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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管韻
천하를 다스린 풍운아 진시황제 ... 영정(嬴政)
진시황제(秦始皇帝 259 BC-210 BC)는 조(趙) 씨(氏)족 출신으로 조상으로 부터 물려 받은 성(姓)이 영(嬴)이고 이름(名)이 정(政)이다.
그는 기원전 246년 부터 기원전 221년까지는 명목상 주(周朝 1045 BC–256 BC)나라 치하 춘추(春秋 770BC-476BC)전국(戰國 475BC-221BC)시대 봉건 제후국 중의 하나였던 진(秦 778 BC-207 BC )나라의 마지막 왕(王)이었고 기원전 221년부터 기원전 210년까지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천하를 통일했던 통일국가 진나라의 황제였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조영정이었던 그는 진 왕국의 마지막 왕인 31대 왕인 동시에 진 제국의 첫 황제(221BC-210BC )로 그는 그가 쉰살이었던 기원전 210년에 죽을 때까지 그의 그 나라를 아주 야심차게 다스렸다.
그 이름을 조영정 또는 조정(趙政)이라고도 하는 이 진시황제는 진나라 장양왕 영자초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일설에는 그가 당시 승상으로 막강한 세도를 누리고 있던 조나라 출신의 상인 여불위(呂不韋 c.291BC-235BC)의 아들이란 얘기도 있다.
어쨌든 중국사에서 진시황은 중추적인 인물이다.
중국을 통일한 후 그와 그의 오른팔이었던 이사(李斯 c.280BC-208BC)는 일련의 주요 경제적 정치적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만리장성이나, 지금 유명한, 실물 크기의 수많은 적갈색 병사들이 줄을 서서 그를 지키고 있는, 한 도시 크기의 웅장한 묘나, 거대한 전국적인 도로망 계획과 같은, 모두 수많은 생명으로 그 대가를 치뤘던, 거대한 건축 계획들과, 도량형의 통일과 같은 아주 중요한 국가적인 경제정책의 실현에 착수했다.
진시황은 또한 국가의 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정치적인 비판을 엄금하고, 분서갱유(焚書坑儒)와 같은 만행을 자행함으로서, 훗날 수나라의 양제와 더불어 중국사의 2대 폭군으로 블리우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제와 군현제를 확립하여 향후 2천년 중국사의 기틀을 닦아 놓은 진취성과 창의성을 두루 갖춘 영웅이었다.
출생
여불위라고 부르던 한나라(韓國 403BC-230BC)출신의 한 부자 상인은, 조(趙)나라에서 공자 이인(公子異人)을 만났고, 여불위가 부린 잔꾀 덕분으로 이인(異人)은 진장양왕(秦庄襄王 250BC-247BC)이 된다.
한편 이 진장양왕 이인은, 당시 두나라 사이의 휴전조약을 보장하기 위해 인질로서 조나라(趙國 403BC-222BC)에 살고 있던, 진(秦)왕실 출신 왕자들 중의 하나였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진시황 조정은 기원전 259년 진장양왕의 장자로 태어났다.
진장양왕이 조희라고 하는 여불위에게 속했던 여자 하나를 첩으로 삼았는데 그녀가 진시황을 잉태했던 것이다.
태어날 때 그에게는 정(政)이란 개인 이름이 주어졌고, 그 정은 적국인 조(趙)나라의 도성 한단(邯鄲)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조정이란 성명을 갖게 됐다.
조정의 조상들은 감숙(甘肅)성 출신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진시황에게 공공연히 적대감을 드러냈던 다음 왕조인 한(漢)왕조 동안에 사마천에 의하여 씌어졌던 사기에 의하면, 진시황은 실제로는 진장양왕의 아들이 아니었단 것이다.
여불위가 미래 진장양왕에게 무희 조희(趙姬)를 소개할 무렵의 그녀 조희는, 소문에 의하면, 여불위의 첩이었고 이미 그의 아이를 가진 상태였다고 한다.
기원전 239년 경에 편찬된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의하면, 그 여인은, 진 장양왕의 조부인 진 소양왕(秦昭襄王306BC -251BC) 48년인 기원전 259년 1월에 한단에서 그 미래 황제를 잉태했다고 한다.
진소양왕은 진시황제의 증조부다.
그 출생 날짜와 여불위가 그 첫 황제의 진짜 아버지라는 이론 사이에는 다소간의 모순이 있다.
일부 학자들의 견해는, 그 임신 기간이, 현대 의학에 의하면, 그것이 불가능한, 만 일년으로,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황제가 사생아였다는 그 견해는 거의 지난 2000여년 동안 그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주도해 왔다.
하지만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는 사마천의 주장에 대한 상당한 회의가 존재하고 있다.
어쨌든, 영정은 영자초(秦庄襄王)의 아들로 태어나, 줄곧 조나라에서 자라다가 기원전 250전, 동주(東周)를 멸망시킨 그의 증조부인 소양왕 영직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효문왕(250 bc) 영주가 즉위하자 그때까지 조나라에 인질로 있던 영자초 진장양왕은 처자와 여불위를 데리고 진나라로 돌아와 진나라 태자에 책봉된다.
그리고, 효문왕 영주는 즉위한 지 1년 만에 사망하고, 태자였던 영자초가 즉위하니, 이가 장양왕이다.
기원전 246년에 그 진장양왕도 3년간의 짧은 치세 끝에 사망하고, 태자였던 13살의 영정이 진나라의 31대 왕으로 등극하여 그의 뒤를 이으니 이가 곧 훗날의 시황제이다.
한편 당시 조정(趙政)이 아직 나이가 어렸으므로, 전국칠웅(戰國七雄) 중 주변 6국, 초(楚), 한(韓), 제(齊), 위(魏), 연(燕), 조(趙)을 상대로 여전히 전쟁 중이었던 진(秦)나라의 승상 여불위가 그의 섭정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노애(嫪毐)의 모반
왕 정이 어른이 되었을 때, 여불위는 그 소년 왕이 그의 어머니 조희(趙姬)와 그 사이의 불륜을 알고 있을까봐 두려움에 떨었다.
스스로 물러나기로 결심한 그는 왕을 위해 후임자를 물색하고 있던 중 노애라는 이름의 한 남자를 알게 됐다.
사기의 기록은 노애가 그의 턱수염을 뽑고 환관으로 위장했다고 말하고 있다.
나중에 노애와 대비 조희는 아주 가까워져서 그들은 아무도 몰래 두 아들까지 두게 됐다.
그후 노애는 제후 노애로서 고귀한 신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재물도 갖게 됐다.
여불위의 음모는 그 숨겨 놓은 노애의 아들 중 하나로 왕 정을 대체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만찬 연회 중 만취한 노애의 입에서 자기가 젊은 왕 정의 의붓 아버지임을 자랑하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기원전 238년 왕 정은 군사를 이끌고 어머니 조희와 그 노애가 있는 옹(雍)의 옛 도성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다급해진 노애는 그 대비 어머니의 옥쇄(?)를 손에 넣은 후 군을 동원하여 반란을 도모했다.
노애의 목에는 현상금이 걸렸다.
산 채로 잡아 오면 일백만냥, 죽이면 50만냥의 동전 현상금을 주겠다는 방이 나붙었다.
노애를 따르던 자들이 먼저 잡혀 목이 잘려 나갔고, 그후 노애도, 그의 전가족이 고문으로, 처형당하는 동안, 묶여서 능지처참을 당했다.
그 두 숨겨논 아들들도 그들의 어머니 조희가, 여러해 후에 죽을 때까지 가택연금 당해 있던 그곳에, 가택연금 당한 사이, 죽임을 당했다.
여불위는 기원전 235년 독이 든 포도주 한잔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영정은 그후 진나라 왕으로서 전권을 회복한 뒤 여불위가 차지하고 있던 승상 자리를 이사(李斯 280-208 BC)에게 넘겨주었다.
형가(荊軻)의 암살 음모
왕 정과 그의 군은 계속해서 주위의 나라들을 점령해 나갔다. 연(燕)나라는 아주 작고 약하고 군인들에게 자주 시달리던 나라였다.
한마디로 진나라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 진(秦)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다가 기원전 232년에 귀국하게 된, 그 연나라의 태자 단(燕太子丹)은 진나라 왕 정을 암살하여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기원전 227년에, 그의 객사에 머물고 있던, 형가(荊軻)를 사주하여 그 임무를 수행하라고 보냈다.
형가는 그 음모 수행에 젊은 진무양(秦舞陽?)을 동반했다. 사절로 간 두 사람은 각각, 진나라의 장군으로 진나라를 배신했던, 번우기(樊于期)의 잘린 목과, 두강(杜康?)의 지도를 왕 정에게 선물로 진상하게 되어 있었다.
연나라에서 도망쳤던 번우기는 나중에 이 유명한 형가의 진시황 암살을 성공시키는데 일조하기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진무양이 먼저 지도가 든 선물 상자를 진상하려 했지만 두려움에 떨려 더 이상 그 왕에게로 나아가질 못했다.
형가는, 그의 동반자가 떠는 이유를 “ 한번도 천자(天子)를 뵌 적이 없기 때문 “ 이라고 변명하면서, 계속해서 그 왕에게로 나아갔다.
형가는 그 두 선물을 혼자서 진상해야만 했는데 그가 그 지도를 폈을 때 그만 그 숨겼던 비수가 드러나고 말았다.
그 왕은 한발짝 뒤로 물러 섰지만, 그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칼을 뽑는데는 시간이 걸렸다.
당시 다른 궁정 관리들은 무기를 지니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형가는 달겨들며 그를 찌르려 했지만 그 칼은 빗나가고 말았다.
왕 정은 그때 그의 칼을 뽑아 형가의 가랑이를 내리쳤다. 형가도 동시에 단도를 집어 던졌지만 또 빗나가고 말았다.
형가는 그의 시도가 실패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 왕의 칼에 맞은 8곳의 상처가 주는 고통으로 괴로워했다. 형가와 진무양 양자는 그후 죽임을 당했다.
태자 단의 아버지인 연나라 왕 연왕희(燕王喜 255-222 BC)는, 오늘날의 연경(北京 / 燕京)에 해당하는, 그 도성 연양(燕陽 / 幽州) 즉, 계(薊 / 范京)가 함락된 뒤, 진나라를 무마하기 위하여, 태자 단을 처형하라고 명했다.
위나라와 초나라가 정복되던 수년 간은 진나라의 연나라 침입은 중단됐다. 당시 연왕희는 요동 지역으로 파천했었다.
어쨌든 그 연나라는 그 암살 사건으로 부터 5년 후인 기원전 222년 진나라에 의해 정복됐고 왕 희는 생포됐다.
고점리(高漸離)의 암살 음모
고점리는 형가의 죽음에 복수를 하려 했던 그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리고 그는 중국의 고대 현악기인 축(筑)을 아주 잘 타던 음악인이었다.
형가가 진시황의 암살 시도 중에 살해 당한 후 진시황이 형가의 모든 친구들을 상대로 복수를 자행할 때 고점리는 그의 이름을 바꾸고 포도주점의 보조가 됐다.
일이 힘들 때마다 그는 그 포도주점 주인 집에서 흘러나오는 그 주인 집 손님들이 타는 축소리를 들으면서 그 집 주위를 생각에 잠겨 천천히 걷곤했다.
그는 누군가가, 고점리가 축을 타는 손님들의 솜씨에 대하여 평하더라는 말을, 그 주인에게 말했던 그날까지, 그 손님들의 축소리에 대한 논평을 그치지 않았다.
드디어 그 주인은 그에게 그를 위해 한곡 뜯기를 청하게 됐고 그의 노련한 연주는 그 주인의 환심을 샀다.
이 일에 관한 소문을 전해들은 진시황도 고점리를 불러 한 곡 듣기로 작정했는데, 누군가 고점리의 과거를 아는 사람이 그의 정체를 진시황에게 일러 받쳤다.
음악을 아주 좋아했던 진시황은 그런 재주 있는 사람을 그냥 죽일 수가 없어서 고점리를 용서하기로 했지만 그를 장님으로 만든 후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리곤 계획대로 그의 연주를 듣기로 했다.
축을 타는 고점리의 솜씨는 그로 하여금 진시황의 극찬을 듣기에 충분했고 그렇게 몇 곡이 더 흐르는 사이 진시황은 조금씩 조금씩 그에게로 다가오던 고점리에 대한 경계심을 완전히 늦추고 있었다.
고점리는 그 황제가 사정거리 안에 들어 왔을 때 그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었고, 그 악기 속에는 비밀리에 납 조각을 숨기고 있었다.
점점 빨라지기 시작하던 납조각으로 끍어대던 축소리가 일순 멎었다.
축을 높이 들어 황제를 내리쳤던 고점리의 일격이 빗나갔던 순간이었다.
고점리는 곧 처형됐고 그후 진시황은 타국 출신의 사람들이 그에게로 가까이 오는 것을 금했다.
첫 통일 중국
기원전 230년 왕(王) 정(政)은 그때까지 살아 남은 독립 왕국들을 하나씩 하나씩 정복하기 시작했던 전국시대(戰國時代 481-221 BC)의 마지막 군사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기원전 230년, 그 원정에 무너진 첫 나라는 한(韓國 403-230 BC)나라였다.
이 한나라는 한고조(漢高祖 202-195 BC) 유방(劉邦 247-195 BC)이 세운 한(漢朝 206 BC-220 AD)왕조의 한나라와는 다른 나라다.
그후 진나라는, 기원전 229년에 있었던 조(趙國 403-222 BC)나라의 대 지진(地震)을 기화로, 진시황이 태어났던 바로 그곳, 조나라를 침입하여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는 어릴적 거기서 볼모로 잡혀 있을 때 그를 홀대한데 대한 복수로 그의 적들을 모조리 잡아 죽였다.
진나라 군대는 기원전 228년에 조(趙)나라를 정복했고, 기원전 226년에는 주(周朝1045-256 BC)나라 초기부터 존재해 온 북쪽의 연(燕國)나라를, 기원전 225년에는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였던 위(魏國 445-225 BC)나라를, 그리고 기원전 223년에는 가장 크고 가장 큰 모험이었던, 춘추(春秋722-481 BC) 전국(戰國)시대를 통하여 오랜 숙적이었던 초(楚國 1030-223 BC)나라를 정복했다.
기원전 222년 연나라의 마지막 살아남은자들과 왕족이 동북지방인 요동(遼東半島)에서 사로잡혔다.
마지막 살아남은 남은 유일한 독립국은 이제 극동 산동반도(山東半島)의, 강(姜)씨들과 전(田)씨들의 천년 왕국, 제(齊國 1046-221 BC)나라 밖에 없었다.
깜짝 놀란 젊은 제폐왕(齊廢王 264-221 BC) 전건(田建)은 그의 서부 국경을 사수하기 위하여 30만명을 급파했지만 기원전 221년 북쪽으로 부터 그나라를 공략한 영정의 진나라 군대는 제폐왕을 사로잡고 제나라를 합병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 땅 전체가 강력한 한 통치자 아래 통일되던 순간이었다.
같은 해 왕 영정은 스스로를 “첫 황제”(始皇帝)라고 선언했다.
남쪽에서 그의 치세 동안 계속된 진나라의 군사작전은 오늘날의 광동성에 해당하는 지역과 오늘날 베트남의 일부가 포함된 여러 지역을 병탄했다.
진왕조의 첫 황제
전국시대와 같은 정치적 혼란으로 돌아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진시황과 그의 승상 이사는 봉건제도를 철저하게 타파했고, 정복된 독립국들은 더 이상 독립국으로 행세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 제국은 그후 36군(郡)으로 나뉘어졌다가 후에는 40군 이상으로 나뉘어졌다. 전 중국은 이제 행정 단위들로 나뉘어졌다.
먼저 군으로, 그 다음에는 현(縣)과 향(鄉)으로 그리고는 100가구 단위의 리(里)로 나뉘어졌다.
이 제도는 느슨한 동맹들과 연합체들이었던 이전 왕조와는 다른 것이었다.
과거에는 초나라 출신이면 초인(楚人)이라고 불렀지만,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의 고향이나 이전 봉건 국가에 의해서 구별될 수가 없었다.
임용은 이제 상속에 의해서가 아니라 능력에 그 근거를 두고 있었다.
경제
진시황과 이사는, 무게와 치수, 그리고 통화, 그리고 도로망을 통해 수송의 촉진을 기하기 위한 손수레의 차축 길이와 같은, 중국의 시제(市制)를 표준화함으로서 중국을 경제적으로도 통일했다.
그 황제는 또한 도로망의 확장과 상호간의 거래를 활성화시키기 위하여 성(省)들을 연결하는 운하들을 건설하기도 했다.
나라마다 달랐던 화폐 또한 반량(半兩)으로 표준화시켰다. 어쩌면 가장 큰 그의 업적 중의 하나는 중국 글자(X 漢字)의 통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사의 주도 아래, 진나라의 전서(篆書)는 진자체(秦字體) 내의 상이한 자체들을 스스로 제거함으로서 표준화 됐다.
이 새로이 표준화 된 자체는 그후 모든 정복 지역을 통하여 공식화 됐고, 이렇게 전 중국을 위한 한 의사소통 시스템인, 한 언어를 형성하기 위하여 모든 지방 자체는 폐기됐다.
정체성
진시황은 또한 토(土), 목(木), 금(金), 화(火), 수(水)의 오행(五行)설을 신봉했다.
그 상징 색이 붉은 색이었던 전 왕조 주나라의 왕실은 그 통치 기반을 불(火)에 두고 그 나라를 다스렸던 것으로 믿어졌다.
그러므로 그 새로운 진왕조는, 목록상의 그 다음 행(行)인, 그 색이 검은색으로 대표되는, 물(水)에 의해서 다스려져야만 했다.
그래서 검은색이 의복과 깃발과 페넌트(pennants)의 색이 됐다.
그와 관련된 다른 것들로는 그 기본 방향은 북쪽, 계절은 겨울, 그리고 수는 여섯(6) 등이 있다.
계산원들과 관리들의 모자의 길이는 6촌(寸)이었고. 마차의 너비는 6자였으며, 일보(一步)의 길이도 6자(尺)였다.
자방(子房) 장량(張良 262-189 BC)의 암살 미수
기원전 230년, 진(秦)나라가 한(韓)나라를 무너뜨렸다.
장량이라고 하는 이 한나라의 한 귀족이 그 진나라 황제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맹세를 했다.
기원전 218년에 그는 그의 전 재산을 다 팔아 장사 자객을 고용했고 그에게 그 무게가 120근(120斤: 대략160 lbs./97 kg. )이나 나가는 중금속 첨봉(尖峰)을 만들어 주었다.
그 두 사나이는 산 중 황제가 지나다니는 길옆 숲속에 숨었다.
신호에 따라 그 근육질의 암살자가 첫 마차에 힘껏 던진 그 첨봉은 그 마차를 산산이 부수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두 똑같은 마차로 움직이던 그 황제는 실상 그 두번째 마차에 타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그 암살 시도는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그 두 사나이는 거대한 규모의 집중 수색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을 만큼 운이 좋았다.
그리고 그 장량이란 자는 훗날 한(漢)고조가 된 유방(劉邦)이란 자를 도와...
북의 만리장성
진나라는 북방과 서북방의 유목민족들과 싸워야만 했는데 그중 흉노족은 아주 강해서 꺾기거나 정복되질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상대로 한 군사 원정은 아주 골치 아팠고 번번히 실패했다.
그래서 그 흉노가 진나라 북방 경계 안으로 더 이상 침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진시황은 한 거대한 방어벽을 건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건축을 위해서 수십만명이 동원되고 수많은 사람이 죽은 진시황의 이 벽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만리장성으로 알고 있는 그 거대한 벽의 선행물이다.
진시황에 의해 건축된 그 거대한 벽의 본래 구간은 여러 세기 전에 폐허가 됐고 오늘날은 그 벽의 극히 일부만이 살아남아 있다.
남의 영거(靈渠)
남중국 사람들은 “ 북에는 장성이 있고 남에는 영거가 있다 “(北有長城、南有靈渠)는 유명한 인용구를 즐겨 써왔다.
기원전 214년 진시황은 군수품 수송을 위한 대운하 건설계획을 세웠다.
그 운하는 남북 중국간의 수송(水送)을 가능케 했다.
34킬로키터 길이의 그 운하는 양자강으로 흘러드는 상강(湘江)과, 양자, 황하 다음으로 긴, 주강(珠江)으로 흘러드는 리강(漓江)을 연결하고 있다.
그 운하는 중국의 두 주요 물길을 연결하면서 진나라의 남서 중국으로의 영토확장을 도왔다.
그 건설은 만리장성, 도강연(都江堰)과 더불어 중국 건축공학의 3대 위업으로 여겨지고 있다. 모두 2200여년전 진나라 때 건축됐다.
그 목적이야 어디에 있었던 그 짧은 치세 중에 장성을 쌓고 운하를 판 진시황의 아이디어와 추진력만은 알아주어야 할 것 같다.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종말
이전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770-221 BC)는 전쟁으로 일관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자유 사상의 황금기로 여겨지기도 했다.
진시황은 유가(儒家)나 다른 철학 체계들과 관련된 그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제거했다.
중국을 통일한 후, 모든 다른 사상체계를 금하면서, 한비자(韓非子281–233 BC)의 법가(法家), 즉 법치주의(法治主義)가 진제국을 떠받치는 중심 사상이 됐다.
법치주의란 본질적으로 사람들이 법을 준행할 것을 요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에 따라 처벌을 하는 한 제도를 말한다.
분서갱유(焚書坑儒)와 부소
이사(李斯 c.280-208BC)의 부추김과, 그의 치세와 과거의 그것을 학자들이 비교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기원전 213년에 그 일을 시작한 진시황은, 또한, 천문학, 농학, 의학, 예언, 그리고 진나라의 역사에 관한 책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존 서적들을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시경(詩經)이나 서경(書經)을 소유한 자에게는 특별히 가혹한 형벌이 뒤따랐다.
대략 100여년 후 사마천에 의해 씌어진 사기(史記)에 의하면, 그 다음 해에 진시황은 금서를 소유한 죄로 460명 정도의 학자들을 생매장했다.
그 황제의 장자인, 부소(扶蘇 died 210 BC)가, 그의 이 행동을 비판했다.
물론 그 황제 자신의 사서에는 그 금서들의 사본들이 여전히 모두 소장되어 있었지만, 이 책들의 대부분도 나중 기원전 206년 초패왕(楚霸王 206-202 BC) 항우(項羽)로 더 알려진 항적(項籍 232-202 BC)이 그 궁궐을 불태울 때 소실되고 말았다.
부황(父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에 대한 간언으로 분노를 샀던 부소(扶蘇)는 이로인해 북방의 흉노와 마주하는 국경 수비 담당자로 명을 받아 장군 몽염(蒙恬)과 함께 임지로 떠났다.
그후, 순행중의 시황제가 죽고, 환관 조고(趙高)와 승상 이사(李斯)의 농간으로 대권을 물려 받은 진시황의 둘째아들 호해(胡亥)의 이름으로, 임지의 부소에게 자결를 명하는 거짓 성지(聖旨)가 도착했다.
장군 몽념이 즉시 그것이 거짓 성지임을 간파한 후, 부소에게 진언 했지만, 부소는 “의심하는 것 자체가 도리(道理)에 어긋난다(反)”고 말하면서 그 진언을 받아 들이지 않고, 그 성지의 내용대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훗날 흥미위주의 소설이나 군담등에서는 진나라의 마지막 황제 자영(子嬰)이 부소의 아들로 설정되곤 했지만, 사마천(司馬遷)의 사기를 비롯한 사서들에 의하면 그건 신빙성이 전혀 없는 그냥 만든 얘기일 뿐이다.
於是使御史悉案问诸生,诸生传相告引,乃自除犯禁者四百六十馀人,皆阬之咸阳,使天下知之,以惩後。益发谪徙边。始皇长子扶苏谏曰:「天下初定,远方黔首未集,诸生皆诵法孔子,今上皆重法绳之,臣恐天下不安。唯上察之. [史記6]
아방과 아방궁(阿房宫)
통일 후, 진시황은 함양궁(咸陽宮)을 나와 위하(渭河) 남쪽에 거대하고 화려하게 새로 지은 아방궁(阿房宫)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방(阿房)은 진시황이 가장 사랑하던 후궁의 이름이다.
진시황은 그밖에, 다른 6나라를 쳐부수고 거둬들인 병장기로, 12 청동 거상(十二金人)을 만들기도 했다.
불로장생의 영악(Elixir of life)
그의 말년에 죽음을 두려워 한 진시황은 필사적으로, 그에게 영생(永生)을 안겨 줄 것이라고 믿었던, 전설적인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영약(靈藥)을 구하기 위하여 천하를 샅샅이 뒤졌다.
영생을 얻는데 미쳐 있었던 그는 그에게 가짜 불로장생의 영약을 제공하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속아 놀아나기도 했다.
그는 불사의 도를 터득하기 위하여 산동성 대탄촌(大疃村)의 일부인 지부도(芝罘島/北島)를 세번이나 방문하기도 했다.
한번은 그가 불로장생의 영약이 있다는 신비적인 선경(仙境) 봉래산(蓬莱山)을 찾기 위하여 지부도 출신인 서복(徐福)을 동해로 보낸 적이 있는데, 그 여행에는 5000명의 선원과 3000명의 소년 소녀들과 각 분야의 명장들이 60척의 배에 나눠 타고 그와 동행했다고 한다.
그들은, 진시황이 그의 여행 중에 그를 만나기로 되어 있던, 그리고 그에게 충고를 구하던 그를 그곳으로 초대했던, 당시 이미 1000살이었던 중국의 신선(神仙/仚/僊), 안기생(安期生)을 찾기 위하여 보내졌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돌아 가지 않았다.그들이 약속했던 불로장생의 영약을 갖고 돌아 가지 않으면 처형될 것이 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설은 일본 땅에 도착한 그들이 그곳을 식민지로 삼았다고 말하고 있다.
기원전 255년 제나라(齊國)에서 태어난 서복(徐巿)은 당시 진제국에서 궁중 마법사로 봉직하고 있던 자였다.
그는 진시황에 의해서 두번 동해(黃海)로 그 불로초(不老草)를 구하러 보내졌는데, 그의 그 두번의 여행 시기는 기원전 219년과 기원전 210년 사이였다고 한다.
그에 관한 다양한 기록들은 다양한 수치들과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여주고 있지만 그가 일본(日本)에 도착해서 거기서 죽었다는 부분은 한결같이 일치하고 있다.
죽음
기원전 211년 한 큰 유성(流星)이 황하(黃河) 하류에 있는 동군(東郡)에 떨어졌다고 전해진다. 그것에다가 누군가가 다음과 같은 말을 새겼다.
“첫 황제(始皇帝)는 죽을 것이고 그의 나라는 나뉠 것이다” 이 소문을 전해들은 진시황은 그 예언에 대해서 알아보라고 황실 승지를 그곳으로 보냈다.
하나 그 누구도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일대에 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후 불에 달궈진 그 운석은 가루가 됐다.
동부 중국을 여행하던 진시황은 기원전 210년 9월 10일(Julian Calendar), 그의 도성 함양(咸陽)으로부터 대략 두달 길 정도 떨어진, 사구평태(沙丘平台)의 궁전에서 죽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그의 궁중 과학자들과 의사들에 의해 조제된 수은이 너무 많이 들어간 극약(劇藥)인 수은 환약을 삼킨 후 죽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환약들은 진시황을 불멸이 되게 할 수밖에 없었다.
진시황의 사후 그를 수행했던 승상 이사(李斯)는 그의 죽음이 제국에 내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지극한 두려움에 빠졌다.
그 조정이 도성으로 돌아가려면 두달이나 걸리는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반란을 진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사는 시황제의 죽음을 숨긴 채 함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진시황제를 수행했던 대부분의 측근들도 그의 죽음을 모르고 있었다.
다만 그 행차에 그의 아버지 시황제를 따라나섰던 막내이자 26번째 아들이었던 진이세(秦二世)영호해(嬴胡亥), 내시 조고(趙高), 이사(李斯), 그리고 오륙명의 총애받던 내시들만이 그 죽음을 알고 있었다.
이사는 또한 그 황제의 마차 바로 앞뒤에 썩은 생선이 실린 두 수레를 끌고 가라고 지시했다.
여기에 숨은 아이디어는 더운 날씨로 인해 이미 심하게 부패하기 시작했던 그의 시신이 실린 마차로부터 흘러나오는 역한 냄새를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王侯將相寧有種乎
두달쯤 지나 드디어 제국의 도성 함양에 도착한 이사와 조정 신하들은 황제의 죽음을 그제서야 공표했다.
진시황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기를 몹씨 꺼려했기 때문에 어떤 유언이나 유서도 남겨 놓지 않았다.
그의 사후, 장자였던 부소(扶蘇 210 BC 歿)가 황제가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사와 내시 조고는 부소를 죽일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부소가 총애하던 장군 몽염(蒙恬 210BC 歿)과 상극으로 그를 몹씨 두려워 했으며 또 조고가 상신이었던 몽염의 형에게 한번 처벌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부소가 즉위하면 그들의 모든 권세를 다 잃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이사와 조고는 부소와 몽염은 자진하라는 칙서를 진시황의 명령인 것처럼 위조했다.
그 농간은 먹혀들었고 그래서 훗날 진이세(秦二世 210-207 BC)로 알려진 진시황의 막내이자 26번째 아들이었던 호해(胡亥 229-207 BC)가 진 제국의 두번째 황제로 등극하게 됐다.
어쨌든 진이세 호해는 그의 아버지와 같은 그릇은 아니었다.
즉시 도처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의 치세는 사회 불안이 극도에 달했던 시기로 진시황제가 이룩했던 거의 모든 것이 아주 짧았던 그의 치세 동안에 모두 산산 조각이 났다.
제국 붕괴에 불을 붙인 그 첫 반란은 군관이었던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기원전 209년 칠월에 일대 소작농들을 규합하여 봉기한 농민의 난으로 역사적으로는 대택향기의(大澤鄉起義)라 부른다.
제국의 폭정에 견딜 수 없었던 그들은 죽음보다는 차라리 자유를 택하자고 부르짖으며 그 유명한 ‘왕후장상영유종호’(王侯將相寧有種乎)[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라는 케치프레이즈(catch phrase) 아래 6개월을 버텼으나 오광이 내분 중에 희생되고 진승이 배신한 호위병에게 암살당함으로서 그 막을 내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 난은 후발 주자였던 초패왕(楚霸王) 항우(項籍)와 한고조(漢高祖)유방(劉邦)에게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