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우물 팔 때는 두개만 명심하세요 전문화·세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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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트라팩 용기
현대인의 생활 속엔 수없이 많은 제품이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하게 엮여 있다.
이 중 많은 제품은 소비자들이 이름만으로 쉽게 인식한다. 하지만 개중엔 소비자가 소비하면서도 이름도 모르고, 소비한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면서 소비하는 '얼굴 없는' 제품도 있다. 문제는, 만일 이런 제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불편해진다는 점이다.
도시에 사는 평범한 직장인 나몰라씨의 출근길을 가정해 보자. 아침 일찍 일어난 그는 냉장고에서 연세우유를 꺼내 마신 뒤 현대차가 만든 쏘나타 승용차를 몰고 출근했다. 회사 주차장에 차를 세운 그는 오티스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선 삼성전자 갤럭시S4로 거래처 직원과 통화를 했다.
모두가 유명 회사 제품들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나씨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소비한 제품들이 있다.
나씨가 마신 우유 용기를 제작한 회사는 스웨덴의 테트라팩이란 회사이다. 세계 유수의 식음료 업체들에 포장 용기를 공급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정식품, 남양유업, 롯데칠성음료, 한국야쿠르트 등 대부분의 유가공 업체가 이 업체가 만든 용기를 사용하고 있다. 지난해 전 세계 식음료 업체에 공급한 포장 용기가 1732억개에 이르며, 111억유로(약 16조원)의 매출을 올렸다.
나씨가 탄 엘리베이터와 자동차 내부에는 독일의 셰플러나 일본의 NSK, 스웨덴 SKF가 만든 베어링이 들어가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가 운전한 쏘나타 자동차에는 고성능 마이크로프로세서(32비트 MCU)가 들어가는데, 독일 인피니온, 일본 르네사스, 미국 프리스케일의 단 3개 업체만이 공급한다. 스마트폰도 마찬가지다. 나씨가 갤럭시폰을 쓰든 아이폰을 쓰든, 미국 퀄컴이 만든 칩과 일본 무라타에서 만든 통신 부품을 피할 길이 없다.
이런 얼굴 없는 제품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한 우물을 수십 년간 꾸준히 파서 성공한 기업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B2B(기업 간 거래) 업체가 많다는 점도 특징이다.
테트라팩은 1950년 설립 이래 63년간 포장 기술 한 분야에 집중했다. 또 셰플러는 창업한 지 130년, SKF는 106년, NSK는 97년이 됐다.
테트라팩의 두 창업자는 1940년대까지 유리병 형태로만 판매가 되던 우유를 살균 처리된 종이팩 용기에 담아서 유통시키는 방법을 처음 발명했다. 지난달 일본에서 만난 데니스 욘슨(Jonsson) 테트라팩 회장은 "우리는 하나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시작했지만, 그것을 기초로 끊임없이 혁신했기에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 우물 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전문화와 함께 세계화가 필수이다. 유필화 성균관대 교수는 "단일 기술로 틈새시장을 노리는 한 우물 기업이 규모가 작은 국내 시장에만 집중할 경우, 곧 성장 한계에 부딪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앞서 사례로 든 기업들은 국내 틈새시장에서 1위를 차지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해외 시장에 도전했고, 그때마다 각기 다른 시장의 요구에 유연하게 대처해 현지화에 성공했다.
데니스 욘슨 테트라팩 회장은 "우리의 가장 큰 업적은 전 세계로 진출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회사는 세계 173개국에 진출해 있다. 베어링 업체인 셰플러도 180여 개국에 진출했다.
명품 업체 중에서도 한 우물 전략을 펴는 곳이 많다. 한 대당 최고 10억원짜리 오디오를 만드는 FM어쿠스틱스 마누엘 후버 사장은 위클리비즈와의 인터뷰에서 "최고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 제작 기간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고 했다. 그 때문에 1년 동안 생산하는 오디오가 평균 10대밖에 안 된다. 최고의 품질을 고집하다가 "우주선을 만드느냐"는 핀잔을 받고, 자동차용 오디오를 제작해 달라는 자동차 회사의 의뢰를 거부해 사장이 친동생에게조차 "미쳤다"는 비판을 들었다. 이 회사를 업계 최고로 만든 것은 바로 그런 고집이었다.
베어링과 비메모리반도체의 경우 우리 스스로 키워왔던 한 우물 기업을 지키지 못하고 외국에 내줬다는 아쉬움이 있다. 50년 역사를 가진 국내 유일 종합 베어링 업체였던 한국종합기계는 IMF 외환위기 당시 모기업인 한화그룹의 자금사정이 어려워지면서 1998년 독일 셰플러그룹에 팔렸다. 이후 국내 베어링 시장은 고가 제품은 독일·일본이, 저가 제품은 중국이 장악하기 시작했다.
비메모리의 경우 삼성전자의 비메모리 사업부(전력반도체)가 1998년 미국 페어차일드에 매각되면서 관련 기술력이 오랫동안 단절되는 비운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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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니스 욘슨 테트라팩 회장이 인터뷰 도중 종이를 들어 테트라팩의 시초가 된 삼각뿔 모양 용기 제작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테트라팩 제공
63년간 궨포장 용기궩로 승부‐ 173개국에 1732억개 팔아 年매출 16조원
요코하마=오윤희 기자
테트라팩은 경영 전문가들이 꼽는 한 우물 전략의 성공 비결, 즉 경쟁 업체가 쫓아올 수 없는 전문성과 세계화로 무균 포장 용기 시장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일본에서 만난 테트라팩의 데니스 욘슨(Jonsson) 회장이 들려준 테트라팩의 한 우물 전략을 세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 보았다.
테트라팩은 ‘왜 우유는 유리병에 담아 냉장고에 보관해야 하는가’라는 소박한 의문에서 시작됐다. 창업자 루벤 라우싱(Rausing)이 이러한 의문을 품었을 당시 유럽은 2차 세계대전 여파로 물자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유리를 구하기도 어려웠지만, 병에 든 우유는 쉽게 상해서 먼 지역으로 배송하기도 힘들었다.
그런 라우싱에게 영감을 준 것은 소시지를 만들던 아내다. 아내가 전통 방식대로 튜브에 소시지를 넣고 아래위를 꽁꽁 묶는 것을 본 라우싱은 이를 응용해서 삼각뿔 모양 우유 용기를 개발했다. 그가 발명한 기계 안에 종이를 넣으면 삼각뿔 형태로 모양이 접히며, 동시에 우유가 그 안으로 들어간다.
테트라팩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63년에 삼각뿔 모양 용기 디자인을 벽돌 모양으로 개선했다. 직사각형 용기는 벽돌로 집을 쌓듯 차곡차곡 컨테이너 안에 넣을 수 있어 운송 시 공간 효율성이 높다.
1993년 테트라팩은 또 한 번 핵심 기술을 업그레이드했다. 종이와 알루미늄 포일, 폴리에틸렌 등으로 촘촘하게 만든 6겹 포장으로 부패를 촉진하는 산소가 들어오는 것을 막아 상온(常溫·섭씨 15도 정도)에서도 몇 달씩 음료를 보관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더 이상 음료를 냉장 보관할 필요가 없어졌고, 2~3일 남짓하던 음료의 유통기한을 몇 개월로 늘릴 수 있게 됐다. 지난해 빙그레 ‘바나나맛 우유’가 중국에서 대히트를 칠 수 있었던 데도 테트라팩이 큰 기여를 했다. 빙그레는 중국에 생산 공장이 없지만, 테트라팩 용기에 담긴 바나나맛 우유는 원래의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욘슨 회장은 인터뷰 도중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음료 패키지 가운데 하나를 들어 보였다.
“이 용기는 뚜껑의 마개가 27mm입니다. 다른 용기보다 크지요. 덕분에 마개를 열 때 필요한 힘을 60%가량 줄여서 손목 관절이 약하거나 류머티즘에 걸린 노인들이 쉽게 마개를 열 수 있어요.”
옆에 놓인 또 다른 용기는 이동할 때 들고 다니면서 마시기 쉽게 만든 제품이었다. 소비자들이 움직이면서 부담 없이 음료를 마시려면 마개 크기가 어느 정도 커야 하고, 마개 방향이나 각도가 얼마나 기울어져야 하는지까지 연구했다고 했다. 이런 제품을 만든 이유는, 노인 인구가 늘어나고 있고, 출근길에 후닥닥 아침 식사를 해야 할 정도로 현대인의 일상이 빡빡하게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대의 변화와 소비자들의 요구를 잘 이해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어떻게 공급할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예를 들면 예전엔 우유 용기가 훨씬 컸어요. 주로 갤런(미국은 3.8L, 영국과 캐나다는 4.5L) 단위였어요. 부모와 아이를 둔 일반 가정을 겨냥해서였죠. 하지만 지금은 1인 가구가 점점 늘어나고 있어 소용량 패키지 개발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렇듯 경쟁자가 따라 할 수 없는 독점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계속 갈고 닦아 나가는 것은 성공적 한 우물 기업의 특징이다. 헤르만 지몬(Simon) 박사에 따르면, 기술 하나로 세계를 제패한 ‘히든 챔피언’ 기업은 매출액의 평균 5.9%를 R&D에 투자한다. 독일 일반 기업(3%)의 두 배 가까운 수치다. 테트라팩은 매출의 4% 정도를 R&D에 쓴다.
성공적인 한 우물 기업은 세계화에 주력한다. 테트라팩도 예외는 아니다. 케냐 같은 아프리카 국가에도 1950년대부터 진출했다. 욘슨 회장은 “모든 시장이 다 다르다”고 말했다. “유럽 시장만 해도 규모는 매우 작지만, 각 나라의 개성이 다릅니다. 우유를 소비하는 습관조차 프랑스, 네덜란드 등 나라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납니다. 테트라팩은 모든 시장의 기호와 요구를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982년 처음 미국 시장에 진출했을 때 이 회사는 난관에 부딪혔다. 미국인들은 우유를 냉장고가 아니라 상온에 보관한다는 사실에 큰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테트라팩은 전략을 바꿨다. 레스토랑 체인을 공략한 것이다. 상온에 보관해도 안전한 테트라팩 포장 용기를 사용하면 냉장 시스템이 필요 없고, 전기료도 줄어든다는 점을 내세운 것이다. 두유 제조업체를 고객사로 포섭한 것도 유효한 전략이었다. 두유는 우유보다 상온 보관에 대한 소비자 거부감이 덜했기 때문이다. 두유 용기가 시중에 받아들여진 다음부터는 주스 등으로 서서히 범위를 넓히기 시작했다.
1978년 중국에 진출했을 때 테트라팩은 느닷없이 어린이 우유 소비 촉진 캠페인을 벌였다. 우유를 마시는 사람이 늘어나야 우유 용기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는 점을 내다본 장기 포석이었다.
“당시만 해도 중국에선 우유를 마시는 사람이 많지 않았어요. 어릴 때부터 우유를 마시게 되면 성인이 되어서도 그 습관이 이어집니다. 또 우유를 마시면서 큰 아이들이 자라서 자녀에게도 우유를 마시도록 하면 우유 소비층이 점차 커지는 거죠. 그러니 장기적 안목으로 봤을 때 어린아이들에게 우유를 마시라고 장려하는 것이 우리 사업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테트라팩은 음료 용기라는 핵심 사업에서 기타 식품 용기로 사업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는 중이다. 올해 테트라팩은 인도에서 10억개가 넘는 포장 용기를 판매했다. 우유가 아닌 위스키 용기에서 올린 매출 성과다. 현재 테트라팩의 사업 범위는 주스나 기타 음료수에서 요구르트 등 유제품, 레토르트 식품, 막걸리, 소주, 와인 같은 주류 패키지까지 아우르고 있다.
유필화 성균관대 교수는 “한 우물 전략의 좋은 점은, 한 우물을 계속 파다 보면 한 우물 안에서 기술을 활용할 분야가 계속 넓어지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급 호텔과 레스토랑에 식기 세척기를 공급하는 회사인 독일의 중소기업 빈터할터 가스트로놈 (Winterhalter Gastronom)는 처음엔 세척기 납품에 주력했지만, 그 뒤엔 세척기 AS 사업, 세척기 전용 세제 사업 등 핵심 사업을 둘러싼 주변 영역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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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트라팩이 제작한 각국의 음료수 용기들. 세계 173개국에 진출한 이회사는 작년에 1732억개가 넘는 용기를 판매했다./테트라팩 제공
한국이 놓친 '한 우물 산업' 베어링
최원석 기자
국내에도 한국종합기계라는 뛰어난 베어링 회사가 있었다. 1953년 신한베어링에서 시작한 이 업체는 50년 가까이 한국 베어링산업의 사관학교였다. 그러나 1998년 모기업인 한화그룹의 결정으로 지분 70%가 독일 셰플러에 매각됐고, 2003년 나머지 30%까지 매각돼 100% 독일 업체가 돼 버리고 만다.
국내 주력 베어링 업체가 100% 외국에 넘어가면서 베어링산업은 정부 입장에서 육성하기도 애매한 존재가 돼 버렸다. 국내 최대 베어링 메이커가 된 셰플러코리아는 최근까지 줄곧 한국베어링공업협회 회장사(社)를 맡아 왔다. 100% 독일 지분의, 글로벌 베어링 회사가 이끄는 협회에서 한국 국내 산업 육성에 관심을 가졌을 리 만무하다. 이 협회는 현재 직원 2명의 초미니 조직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연 3조원대인 국내 베어링 시장은 셰플러가 60%, 일본 NSK와 스웨덴 SKF가 각각 10% 내외를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추정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외국계 업체들의 비밀주의 때문에 통계자료조차 작성이 어렵기 때문이다. 포스코 등 철강회사에서 1년에 용광로·컨베이어 등에 사용하는 베어링 구입량만 수천억원에 달하는데 이 가운데 90%가 외국 업체 제품이다. 소규모 토종 업체가 20여개 있지만 틈새시장 공략에 그치고 있다.
일진베어링이 자동차 휠 베어링을 기반으로 기차·풍력발전기용 베어링으로 시장을 확대해 나가려 하지만, 외국계 업체들이 쳐놓은 진입 장벽이 높아 고전하고 있다.
편영식 선문대 교수는 “우리나라가 자동차든 반도체든 앞으로 계속 경쟁력을 가지려면, 핵심 부품을 개발해 줄 국내 업체가 반드시 필요하다”면서 “토종 베어링 업체를 키우지 못하면 4~5년 내에 외국 업체에 영원히 종속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