나오고 있는데 굉장히 흥미로운 내용입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아들들을 낳았으되 맏아들은 암논이라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이요, 둘째는 길르압이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의 소생이요 셋째는 압살롬이라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요, 넷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다섯째는 스바댜라 아비달의 아들이요, 여섯째는 이드르암이라 다윗의 아내 에글라의 소생이니 이들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자들이더라” (2-5절)
헤브론에서 왕이 된 7년 사이에 여섯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들의 엄마가 다 다릅니다. 그러니까 많은 아내를 취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히노암, 아비가일, 마아가, 학깃, 아비달, 에글라 등 총 6명의 아내가 등장합니다.
물론 고대사회에서 왕은 아내들이 많았습니다. 아내가 많을수록 힘이 강하다는 것을 과시할 수 있기 때문에 왕권이 안정되어 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까?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까? 찬양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가 쓴 시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다른 나라 왕들이 하는 것처럼 인간적인 방법인 정략결혼을 통해서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단순히 여자를 좋아해서 아내들을 많이 두었다기보다는, 정략결혼을 통해 안정을 취하기 위함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 당시 관습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는 관계가 없는 잘못된 일입니다. 하나님의 율법 어디에 보아도 일부다처제를 허락하신 곳이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도 첩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 태어났고, 그 후 아내 사라를 통해 이삭이 태어났는데, 사라 사후에 또 그두라라는 여인과 재혼을 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동시에 여러 명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일부다처였습니다. 그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도 야곱도 다윗도 다 믿음의 사람들인데 여러 아내를 얻은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이었습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 40년을 마감하면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고별설교가 신명기입니다. 신명기 17장(14-17절)에 보면 왕은 이렇게 하라는 지침이 나와 있습니다. 나중에 왕을 세워달라는 백성들의 요구가 있을 텐데, 그때 반드시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을 왕으로 세우라고 하면서 왕에게 세 가지를 금하라고 모세가 오래 전 기록을 해두었습니다.
모세가 대략 BC 1500년경 사람이고 다윗은 BC 1000년경 사람이니까 다윗 500년 전에 하나님은 이미 왕이 다 나올 줄 아시고 미리 경고를 주신 것입니다.
첫째는 “말을 많이 두지 말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모든 말은 군사용 병마입니다. 말을 많이 두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전쟁의 승패가 군사력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군사력에 이스라엘의 승패가 있지 않다는 것을 왕에게 명심시키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아내를 많이 두지 말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여자를 좋아해서 결혼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결혼하는 여자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우상과 이방신으로 인해 마음이 미혹되고 여러 가지로 나뉠까 봐서 금한 것입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여자라도 집안에 우상을 가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 우상을 끌고 들어오면 우상숭배로 나아가기 때문에 금하셨습니다.
셋째로 “은금을 많이 두지 말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은금은 이 땅의 보화와 재물을 압축적으로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그것이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신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다윗은 아내를 많이 두지 말게 하라고 하셨는데 여러 명의 아내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이것을 전부 완전히 반대로 지켰습니다. 심지어 아내는 천 명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다윗이 말씀을 잘 앎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기 전 헤브론에 와서 유다 지파의 왕이 된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아내를 많이 두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후 보겠지만 나중에는 자기가 버리고 떠났던 사울의 딸 미갈까지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그것도 역시 정략적인 이유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으로 등극한 후에 이제는 드디어 도망자 생활을 청산하고 성공을 거두니까, 왕이 되니까, 높은 자리에 올라가니까, 영적으로 틈이 생기고 다윗도 조금씩 조금씩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한 번에 완전히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항상 하나님을 잘 섬기고 예배도 잘하고 찬양도 잘했습니다. 아주 귀한 믿음의 사람이었고, 그 누구도 다윗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다고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놀라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사람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는 것을 성경이 보여줍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의 잘남 때문에 나라가 세워지고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그 성패가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누가 나라의 지도자가 되면 잘되고 누가 되면 망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에게 달린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성경은 바로 그런 것을 잘 보여줍니다. 다윗같이 가장 위대한 사람, 그 후손에서 메시아(구원자)가 나올 정도로 하나님이 인정하셨던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인 다윗도 이렇게 많은 잘못과 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성경은 그대로 보여줍니다. 감추려 하지도 미화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위대한 책입니다. 자기들이 추앙하는 사람들을 미화하는 것이 대부분의 경전들인데, 성경은 전혀 감추지 않습니다.
다윗이 훌륭한 행적을 역사에 남긴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가장 뛰어난 왕이었으며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아주 부끄러운 일도 많이 행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런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결국 역사라는 것이 강하고 뛰어난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된다는 것, 하나님이 이끄신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내를 많이 두는 일로 인하여 장차 왕국의 심각한 분열을 초래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아들 솔로몬이 그대로 본받는 것을 넘어 뛰어넘습니다. 솔로몬 왕국은 많은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았기 때문에 분열되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 남북으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여인들이 가지고 들어온 이방 신들을 하나님 신앙과 섞어 섬김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정결한 신앙이 다 무너지고, 변질되고, 삶도 엉망이 된 것입니다. 물질적으로는 뛰어났지만 영적으로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나라의 분열을 초래했고, 피비린내 나는 내부적 정권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이때만 해도 다윗은 자신이 이렇게 하는 것이 훗날 이스라엘 내전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나중에 이것은 다윗 자신의 가정에 일어나는 많은 문제의 원인이 됩니다.
맏아들은 암논인데, 그는 다윗의 맏아들로 후에 이복형제인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성폭행하고, 그 일로 압살롬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둘째는 길르압인데, 나발의 아내였던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에게서 태어난 아들로서, 다니엘이라는 이름도 있었습니다(대상 3:1). 그런데 암논과 압살롬이 죽은 후에 넷째 아들이었던 아도니야가 맏아들 노릇을 하려고 하는데, 그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길르압은 일찍 죽었거나,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의 소생이었기 때문에 나발의 족보에 속해서 다윗 왕권의 후계자가 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셋째는 그 유명한 압살롬으로, 아버지 다윗을 반역하여 왕이 되지만 전쟁 중에 요압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압살롬의 어머니 마아가는 다윗이 결혼한 그술 왕 달매의 딸로, 이스보셋의 근거지인 마하나임 북쪽에 위치한 작은 나라 출신이었습니다. 다윗은 마아가와 결혼함으로 그술 왕을 통해 이스보셋을 정치적으로 압박하고자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넷째는 아도니야인데, 넷째 아들이었지만 솔로몬과 왕위 쟁탈전을 벌이다 죽임을 당합니다. 다섯째는 스바댜인데, 스바댜와 그의 어머니 아비달에 대해서는 성경에 특별히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드르암도 헤브론에서 태어난 다윗의 여섯째 아들로 특별한 행적은 알려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기록은 단순히 다윗 집안이 이랬고 어머니는 누구이고 아들은 누구라는 것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서, 이 아내들과의 관계들 속에서 태어난 아이들 때문에 나중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가를 미리 암시해주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많은 문제들이 사실은 우리의 욕심 때문에 또는 잔꾀를 부리는 것 때문에 일어납니다. 살살 머리를 굴리거나 욕심을 부리거나 내 뜻을 주장하거나 하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 내 잘못으로 인해 문제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도 바른 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가야겠다는 것을 다짐하게 됩니다. 천하의 다윗이라도 넘어졌는데, 다윗보다 연약한 우리는 얼마나 더 넘어지겠습니까? 그러므로 결코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2) 이스보셋 정권의 실권자 아브넬 (6-11)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있는 동안에 아브넬이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으니라” (6절)
사울과 다윗의 집 사이의 전쟁은 다윗 집의 부흥을 가져다주었을 뿐 아니라 사울 집 내부의 권력 구조 개편을 가져옵니다. 그것은 이스보셋이 아닌 아브넬이 권력을 장악한 것입니다. 이스보셋은 죽은 사울의 아들인데, 정작 사울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이 권력을 잡은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당연한 결과로서, 이스보셋 정부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군부 세력이 권력 중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요즘에도 이런 일이 다 있습니다. 이것이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나라에 혼란이 오면 군대가 쿠데타를 일으켜 군부가 권력을 잡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이런 것이 고대사회에서는 지금보다 더 흔한 일입니다. 힘이 있는 사람이 권력을 잡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 예상하지 못했던 심각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사울에게 첩이 있었으니 이름은 리스바요 아야의 딸이더라 이스보셋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첩과 통간하였느냐 하니” (7절)
아브넬은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사울의 첩 리스바와 통간했고, 그것이 이스보셋과 아브넬 사이를 결정적으로 갈라지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적해서 세운 나라가 이제는 스스로의 죄로 인해 결국 붕괴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첩과 통간하였느냐?”라는 아브넬에 대한 이스보셋의 비난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고대에는 이전 왕의 아내나 첩을 후계자의 소유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압살롬도 다윗의 후궁들과 잠자리를 같이 함으로써 ‘내가 진짜 왕이다.’라고 과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삼하 16:22).
따라서 아브넬이 사울의 첩과 통간했다는 소문은 아브넬이 사울 왕의 후계자로 자처했다는 것과 같은 주장입니다. 이제 아브넬이 왕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사실 이 소문은 점점 강해지는 아브넬의 권력을 질투한 사람들이 퍼뜨렸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실제로 아브넬이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사실은 더 낮습니다. 아브넬이 진짜 그렇게 한 게 아니라, 누군가가 계략을 짜서 아브넬과 리스바가 같이 있게 했을 수 있습니다. 그 장면을 보도록 증인들을 동원해서 목격하게 한 후 그것을 가지고 퍼뜨리는 겁니다. 옛날이 더욱 무섭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얼마나 치사하고 더럽습니까? 그런데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이건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소문이 이스보셋의 귀에 들어가게 됩니다. 누군가가 보고한 겁니다. 그랬더니 이스보셋이 너무 화가 나서 아브넬에게 따집니다. 아브넬이 너무 강해지니까 두려움도 있고 질투도 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니 가서 따진 겁니다.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을 매우 분하게 여겨 이르되 내가 유다의 개 머리냐 내가 오늘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의 형제와 그의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내가 이루게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그 맹세는 곧 이 나라를 사울의 집에서 다윗에게 옮겨서 그의 왕위를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에 세우리라 하신 것이니라 하매” (8-10절)
아브넬은 이스보셋의 항의에 대해 분노합니다. 이것이 사실이었다면 이스보셋이 정당한 항의를 한 것인데 거기에 대해 엄청나게 분노하고 있습니다. 사울 집을 지금까지 지탱해 준 것이 바로 자기인데, 그러한 공을 인정하지도 않고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채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 소문이었다면 이스보셋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항의한 것이 되기 때문에 아브넬의 분노를 더 돋운 것이 됩니다. 얼마나 화가 났던지 아브넬은 결정적으로 나라를 다윗의 손에 넘기기로 작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브넬이 진짜로 그렇게 했든지 안 했든지 상관없이 이것은 아브넬의 사악한 면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아브넬이 사울의 첩과 통간을 했느냐 안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아브넬의 관심이 어디 있는가를 보면, 사울의 집을 향한 신실한 충성 때문에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권력을 잡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이렇게 한 것입니다. 결국 아브넬은 이미 기울어 가는 나라를 이제 다윗에게 넘겨야겠다고 작정하면서, 다윗과 협상을 통해 자신의 생명과 권력을 보장받으려는 속셈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사실인지 아닌지를 떠나, 아브넬은 자기 스스로의 말로 인정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도록 하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알고도 자기가 이스보셋을 내세워서 나라를 세우고 다윗을 대적해 왔습니다. 이제는 사사로운 것 때문에 이스보셋을 배신하고 다윗에게 붙으려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보니까 이쪽은 아무리 해봐야 별일이 없고, 이쪽에서 권력을 잡아 봐야 별것 아니라는 것을 이제 깨달은 겁니다. 그래서 다윗 쪽에 붙으면 더 낫다는 계산이 벌써 끝난 겁니다. 이스보셋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항의 때문에 아브넬의 결정을 더 빨라지게 촉진했습니다.
“이스보셋이 아브넬을 두려워하여 감히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니라” (11절)
이것만 보아도 이스보셋은 참 미련한 사람입니다. 아무 대항도 못할 것을 왜 이야기합니까? 아브넬의 이러한 분노에 대해 너무 무기력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단지 이름뿐인 왕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고, 나라에 대한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브넬을 두려워하여 그의 죄를 더욱 분명히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이스보셋은 다윗에게 항복하고 그 나라의 통치권을 넘겨주는 것이 생명을 보존하는 유일한 길이었지만, 그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실행하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결국 비참하게 죽고 맙니다.
아브넬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이거구나.’ 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피하거나 대적하게 될 때, 나중에 분명히 결과가 좋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르고 범해도 죄는 죄인데, 알면서도 범하면 그것은 더 악합니다. 특히 아브넬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려는 태도는 옳지 못합니다.
여기에 무기력한 왕 이스보셋이 있습니다. 그런 왕을 조종하고 나라를 뒤흔드는 아브넬이 있습니다. 그리고 곧 뒤에 나오는 내용대로 왕인 다윗도 통제할 수 없는 군사령관 요압이 있습니다. 또 남의 아내가 되어 버린 다윗의 아내 미갈이 등장합니다. 다윗도 나름대로 미갈을 되찾아 사울 왕조의 적법한 후계자라는 인정을 받고자 애씁니다.
그러나 다윗이 결정적으로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 추대받게 된 계기는, 의외로 이스보셋과 아브넬의 갈등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갈등으로 인하여 아브넬이 자기 왕을 배반하고 다윗을 지지함으로 문제가 그냥 해결되어 버렸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 아래 이미 있었기 때문에 모든 상황은 그 목적을 위해서 가고 있는데, 거기에 아브넬이나 이스보셋 같은 사람은 알지 못하면서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는 아무리 인간이 계략을 쓰고 술수를 동원해도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따라 이끌려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갈등, 속임수, 배반, 폭력, 죄악 등의 문제들 가운데서도 당신의 뜻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십니다.
성도의 모든 인생과 결과는 하나님의 계획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다 보시며 기록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카운트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정말로 믿는 사람은 어떤 복잡한 상황과 관계 속에서도 낙담하거나 조급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다 아시며 기록하고 계신데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니, 낙담하거나 조급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인간적인 꾀나 세상적인 방법을 쓰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시는데 그런 방법을 왜 쓰겠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찾는 것이 믿음의 반응인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2. 아브넬의 뜻밖의 조력을 통한 유익 (12~21절)
1) 화친의 조건 (12-16)
“아브넬이 자기를 대신하여 전령들을 다윗에게 보내어 이르되 이 땅이 누구의 것이니이까 또 이르되 당신은 나와 더불어 언약을 맺사이다 내 손이 당신을 도와 온 이스라엘이 당신에게 돌아가게 하리이다 하니” (12절)
아브넬은 자신의 생명과 권력을 보장받기 위해 다윗에게 나라를 넘기기로 결심을 굳히고 다윗에게 사신들을 보내어 화친 조약 체결을 제안합니다. 그런데 여기 질문을 보십시오. 그가 뭐라고 합니까? “이 땅이 누구의 것이니이까?”
이 질문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이 땅이 다윗 당신의 것이니까 내가 되찾도록 돕겠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진짜는 ‘이 땅을 실제로 장악하고 있는 것은 나 아브넬이다. 내 도움이 없이는 땅을 전부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내게 잘해라.’라는 숨겨진 뜻이 있습니다. 얼마나 정치적이고 교활합니까? 아브넬은 다윗이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되면 적절한 보상과 보호를 얻기 위해서 이런 것을 제안하는 겁니다.
다윗의 가장 강력한 적이 사실 아브넬인데, 이 아브넬이 다윗에게 화해의 언약을 맺자고 제의합니다. 이것은 다윗에게 매우 놀라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나?’ 하고 있는데 제발로 먼저 찾아온 겁니다. 더 이상 싸움 없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브넬의 그러한 제안을 환영하면서 조건을 내겁니다. 무엇입니까?
“다윗이 이르되 좋다 내가 너와 언약을 맺거니와 내가 네게 한 가지 일을 요구하노니 나를 보러올 때에 우선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고” (13절)
그냥 보면 다윗이 여자를 좋아해서 자기를 떠난 미갈을 데려오라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정치적인 이유로 미갈을 찾고 있습니다. 이 표현을 보십시오.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 원래 결혼했었던 사울의 딸 미갈을 되찾음으로 다윗은 사울 왕조의 합법적인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지닐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다윗도 엄청나게 정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전령들을 보내 이르되 내 처 미갈을 내게로 돌리라 그는 내가 전에 블레셋 사람의 포피 백 개로 나와 정혼한 자니라 하니, 이스보셋이 사람을 보내 그의 남편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서 그를 빼앗아 오매” (14-15절)
다윗은 아브넬과 몰래 조약을 맺은 후 이스보셋에게는 공식적으로 전령들을 보내서 미갈을 돌려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스보셋이 누이 미갈을 적인 다윗에게 순순히 보낸 이유는 아브넬의 압력 때문일 것이 분명합니다.
미갈은 다윗과 헤어진 후에 재혼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합법적인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윗과 이혼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미갈과 결혼한 발디엘이 잘못한 겁니다. 이혼이 아닌데 그냥 결혼해버렸으니까 무효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다윗에게는 미갈을 되찾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의 남편이 그와 함께 오되 울며 바후림까지 따라왔더니 아브넬이 그에게 돌아가라 하매 돌아가니라” (16절)
너무 허무합니다. 울면서 끝까지 따라왔는데 “돌아가라” 하니까 그냥 돌아갑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합법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발디엘이라는 사람은 원래 사울과의 깊은 유대 관계로 인해 미갈을 아내로 데려가서 잠시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몰락한 후 즐거움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한 게 아닌가? 잘살고 있는데 남의 가정을 파괴하나?’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은 발디엘이 다윗의 가정을 파괴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권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이 권리를 되찾은 겁니다. 그런데 미갈을 그냥 둘 수도 있었지만,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미갈을 데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철저히 모든 것을 이렇게 준비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너무나 믿음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이렇게 너무나 정치적인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2) 돌아오는 이스라엘 (17-21)
기울어 가는 정세와 이스보셋과의 틀어진 관계 등을 계기로 하여 다윗에게 나라를 넘기기로 작정한 아브넬은 곧장 그 계획을 실행에 옮깁니다. 이것은 그가 주도면밀하고 의지가 강한 사람임을 알려줍니다.
“아브넬이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여러 번 다윗을 너희의 임금으로 세우기를 구하였으니, 이제 그대로 하라 여호와께서 이미 다윗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종 다윗의 손으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든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하셨음이니라 하고” (17-18절)
이것을 그냥 보면 그런가 보다 하지만, 요즘 뉴스에서 정치인들이 얼마나 수를 씁니까? 그건 저리 가라입니다. 보십시오. 아브넬이 먼저 열한 지파 중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열 지파의 장로들(리더들)을 부릅니다. 뒤에서 베냐민 사람들만 따로 부른 걸 보면 이때는 열 지파를 부른 겁니다.
그래서 그 장로들을 불러 자신의 계획을 알립니다. 아브넬의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장로들의 마음은 이미 오래전에 다윗에게로 돌아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여러 번 다윗을 자신들의 임금으로 세우기 원한다는 뜻을 사울 집에 건의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권력욕에 사로잡혀 있던 이스보셋과 아브넬은 이스라엘 장로들의 그러한 의견을 묵살하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군사적 힘으로 강권 통치를 계속해 왔던 겁니다.
아브넬의 말속에서 또 한 가지 확인하는 것은, 이스보셋 정권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뜻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권력욕을 위해 다윗을 대적하며 다른 정부를 세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아브넬이 다윗에게 온 나라를 돌리기를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그러한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브넬이 다윗에게 나라를 돌리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선한 의도에서 나온 게 아니라, 전적으로 불신앙적인 입장에서 나라가 망하기 전에 살짝 넘김으로써 자신의 기득권을 인정받고자 하려는 속셈으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넬이 또 베냐민 사람의 귀에 말하고 아브넬이 이스라엘과 베냐민의 온 집이 선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다윗의 귀에 말하려고 헤브론으로 가니라” (19절)
이스라엘 장로들의 동의를 얻은 아브넬은 최종적으로 권력의 중심에 있는 베냐민 지파 장로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동의를 얻어냅니다. 이제 정부를 다윗에게 넘기려는 그의 계획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수용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브넬을 향한 하나님의 복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다윗에게로 당신의 백성을 보내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계획 안에서의 인도하심입니다. 오히려 아브넬은 자신이 계획해서 잘 진행되던 이 일로 인해 나중에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얼마나 아이러니합니까?
“아브넬이 부하 이십 명과 더불어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가니 다윗이 아브넬과 그와 함께 한 사람을 위하여 잔치를 배설하였더라. 아브넬이 다윗에게 말하되 내가 일어나 가서 온 이스라엘 무리를 내 주 왕의 앞에 모아 더불어 언약을 맺게 하고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 하리이다 하니 이에 다윗이 아브넬을 보내매 그가 평안히 가니라” (20-21절)
아브넬은 자신의 부하 20명을 화친 사절로 자신과 동행하게 하면서 다윗이 있는 헤브론으로 찾아갑니다. 그때 다윗이 아브넬을 잘 대해줍니다. 큰 잔치를 벌여주는데, 왜냐하면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뤄지고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일관되게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모든 것을 맡겼고, 결코 자신의 기분이나 혈기에 따라 사람들을 대하거나 처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온유함과 사랑으로 대한 것을 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일이 술술 풀리면 ‘하나님이 인정하셔서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하면서 일이 잘 풀린다면 그것은 완전한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셔서 그런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 나중에 결국 자신의 발목을 잡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나가는 말]
이러한 내용을 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이처럼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당신의 약속을 이루어가시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인간의 노력이나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약속을 이루십니다. 아무리 이런 인간의 악한 계략과 속임수가 판을 치고 일이 술술 풀리며 성공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주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우리에게 인간의 능력이나 상황으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것처럼, 우리 또한 왕이신 예수님의 완전한 다스리심을 받는 사람들이 되게 해주십니다.
우리 눈으로 볼 때는 ‘이것이 왜 그런가? 이 세상이 왜 그런가?’라고 할 만한 일들이 요즘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신가?’ 하나님은 여기 계십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아실까?’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오묘하고 선한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 주님의 뜻을 늘 구하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선한 뜻 가운데 쓰임 받는 믿음의 일꾼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양인국목사 / 삼하 3:1-39.
1.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그 약속에 대한 믿음에 따라 사는 다윗과 그의 집은 시간이 더해 감에 따라 점점 강해져갔고,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떠난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해져 갔다. 하나님은 본문의 내용을 통하여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이 흥하고 쇠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의 유무에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다.
2. 1절의 말씀이다.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여기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랫동안 있었다”는 말은 다윗이 유다 왕이 된 후 이스라엘과 전쟁을 했다는 의미가 아니고, 사울이 왕이 된 후 다윗을 정적(政敵)으로 생각하고 그를 제거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추격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당시 사울은 왕으로서 이스라엘 가운데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자였지만 다윗은 사울의 신하였고 사울로부터 계속 쫓기고 있는 자였다. 그러므로 힘의 크기를 생각한다면 사울은 다윗과의 싸움에서 시간이 더해 갈수록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었고, 다윗은 점점 더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로 나타났다. 힘없는 다윗은 싸움이 지속 될수록 점점 강해져 갔고, 힘을 가진 사울은 점점 약해져갔다. 우리 가운데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의 연약함은 더 이상 절망이나 좌절의 이유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싸울수록 강해지고 어떤 사람이 약해지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의 약속의 유무에서 찾을 수 있다. 사울은 강한 자였지만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떠났기 때문에 시간이 더해 갈수록 약해져갔고, 다윗은 연약한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 위에 굳게 서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더해갈수록 점점 더 강해져 갔다. 특별히 본문에서 “집”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 때 사울과 다윗을 통하여 보여주신 삶의 원리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삶의 원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집”이라는 말은 공동체 또는 집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울의 집은 사울을 따르는 집단을 의미하고 다윗의 집은 다윗을 따르는 집단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울의 집이 점점 약해져간다는 것은 사울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부터 떠난 자들은 시간이 더해갈수록 점점 더 약해져간다는 의미이고, 다윗의 집이 점정 강해져간다는 것은 다윗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사는 자들은 시간이 더해갈수록 점점 더 강해져간다는 의미다. 이와 같은 사실은 사울이 걸어간 길은 쇠하는 길이고 다윗이 걸어간 길은 흥하는 길이라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의 유무에 따라서 우리는 흥하기도하고 쇠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삶의 원리다. 실제로 사울의 집이 점점 약해져 간 것은 다윗의 강함 때문이 아니었고, 다윗의 집이 점점 강해져간 것 역시 사울의 집의 약함 때문이 아니었다.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에 일어난 일들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인한 것이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결과를 가져오도록 두 집에 대하여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말해 주고 있다. 그 역사들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에는 생육하고 번성하게 해 주셨지만 사울의 집은 쇠하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2-5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다윗의 가계(家系)가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여기에 다윗이 여러 부인을 통하여 얻은 여섯 아들의 아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삼상31:1,2절에 기록된 사울의 세 아들의 죽음과 비교된다.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은 길보아에서 블레셋과 싸울 때 한 날에 모두 죽임을 당했다. 한 나라의 왕가에서 자식들을 낳는 일은 그 왕가의 보장과 번영을 말하고 있지만 반대로 자식들의 죽음은 그 왕가가 쇠락해 자고 있음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은 일들은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로서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사는 자들을 흥하게 해 주시기 위하여 행하시는 일이고 약속을 떠난 자들의 집을 쇠하게 해 주시기 위하여 행하시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흥하게 해 주시고 사울의 집을 쇠하게 해 주시기 위하여 역사하신 것들 가운데 다른 하나는 사울의 집 군대장관 아브넬을 통하여 두 집에 끼친 영향이다. 아브넬은 사울의 군대 장관으로서 사울이 죽은 후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우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역할로 인하여 사울이 죽은 후에도 유다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지파들을 사울의 왕국에 속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권력을 사유화했다. 그에 대하여 6절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있는 동안에 아브넬이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으니라” 아브넬이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사유화 한 것은 사울의 집을 무너지게 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권력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을 때 개인과 공동체를 세워주는 은혜의 수단이 되지만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날 때 무서운 파괴력을 갖는다. 인류 역사를 살펴볼 때 개인과 공동체가 흥하고 망하게 된 대부분의 이유가 바로 권력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권력이 사유화 될 때 그것이 얼마나 파괴적인 것이 되는지 확인할 수 있다. 권력이 사유화 될 때 모든 사람은 권력을 소유한 바로 그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게 되고 그 권력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하여 독재자가 존재하는 곳에는 언제나 참혹한 학살이 자행 되고 있는 것이다. 권력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권력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공동의 선을 위하여 사용하지만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하여 무지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권력을 사유화하여 오직 자신의 탁욕을 채우는 일만을 위하여 사용한다. 그러므로 이런 권력을 파괴적인 수밖에 없다.
아브넬은 권력을 사유화 했다. 그래서 그는 권력을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일에 사용했다. 아브넬이 권력을 사유화 했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예들 가운데 하나를 든다면 그가 사울의 첩을 취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사울에게 첩이 있었으니 이름은 리스바요 아야의 딸이더라 이스보셋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첩과 통간하였느냐(3:7)” 아브넬이 사울의 첩을 취한 것은 왕권에 대한 도전이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죽은 왕의 첩을 차지하는 것은 왕위를 계승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죽은 왕은 계승자에게 특권의 일부로서 그렇게 하도록 했다(카알.델리취 주석). 그러므로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아버지의 첩을 차지한 것에 대하여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아브넬은 이스보셋의 신하로서 그의 부친의 첩을 소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왕의 군대 장관으로서 왕의 권세 아래 있어야 할 자임에도 불구하고 왕보다 더 큰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이스보셋이 그의 행악을 책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이스보셋의 태도에 대하여 분개했다. 이것이 바로 권력을 사유화 한 자에게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모습이다.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을 매우 분하게 여겨 이르되 내가 유다의 개 머리냐 내가 오늘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의 형제와 그의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내가 이루게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3:8,9)” 표준 개역에는 8절을 이렇게 번역해 놓았다. “그러자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에 몹시 화를 내면서 대답하였다. "임금께서는 내가, 유다에 빌붙어 살아가는 개로밖에 보이지 않습니까? 나는 오늘날까지 임금님의 아버지 사울 집안과 그의 형제들과 친구들에게 충성을 다하였고, 임금님을 다윗의 손에 넘겨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임금님께서 오늘 이 여자의 그릇된 행실을 두고, 나에게 누명을 씌우시려는 것입니까?” 아브넬의 말은 사울의 집이 지금의 상태로 유지 되고 있는 것은 모두 자신이 베푼 은혜로 인한 것임을 말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허물을 말하는 사울의 집에 더 이상 은혜를 베풀지 않겠다는 위협이었다. 그는 자신이 원한다면 사울의 집이 소유하고 있는 왕권을 다윗에게 돌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하며 이스보셋을 위협하였다. 이것은 사울의 나라를 다윗에게 돌려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겠다는 의미다. 그는 실제로 이와 같은 일을 실행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악행을 심판하셨다. 그래서 그는 사울의 집을 다윗에게 넘겼지만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아브넬의 악행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다윗에게 넘겨 주도록 하는 일에 사용하셨지만 그의 악행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원한 관계에 있던 요압의 손에 의하여 심판하셨다. 이로 인하여 사울의 집은 무너졌고 다윗의 집은 더욱 견고해 진 것이다.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은 본문의 내용을 통하여 믿음의 사람들이 흥하고 쇠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의 유무에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다. 여기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도록 하는 삶을 말한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주의 말씀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가지고 살게 해 주시고 그 말씀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이렇게 사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복을 허락해 주심으로 비록 싸움을 피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살지라도 점점 강성해 가는 복을 보리게 해 주옵소서. 아멘!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3가지
삼하 3장 6~11절 / 이한규목사
< 의로운 외로움을 선택하라 >
며칠 전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 갔는데 그때 법 얘기가 오갔다. 다단계나 주식 사기나 코인 사기나 마약 범죄처럼 거액의 돈과 관련된 범죄에서 범죄자로 기소되어 재판이 벌어지면 그 범죄자는 번 돈을 거의 잃고 피해자도 상당액을 잃는데 그 와중에 엄청난 돈을 법조인들이 수금하듯이 쓸어간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의롭고 신실한 법조인들도 많다. 또한 법 왜곡 현실이 있다고 해서 법조인을 증오하면서 “나는 절대로 법조인이 안 돼.”라고 하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살면서 그런 부조리를 느끼면 오히려 바른 개혁 정신을 가지고 그 세계로 들어가려고 하라. 청년들에게는 그런 도전정신이 더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처럼 신실하고 정의로운 법조인이 될 거야.”라고 다짐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의로운 법조인이 되려는 사람도 있어야 세상은 변하고 억울한 사람을 줄일 수 있고 하나님의 뜻과 의를 이 땅에 이루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면서 헤롯 당원들과도 공모했다. 싫은 정치인을 파멸시키고 싶다고 교회가 이단과 동조한 꼴이다. 아무리 정치적인 뜻을 이루고 싶다고 해도 이단 교주나 불의한 세력과 연합해 뜻을 이루려고 하지 말라. 정치적인 뜻과 소원 성취가 조금 늦어지더라도 불의한 세력과 손잡지 말고 차라리 의로운 외로움을 선택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기억해 주신다. 역전 인생을 꾀할 때도 남의 자리를 불의하게 빼앗지 말고 그렇게 빼앗는 사람은 최대한 멀리하라.
리더는 팔로워를 왕따로 만들면서 리더십을 행사해도 안 되고 반대로 팔로워를 섬겨준다면서 스스로 리더십을 잃고 왕따가 되어도 안 된다. 섬김과 희생과 지혜와 믿음으로 팔로워를 권위 있게 이끄는 리더가 되라. 어떤 직분을 맡으면 천성적으로 착하고 유순해도 굳건한 리더십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라. 리더가 리더십을 잃고 팔로워가 리더 자리를 위협하며 질서를 흔들면 공동체도 망하지만 리더 자신도 망하고 결국 팔로워도 망한다.
<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 >
사울이 죽은 후 유다 족속의 왕이 된 다윗 군사들과 군대장관 아브넬에 의해 왕으로 옹립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 군사들 사이에 전쟁이 계속되면서 아브넬의 권세는 점차 막강해졌다(6절). 그즈음에 아브넬이 사울 왕의 애첩 리스바와 동침했다. 그 사실에 대해 이스보셋이 질책하자 아브넬은 오히려 분노하며 말했다. “내가 유다의 개 머리냐 내가 오늘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의 형제와 그의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8절).”
‘개 머리’란 말은 ‘개 대가리’라는 말로 요즘 표현으로 하면 ‘닭대가리’라는 말이다. 즉 “내가 유다의 개 머리냐?”라는 말은 “내가 유다 지파에 속한 닭대가리인 줄 아느냐?”라는 말로서 “나를 우습게 아느냐?”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아브넬은 나라의 왕위를 다윗에게 넘기겠다는 식으로 위협했다. 그 말을 듣고 이스보셋은 두려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본문이 주는 교훈으로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3가지가 무엇인가?
1. 교만한 권세 남용
고대에 죽은 왕의 아내나 첩을 취하는 것은 “내가 이제 왕의 위치에 올라섰다.”라는 것을 과시하는 수단이었다. 그런데 아브넬은 교만하게 권세를 남용해 죽은 사울 왕의 첩 리스바와 통간했다. 이스보셋이 그 잘못을 지적하자 아브넬은 오히려 분노하며 이스보셋에게 “은혜도 모르느냐?”라고 윽박지르며 왕까지 우습게 알았다. 하나님은 이스보셋의 어리석고 유약한 모습보다 아브넬의 교만한 모습을 더 싫어하신다. 교만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뒤따르지만 겸손하면 하나님이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 함께하신다.
권세란 권력과 세력을 뜻한다. 권력이란 남을 지배하거나 복종시키는 공인된 권리와 힘을 뜻하고 세력이란 자리나 위치나 흐름이 주는 힘을 뜻한다. 어떤 자리에 오르거나 리더로 선출되면 자연스럽게 권세가 생긴다. 그때 권리 의식만 가지면 안 되고 좋은 리더가 되려면 책임 의식까지 가지고 더 나아가 섬김 의식까지 가지라. 반대로 섬김 의식을 가진다고 하면서 리더의 권리나 책임을 등한시하지는 말라.
작은 공동체의 어떤 리더는 너무 착해서 회원들이 하자는 대로 무조건 따른다. 그러면 자연히 적극적이고 주도적이고 요구나 주장이 많은 사람에 의해 공동체가 휘둘린다. 그러면 공동체의 배가 산으로 가게 되고 내성적이고 소극적이고 종속적인 성향의 사람의 요구는 늘 묻히게 된다. 그러므로 작은 공동체의 착한 리더도 리더로서의 책임의식과 리더십을 가지고 권위 있게 공동체를 이끌어야 한다.
권위란 남을 리드할 때 자발적으로 따르게 하는 힘이다. 작은 선교회의 리더라고 임기응변식으로나 주먹구구식으로 공동체를 이끌면 권위가 생기지 않는다. 결국 공동체의 배가 산으로 가는 핵심 이유는 말과 요구가 많은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팔로워 때문이 아니고 섬김 의식에 대한 리더의 오해나 무책임 때문인 경우가 많다. 리더는 섬기는 것을 끌려 다니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고 잘 섬기면서도 잘 이끄는 권위가 있어야 한다.
2. 거짓된 하나님 사칭
아브넬은 이스보셋을 위협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내세웠다(9-10절). 그리고 곧 다윗에게 왕권을 넘기려고 사자를 보냈다. 결국 다윗에게 왕권이 넘어가도록 아브넬도 일정한 역할을 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뤘기에 아브넬이 천벌을 받지 말아야 하는데 오히려 다윗에게 왕권을 넘긴 후 요압에게 곧 죽었다. 왜 그런가? 신앙도 없으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며 이스보셋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그 장면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는 것을 매우 싫어하심을 알 수 있다.
요새 보이스 피싱 사기가 극심하다. 보이스 피싱이란 공공기관이나 특정인을 사칭해 두려움과 불안함을 심고 돈을 빼앗는 것이다. 그런 사칭보다 더 나쁜 사칭은 하나님의 이름 사칭이다. “예수 이름으로”라는 복된 구호를 믿음도 없이 주문처럼 습관적으로 언급하면 저주스러운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 참된 능력이 나타나게 하려면 하나님의 이름이 나로 인해 훼손되지 않게 하면서 그 이름을 믿음으로 부르거나 앞세우라.
구약시대에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앞세우면서 대중의 마음을 움직였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위선과 탐욕과 불의를 질책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반면에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면서도 이상한 무속적인 태도로 앞날을 맞춘다는 것은 거짓 예언자이고 하나님을 사칭하는 것이다. 그런 사칭에 넘어가 이단 교주나 거짓 예언자에게 땀과 물질을 바치는 것은 보이스 피싱 사기에 당하는 것 이상으로 불행한 일이다.
거짓 능력자나 교주도 하나님을 내세워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성공하고 기적이 이뤄집니다.”라고 설교한다. 그러면서 정의와 사랑으로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사칭으로서 진짜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와 함께한다는 말을 통해 권세를 행사하고 영혼과 물질을 빼앗으려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이름 사칭에 넘어가지 않도록 무속적이고 기복적인 믿음을 멀리하고 기적 약속 남발에 속지 말라.
3. 약삭빠른 철새 행동
아브넬의 모습은 기회주의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는 전세가 점차 불리해지고 다윗이 점차 민심을 얻어가자 다윗에게 붙어 나라를 바치겠다고 했다. 물론 발단은 사울의 첩 문제로 이스보셋에게 분노한 것 때문이지만 그것은 일종의 핑계였고 그는 이미 이스보셋을 배반할 구실을 찾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시류에 따라 강자에 붙으려고 하면서 양지만 찾아다니는 기회주의자나 철새를 결코 축복하시지 않는다. 거짓된 편인 줄 알면서도 힘 있는 사람 편에 서는 것을 비겁함이나 약삭빠름이 아닌 일종의 생존 전략이라고 합리화하면 세상은 좋게 변할 수 없다.
최근에 한 셀럽 기자가 유튜브 기반 언론사 대표를 불의하게 몰아내고 스스로 대표가 되었다. 그런 불의를 눈감고 같은 진영의 다수가 그 셀럽 기자 편에 섰다. 그 셀럽 기자가 반대 진영 정치인을 자극적인 기사와 취재 방식으로 공격해 자신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불의한 유튜버가 자극적인 방법으로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줄 때 그런 시원함은 사양하라. 그런 시원함에 취하면 자신의 내면과 자기 편 진영은 더렵혀지고 유일한 승리자는 구독자수와 슈퍼챗과 인기를 챙겨 가는 그 유튜버뿐이다.
이단 교주가 비상식적인 언행으로 내게 찬란한 미래를 약속하면 그런 약속은 거부하라. 그런 약속에 넘어가면 나는 약속어음만 받고 정작 쏠쏠한 현찰은 이단 교주가 다 챙겨 감을 잊지 말라. 내게 좋다면 “좋은 게 좋은 거지.”라고 하면서 불의를 용납하는 태도가 겉으로는 좋은 것 같아도 전체적인 결과는 더 시원찮게 되어 오히려 내가 원하는 결과와 반대로 나타난다. 더 나아가 불의한 편에 서면 하나님의 심판 때 자신도 같이 심판 당한다.
힘들고 어려워도 힘의 편이 아닌 의의 편에 서라. 우직하다는 말에서 우 자는 어리석을 우(愚) 자이고 직 자는 곧을 직(直) 자다. 어리석게 보여도 곧은길로 가는 것이 우직함이다. 하나님은 우직함을 충직함만큼 기뻐하신다. 약삭빠르게 살면 오히려 빠르게 망한다. 늘 힘 있는 편보다 의로운 편에 서서 일시적으로는 손해 보는 것 같아도 점차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를 받아 권위 있게 되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좋아지는 복된 인생이 되라.
민족이 잘 되려면
삼하 3장 6~11절 / 김중석목사
For going well with Korean. 오늘은 3.1독립만세운동의 90주년 되는 날이다. ‘기미년 3월1일 정오 터지자 민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아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여 이날을 길이 빛내자’. 이때 발표된 [독립선언서]는 대한민국 헌법 서문에도 나오고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1919년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중 16인이 기독교 인사였고, 운동 준비과정의 중심인물 48인중 24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주도한 것이다.그것을 알 수 있는 자료로 일본관헌이 3.1운동 관련 기소자 종교별 통계가 있다. 1919.3.1-5.8 총 6417명이 기소 당했는데 불교72 유교1 천도교1156 기독교1561이었다. 나머지는 무교(2659) 또는 종교불명(958)이었다. 당시 기독교인은 얼마나 되었을까? 22만명으로 전체 인구중 1.3%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런 민족적인 일을 주도할 수 있었을까? 당시 유일한 조직체였다는 점과, 목회자등 신앙인에 대한 신뢰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백성의 신뢰감은 어디서 왔을까? 한국교회는 그 시작인 구한말부터 애국적 민족적 성향을 띄어왔다. 주변 열강으로부터 침탈을 당하여 국권이 흔들리고 있었고 성경이 구약 출애굽기를 비롯하여 사도바울도 로마서 9장에서 뜨거운 민족애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1905년 을사보호늑약이 체결되고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한국교회에 대한 일제로부터의 탄압은 극심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10.12.27터진 105인 사건이다. 데라우찌 총독이 신의주로 가는 기차에서 암살미수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으로 600여명이 검거 투옥되는데 남강 이승훈 양전백(최초7인목사) 김동원 이명룡 선우혁(한인최초박사 평양신학교 최초 한인교수) 윤치호(애국가 지음) 안태국 유동열 등, 기독교인사 신민회 인사가 망라되었다. 이는 일제가 서북지역의 반일기독교세력을 꺾고, 기독교와 연결된 신민회의 조직력을 해체하기 위해 대규모로 날조한 사건이다. 1915년에 일제는 ‘포교규칙’을 발표해 교회설립을 통제했고 ‘개정사립학교 규칙’을 발표해 당시 교회가 세워 이 민족의 교육을 담당하던 기독교학교에서 예배와 종교교육을 막았다. 그러다가 3.1운동 이후에는 기독교사립학교가 민족교육 반일교육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829개에 달했던 기독교사립학교의 절반 이상을 폐쇄시켜 버렸다. 이렇게 한국교회는 말씀과 기도 가운데 세계정세를 정확히 알고 바른 시대정신을 가졌고 더 나아가 백성의 고난을 직접 짊어지고 선도해 나갔기에 백성이 신뢰를 줄 수 밖에 없었다.
90년이 지난 오늘.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선진들 앞에 부끄러운 면이 많다. 오늘도 이 민족은 고통이 많다. 90년 전 못지않게. 땅은 분단되고 민족은 분열하고, 북한은 더 못하게 되어있고, 남한도 안보 경제 극한대립으로 앞길이 막막하다. 이 민족의 간난과 고초는 끝나려나? 좀 편안히 오손도손 살아보나? 하나님은 이 민족을 사랑하신다. 북한땅도 사랑하신다. 이 민족이 잘 되기를 바라신다. [이 민족이 잘 되려면]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세 가지로 말씀하시는 것 같다.
1. 대한민국을 잘 운영하라.
롬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사도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이 말씀을 기록할 때에 상황은 어떠했는가? 국가권력을 비롯하여 온갖 권세들이 교회를 핍박하는데 극히 핍박하여 예수를 믿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바울은 국가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을까? 기본적으로 국가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질서를 잡고 악을 구축하고 선을 조장하기 위하여 세우신 하나님의 기관으로 파악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했다. 따라서 국가권력을 그 세우신 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행사해야 한다. 교회도 이와 같으나 다른 점은 칼, 곧 공권력을 가지고 강제력을 발동하여 실행한다는 점이다. :4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따라서 국가권세가 완전하지 못하다 하여 ‘무정부주의자’가 되면 안 된다는 말씀이다. 이는 교회가 완전하지 못하다 하여 ‘무교회주의자’가 되면 안 되는 이치와 같다. 국가권력의 정당한 행사에는 복종해야 한다. 국가권력의 정당한 행사에 거스르면 그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다. :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죄요 나중에 최후의 심판에서도 벌을 받게 되리라는 말씀이다. 당시 유대인들이 로마정권에 끊임없이 저항했던 것과 다르다. 또 예수 믿는 자를 심히 핍박하는 정권을 놓고도 이런 말씀을 한 것은 매우 놀라운 진리의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이 말씀을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면 이렇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한민족이 잘 되려면 먼저 대한민국을 잘 운영하라. 한민족이 잘 되려면 먼저 대한민국을 인정하라.대한민국은 가까스로 일본의 압제를 벗어나서, 또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을 막아내고 하나님의 은혜로 힘들게 세워진 축복된 나라이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제헌국회를 시작한 나라이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무리들이 한국 내에 있다. 개인 단체 정당 국회에도 있다. 모순이다// 국가는 헌법 위에 세워지니 이 말은 대한민국 헌법을 인정하라는 말이 된다. 헌법을 우습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안 된다. 국가는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데 질서는 법에 따라 다스릴 때 나오고 법은 헌법에 근거한다. 헌법을 무시하는 자는 국가를 무시하는 자요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요 한민족이 잘 되는 것을 방해하는 자이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후 지금까지 여러 번 정권이 바뀌었다. 정권에 대하여는 찬성과 반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법에 따라서 표현돼야 한다. 투표이다. 그 정권이 맘에 안 들면 다음 선거에서 투표로 바꾸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것이고 정당한 것이다. 다수의 찬성으로 정권이 들어섰는데 이에 반대하는 소수가 극한투쟁으로 국정을 마비시킨다면? 그것은 불의한 것이다. 법에 따라 의사표시를 하고 다수결로 결정을 짓고, 그 다음 선거에서 심판을 받아야 한다. 이 간단하고 상식적인 것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국가를 잘못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가!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대한민국을 잘 운영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리하면 한민족이 잘 되게 하시겠다고 하신다.
2. 통일을 잘 준비하라.
삼하3:6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있는 동안에 아브넬이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으니라. 주전 천년 경에 이스라엘은 남쪽에 유다나라 곧 다윗이 다스리는 나라가 있었고, 북쪽에는 이스라엘나라 곧 사울의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가 있었다. 남북은 하나의 민족이었지만 둘로 나뉘어 있었고 둘 사이에는 계속 다툼이 있었다. 점차 북쪽이 약하여져 갔다. 남쪽은 강해져 갔다. 북쪽에서는 아브넬이 대표하는 군부가 득세하게 되었다. 국가의 정통성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택하심으로 남쪽 다윗에 있다(9,10). 그리고 어떻게 남북이 하나로 통일되어 갔는가? 하는 것이 기록되고 있다// 오늘날 한반도에서 아주 유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 성경이 많이 참고가 된다. 북쪽은 지금 3대에 걸친 세습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자꾸 약해지고 있다. 이를 감추려고 무력시위를 하기도 한다. 정통성은 어느 쪽에 있나? 남쪽 대한민국에 있다. 왜냐하면 북한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통치자가 하나님이 되어있기 때문에 정통성이 없다. 올해가 서기2009년이 아니라 주체98년이라고 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국가는 백성을 사랑하고 먹이고 보호하라는 것인데 백성을 3백만이나 굶어 죽이고 조금만 불평해도 정치범수용소에 가두어버리니 정통성이 없다. 대한민국은 신앙의 자유가 있고 백성을 잘살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으니 정통성이 있다. 남북은 통일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에게 의롭고 선하다.통일은 언제 어떻게 될까?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신다. 착착 진행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몫이 있고 인간의 몫이 있다. 다윗은 통일을 인위적으로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두르지 않았다. 통일을 떠벌리지도 않았다. 그냥 조용히 자기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남북관계에서 원칙이 있었고 그 원칙을 지켰다. 사울과 요나단이 블레셋과 전투에서 전사하자 사울을 피하여 여전히 타국에서 망명상태에 있던 다윗은 이를 듣고 옷을 잡아 찢고 슬퍼울며 저녁까지 금식하였고 슬픈 노래까지 지어 불렀다. 그리고 사울의 목과 왕관과 팔고리를 다윗에게 가져와서 상을 받기를 기대한 아말렉인을 목을 쳐 죽임으로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인 죄’를 갚아 하나님의 법을 세웠다. 개인감정보다는 민족애와 하나님의 법을 나타낸 것이다. 통일협상을 하러 왔던 아브넬이 요압에 의해 피살되는 난처한 일이 발생하자 아브넬의 장례를 성대히 치르며 왕이 친히 소리 높여 울고 애가를 지어 부르고 금식하니 이로서 백성들이 다윗에 대한 오해를 풀게 되었고 통일과정은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북쪽에서는 왕의 신하가 왕을 시해하고 그 머리를 가지고 다윗에게 오는 일이 벌어졌다. 다윗의 원칙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 일을 기뻐하기는커녕 시해자를 처형하고 북쪽 왕의 머리를 장사 지내 주었다. 도덕적 사회적 의와 하나님의 법을 세운 것이다. 또 북쪽 백성들의 마음을 얻은 것이다. 다윗이 남쪽 왕이 된 후 처음으로 한 일이 사울과 요나단의 머리를 가져다가 장사 지내준 길르앗야베스 사람들을 선무한 것이다. ‘당신들이 잘 했다 그러니 내가 상이라도 줄 것이다 내가 유다의 왕이 되었다’ 하니까 그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할까? 한민족이 잘 되려면? 통일준비를 잘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성경에 다 있다.
3. 세계선교민족이 되라.
이사야49:4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여러분은 왜 한민족이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있다고 생각하는가? 왜 북한은 저리도 처참하게 64년 동안 당하게 내버려 두시는가? 무슨 죄가 많아서인가? 아니다. 무슨 뜻이 있어서인가? 그렇다. 무슨 뜻인가? 한민족이 당하는 이 고통은 ‘헛되이 수고’하는 것이 아니다. ‘무익하게 공연히’ 당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한민족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참으로 한민족에 대한 보응이 한민족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아멘! 그러면 그 판단이 무엇인가? 그 보응은 무엇일까? 세계선교민족이 되게 하시려고. 이사야49:1 섬들아 내게 들으라 먼 곳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 한민족의 유다른 고통은 우리의 유다른 죄 때문이 아닌 것처럼 또한 한민족이 세계선교민족이 되는 것도 우리의 유다른 잘남 때문이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이 그렇게 계획하시고 한민족을 택하셨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다. 증거도 있다. 지금 미국교회가 한국교회에 하는 말이, 아니 세계교회가 하는 말이, ‘세계선교의 횃불이 미국에서 한국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말한다. 아직까지는 미국이 세계선교의 중심이다.그래서 미국이 엄청 복을 받았고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들이 하는 말이 그렇게 증언하고 있다. 한민족이 세계선교민족이 될 것을 믿어야 한다. 한민족에게는 선교에 대한 유다른 열정이 있다. 건전한 신학이 있다. 이미 지난 백 년 동안 시험을 쳐서 합격한 바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개 나라가 식민지에서 독립을 했고 저마다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추진했지만 유일하게 한국만 성공했다. 그 비결은 한국만 신앙이 폭발적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택하셨기 때문이다. 왜? 세계선교민족으로 쓰시려고! 한민족이 잘 되려면? 세계선교민족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사랑교회는 3.1절을 맞이하여 제암리교회를 여러 번 갔었다. 독립기념관에도 갔다. 아우내 (병천 竝川) 장터에도 갔었다. 오늘은 교회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것으로 대신할 것이다. 만세3창도 부르자. ‘대한(조선)독립만세’대신에 세가지를 외칠 것이다. 90년 전 선진들에게 부끄러운 한민족이었으나 이제는 벗어나 보자. 방법이 여기 있다. 오늘 일러주신 대로 세가지를 잘하여 한민족이 잘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하며 축복한다.(아멘)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삼하 3:1-11 / 장석환목사
오늘 본문은 다윗이 느리지만 당당하게 길을 걸어가는 이야기입니다.
1. 다윗의 강해짐
이스라엘에 일시적으로 생긴 두 왕국 체제가 2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삼하 3:1)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고 말합니다. 겉으로는 사울의 집이 10지파이기 때문에 더 유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집이 더 강해졌습니다.
성경은 다윗이 아들들을 낳은 것을 말합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아들들을 낳았으되 맏아들은 암논이라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이요” (삼하 3:2) 오늘날 시각으로 보면 좋지 않아 보일 수 있지만 이 당시에는 이것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있는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둘째는 길르압이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의 소생이요 셋째는 압살롬이라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요” (삼하 3:3) '압살롬이라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요'라고 말합니다. '그술'은 갈릴리 호수의 동편에 있는 작은 나라로 이 당시 북이스라엘의 수도 마하나임의 북쪽에 위치한 나라입니다. 그술 왕이 자신의 딸을 다윗에게 주었다는 것은 그가 다윗을 인정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맹을 맺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윗은 그렇게 힘이 더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을 압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힘이 강해졌으나 대대적으로 북이스라엘을 정복하지 않았습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그는 왜 이렇게 기다리기만 하고 있을까요? 분명 그는 북이스라엘이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싸움을 피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내가 이루게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삼하 3:9) 아브넬이 이스보셋에게 하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다윗을 왕으로 기름부으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넬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여 주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브넬만이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윗은 가슴에 새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무기로 하여 더욱 세차게 밀어부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느리게 움직였습니다. 약속이 있으니 약속을 믿으며 기다렸습니다. 사울이 그를 쫓을 때도 그랬습니다. 지금은 그가 강자입니다. 힘으로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 약속을 이루어 가는데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가길 원하여 조심스럽게 천천히 가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가장 크고 중요한 약속으로 영원한 천국에 대한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약속이 없는 사람처럼 불안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약속을 가진 사람으로 평안하며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가야 합니다.
2. 이스보셋의 약해짐
이스보셋은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을 입었지만 그 자리가 불안하였습니다.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있는 동안에 아브넬이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으니라” (삼하 3:6) '아브넬이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으니라'고 말합니다. 아브넬이 가지고 있는 군사력으로 힘이 더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울에게 첩이 있었으니 이름은 리스바요 아야의 딸이더라 이스보셋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첩과 통간하였느냐 하니” (삼하 3:7) '이스보셋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첩과 통간하였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이스보셋의 질문에 아브넬이 대답하였습니다.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을 매우 분하게 여겨 이르되 내가 유다의 개 머리냐 내가 오늘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의 형제와 그의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 (삼하 3:8)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을 매우 분하게 여겨 내가 유다의 개 머리냐'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브넬은 대답 대신 분노로 대응하였습니다.
만약 아브넬이 실제로 사울의 첩과 통간을 하였다면 그것은 반역에 해당합니다. 그 당시의 문화에서는 왕의 첩과 통간을 한 것은 단순히 여성과 통간을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왕권에 대한 도전이요 선언입니다. 실제로 아브넬이 사울의 첩과 통간을 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이스보셋이 그렇게 주장하였고 아브넬은 분노한 것만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는 둘 다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이스보셋은 하나님의 약속이 다윗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아브넬이 군사력으로 더 세력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불안하였을 것입니다. 불안함은 오해를 낳을 때가 있습니다. 약속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불안은 극도로 커졌을 것입니다. 언제 아브넬이 자신을 죽일지 모르고 언제 다윗이 자신을 공격해 올지 몰랐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내가 이루게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삼하 3:9) 아브넬은 자신이 오해를 받은 김에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내가 이루게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헤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고 선언함으로 다윗에게 북이스라엘을 통채로 바치겠다고 말합니다. 대 놓고 반역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보셋은 아브넬의 말에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스보셋은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불안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넬의 반역의 말에도 대꾸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 신앙인이 하나님의 약속의 자리가 아닌 곳에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불안하고 벌벌 떱니다. 지금 있는 자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자리인지 잘 살펴야 합니다. 약속의 자리가 아니면 떠나야 합니다.
다윗과 이스보셋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자리에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자리에 있으면 평안하고 당당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실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있는 자리가 약속의 자리이며 약속의 자리를 향하여 가고 있다면 평안하십시오. 만약 약속의 자리가 아니면 빨리 약속의 자리로 오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오늘을 당당하고 평안하게 사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흥해가는 집과 약해가는 집
삼하3장 1-11 / 김창규 원로목사
나라나 가정을 보면 흥해가는 나라와 집이 있는가 하면, 약해가는 나라와 약해가는 집이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업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세계 역사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도 다윗의 집은 흥해가고 사울의 집은 약하여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무엘하 2:1-11절에서 다윗이 유다 지파의 왕으로 즉위하자 그에 대립하여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의 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그리고 2:12-32절에 보면 그 두 세력 간에 전투가 벌어졌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5절에 다윗이 헤브론에 거주하는 동안 6명의 아들을 낳았고, 사울 가는 이스보셋과 아브넬 사이에 내분이 발생한 것을 6-11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1절에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고 하였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관계는 한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장인과 사위의 관계입니다. 왜 사울의 집은 망해가고 다윗의 집은 흥해가고 있습니까?
초대 왕 사울은 기골이 장대하고 외모가 뛰어나며 준수하여 이스라엘 왕으로 옹립할 당시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대대로 왕권을 이어서 든든한 가문을 세울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집은 1대도 못 넘기고 망하여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흥해가는 다윗의 집은 어떻습니까? 외모로 볼 때 비천하고 초라한 목동, 그의 아버지도 왕 감으로, 지도자 감으로 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다윗의 가정은 점점 강해지고 흥왕해 갔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어떤 일 때문에 다윗의 집은 점점 흥왕해 갔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해져 갔는가 말입니다.
1. 다윗은 항상 하나님만 의지했고, 사울은 잡신을 의지했습니다.
사무엘하 22:2-7절에 보면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2.이르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3.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 4.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받으리로다 5.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6.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7.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스올 이것은 지옥과 같은 동의어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서 엄청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 의지했습니다. 그러기에 시편 23편에서 다윗의 신앙고백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23: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4절에서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다윗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이 바짝 붙었습니다.
반면에 사울은 잡신을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의지했습니다. 사무엘상 28장을 보면 사무엘 선지가 죽고 난 뒤 사울은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신하들에게 자기를 위해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고 명령합니다. 그 신하들이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다고 하니 사울이 변장을 하고 그 여인에게 찾아갑니다. 그러므로 사울의 집은 망해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20:3절에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하셨고, 5-6절에서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의 집은 흥하고 사울의 집은 망해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윗은 어려워도, 고통이 있어도, 힘들어도, 심지어는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가는 환난이 있어도 하나님만 믿고 의지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에게는 늘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셨습니다. 반면 사울은 힘들 때, 두려움이 있을 때 사탄이 함께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사무엘하5:10) 이 말씀을 믿습니까? 믿으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 자손대대로 여러분의 가문이 잘 되기를 바라십니까? 여러분의 집이 점점 흥해지기를 원하십니까? 그 방법을 다른데서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간 낭비요 헛수고입니다. 성공하고 흥하고 왕성하고 강해지고 자손이 잘 되는 비결은 하나님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집안에, 자신에게 혹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잡신이 있다면 다 버리세요. 점쟁이한테 가지 마세요. 오직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가정, 그러한 자녀, 그러한 삶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릴 일꾼, 지도자들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나라가 강하여지고 흥왕해가고 부해질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릴 때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 맑은 나라, 맑은 사회, 맑은 경제가 이루어지는 정신혁명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전쟁에서도 이깁니다. 어린 다윗이 블레셋 장군 골리앗과 싸울 때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 싸워 이겼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는 모든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세상에서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사무엘하 7:9절에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요셉도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마침내 총리가 되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2. 다윗은 순종의 사람이었고, 사울은 불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전쟁터에 가 있는 형들의 상황을 보고 오라고 했을 때 두말없이 순종했습니다. 그라고 왜 겁이 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고 전쟁터로 갔습니다.
그뿐 아니라 다윗은 하나님이 가라 하면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했습니다. 순종은 축복의 길입니다. 순종은 복 받는 통로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불순종의 사람이었고 변명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를 통해서 사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사무엘상15:3)
사울이 이 말씀을 듣고 아말렉과 싸웠습니다. 이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사무엘하 15:8-9)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고 자기 생각, 자기 계획대로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때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시고, 결국 하나님은 사울을 떠나셨습니다. 하나님이 떠나시면 끝입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업이나 나라도 하나님이 떠나시면 끝입니다. 하나님이 끝 하시면 끝입니다.
이 때 사무엘 선지가 사울에게 와서 왜 이렇게 했느냐고 물으니까 사울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사무엘상15:15)
여러분, 지금 사울은 백성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고, 거짓말을 하고 있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사무엘상15:22). 이 말씀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3. 다윗의 집과 달리 사울의 집은 분열이 있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다산은 곧 번영의 척도가 되었습니다. 야곱도 열두 아들에 딸이 있었고, 욥도 아들 일곱과 딸 셋이 있었다고 욥기 1:2절에 말씀했습니다. 다윗도 헤브론에서 사는 동안 아들을 6명이나 낳았다는 것은 다윗 왕가가 매우 번성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사울의 집은 이스보셋과 아브넬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음을 오늘 본문 6-11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내분은 결국 사울 가의 몰락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분열은 약해져 가고 망해가는 길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4. 다윗은 회개의 사람이었고, 사울은 회개가 없었습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의 책망을 듣고 바로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았을 때 곧바로 회개하였습니다. 중심으로 회개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회개하는 것을 보시고 다윗을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사무엘 선지의 말을 듣고 회개하는 척만 했을 뿐,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회개하면 용서하시고 다시 새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회개하면 살고 복을 받으나 회개하지 않으면 망합니다. 사무엘하 24:17절에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 이 얼마나 간절한 회개입니까? 그러니 복을 받습니다.
5. 다윗은 기도하는 사람이었으나, 사울은 기도가 없었습니다.
다윗은 모든 일에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응답을 받았습니다. 사무엘하 22:4절에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받으리로다” 하였고, 7절에서는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항상 기도하였습니다. 다윗의 시편은 기도의 소리입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고 지켜주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러나 사울은 기도하지를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판가름이 나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6. 다윗은 감사가 있었고 예배의 성공자였으나, 사울은 감사가 없었고 예배도 자기 멋대로 드렸습니다.
다윗의 집이 흥하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가 있었고 성전을 늘 사모하는 아름다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성공은 바로 복 받을 통로입니다.
예배를 드리면 감사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무엘하 22:50절에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모든 민족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를 흥하게 하시고, 감사하는 자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사울에게는 예배가 없으니 자연히 감사도 없고 주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이 없습니다. 잡신에게 자기를 의지하고 물어보는 판에 무슨 감사와 찬양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흥함과 쇠함의 갈림길이 있는 것입니다.
왜 다윗의 집은 흥하고 사울의 집은 망해 갑니까?
7. 다윗은 마음이 넓었고, 사울은 마음이 좁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목동이었지만 그의 마음은 바다보다 넓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왕이었지만 그의 마음은 아주 좁고 작았습니다.
여러분, 넓은 마음은 곧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사울이 얼마나 다윗을 죽이려고 애를 썼습니까? 자기 사위이고 자기가 위태할 때 보호해 주었고 용서하고 정말로 사랑했습니다. 그런데도 사울은 끊임없이 다윗을 죽이려고만 합니다. 반대로 다윗은 그렇게 자기를 죽이려는 원수까지도 사랑합니다. 굴속에서 얼마든지 죽일 기회가 있었으나 오히려 보호해 주었습니다. 다윗이 왕위에 있을 때 원수 집안인 사울의 손자를 돌보았습니다.
우리나라 손양원 목사님도 넓은 마음이 있기에 자기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하고 오히려 양 아들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넓은 마음이 없이는 안 되는 일입니다. 특히 우리 성도들 간에는 한 번 틀어지면 좀처럼 풀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넓은 마음, 인자한 마음,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마음이 있기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죽게 하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 성탄의 달에 우리 모두 넓은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며 용서하고 어지러운 이 땅에 평화의 도구가 되십시다.
넓은 마음을 가지면 마음에 평안이 있습니다. 그러나 좁은 마음에는 시기와 질투가 찾아옵니다. 잠언 14:30절에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분노와 시기를 멀리하고 마음의 화평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책을 읽다가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옛날 아라비아 사막에 한 성자가 은둔생활을 했습니다. 이 성자는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며 믿음생활을 굳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간교한 사탄이 와서 이 성자에게 말합니다. “당신 동생에 관한 소식을 들었습니까? 당신 동생이 알렉산드리아에서 감독이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시기와 질투심이 밀려오더니 심한 분노와 함께 충격을 받아 그만 자살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는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넓은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세례 요한은 질투가 아니라 남을 높이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30절에서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고 외쳤습니다. 다윗도 사울 왕에 대해서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이 성탄의 달에 이렇게 넓은 마음으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시기 바랍니다. 잠언 16:18절에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했습니다. 거만하고 교만하면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겸손하면 항상 평안이 임합니다. 겸손하고 온유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강해지고 흥해갑니다. 하지만 교만하면 쇠하고 망해 갑니다.
교만한 사울은 하나님께서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셨지만, 겸손한 다윗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왕으로 세워서 유능한 임금으로 쓰임 받게 해 주셨고 흥하게 해 주셨습니다.
넓은 마음을 가진 다윗은 용서의 사람이었고 사울은 복수의 사람이었습니다. 넓은 마음, 용서의 마음은 사람의 힘으로 안 됩니다. 성령의 힘으로만 될 수 있습니다. 사울의 집과 같이 쇠하는 집이 아니라, 다윗과 같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날마다 왕성하고 흥해가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집, 자손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회개의 사람이 되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와 예배의 성공자가 되어야 합니다. 넓은 마음을 가지고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흥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인간의 계략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뜻
삼하 3장 1~21절 / 콜럼보스한인교회
[들어가는 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처칠 수상과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신뢰 관계를 보여주는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릴 때도 책에서 그런 내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루즈벨트와의 신뢰 관계를 세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처칠은, 당시 루즈벨트의 마음을 잡기가 여자의 마음을 잡기보다 더 어려웠다고 나중에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은 전쟁 중에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아주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도 나누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한번은 처칠이 목욕하고 있는 중에 모르고 들어가게 된 루즈벨트가 벌거벗은 처칠의 모습을 보고 당황하여 나가려고 하자 처칠은 도리어 팔을 활짝 벌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영국 수상은 미국 대통령에게 아무것도 숨기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한 유머를 발휘한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어서 두 사람이 정말 가깝고 신뢰하는 관계가 되어서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람 사이의 신뢰 관계는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정치계는 물론이고 교회 안에서도 의견이 하나 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치계를 보면 얼마나 서로 싸웁니까? 같은 당 안에서도 파가 갈라져서 정쟁을 하거나 심한 경우 분열하기도 합니다. 이전에도 보면 같은 당에서 분당을 하고 새 정당을 세운 적이 많았습니다.
하나 되기 힘든 것이 사람은 원래 다 자기가 가장 잘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금만 의견이 다르거나 이해관계가 맞지 않으면 갈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 저를 비롯해서 우리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가 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면 금방 듣습니까? 잘 듣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의식 속에 자기가 더 잘났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틈이 생기지 않으려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고, 신뢰가 세워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라이든 교회이든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멋진 말이나 화려한 구호가 아니라, 많은 희생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고 이스보셋은 사울의 아들로서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의 이스라엘 안에서 두 왕으로 갈라져 싸우니까 이스라엘은 제대로 설 수가 없었습니다. 나라가 둘로 나뉘어 있으니 얼마나 불안정했겠습니까? 같은 나라의 지도자들이 서로 갈라져 싸우면 그 나라는 바로 설 수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분쟁이 있으면 영혼 구원의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싸우는 교회에 누가 나와서 은혜받고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되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그런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지만, 대기의 경우 교회가 싸우면 ‘나는 잘 모르지만 분명히 예수가 사랑하라고 한 게 가장 큰 가르침인 것 같은데 사랑하라고 하는 사람들끼리 왜 싸우나?’ 하면서 외면하게 됩니다.
사울쪽 사람들은 정권을 넘겨주기 싫었고, 다윗의 보복도 두려웠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면 많은 변화가 일어날 텐데, 그것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대략 7년 정도 그런 상태가 지속되었는데, 다윗은 힘이 있어서 무력으로 할 수도 있었지만 무력으로 나라를 통일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랬더니 다윗을 대적하던 사울파 안에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였고, 그런 것이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의외의 방법으로 인도해주십니다.
1. 안정되어 가는 다윗의 왕권 (1~11절)
1) 다윗의 가족 (1-5)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1절)
1절은 3장 전체의 개요를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의 오랜 전쟁은 사울 집의 몰락과 다윗 집의 부흥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다음에 다윗의 가족에 대해 죽 나오고 있는데 굉장히 흥미로운 내용입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아들들을 낳았으되 맏아들은 암논이라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이요, 둘째는 길르압이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의 소생이요 셋째는 압살롬이라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요, 넷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다섯째는 스바댜라 아비달의 아들이요, 여섯째는 이드르암이라 다윗의 아내 에글라의 소생이니 이들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자들이더라” (2-5절)
헤브론에서 왕이 된 7년 사이에 여섯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들의 엄마가 다 다릅니다. 그러니까 많은 아내를 취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히노암, 아비가일, 마아가, 학깃, 아비달, 에글라 등 총 6명의 아내가 등장합니다.
물론 고대사회에서 왕은 아내들이 많았습니다. 아내가 많을수록 힘이 강하다는 것을 과시할 수 있기 때문에 왕권이 안정되어 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까?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까? 찬양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가 쓴 시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다른 나라 왕들이 하는 것처럼 인간적인 방법인 정략결혼을 통해서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단순히 여자를 좋아해서 아내들을 많이 두었다기보다는, 정략결혼을 통해 안정을 취하기 위함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 당시 관습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는 관계가 없는 잘못된 일입니다. 하나님의 율법 어디에 보아도 일부다처제를 허락하신 곳이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도 첩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 태어났고, 그 후 아내 사라를 통해 이삭이 태어났는데, 사라 사후에 또 그두라라는 여인과 재혼을 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동시에 여러 명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일부다처였습니다. 그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도 야곱도 다윗도 다 믿음의 사람들인데 여러 아내를 얻은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이었습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 40년을 마감하면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고별설교가 신명기입니다. 신명기 17장(14-17절)에 보면 왕은 이렇게 하라는 지침이 나와 있습니다. 나중에 왕을 세워달라는 백성들의 요구가 있을 텐데, 그때 반드시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을 왕으로 세우라고 하면서 왕에게 세 가지를 금하라고 모세가 오래 전 기록을 해두었습니다. 모세가 대략 BC 1500년경 사람이고 다윗은 BC 1000년경 사람이니까 다윗 500년 전에 하나님은 이미 왕이 다 나올 줄 아시고 미리 경고를 주신 것입니다.
첫째는 “말을 많이 두지 말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모든 말은 군사용 병마입니다. 말을 많이 두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전쟁의 승패가 군사력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군사력에 이스라엘의 승패가 있지 않다는 것을 왕에게 명심시키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아내를 많이 두지 말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여자를 좋아해서 결혼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결혼하는 여자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우상과 이방신으로 인해 마음이 미혹되고 여러 가지로 나뉠까 봐서 금한 것입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여자라도 집안에 우상을 가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 우상을 끌고 들어오면 우상숭배로 나아가기 때문에 금하셨습니다.
셋째로 “은금을 많이 두지 말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은금은 이 땅의 보화와 재물을 압축적으로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그것이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신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다윗은 아내를 많이 두지 말게 하라고 하셨는데 여러 명의 아내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이것을 전부 완전히 반대로 지켰습니다. 심지어 아내는 천 명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다윗이 말씀을 잘 앎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기 전 헤브론에 와서 유다 지파의 왕이 된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아내를 많이 두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후 보겠지만 나중에는 자기가 버리고 떠났던 사울의 딸 미갈까지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그것도 역시 정략적인 이유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으로 등극한 후에 이제는 드디어 도망자 생활을 청산하고 성공을 거두니까, 왕이 되니까, 높은 자리에 올라가니까, 영적으로 틈이 생기고 다윗도 조금씩 조금씩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한 번에 완전히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항상 하나님을 잘 섬기고 예배도 잘하고 찬양도 잘했습니다. 아주 귀한 믿음의 사람이었고, 그 누구도 다윗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다고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놀라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사람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는 것을 성경이 보여줍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의 잘남 때문에 나라가 세워지고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그 성패가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누가 나라의 지도자가 되면 잘되고 누가 되면 망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에게 달린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성경은 바로 그런 것을 잘 보여줍니다. 다윗같이 가장 위대한 사람, 그 후손에서 메시아(구원자)가 나올 정도로 하나님이 인정하셨던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인 다윗도 이렇게 많은 잘못과 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성경은 그대로 보여줍니다. 감추려 하지도 미화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위대한 책입니다. 자기들이 추앙하는 사람들을 미화하는 것이 대부분의 경전들인데, 성경은 전혀 감추지 않습니다.
다윗이 훌륭한 행적을 역사에 남긴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가장 뛰어난 왕이었으며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아주 부끄러운 일도 많이 행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런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결국 역사라는 것이 강하고 뛰어난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된다는 것, 하나님이 이끄신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내를 많이 두는 일로 인하여 장차 왕국의 심각한 분열을 초래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아들 솔로몬이 그대로 본받는 것을 넘어 뛰어넘습니다. 솔로몬 왕국은 많은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았기 때문에 분열되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 남북으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여인들이 가지고 들어온 이방 신들을 하나님 신앙과 섞어 섬김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정결한 신앙이 다 무너지고, 변질되고, 삶도 엉망이 된 것입니다. 물질적으로는 뛰어났지만 영적으로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나라의 분열을 초래했고, 피비린내 나는 내부적 정권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이때만 해도 다윗은 자신이 이렇게 하는 것이 훗날 이스라엘 내전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나중에 이것은 다윗 자신의 가정에 일어나는 많은 문제의 원인이 됩니다.
맏아들은 암논인데, 그는 다윗의 맏아들로 후에 이복형제인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성폭행하고, 그 일로 압살롬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둘째는 길르압인데, 나발의 아내였던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에게서 태어난 아들로서, 다니엘이라는 이름도 있었습니다(대상 3:1). 그런데 암논과 압살롬이 죽은 후에 넷째 아들이었던 아도니야가 맏아들 노릇을 하려고 하는데, 그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길르압은 일찍 죽었거나,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의 소생이었기 때문에 나발의 족보에 속해서 다윗 왕권의 후계자가 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셋째는 그 유명한 압살롬으로, 아버지 다윗을 반역하여 왕이 되지만 전쟁 중에 요압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압살롬의 어머니 마아가는 다윗이 결혼한 그술 왕 달매의 딸로, 이스보셋의 근거지인 마하나임 북쪽에 위치한 작은 나라 출신이었습니다. 다윗은 마아가와 결혼함으로 그술 왕을 통해 이스보셋을 정치적으로 압박하고자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넷째는 아도니야인데, 넷째 아들이었지만 솔로몬과 왕위 쟁탈전을 벌이다 죽임을 당합니다. 다섯째는 스바댜인데, 스바댜와 그의 어머니 아비달에 대해서는 성경에 특별히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드르암도 헤브론에서 태어난 다윗의 여섯째 아들로 특별한 행적은 알려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기록은 단순히 다윗 집안이 이랬고 어머니는 누구이고 아들은 누구라는 것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서, 이 아내들과의 관계들 속에서 태어난 아이들 때문에 나중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가를 미리 암시해주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많은 문제들이 사실은 우리의 욕심 때문에 또는 잔꾀를 부리는 것 때문에 일어납니다. 살살 머리를 굴리거나 욕심을 부리거나 내 뜻을 주장하거나 하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 내 잘못으로 인해 문제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도 바른 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가야겠다는 것을 다짐하게 됩니다. 천하의 다윗이라도 넘어졌는데, 다윗보다 연약한 우리는 얼마나 더 넘어지겠습니까? 그러므로 결코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2) 이스보셋 정권의 실권자 아브넬 (6-11)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있는 동안에 아브넬이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으니라” (6절)
사울과 다윗의 집 사이의 전쟁은 다윗 집의 부흥을 가져다주었을 뿐 아니라 사울 집 내부의 권력 구조 개편을 가져옵니다. 그것은 이스보셋이 아닌 아브넬이 권력을 장악한 것입니다. 이스보셋은 죽은 사울의 아들인데, 정작 사울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이 권력을 잡은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당연한 결과로서, 이스보셋 정부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군부 세력이 권력 중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요즘에도 이런 일이 다 있습니다. 이것이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나라에 혼란이 오면 군대가 쿠데타를 일으켜 군부가 권력을 잡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이런 것이 고대사회에서는 지금보다 더 흔한 일입니다. 힘이 있는 사람이 권력을 잡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 예상하지 못했던 심각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사울에게 첩이 있었으니 이름은 리스바요 아야의 딸이더라 이스보셋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첩과 통간하였느냐 하니” (7절)
아브넬은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사울의 첩 리스바와 통간했고, 그것이 이스보셋과 아브넬 사이를 결정적으로 갈라지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적해서 세운 나라가 이제는 스스로의 죄로 인해 결국 붕괴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첩과 통간하였느냐?”라는 아브넬에 대한 이스보셋의 비난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고대에는 이전 왕의 아내나 첩을 후계자의 소유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압살롬도 다윗의 후궁들과 잠자리를 같이 함으로써 ‘내가 진짜 왕이다.’라고 과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삼하 16:22).
따라서 아브넬이 사울의 첩과 통간했다는 소문은 아브넬이 사울 왕의 후계자로 자처했다는 것과 같은 주장입니다. 이제 아브넬이 왕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사실 이 소문은 점점 강해지는 아브넬의 권력을 질투한 사람들이 퍼뜨렸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실제로 아브넬이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사실은 더 낮습니다. 아브넬이 진짜 그렇게 한 게 아니라, 누군가가 계략을 짜서 아브넬과 리스바가 같이 있게 했을 수 있습니다. 그 장면을 보도록 증인들을 동원해서 목격하게 한 후 그것을 가지고 퍼뜨리는 겁니다. 옛날이 더욱 무섭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얼마나 치사하고 더럽습니까? 그런데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이건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소문이 이스보셋의 귀에 들어가게 됩니다. 누군가가 보고한 겁니다. 그랬더니 이스보셋이 너무 화가 나서 아브넬에게 따집니다. 아브넬이 너무 강해지니까 두려움도 있고 질투도 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니 가서 따진 겁니다.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을 매우 분하게 여겨 이르되 내가 유다의 개 머리냐 내가 오늘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의 형제와 그의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내가 이루게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그 맹세는 곧 이 나라를 사울의 집에서 다윗에게 옮겨서 그의 왕위를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에 세우리라 하신 것이니라 하매” (8-10절)
아브넬은 이스보셋의 항의에 대해 분노합니다. 이것이 사실이었다면 이스보셋이 정당한 항의를 한 것인데 거기에 대해 엄청나게 분노하고 있습니다. 사울 집을 지금까지 지탱해 준 것이 바로 자기인데, 그러한 공을 인정하지도 않고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채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 소문이었다면 이스보셋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항의한 것이 되기 때문에 아브넬의 분노를 더 돋운 것이 됩니다. 얼마나 화가 났던지 아브넬은 결정적으로 나라를 다윗의 손에 넘기기로 작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브넬이 진짜로 그렇게 했든지 안 했든지 상관없이 이것은 아브넬의 사악한 면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아브넬이 사울의 첩과 통간을 했느냐 안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아브넬의 관심이 어디 있는가를 보면, 사울의 집을 향한 신실한 충성 때문에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권력을 잡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이렇게 한 것입니다. 결국 아브넬은 이미 기울어 가는 나라를 이제 다윗에게 넘겨야겠다고 작정하면서, 다윗과 협상을 통해 자신의 생명과 권력을 보장받으려는 속셈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사실인지 아닌지를 떠나, 아브넬은 자기 스스로의 말로 인정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도록 하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알고도 자기가 이스보셋을 내세워서 나라를 세우고 다윗을 대적해 왔습니다. 이제는 사사로운 것 때문에 이스보셋을 배신하고 다윗에게 붙으려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보니까 이쪽은 아무리 해봐야 별일이 없고, 이쪽에서 권력을 잡아 봐야 별것 아니라는 것을 이제 깨달은 겁니다. 그래서 다윗 쪽에 붙으면 더 낫다는 계산이 벌써 끝난 겁니다. 이스보셋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항의 때문에 아브넬의 결정을 더 빨라지게 촉진했습니다.
“이스보셋이 아브넬을 두려워하여 감히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니라” (11절)
이것만 보아도 이스보셋은 참 미련한 사람입니다. 아무 대항도 못할 것을 왜 이야기합니까? 아브넬의 이러한 분노에 대해 너무 무기력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단지 이름뿐인 왕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고, 나라에 대한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브넬을 두려워하여 그의 죄를 더욱 분명히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이스보셋은 다윗에게 항복하고 그 나라의 통치권을 넘겨주는 것이 생명을 보존하는 유일한 길이었지만, 그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실행하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결국 비참하게 죽고 맙니다.
아브넬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이거구나.’ 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피하거나 대적하게 될 때, 나중에 분명히 결과가 좋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르고 범해도 죄는 죄인데, 알면서도 범하면 그것은 더 악합니다. 특히 아브넬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려는 태도는 옳지 못합니다.
여기에 무기력한 왕 이스보셋이 있습니다. 그런 왕을 조종하고 나라를 뒤흔드는 아브넬이 있습니다. 그리고 곧 뒤에 나오는 내용대로 왕인 다윗도 통제할 수 없는 군사령관 요압이 있습니다. 또 남의 아내가 되어 버린 다윗의 아내 미갈이 등장합니다. 다윗도 나름대로 미갈을 되찾아 사울 왕조의 적법한 후계자라는 인정을 받고자 애씁니다.
그러나 다윗이 결정적으로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 추대받게 된 계기는, 의외로 이스보셋과 아브넬의 갈등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갈등으로 인하여 아브넬이 자기 왕을 배반하고 다윗을 지지함으로 문제가 그냥 해결되어 버렸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 아래 이미 있었기 때문에 모든 상황은 그 목적을 위해서 가고 있는데, 거기에 아브넬이나 이스보셋 같은 사람은 알지 못하면서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는 아무리 인간이 계략을 쓰고 술수를 동원해도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따라 이끌려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갈등, 속임수, 배반, 폭력, 죄악 등의 문제들 가운데서도 당신의 뜻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십니다.
성도의 모든 인생과 결과는 하나님의 계획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다 보시며 기록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카운트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정말로 믿는 사람은 어떤 복잡한 상황과 관계 속에서도 낙담하거나 조급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다 아시며 기록하고 계신데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니, 낙담하거나 조급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인간적인 꾀나 세상적인 방법을 쓰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시는데 그런 방법을 왜 쓰겠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찾는 것이 믿음의 반응인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2. 아브넬의 뜻밖의 조력을 통한 유익 (12~21절)
1) 화친의 조건 (12-16)
“아브넬이 자기를 대신하여 전령들을 다윗에게 보내어 이르되 이 땅이 누구의 것이니이까 또 이르되 당신은 나와 더불어 언약을 맺사이다 내 손이 당신을 도와 온 이스라엘이 당신에게 돌아가게 하리이다 하니” (12절)
아브넬은 자신의 생명과 권력을 보장받기 위해 다윗에게 나라를 넘기기로 결심을 굳히고 다윗에게 사신들을 보내어 화친 조약 체결을 제안합니다. 그런데 여기 질문을 보십시오. 그가 뭐라고 합니까? “이 땅이 누구의 것이니이까?”
이 질문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이 땅이 다윗 당신의 것이니까 내가 되찾도록 돕겠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진짜는 ‘이 땅을 실제로 장악하고 있는 것은 나 아브넬이다. 내 도움이 없이는 땅을 전부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내게 잘해라.’라는 숨겨진 뜻이 있습니다. 얼마나 정치적이고 교활합니까? 아브넬은 다윗이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되면 적절한 보상과 보호를 얻기 위해서 이런 것을 제안하는 겁니다.
다윗의 가장 강력한 적이 사실 아브넬인데, 이 아브넬이 다윗에게 화해의 언약을 맺자고 제의합니다. 이것은 다윗에게 매우 놀라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나?’ 하고 있는데 제발로 먼저 찾아온 겁니다. 더 이상 싸움 없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브넬의 그러한 제안을 환영하면서 조건을 내겁니다. 무엇입니까?
“다윗이 이르되 좋다 내가 너와 언약을 맺거니와 내가 네게 한 가지 일을 요구하노니 나를 보러올 때에 우선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고” (13절)
그냥 보면 다윗이 여자를 좋아해서 자기를 떠난 미갈을 데려오라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정치적인 이유로 미갈을 찾고 있습니다. 이 표현을 보십시오.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 원래 결혼했었던 사울의 딸 미갈을 되찾음으로 다윗은 사울 왕조의 합법적인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지닐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다윗도 엄청나게 정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전령들을 보내 이르되 내 처 미갈을 내게로 돌리라 그는 내가 전에 블레셋 사람의 포피 백 개로 나와 정혼한 자니라 하니, 이스보셋이 사람을 보내 그의 남편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서 그를 빼앗아 오매” (14-15절)
다윗은 아브넬과 몰래 조약을 맺은 후 이스보셋에게는 공식적으로 전령들을 보내서 미갈을 돌려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스보셋이 누이 미갈을 적인 다윗에게 순순히 보낸 이유는 아브넬의 압력 때문일 것이 분명합니다.
미갈은 다윗과 헤어진 후에 재혼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합법적인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윗과 이혼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미갈과 결혼한 발디엘이 잘못한 겁니다. 이혼이 아닌데 그냥 결혼해버렸으니까 무효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다윗에게는 미갈을 되찾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의 남편이 그와 함께 오되 울며 바후림까지 따라왔더니 아브넬이 그에게 돌아가라 하매 돌아가니라” (16절)
너무 허무합니다. 울면서 끝까지 따라왔는데 “돌아가라” 하니까 그냥 돌아갑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합법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발디엘이라는 사람은 원래 사울과의 깊은 유대 관계로 인해 미갈을 아내로 데려가서 잠시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몰락한 후 즐거움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한 게 아닌가? 잘살고 있는데 남의 가정을 파괴하나?’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은 발디엘이 다윗의 가정을 파괴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권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이 권리를 되찾은 겁니다. 그런데 미갈을 그냥 둘 수도 있었지만,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미갈을 데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철저히 모든 것을 이렇게 준비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너무나 믿음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이렇게 너무나 정치적인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2) 돌아오는 이스라엘 (17-21)
기울어 가는 정세와 이스보셋과의 틀어진 관계 등을 계기로 하여 다윗에게 나라를 넘기기로 작정한 아브넬은 곧장 그 계획을 실행에 옮깁니다. 이것은 그가 주도면밀하고 의지가 강한 사람임을 알려줍니다.
“아브넬이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여러 번 다윗을 너희의 임금으로 세우기를 구하였으니, 이제 그대로 하라 여호와께서 이미 다윗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종 다윗의 손으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든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하셨음이니라 하고” (17-18절)
이것을 그냥 보면 그런가 보다 하지만, 요즘 뉴스에서 정치인들이 얼마나 수를 씁니까? 그건 저리 가라입니다. 보십시오. 아브넬이 먼저 열한 지파 중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열 지파의 장로들(리더들)을 부릅니다. 뒤에서 베냐민 사람들만 따로 부른 걸 보면 이때는 열 지파를 부른 겁니다.
그래서 그 장로들을 불러 자신의 계획을 알립니다. 아브넬의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장로들의 마음은 이미 오래전에 다윗에게로 돌아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여러 번 다윗을 자신들의 임금으로 세우기 원한다는 뜻을 사울 집에 건의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권력욕에 사로잡혀 있던 이스보셋과 아브넬은 이스라엘 장로들의 그러한 의견을 묵살하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군사적 힘으로 강권 통치를 계속해 왔던 겁니다.
아브넬의 말속에서 또 한 가지 확인하는 것은, 이스보셋 정권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뜻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권력욕을 위해 다윗을 대적하며 다른 정부를 세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아브넬이 다윗에게 온 나라를 돌리기를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그러한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브넬이 다윗에게 나라를 돌리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선한 의도에서 나온 게 아니라, 전적으로 불신앙적인 입장에서 나라가 망하기 전에 살짝 넘김으로써 자신의 기득권을 인정받고자 하려는 속셈으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넬이 또 베냐민 사람의 귀에 말하고 아브넬이 이스라엘과 베냐민의 온 집이 선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다윗의 귀에 말하려고 헤브론으로 가니라” (19절)
이스라엘 장로들의 동의를 얻은 아브넬은 최종적으로 권력의 중심에 있는 베냐민 지파 장로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동의를 얻어냅니다. 이제 정부를 다윗에게 넘기려는 그의 계획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수용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브넬을 향한 하나님의 복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다윗에게로 당신의 백성을 보내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계획 안에서의 인도하심입니다. 오히려 아브넬은 자신이 계획해서 잘 진행되던 이 일로 인해 나중에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얼마나 아이러니합니까?
“아브넬이 부하 이십 명과 더불어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가니 다윗이 아브넬과 그와 함께 한 사람을 위하여 잔치를 배설하였더라. 아브넬이 다윗에게 말하되 내가 일어나 가서 온 이스라엘 무리를 내 주 왕의 앞에 모아 더불어 언약을 맺게 하고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 하리이다 하니 이에 다윗이 아브넬을 보내매 그가 평안히 가니라” (20-21절)
아브넬은 자신의 부하 20명을 화친 사절로 자신과 동행하게 하면서 다윗이 있는 헤브론으로 찾아갑니다. 그때 다윗이 아브넬을 잘 대해줍니다. 큰 잔치를 벌여주는데, 왜냐하면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뤄지고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일관되게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모든 것을 맡겼고, 결코 자신의 기분이나 혈기에 따라 사람들을 대하거나 처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온유함과 사랑으로 대한 것을 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일이 술술 풀리면 ‘하나님이 인정하셔서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하면서 일이 잘 풀린다면 그것은 완전한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셔서 그런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 나중에 결국 자신의 발목을 잡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나가는 말]
이러한 내용을 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이처럼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당신의 약속을 이루어가시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인간의 노력이나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약속을 이루십니다. 아무리 이런 인간의 악한 계략과 속임수가 판을 치고 일이 술술 풀리며 성공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주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우리에게 인간의 능력이나 상황으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것처럼, 우리 또한 왕이신 예수님의 완전한 다스리심을 받는 사람들이 되게 해주십니다.
우리 눈으로 볼 때는 ‘이것이 왜 그런가? 이 세상이 왜 그런가?’라고 할 만한 일들이 요즘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신가?’ 하나님은 여기 계십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아실까?’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오묘하고 선한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 주님의 뜻을 늘 구하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선한 뜻 가운데 쓰임 받는 믿음의 일꾼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