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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열풍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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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신박한 사진방 스크랩 발레 역사와 일본 발레리나 요시다 미야코가 욕 듣는 이유
윤승러브 추천 0 조회 2,127 10.07.16 01:45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요시다 미야코에 관한 이야기를 보다가 여러분의 댓글을 보고 생각난 바 있는데

 

이 잽머니의 화신인 왜녀를 두고 "저 몸매로 어떻게 발레를 하냐"는 의견이 많았소.

 

그러나 알아둘 점은 현대 발레는 분명 체형도 중요하고 가늘고 길고 가냘퍼 보이는 몸매와 분위기에 맞춰가는 것도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우선 본론 들어가기 전에 발레에 대한 간단한 설명. 180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 소비에트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러시아 제국은 발레의 중흥기였습니다. 그 유명한 안나 파블로바, 프레오브라젠스카, 타마라 칼사비나, 니진스키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무용수들도 모두 이 시기 러시아에서 배출한 인재들로, 이들은 황실 발레학교에서 어릴 때부터 지원을 받으며 성장한 케이스. 하지만 그렇다고 발레가 러시아에서 시작되었느냐하면 그것은 아니고!

 

발레의 고향은 프랑스로, 발레는 처음부터 독립적 예술 분야가 아니라 오페라 막간마다 여흥으로 제공되던 '끼워넣기' 으로 대접받았는데 18세기 무렵부터 유명한 무용수 노베르(마리 앙투아네트의 무용 선생이기도 합니다)에 의해 독립된 예술 분야로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 후 귀족들이 대거 혁명을 피해 피난온 곳이 러시아로, 표트르 대제 때부터 유럽에 편입하기 위해 개혁 중이던 러시아 귀족들은 문화 선진국 프랑스라고 떠받들며 프랑스 문화를 수용하는데 혈안이 됩니다. 그리고 18세기 중반부터 인기를 끌던 발레는 러시아 황실의 지원까지 받아 극장과 발레 양성소를 세우고 국가적 양성에 들어가게 되죠. 거기다 유럽에서는 발레의 인기가 한풀 꺾일 때도 러시아에서는 여전해서 유명한 무용수와 안무가들이 러시아로 건너와 활동하게 되는데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들이 안나 파블로바의 선생이기도 한 엔리코 체케티, 마리우스 프티파 등으로 러시아 발레는 굴지의 성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자세한 내용 다 짤라먹고(발레 만화에 감동 먹고 발레 파고들던 시절 본 거라 어차피 기억도 잘 안 나지만....퍽!!!) 기억나는 것만 대강 쓴 거지만 ㅋㅋㅋ 본론이랍시고 나갑니다.

 

기억하는 바로는 막상 황실 발레학교라는 이름 때문에 입학 시험이 엄청 어려울 거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의외로 입학 시험은 그렇게 까다롭지 않았다고 하네요. 안나 파블로바의 경우는 세탁부 홀어머니 슬하 외동딸로 간단한 면접, 걷기, 뛰기, 앉기 등 기본 동작을 테스트해본 다음 합격했다고 들었네요. 즉 등용문이 그렇게 어렵진 않았고 계층 구분 별로 없이 뛰어들 수 있었던 것. 그런데 이 시기 발레리나들을 보면 의외로 현대에서는 발레하긴 애초에 글른 체형인데도 발레로 대성한 무용수들도 있습니다. 그 중 대표격이 바로 마틸다 크셰신스카라는 무용수.

 

 

바로 이 여자입니다. 어딘가 굴곡있어뵈는(???) 몸매 같지 않나요.

 

 

실제로 굴곡 많은 몸매 -.-;; 딱 나인데 나도 이 때 태어났으면 발레리나로 날리기 딱 좋은 시절이었는지도.........

지금은 내가 발레했다고 뻥이라도 쳤다가는 쳐맞고 죽을 몸매가 된 더러운 시대 

 

마틸다 크셰신스카는 황실 발레학교 출신으로 위에 언급한 황실발레학교 출신들의 선배입니다. 보시다시피 현대에서는 발레하기 애잔한 몸매;;; 이 여자는 황태자 시절 니콜라이 2세를 비롯해서 안드레이 대공, 세르게이 대공 등 황실 남자들을 여럿 드시면서 황태자의 애를 임신했지만 유산하는 등 황실 남자들과의 관계 덕분에 빽줄을 많이 잡은 케이스지만 적어도 그 실력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1895년 '최고 수석 발레리나'(prima ballerina assoluta)였으며 이 칭호를 받은 사람은 당시 이탈리아 무용수 레리냐를 제외하면 러시아에서는 그녀가 최초! 무엇보다 그녀 이전에는 이탈리아 무용수들만이 할 수 있었으며 당시에는 최고의 기법으로 간주되었다고 할 정도인 32회 연속 푸에테 앙 투르낭(fouett?s en tournant : 한쪽 다리로 한 자리에 서서 다른 쪽 다리를 휘두르며 회전하는 기법)을 성공시킨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속물적인 행실을 무척 싫어했던. 깐깐하기로 소문난 프티파도 이 때문에 크셰신스카의 재능만은 외면하지 못할 정도였으니까요. (프티파한테 찍히면 아무리 황실 남자들 빽을 업고 있어도 끝장임 적어도 프티파의 능력은 황실에서도 뭐라 말 못했으니)

 

안나 파블로바나 타마라 칼사비나 등을 직접 지도해줄 정도로 실력있는 발레리나였던 크셰신스카의 문제점은 실력이나 저 땅딸막한 체형이 아니라 저 고위급 남자들과의 문란한 관계와 사치스러운 생활 등이 맞물렸기 때문임. 혁명이 터지자 그녀의 집은 민중들의 공격 표적이 되었을 정도여서, 레닌이 그녀의 집 발코니에서 연설한 사실은 유명하죠. 그리고 자신의 지위나 명성을 믿고 실력을 쌓는데 매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크셰신스카가 아직 젊은 나이에 그렇게 은퇴한 반면 안나 파블로바는 자신의 입지에 만족하지 않고 끝없는 노력과 연습, 결국에는 탄탄한 국내에서의 입지를 버리고 세계를 돌아가며 공연하고 일본 무용까지 배워가면서 자신의 예술 세계를 넓히고, 특유의 정적이면서도 영적이기까지한 분위기가 더해 죽는 날까지 발레계의 여신으로까지 등극하지요. 다만 크셰신스카처럼 황제의 숙부인 블라디미르 대공을 스폰(첩 노릇)으로 뒀다는 일화가 무지막지 깨지만;;

 

이처럼 발레에서 날씬하고 가냘픈 체형은 필수가 아니었습니다. 크셰신스카에 비하면 요시다 미야코가 신체적 면에선 차라리 낫겠죠. 그런데 실력도 안 되는 게 <스완>같은 만화를 너무 봤는가 잽 머니 파워로 세계적 발레단에 밀고 들어가서는 자기 능력인 양 깝치고 다니고 주제 파악을 못하는 건 두번째 이유고, 좋은 소리 못듣고 듣보잡으로 머무르는 제일 큰 이유는 크셰신스카만한 실력이 절대 못되기 때문임. 아니 막말로 돈을 퍼부어서 들어갔든 어쨌든 돈의 힘도 아주 가끔은 좋은 쪽으로 작용하면, 실력은 있는데 빛을 못 보는 애들을 인정 받게 해주는 후광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단 유명 발레단에 들어가서 솔로 자리 꿰차고 앉아서는 영상에서도 보면 알듯이 별로 유연한 것도 아니고 호소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과시'해서 관객에게 보이려는 듯한 동작, 가끔씩은 뻣뻣하고 남자 무용수들한테 의존해 끌려다니는 것 같고 군무에도 묻히는 저런 애가 자기 유명한 줄 알고 설치니 대성하기는 글른 거지요. <스완>이라는 발레만화에서 처음에 어떻게 시작하는지 까묵었는데, 이 마스미라는 기집애가 갑자기 모르는 러시아 인들 앞에서 춤춰서 저게 미쳤나 했더니 눈에 확 튀고 갑자기 뜨고 외국남들하고 어장관리하고 세계적 천재와 경쟁해 이기고 등등... 대충 이런 구도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생긴 것 부터가 소라 머리에 원피스에 완전 일본애들의 서양에 대환 환상을 집대성해놓은 만화였긔 ㅋㅋㅋ 왈본의 천재병, 축구든 피겨든 음악이든 발레든 다 자기네가 세계 1등이고 외국에 진출해 서양인들하고 경쟁해서 1등 천재로 인정받는데 현실 시궁창 ㅋㅋㅋㅋㅋㅋㅋ

 

결론은 애초에 발레는 가냘픈 몸매가 필수였던 게 아니었다는 거. 오히려 크셰신스카처럼 다리 짧고 통통한 편이 더 어필하는 이상적인 체형이었다고 합니다. 지금같이 가는 몸매가 기본이 되는 건 안나 파블로바나 뛰어난 미모로 유명했던 타마라 칼사비나같은 무용수들이 등장해 인정 받으면서 점차 이런 식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이걸 말하려고 했는데 결국 언제나처럼 잡소리가 엿가락으로 늘어졌긔. 참고로 위 아래는 안나 파블로바의 대표작인 '백조'의 한 장면입니다.

 

 


 

The Swan~ 1905년 녹화된 일부 Anna Pavlova. 그후 이를 디지탈 칼라로 편집한것임. 위자료는 1905년에 안나파블로바의 쌩상의 "백조" 중에서 일부 비디오만 남아 있는 동영상.

 

여담이지만 안나 파블로바는 영화 제의가 처음 들어왔을 때 거절하려고 생각했는데 마음을 바꾼 것은 남편이 권유 때문이라고 한다. 만일 당신이 더 이상 춤출 수 없게 되더라도 당신이 춤추는 모습을 후세 사람들에게 남겨두는 게 가치 있는 일이 아니겠느냐고. 그 말을 받아들여서 파블로바는 종일 영사기 앞에서 춤을 췄는데 안타깝게도 당시 영화 기술의 미흡함으로 발레 동작을 정확히 잡아내지 못 했다. 아래 쪽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백조의 안무가인 미하일 포킨은 안나 파블로바의 친구였는데 그는 안나 파블로바를 이미지 모델로 해서 백조를 안무했다고. 그녀는 그 때 길고 가는 우아한 몸매와 드레스, 구두, 모자 등 흰 색 일색으로 차리고 있었다. 그녀를 보다가 퍼킨은 '청아함'과 '고귀함'을 떠올리고 아름답고 흰 새를 연상하며 뭔가 연약하고 사랑스러움, 어쩐지 슬픈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떠오른 음악이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였다. 마침 그 때 물 위를 떠다니는 백조를 보고 백조를 좋아한다는 안나의 말에 포킨은 마침내 백조의 춤, 흰 옷과 흰 깃털 모자를 쓰고 엷고 푸른 조명이 생명의 빛처럼 사라지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것... 백조가 높이 날아오르다 헤엄치고 괴로워하고 죽는 모습을 그린 백조의 모습, 삶의 기쁨과 슬픔, 죽음에 대한 공포, 사랑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백조의 춤을 생각해낸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안나 파블로바를 위한 '빈사의 백조'이다. 이 발레는 곧 파블로바의, 파블로바에 의한, 파블로바를 위한 작품이 되었다. (참고자료: 말반의 파블로바 전기 중에서 인용. 그 외 인물백과, 기타 등등 기억 안 나는 발레 이야기들)

 

 파블로바랑 나란히 놓기는 거시기하지만

요시다 미야코

시작부터 얼굴은 웃는데 팔은 ㄷㄷㄷ

 

 

 

덤으로 러시아 발레 황금기를 이끌었던 황실발레학교 출신 무용수들

 

올가 프레오브라젠스카

 

 

 

 

 

타마라 칼사비나

 

 

 

 

 

바슬라프 니진스키

 

 

칼사비나와 니진스키

 

 

 한 때 책받침 모델 등으로도 쓰였던 발레계의 영원한 꽃돌이 니진스키. 그러나 너무 곱게 생긴 나머지 러시아 발레계의 제작자이자 후원자인 디아길레프 등 망할 변태 놈들이 그냥 두질 않아서 강압과 회유 등으로 남자한테 몸 팔아 연명해야했던 시절도 있었다. 뜨기 위해 몸 팔았어도 노멀이었던 니진스키가 헝가리 부호 딸과 결혼해 애까지 낳아버리자 디아길레프 개새는 니진스키 앞길을 권력으로 막아버리는 등 더러운 짓을 많이 해서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니진스키는 젊은 나이에 미쳐서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사실... 디아길레프와 부인 사이에서 많이 치이긴 했긔 부인이 좀 극성이었다고 들은 듯...) 그의 도약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평을 들었다. 그의 실력으로 자신이 돋보이길 원한 크셰신스카가 자기 파트너로 탐냈는데 안나 파블로바랑 춤추겠다고 해서 크셰신스카에게 찍혀 무대를 한동안 떠나야하는 등 인생이 굴곡이 여럿 있었음.

 

 

 

 

에로틱하면서도 어떤 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한 대표작 <목신의 오후>

 

안나 파블로바

 

 

 

 

 

이들에 이어...

요시다 미야코.............

 

 

딱히 악의가 있어 올리진 않았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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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7.16 04:19

    첫댓글 이분 블로그 가면 재미있는 글 많던데ㅋ

  • 10.07.16 11:16

    아 어떻게해...막짤...의도하진 않았대도.... 뽱 터져버렸어요....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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