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찾은 김가영이 내려놓았던 배낭을 어깨에 매었을 때 핸드폰이 진동을 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김가영이 서둘러 귀에 붙였다. 윤성일이다.
“형, 나야.”
“도착했니?”
“응, 방금 짐 찾았어.”
“그럼 곧 나오겠네.”
“응.”
대답했던 김가영이 눈을 크게 떴다.
“형, 어딘데?”
“나?”
하더니 통화가 뚝 끊겼으므로 김가영은 핸드폰을 쥔 채 발을 떼었다. 세관원은 쓱 시선만 줘도 밀수꾼을 안다. 세관원 옆을 지난 김가영이 입국장 대합실로 나왔을 때 바로 눈앞에 ‘김가영’이라고 쓴 골판지를 치켜든 윤성일이 보였다. 어디서 라면박스를 주워 펴고 안쪽에 사인펜으로 여러 번 그어서 쓴 이름인데 독특했다. 제일 ‘거지’ 같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그래서 얼른 눈에도 띈 것이다.
“아유, 창피해.”
더구나 윤성일이 이산가족 찾는 동포처럼 절실한 표정을 짓고 있는 터라 다가선 김가영이 웃지도 못하고 말했다. 손을 뻗어 아직도 치켜든 ‘박스 껍질’을 끌어 내린 김가영이 눈을 흘겼다.
“왜 나왔어?”
“심심해서.”
김가영의 가방 하나를 받아 쥔 윤성일이 발을 떼면서 말했다. 사이공에서 출발하기 전에 통화는 했지만 공항에 마중 나오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청사 앞 버스정류장에 선 윤성일이 손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다. 오후 6시 반이다.
“어때? 같이 저녁 먹고 들어갈까?”
“형, 집에서 엄마가 기다려.”
바짝 다가선 김가영이 윤성일의 손을 쥐었다. 손가락을 낀 김가영이 힘을 주었으므로 윤성일이 마주 잡았다. 어깨가 붙여졌고 바라보는 눈과 눈 사이가 20센티밖에 안되었다. 윤성일이 김가영의 눈동자에 박힌 제 얼굴을 보면서 물었다.
“여기서 키스 한번 할까?”
“아서.”
“뭐 어때?”
그러자 김가영이 어깨를 떼었지만 손은 풀지 않았다.
“보고 싶었어, 형.”
“그럼 밤에는 나올 수 있어?”
“오늘은 안돼, 형.”
그러자 어깨를 늘어뜨린 윤성일이 길게 숨을 뱉었다.
“형, 오늘만 참아. 응?”
잡은 손에 다시 힘을 주고 김가영이 말했을 때 윤성일은 머리만 끄덕였다. 이제 시선이 떼어져서 앞쪽을 본다.
“형, 화났어?”
“아니.”
“밤에 나갈게.”
어깨를 밀면서 김가영이 말했더니 윤성일은 풀썩 웃었다.
“아냐, 괜찮아. 내일 만나.”
“정말 괜찮아?”
“그렇다니까?”
그때 버스가 왔으므로 둘은 제각기 가방과 배낭을 집어 들었다.
그 시간에 윤은지는 작은오빠 윤수일과 변호사 사무실에서 마주앉아있다. 윤수일은 서초구 구의원도 겸하고 있는 터라 형제 중 가장 바쁘다. 작년에 33세로 구의원에 당선된 윤수일은 최연소 구의원 기록까지 세워서 아버지를 기쁘게 했다.
“그럼 그자식이 어머니 유산을 다 찾아갔단 말이지?”
윤수일이 묻자 윤은지는 먼저 한숨부터 뱉었다.
“아버지는 성일이하고 인연을 끊는다고 하셨대. 박전무한테 앞으로는 성일이 이름도 꺼내지 말라고 하셨다는 거
야.”
“하긴 그놈이 그동안 아버지 속을 어지간히 썩였어야지.”
했다가 윤수일이 정색했다.
“지금 그 자식 어딨냐?”
“오피스텔에 있는 모양인데 사흘 전부터 전화도 안받아.”
“엄마 유산은 다 가져갔고?”
“응, 배변호사가 서류 다 넘겼대.”
“그게 모두 50억쯤 되지?”
윤은지의 시선을 받은 윤수일이 혀를 찼다.
“자식, 돈이 필요하면 나나 형한테 말할 것이지 하필 어머니 유산을...”
“내 생각은 그게 아냐.”
윤수일은 입을 다물었고 윤은지가 정색하고 물었다.
“오빠, 올해 어머니 제사 그냥 넘어간 것 모르지?”
“제사?”
되물었던 윤수일이 헛기침을 했고 윤은지가 말을 잇는다.
“6월12일이었어. 그런데 성남댁 아줌마한테 물어봤더니 집에서 그냥 지나갔대. 성남댁은 제삿날을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아무 말씀 안하시고 새엄마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해서 가만있었다는 거야.”
“....”
“이것이 벌써 5년째야.”
“....”
“그런데 성일이가 엄마 산소에 제삿날 다녀갔어. 난 나중에야 알고 엄마 산소에 갔더니 성일이가 다녀간 흔적이 있더라구.”
“....”
“성일이는 그래서 아버지한테서 엄마 유산 가져간 거야. 어머니 제사도 안 지내는 아버지께 엄마를 상기 시켜주
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아.”
“그 자식이.”
어깨를 부풀렸다 내리면서 윤수일이 길게 숨을 뱉는다. 윤성일과 나이차가 8살이나 났지만 그래도 바로 위형이다. 어렸을 때는 윤수일이 챙겨주곤 했다. 큰형 윤태일은 11살이나 차이가 나는데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3년 만에 결혼을 하고 분가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윤수일도 결혼해서 분가한 터라 윤정수의 대저택에는 새어머니 오명화와 데리고 들어온 딸 전세희가 주인 행세를 하고 산다. 윤은지도 병원 일을 핑계로 대고 병원 근처의 아파트로 옮겨간 것이다.
“우리가 너무 소홀했어.”
눈을 크게 뜬 윤은지가 한마디씩 힘주어 말했는데 말끝이 떨렸다.
“성일이한테 말야. 생각해봐, 오빠.”
윤수일은 시선만 주었고 윤은지의 얼굴이 차츰 상기되었다.
“어머니 제사도 지내지 않는 아버지. 집에는 딴 여자와 데리고 들어온 딸이 주인 행세를 하고. 형들이나 누나는 제각기 제 가족, 제 일 때문에 전화나 한통 제대로 해준 적이 있어?”
“그 자식은 군대에 가 있었기 때문에...”
“제대한지 석 달이 넘었는데 오빠는 걔한테 몇 번 연락했어? 몇 번 만났고?”
“야, 너도 알다시피 나는...”
“한번도 안 만났지?”
“아니 그것이...”
“전화는?”
“몇 번 했는데 통화중이어서...”
그때 윤은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가 가방을 서둘러 열더니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윤수일이 그것을 보더니 어금니를 물고 외면했다.
“엄마, 걔 지금 어딨어?”
하고 전세희가 물었으므로 오명화는 눈을 흘겼다.
“걔가 뭐야 이년아. 그렇게 이야기해도 못 고쳐?”
“둘만 있는데 어때?”
따라서 눈을 흘긴 전세희가 털썩 소파에 앉더니 두 다리를 주욱 뻗었다. 핫팬츠를 입은 터라 미끈한 다리가 통째로 드러났다. 어깨까지 늘어진 머리와 갸름한 얼굴. 이목구비가 서구적인 미인이다. 전세희가 앞에 앉은 오명화에게 다시 묻는다.
“엄마, 지금 뭐해?”
“문자 읽는다.”
핸드폰에서 시선을 뗀 오명화가 찌푸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희나가 세 번이나 연락을 했는데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구나.”
“누가?”
했다가 전세희는 고쳐 묻는다.
“걔가?”
“이놈의 기집애가?”
이제는 정색한 오명화가 고쳐 앉았다.
“너 누구 닮아서 이 지랄이야? 응?”
“엄마 닮았지. 봐.”
턱을 치켜든 전세희가 대들었다. 과연 닮은 얼굴이다. 오명화 또한 갸름한 얼굴형에 큰 눈, 오뚝 선 콧날. 오히려 전세희보다 더 섬세한 용모였다. 그러자 어깨를 늘어뜨린 오명화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남동의 저택은 조용하다. 아래층에서 가정부 둘이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층에는 부르지 않으면 출입금지인 것이다. 집주인 윤정수는 부산 출장을 갔기 때문에 건평 3백5십 평의 대저택에는 둘이 남았다. 주인 식구가 둘이라는 말이다. 저택 안에는 가정부 둘에 대문 옆 별채에 사는 조씨 부부까지 고용원 넷이 상주했고 낮에는 운전사와 관리인이 근무한다. 전세희의 시선을 받은 오명화가 말했다.
“성일이가 제 엄마 유산을 내놓으라고 했다는구나.”
이제는 전세희가 눈만 크게 떴고 오명화의 말이 이어졌다.
“아버지가 화가 나서 다 주신 모양이야. 한 50억쯤 되는 부동산인데 이젠 성일이하고 인연을 끊는다고 하셨어.”
“그럼 이쪽도 끊어야지.”
대뜸 전세희가 말하자 오명화가 시선을 주었다.
“뭘 끊어?”
“희나 언니 말야. 애써 붙여줄 필요 없잖아? 그까짓 50억 바라보고 희나 언니 붙여줄 거야?”
“이 기집애 정말 나쁜 년이네.”
“나 엄마 딸이야.”
“넌 겉만 나 닮았어. 다른 건 네 아빠야.”
이제는 오명화의 말끝이 차가워졌다. 눈을 치켜뜬 오명화가 말을 잇는다.
“네가 그럴 때마다 정 떨어져. 네 아버지 생각이 난단 말야.”
“내가 그러라고 일부러 그러는 거야.”
오명화의 시선을 맞받으며 전세희가 말을 잇는다.
“죽은 아빠 자꾸 매도하지 마. 나도 여차하면 윤성일이처럼 유산 찾아가지고 나갈 수도 있으니까.”
“이 미친년이.”
쓴웃음을 지은 오명화가 눈을 가늘게 뜨고 전세희를 보았다.
“저것 봐. 꼭 제 아비 닮았네. 하지만 이쪽은 성일이처럼 그렇게 안 될 거다.”
오명화가 한마디씩 또박또박 끊어 말한다.
“네 아비가 너한테 남긴 유산도 없고 내 재산은 내 맘대로야. 이 미친년아.”
“아유, 정떨어져.”
“넌 액운 덩어리야.”
머리를 저은 오명화가 길게 숨을 뱉고 나서 말했다.
“난 윤정수 씨한테 오고 나서 처음으로 내 가치를 알았어. 비록 고졸 학력이었지만 날 이해해주고 내 능력을 발휘하게 해준 사람이야.”
“돈이 90퍼센트는 차지했겠지.”
“난 내 능력으로 150억에서 10년 동안 8백억을 만들었어. 난 그것으로 족해. 윤정수 씨 재산은 바라지 않아.”
다부지게 말한 오명화가 웃음 띤 얼굴로 전세희를 보았다.
“알았니? 넌 이런 대궐에서 살지만 8백억 대 규모에서 노는 애야. 그런데 넌 너도 모르게 성일이 아빠의 10조 원대 거부의 딸 흉내를 내고 있었지?”
“....”
“너 그러다가 내가 한 푼도 안 줄 수 있어. 이태원 클럽에서 서양 놈들하고 놀고 다니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또 정보원 고용했군.”
그러자 오명화가 머리를 저었다.
“넌 구제불능이야.”
“거긴 위선자야.”
자리에서 일어선 전세희가 입술 끝을 올리고 웃는 시늉을 했다.
“돈 바라고 여기 온 주제에 뭐? 내 돈으로 8백억 만들었어? 내가 모를 줄 알고? 성일이 아빠가 다 뒤에서 도와준
거 아냐? 나한테까지 거짓말 하고 있어.”
그리고는 몸을 돌렸으므로 오명화는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술잔을 든 박기춘이 윤성일을 보았다.
“네 새엄마 사업은 잘 돼?”
“잘 되는 것 같더라.”한 모금에 소주를 삼킨 윤성일이 알코올 기운을 한숨으로 뱉었다.
“학원이 꽤 유명해.”
새엄마 오명화는 이제 외국어 전문 학원인 강남의 ‘대명학원’ 이사장이다.
“나도 TV 광고 보았다.”
머리를 끄덕인 박기춘이 붉어진 얼굴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 새엄마 딸. 그 물건은 요즘도 이태원 댕기나?”
“글쎄, 난 안본 지가 꽤 되어서.”
“내가 서너 달 전에 한남동 클럽에서 봤어. 흑인하고 같이 있더구만.”
한 모금 소주를 삼킨 박기춘이 말을 이었다.
“지 버릇 개 못준다. 걘 외국으로 나가든지 해야 돼.”
윤성일은 잠자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영등포의 포장마차 안이다. 오후 8시 반이어서 포장마차 안에는 손님이 꽉 찼고 소란스러웠지만 오히려 안정이 되었다. 때로는 시끄러운 분위기가 마음을 가라앉히기도 하는 것이다. 윤성일은 잠자코 빈 잔에 소주를 채웠다. 새엄마가 집에 온 지 10년이 되었다. 윤성일이 16세가 되었을 때다. 그러나 대학 때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했고 바로 군에 갔기 때문에 같이 산 기간은 3년쯤이나 될까? 하지만 세 살 아래인 새엄마의 딸 전세희 하고는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본 기억도 없다. 이쪽도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보인데다가 전세희도 만만한 성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명화는 꽤 노력을 한 것 같다. 하숙할 때 밑반찬을 들고 자주 찾아왔고 작년에 휴가를 나왔을 때는 강희나를 소개시켜 주기까지 했으니까. 윤성일의 눈앞에 강희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 만났을 때의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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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감 했어요
^^
즐감요~
즐감요
감사히 잘보구 갑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감사합니다
굿,,즐감,,,
잘 읽고 갑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
잘읽었습니다..
♠ 늘 감사합니다 ♠
즐감하고 갑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