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27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20-23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21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22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23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인터넷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
요즘 전철을 타거나 버스를 타면 젊은이들과 학생들이 모두 모바일을 들여다보고 문자를 보내거나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사람들과의 대화는 단절된 채 인터넷 친구에 매달려 살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가족도 만나고, 친구도 만납니다. 인터넷 속에서 모든 지식도 정보도 얻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모바일에 매달려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그런 청소년들이나 젊은이들을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 애들은 핸드폰이 다 버려 놓는다.’고 불평이 많지만 그런 공간마저 없다면 어쩌겠습니까?
꼭 엄마를 잃은 아이들과 같이 안쓰러운 요즘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어디에 정을 붙이고 살 수 없는 아이들에게 인터넷 공간은 새로운 삶의 공간입니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는 홍보주일 담화에서 인터넷 공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공간을 현명하고 균형 있게 활용하면 대화와 논의의 형식을 촉진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예의 바르고 사생활을 존중하며 책임 있고 진실하게 이러한 대화와 논의를 진행하면, 개인들 사이에 일치의 유대가 강화되고 인류 가족의 조화가 증진될 것입니다. 정보 교환은 참된 소통이 될 수 있고, 관계는 우정으로 성숙될 수 있으며, 접속은 친교를 촉진할 수 있습니다. 관계망이 이 커다란 잠재력을 현실화하려면 여기에 관련된 사람들은 진정성을 지니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생각과 정보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을 나누기 때문입니다.
사회 관계망의 발전에는 참여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관계를 수립하고 친구를 만들며 자신의 문제에 대하여 답을 구하고 즐기려고 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지적 자극을 추구하며 지식과 경험을 나누고자 합니다. 관계망은 이러한 근본적인 욕구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기에 점점 더 사회 구조 자체의 일부가 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회 관계망은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박힌 열망으로 발전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족 안에 살아계시고, 부모님과 같이 숨쉬고, 그 숨결 안에 머무르시며, 부모님의 거칠어진 손길 속에서도 사랑으로 녹아계십니다. 부모님의 잔소리 속에서도 같이 잔소리 하시고, 친구의 미소 속에서도 녹아 계시면서 같이 미소 짓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길 속에도, 가난한 사람의 고개 숙인 굶주림 속에서도 그분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의 곁을 떠날 수 없이 언제나 같이 곁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는 사실은 그분이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의미로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분이 사람들의 마음으로 들어가셔서 살아계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순간 모든 사람들의 속에 살아 계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의 성령과 함께 오시는 순간 인터넷 공간으로도 살아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컴퓨터만 켜면 접할 수 있는 인터넷 공간이지만 그 작은 공간 안에 무궁무진하게 살아계시는 주님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고, 그분께서 당신의 뜻을 전하시며 세상에 복음을 전하시는 그 진솔하신 모습을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익명성이 보장된다고 함부로 악성댓글을 단다면 그분께 대놓고 비난하고 욕하는 것이고, 그분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 하느님을 배반하고, 악마의 편에 서서 진리를 외면하는 아주 큰 악마가 되는 것입니다. 작은 순간마저 우리를 타락으로 이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 의견은 아주 소중합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의견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 소중한 의견에 대한 나의 표현은 보다 예의에 맞게 표현되어야 합니다. 교황님의 소중한 권고의 말씀은 우리를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가 진정성을 가지고 인터넷에 참여했는지 반성해 봅니다. 그리고 인터넷에 보다 적극적인 참여로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데 노력해야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8,9-18
바오로가 코린토에 있을 때,
9 어느 날 밤 주님께서는 환시 속에서 그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11 그리하여 바오로는 일 년 육 개월 동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12 그러나 갈리오가 아카이아 지방 총독으로 있을 때, 유다인들이 합심하여 들고일어나 바오로를 재판정으로 끌고 가서,
13 “이자는 법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하느님을 섬기라고 사람들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4 바오로가 입을 열려고 하는데 갈리오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유다인 여러분, 무슨 범죄나 악행이라면 여러분의 고발을 당연히 들어 주겠소.
15 그러나 말이라든지 명칭이라든지 여러분의 율법과 관련된 시비라면,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시오. 나는 그런 일에 재판관이 되고 싶지 않소.”
16 그러고 나서 그들을 재판정에서 몰아내었다.
17 그러자 모두 회당장 소스테네스를 붙잡아 재판정 앞에서 매질하였다. 그러나 갈리오는 그 일에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18 바오로는 한동안 그곳에 더 머물렀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프리스킬라와 아퀼라와 함께 배를 타고 시리아로 갔다.
바오로는 서원한 일이 있었으므로, 떠나기 전에 켕크레애에서 머리를 깎았다.
축일5월 27일 성 아우구스티노 (Augustine)
신분 : 선교사, 대주교
활동 지역 : 캔터베리(Canterbury)
활동 연도 : +604/605년
같은 이름 : 아오스딩, 아우구스띠노, 아우구스띠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 오스틴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또는 아우구스티노)의 가문이나 청소년 시절 혹은 교육과정에 관한 정확한 자료는 없다. 다만 그는 이탈리아의 로마(Roma) 태생으로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와 친분이 있었고, 로마 첼리오 언덕에 있던 베네딕토회 성 안드레아 수도원의 수도승이었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다. 595년 그는 이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고, 이듬해에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1세로부터 앵글로 색슨족을 복음화시키라는 사명을 받고 40명의 수도자들과 함께 영국으로 파견되었다. 성 베다(Beda, 5월 25일)에 의하면 그는 이미 영국에 도착하기 전에 주교로 승품되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아를(Arles)의 대주교에게 주교품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597년 봄에 프랑크 왕국의 도움으로 영국 켄트(Kent) 왕국 해안가에 있는 타넷(Thanet) 섬에 도착했다. 그는 이미 영국에 진출해 있던 선교사들과 켄트의 왕인 성 에텔베르트(Ethelbert, 2월 26일)의 환영을 받았다.
그런데 당시에는 아일랜드 교회와 로마 교회의 관습에 많은 차이가 있어서 선교활동에 장애가 많았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켄트의 수도인 캔터베리에 주교좌를 정하고 활동하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설교와 활동은 놀라운 성과를 가져왔다. 수많은 개종자들이 탄생했고 그의 설교와 모범을 보고 성 에텔베르트 왕과 신하들이 597년 예수 성탄 대축일에 세례를 받았다. 그는 왕이 하사한 땅 위에 주교좌 성당을 세우고 도시 외곽에는 성 베드로와 바오로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이 수도원이 유럽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베네딕토회 수도원이다. 그러나 그는 영국의 켈트(Celtic) 전례를 고수하려는 주교들이 로마 전례의 규율과 관습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에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는 여생을 켄트에서 보내면서 런던(London)과 로체스터(Rochester) 교구를 설정하고 주교를 임명하였다. 그는 캔터베리의 첫 번째 대주교이자 '영국의 사도'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오스틴(Austin)으로도 불린다.
오늘 축일을 맞은 아우구스티노 (Augustine)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