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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계열의 축 다듬기
☺ 사람마다 모습과 성격이 다르듯 말들도 다릅니다.
어떤 놈은 빼시시 웃고, 또 어떤 놈은 간지름을 잘 타고…
한 편의 작품은 수 개의 단락(paragraph)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각 단락은 수 개의 문장(sentence)으로, 다시 문장은 수 개의 단어(word)로 이뤄집니다.
그리고, 단어는 수 개의 음절(syllable)로, 음절은 두세 개의 음소(phoneme)로 이뤄집니다.
또 이들은 계열을 이룹니다.
그리고 각 계열 가운데 어느 한 요소를 골라 결합시킴으로써 문장이나 단락 또는 작품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야콥슨(R. Jakobson)은 언어로 표현된 것은 아래와 같이 <계열(系列)의 축>과 <결합(結合)의 축>으로
이뤄진다고 주장합니다.
계열의 축
…… 교활한 잔인한 참을 수 없는 싫은 | ||||
잭크는 | 섬뜩한 | 악당입니다. | 결합의 축 | |
알프레드는 | 끔찍한 | 사람입니다. | ||
그러니까, 문장의 층위에서 주어 자리에는 주어의 계열이 있고, 서술어의 자리에는 서술어 계열이 있고,
그 계열에서 어휘를 골라 문장을 만든다는 겁니다.
그리고 문장보다도 더 큰 단락이나 작품이나 장르의 층위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합니다.
시를 다듬을 때 계열의 층위에서 우선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은 시어의 적절성입니다.
야콥슨은 같은 계열의 축에서 어떤 요소를 고르느냐는 다분히 자의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끔찍한 알프레드>라고 말했을 경우, ‘끔찍한’과 비슷한 ‘두려운’, ‘싫은’, ‘섬뜩한’이라는
낱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선택한 것은 화자가 무의식적으로 그 말이 더 알맞은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시를 다듬을 때는 무의식에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시적 대상을 선택하는 과정에서는 무의식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지만, 그에 어울리는 화자를 선택하고,
그에 따라 시어의 적절성을 따질 때는 화자와 화제의 관계가 어울리도록 다듬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시어의 적절성을 따질 때는 우선 화자의 성과 연령과 사회적 계층에 어울리는 시어인가를
검토해야 합니다.
이때 유의할 사항을 요약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문체적 특징 :
남성화자는 아주 규칙적이거나 이와 반대로 자유분방한 문체를, 여성화자는 자잘한 변화는 있으되
균제된 문체를 기조로 삼는다.
② 시어의 특징 :
남성화자는 이성적․문명적․기능적 어휘를 택하고, 여성화자는 감성적․자연적․장식적인 어휘를 택한다.
③ 음운적 특징 :
남성화자는 기능적이고 소박한 음운을 택하고, 여성화자는 섬세하고 장식적 음운을 택한다.
④ 연령에 따른 특징 :
나이가 어릴수록 여성화되고 노년일수록 남성화된다.
⑤ 계층에 따른 특징 :
상류층일수록 이성적이면서도 여성적이고, 하류층일수록 감성적이면서 남성적이다.
둘째로 시어가 지시하는 의미의 범주, 탄생 시기, 그를 탄생시킨 문화권 등을 검토해야 합니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모든 어휘는 탄생된 시기가 다릅니다.
그리고 고대에 태어난 어휘일수록 오랜 동안 사용하여 그 의미와 뉘앙스가 보편화되고 추상화되며,
현대에 태어난 어휘일수록 일반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특수하며 구체적인 특성을 띱니다.
그러나 시어를 검토할 때 무엇보다 유의할 점은 그 어휘가 지시하는 의미의 범주를
가급적 좁게 잡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가령 아름다운 여인을 비유하기 위해 ‘꽃’을 골랐다고 합시다.
그러나 ‘꽃’에는 백일홍, 목련, 국화, 라일락, 장미 등 무수한 꽃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배경과 뉘앙스 역시 다릅니다.
그러니까 백일홍은 여름날 뜨락에 피는, 다소 못생겼었어도 소박한, 어쩐지 한국적인 느낌을 드는 꽃입니다.
이에 비해 목련은 아름다운 아가씨들의 흐드러진 목덜미 같은, 순수한, 백일홍에 비하면 현대적인 느낌이 드는
꽃입니다.
그리고 라일락은 이름 때문인지 서구적이면서 신비로운 느낌이 들고, 장미 역시 서구적이면서 고혹적인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의미의 등급(meaning level)을 무시하고 넓은 의미의 어휘를 사용하면
이런 특징들이 모두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되도록이면 좁은 의미의 어휘를 골라야 합니다.
참고로 꽃에 대한 의미의 등급을 그림으로 제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 →꽃 | ||
2 | →장미꽃 | ||
3 | →조세핀 | ||
4 | →빨간 조세핀 | ||
5 | →아침이슬을 머금고 빨갛게 핀 조세핀 | ||
6 | →소녀가 안고 가는, 아침 이슬을 머금은 빨간 조세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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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로, 대상의 모습과, 그것이 존재하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 역시 구체화해야 합니다.
장미의 종류는 2천 몇백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 1세의 왕비 이름을 딴 조세핀도 아침 일찍 이슬을 머금고 갓 피어난 것과,
거실 한 구석의 화병에 꽃혀 까맣게 말라 가는 것의 느낌은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해 줘야 합니다.
넷째로, 화자의 정서와 욕망을 드러낼 수 있는 어휘들을 골라야 합니다.
욕망은 결국 초점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관념 : 물질>, <의식 : 무의식>, <구체 : 추상>인 것들을 대비하면서 조직해야 합니다.
다시 장미꽃으로 돌아가 볼까요?
장미의 의미, 예컨대 정열적이라든지 관능적이라는 의미에 초점을 맞추면 관념적인 작품이 되겠지요.
그 꽃잎의 색깔이라든가 모습에 맞추면 즉물적(卽物的)인 작품이 됩니다.
또 관념과 물질 양쪽에 초점을 맞추면 의식의 세계를 대변하고, 그것이 환기시키는
무의식적 욕망이나 환상에 맞추면 비현실적인 작품이 되고,
이런 모든 것들을 논리적으로 재편성하면 추상화됩니다.
다섯째로, 음운 역시 의미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것을 골라야 합니다.
흔히 음운은 자의적(恣意的)인 기호라서 의미를 환기시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의미와 음운의 뉘앙스가 비슷할 경우에는 그 사물의 모습을 떠올리는 데 기여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해봐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위 그림에서 ‘타케타(taketa)’와 ‘날루마(naluma)’는 아무 의미가 없는 음운 덩어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과 도형을 연결하라면, 누구나 ‘타케타’는 각진 도형으로, ‘날루마’는 곡선으로 이뤄진
도형으로 연결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음운이 어느 정도 의미를 환기시키는 기능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음운과 의미의 관계는 꼭 실험을 거쳐야만 입증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표제(標題)를 알 수 없는 기악곡(器樂曲)을 듣고도 우울하다든지 화려한 느낌을 받습니다.
따라서 음운과 의미는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작품을 쓸 때 의미와 음운의 관계를 요약하여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⑴모음
①양성모음 : 밝고 단단하며 작은 느낌
②음성모음 : 어둡고 거칠며 큰 느낌
③전설모음(前舌母音, e, I) : 빠르고 선명하며 가늘고 밝은 느낌
④후설모음(後舌母音, o, u, Ә) : 느리고 둔하고 맥빠지고 어두운 느낌
⑵자음
①유성 자음(ㅁ,ㄴ,ㅇ) :
ㅁ(m)은 평평한 느낌, ㄴ(n)은 가벼운 느낌, ㅇ(ng)은 둥글고 가득 차고 웅얼거리고 노래하는 느낌.
모두 호음조(euphony)를 이루기 쉬움
②무성 자음 :
평음(平音)은 평순한 느낌, 경음(硬音)과 격음(激音)은 강하고 예리한 느낌, 파열음 마찰음 파찰음은
거칠고 둔탁하고 부딪히는 느낌, ㅅ(s), c(ʦ) 같은 치음(齒音)은 섬세하고 가볍게 부딪히는 느낌.
모두 악음조(cacophony)를 이루기 쉬움.
③유음([r]과 [l]) :
흐르는 느낌
이와 같이 음운으로 사물의 모습을 환기시키는 방법으로는 <음모방(sound imitation)>,
<음회화(sound painting)>, <음상징(sound symbol)> 등이 있습니다.
음모방(音模倣)은 음운으로 대상의 실제음이나 모습을 재현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철썩철썩’이라든지 ‘스르르’ 같은 의성어(onomato- poeic)가 이런 기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의성어가 이런 기능을 지니고 있는 것은, <모방(模倣) 언어 시대>에 탄생되어 사물의 모습이나 소리를
흉내내는 데 사용해왔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박두진(朴斗鎭) 시 가운데 음모방을 구사한 예를 고른 것들입니다.
ⓐ 너는 너는 늴늴늴 가락 맞춰 풀피리 불고
- 「어서 오너라」에서
ⓑ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에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에 앉아
- 「해」에서
ⓒ 산아, 우뚝 솟은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 「청산도(靑山道)」에서
ⓐ는 자연음을, ⓑ는 사람의 음성을 모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는 자연음을 모방했지만 '짙푸른'이라는 시각 영상(視覺映像)을, ‘철철철’이라는
청각 영상(聽覺映像)으로 바꿔 공감각적 이미지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의성어들은 언어권이 바뀌거나, 문맥적 의미와 다르게 쓰면 그 기능이 사라지고 맙니다.
음회화(音繪畵)는 음운으로 의미의 일부분을 그려내는 방식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의미와 음운의 뉘앙스를 연결시키는 방법입니다.
이에 이용할 수 있는 자질은 조음점(調音點), 조음 방법, 진동(sonority)의 폭, 개구도(開口度),
기(aspirate)의 유무로서, 이들을 대비시키는 방법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말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자질로는 <양성모음 : 음성모음>, <유성음 : 무성음>, <격음 : 평음>,
<순음/유음/치음 : 다른 자음>등의 대비입니다.
다음은 음회화의 기법을 구사한 예에 해당합니다.
ⓐ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둥아리냐
- 서정주, 「화사」에서
ⓑ 좁은 아파트 방바닥을 팍팍팍 울리며 달려오는 산굼부리 말떼
- 필자, 「산굼부리 말떼」에서
ⓒ 산은 구강산/보랏빛 석산//산도화 두어 송이/송이 버는데,
ㅡ 박목월, 「산도화」에서
ⓐ는 ‘태어났기에’를 제외하고 모든 시어에 유음(流音, r, l)이 들어있습니다.
이와 같이 연속적으로 유음이 든 어휘를 채택한 것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유음의 미끄러지는 느낌을
이용하여 <뱀>의 미끄러운 몸뚱어리와 성(性)의 번들거리는 느낌을 암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얼마나→을마나>와 <커다란→크다란>은 <ə(얼/커) → ɨ(을/크)>로 개구도를 좁혀
어둡고 우울한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고, <징그러운→징그라운>과 <몸뚱어리→몸둥아리>는
<어(ə) → 아(a)>로 넓혀 억눌린 감정을 터뜨리기 위해서입니다.
ⓑ는 [p], [b], [k], [t] 같은 파열음이 든 어휘들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런 음운으로 이뤄진 어휘를 채택한 것은 말떼가 지축을 울리며 달려오는 청각 영상을
환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또, ⓒ는 밝고 작은 양성모음과 치음인 [S]를 간헐적으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는 봄날 깊은 산 속에서 나뭇잎들이 가볍게 사운대는 느낌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이런 음운들은 의미와 음운의 뉘앙스가 일치할 때만이 제 기능을 발휘합니다.
테니슨(G. B. Tennyson)의 시 가운데 ‘the murmuring innumerable bees(무수한 벌떼들의 웅웅거림)’라는
구절만 해도 그렇습니다.
비음성(鼻音性) 유성자음인 [m], [n], [ng]은 무수한 벌떼들이 웅웅거림을 연상시키지만,
'웅웅거리는(murmuring)'을 '살인(murdering)'으로 바꾸면 [d]와 [e]만 바뀌었음에도
그런 느낌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것은 음운의 느낌과 어휘의 의미가 유사할 때만 기능이 발휘함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음회화의 기법을 이용할 경우에는 독자들이 그런 어휘를 의도적으로 채택했음을 감지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인용한 구절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는 음운 일부를 조작하여 의도적으로 조직했음을 알렸지만, ⓑ와 ⓒ는 조작하지 않은 어휘들입니다.
그로 인해, ⓑ와 ⓒ는 분석적으로 읽지 않으면 그냥 매끄럽게 잘 읽히는 시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의미와 음운을 일치시키면 비슷한 어휘들끼리 끌어당기고 다른 어휘들은 밀어내어
에너지가 형성됩니다.
야콥슨은 이런 예로 미국 35대 대통령 선거 때 아이젠하워 진영에서 내세운
‘나는 아이크를 좋아한다.(I like Ike)’라는 구호를 듭니다.
그러면서 <ái láik áik>의 3개의 단음절과 이중모음 [ai]는 전체를 하나로 통일된 느낌이 들도록 만들고,
‘라이크/아이크’는 모두 끝음절을 [k]로 받치고 있어 ‘아이크’가 ‘라이크’를 끌어당기면서
아이크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느끼도록 만든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아이/라이크/아이크’는 '아이(ai)'가 '라이크'를 감싸 아이크를 나의 화신(化身)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든다고 합니다.
이런 점으로 미뤄볼 때, 잘 읽히고, 암송하고 싶은 시는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를 다듬을 때는 시어의 의미만 따지지 말고, 그 어휘의 탄생된 배경과 시기와 어떤 계층에서
사용하고 있으며, 그 음운이 어떤 뉘앙스를 야기시키는가 따져봐야 합니다.
【 우리가 할 일 】
○ 시어를 다듬을 때 유의해야 할 점을 정리해 두시오.
○ 자기가 쓴 시의 시어를 다듬어 완성하시오.